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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와 갓바위
가파른 돌계단은 끝이 없군요.
“힘들어요. 좀 쉬었다 가요.”
다리는 천근만근
담이가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그러자. 여기 앉아라. 오이도 먹고.”
할머니가 편편한 바위 위에 손수건을 깔아주며 담이가 쉴 곳을 만들어 주십니다.
뒤이어 오던 사람들이 담이와 할머니를 앞질러 위로, 더 위로 쉬엄쉬엄 올라갑니다.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연신 땀을 닦으며 아득히 아래로부터 사람들의 행진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이 반 토막을 먹으며 담이는 엄마를 생각합니다.
‘엄마가 아픈 데. 엄마가 아파서 여기 왔는데, 내가 이렇게 오이나 먹고 앉아 있으면
엄마의 병이 낫기나 할까‘
담이는 마음이 조급해 집니다.
“할머니, 얼른 가요. 이젠 힘나요.”
“그려, 그려. 용하다 우리 담이. 오이는 올라가면서 먹자.”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산은 높기만 합니다.
돌계단을 밟고 오르고 또 올라도 다시금 올라가야할 돌계단이 다시금 기다리고 있군요.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갓바위 부처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담이는 갓바위 부처님을 뵈러 가는 중입니다.
갓바위 부처님은 부처님을 뵙고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한 가지 소원만 듣고 풀어주시지만 욕심이 담긴 이것저것 여러 가지 소원은 들어주시지도 않으신대요.
소원이 있어요.
담이의 마음속 소원은 비밀이라서 함부로 터놓지 못합니다.
‘엄마의 병을 꼭 고쳐 주셔야 해요. 그래서 아프고 무거워 쉬고 싶은 다리를 꾸욱 참고 올라가고 있어요. 담이는 아직 덜 자라서 다리도 짧지만 이렇게 부지런히 사용하고 있어요. 할머니의 소원도 아마도 담이와 같을 거예요. 할머니는 진짜 관절염 환자지만 티 안 내고 올라가시는 걸요‘
그때 목소리가 우랑우랑 굵은 아주머니가 지나가며 할머니께 말했습니다.
“아유, 할머니. 다리도 불편해 보이는데 이 위험한 산을 어찌 오르세요? 손자도 어려 보이는 데요. 행여 삐끗하면 낭패잖아요.”
“괜찮아요. 내가 이 산을 열 번 도 넘게 오르내렸다오. 내 손자도 다람쥐마냥 산을 잘 타니 염려 말구려.”
“그래도 조심하세요. 돌계단에 모래알이 까끌까끌하니 매끄러워요.:
할머니는 아주머니의 걱정을 고마워하며 허리를 쭉 펴 올렸습니다.
엊저녁 할머니는 벽에 가까스로 기대어 앉은 엄마에게 죽 그릇을 안겨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난, 내일 갓바위 부처님께 갈란다.”
“가지 마세요. 다리도 불편하신데.”
엄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할머니를 만류합니다.
“그래도 움직여야지. 내가 힘들어도 너보다야 낫다. 담이 애비도 병들어 저 하늘에 먼저 가고, 너마져 아프니 모두가다 내 탓인 것 같다. 네가 훌훌 털고 일어나야 담이도 잘 키우고 나도 남은 생 기도나 하며 편안히 살지,”
텔레비전을 보며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귓전에 들은 담이가 불쑥 내뱉었습니다.
“나도 갈 거야.”
“안 돼. 거긴 길이 험하고 멀어.”
할머니가 손사래를 칩니다.
“그래도 갈 거야.”
담이의 야무진 대꾸에 엄마와 할머니는 마주 보며 웃었습니다.
“저거 애비 닮은 고집이야. 누가 막겠어. 그래, 같이 가자. 갓바위 부처님 계신 산에서 탈났다는 사람 구경도 못했다.”
그리하여 오늘 새벽에 집을 나선 두 사람은 마을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닿았고, 꾸벅꾸벅 졸면서 기차를 타고 가다 동대구역에 내렸으며, 다시금 버스를 타고 안개가 뿌연 팔공산 계곡에 닿아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숲으로 들어선 첫걸음은 가볍고, 힘차고, 재빨랐습니다. 듬성듬성 오르는 돌계단도 짐짓 재미있어 껑충껑충 숫제 토끼뜀이었지요.
냄새 좋고 기분 좋은 숲속의 산새들과 다람쥐도 만났고, 길다란 꼬랑지를 감추며 사라지는 꿩도 보았습니다.
키 큰 나무는 마주 팔을 잡고 지붕도 만들어 눈부신 햇살을 가려 주었습니다. 그 사이로 하늘은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조각보를 짜고 있었습니다.
“신난다!‘
담이는 소풍길인 양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자꾸자꾸 올라가면서 점차점차 힘이 빠지는데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같은 돌계단은 다 올랐다 싶으면 다시금 나타났고. 애써 힘겹게 다 올랐다 싶으면 더 길다란 것이 또 나타나. 담이를 지치게 했던 것입니다.
후회도 합니다.
‘괜히 따라 왔어. 인젠 더 올라갈 힘도 없어’
그러나 참았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계신 엄마를 생각하며 담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꾸욱 다물면서 힘을 냅니다.
“이젠 저기만 넘으면 된다. 아구! 장하다. 내 새끼. 제 엄마 살리고자 저 짧은 다리로!”
할머니의 말씀도 귓전에 닿지 않았습니다.
얼굴이 발갛게 익었고 종아리는 뻣뻣했으며 발바닥이 뜨거웠습니다.
오이를 다 먹었지만 자꾸 목이 말랐습니다.
풀썩 주저앉아 울고 깊은 담이입니다.
이젠 더는 못해 싶은 담이가 안간힘을 내어 이젠 보기조차 싫은 돌계단을 딛고 올라 섰는 데,
아- 시원한 바람과 함께 앞이 환히 트이는 것입니다.
눈 아래로 낮은 산이 보이고 푸른 소나무에 샛털 구름이 걸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없이 좋은 것은 더 이상 오를 돌계단이 없는 것입니다.
“ 와! 만세다! 할머니. 진짜 다 왔어.”
“ 그래. 다 왔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주 엄숙한 얼굴로 묵묵히 담이를 내려다 보는 크고 살찐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방석같은 넓은 바위를 감싼 두터운 흰구름으로 부처님은 구름위에 앉아 계시는 듯 했습니
할머니도 배낭을 풀어 공양미를 올리고 촛불을 밝힙니다.
“할머니, 이제 소원을 비는 거야?”
“그려, 공손히 인사부터 올리고 마음속으로 딱 한 가지 소원만 말씀드리는 거야.”
가슴에 두 손을 모우고 눈을 감은 할머니가 소원을 빕니다.
“이 늙은이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시지요? 저는 다른 욕심 없습니다. 아들 앞서 저 세상 간 것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어린 손자 철들 때까지 잘 키워줄 우리 며느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저는 살만큼 살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다만 한 가지 내 며늘아기, 담이 어미만 살려 주세요.”
담이도 가지런히 두 손 모우고 소원을 빕니다.
“구름타신 부처님 안녕하세요?” 부처님,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소원만 부탁드릴 수 없어요. 엄마도 낫게 해 주시고, 할머니 다리도 낫게 해 주세요. 담이는 건강하신 엄마랑 건강하신 할머니랑 살고 싶어요, 제 아픈 다리는 그냥 두시고요.”
여러 사람이 무수히 밝힌 촛불이 바람 따라 일렁입니다.
진한 향내음이 코끝을 지나갑니다.
기도를 끝낸 담이가 할머니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어요?”
바위 밑 편한 자리에 앉으신 할머니는 담이를 가운데 앉히고 담이의 종아리를 풀어주며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길도 없는 험한 숲을 헤치며 한 사람이 산을 오르고 있었단다.
그는 돌을 다듬어 내는 돌장이였는데, 거룩하신 부처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을 좋은 바위를 구하기 위해 그처럼 온산을 헤치고 다녔던 거야. 그러나 좀처럼 좋은 바위를 만날 수 없었어. 그는 바위를 찾느라 하늘처럼 높이 솟은 산봉우리까지 자꾸자꾸 올라가는 제 자신의 발길조차 눈치 채지 못했거든. 그는 미친 사람과 흡사했어. 억센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에 긁히고 시달려 머리털이 엉클어졌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단다.
그런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어. 숲을 헤치며 더 올라갈 숲이 없었던 거야. 그는 산꼭대기에 올라 서 있었던 거지. 그리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어. 그가 온 몸이 찢기면서 헤매고 찾아다니던 그 바위가 바로 눈앞에 있었거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그 바위를 안았고 어루만졌단다.
일부러 다듬어 놓은 듯 빈틈없이 단정하고 깨끗한 바위. 어디 견줄 수 없이 넉넉하고 둥글고 아름다운 바위. 여태껏 본 바 없는 더없이 크고, 견고하고 의연하고 조각을 한 양 잘 생긴 바위에게 완전히 반해서 넋을 잃은 듯 그 바위를 만지고 쓰다듬고. 맴돌고 또 맴돌며 마구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을 그냥 두었던 거야.
부처님이 될 바위,
그는 그렇게 살아계신 부처님을 뵌 듯한 기쁨으로 몸을 떨며 마냥 울었던 거야. 그리고 끌과 망치와 바위와 한 몸이 되었어.
깊고 넓은 바닷물을 한 방울씩 떠 올리듯. 끝없는 모래밭에서 모래알을 하나씩 주워 올리듯 큰 고목나무에 붙은 까만 매미처럼 바위에 매달려 바위를 쪼아내기 시작했던 거야.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단다. 추위나 더위가 그를 건드리지 못했단다, 거센 빗줄기나 차가운 눈보라가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했단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득한 절벽, 위로는 하얗게 비어 있는 하늘, 가끔 새 한 마리가 날아갈 뿐이었어.
그는 늘 혼자였단다.
오직 홀로 오로지 바위에만 매달려 있었는 데, 그는 바위에 매달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았어. 온 몸은 땀투성이, 한 점 한 점 쪼아낸 돌조각은 그의 몸에 구멍을 내고 검은 멍을 들게 했어. 거기에다 깎지 않은 수염과 머리털은 어깨를 덮었고. 살갗은 햇볕에 타서 까매졌고, 비바람에 두꺼워졌으며, 눈보라에 터져서 거미줄처럼 갈라졌단다.
그가 먹는 것이라곤 풀과 나무뿌리. 그리고 도토리나 밤톨 따위였는데,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으니 그는 점차 사람의 모습을 잃어가는 대신에 큰 바위는 차츰 사람으로 변신하고 있었단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차고 기울며 별들이 밤낮으로 숨바꼭질을 하는 사이 그는 이윽고 자바위 속에서 모셔낸 사람의 무릎을 베고 누워 중얼거리고 있었어.
“ 부처님. 당신께 필요한 모자를 하나 장만했는데 지금 씌워드릴 힘이 없어요.”
그는 어머니의 품속에 노는 그저 행복한 아가마냥 어리광을 부리며 쉬고 있었던 거야.
“쬐끔만 더 기다리세요. 곧 씌워 드릴 게요. 이 모자는 볼품없이 생겼어도 당신의 거룩한 얼굴에 마구 떨어질 비와 눈송이를 막아주고, 버릇없는 새똥도 막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지도 않고 비단이불에 싸인 듯 보드랍게 감아 도는 달콤한 잠 속에 빠져 들었지.
그때였단다.
무릎에 놓인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어.
“나도 이제 손이 있고 발이 있는 데 굳이 그대의 힘을 빌리겠느냐.”
부처님은 천천히 팔을 뻗어 그가 만들어 둔 모자를 집어 머리에 얹었지. 그리고 무릎에서 곤히 잠든 그를 보듬어 올리시며 덧붙이셨어.
“너는 바위로구나. 꿋꿋하고 튼튼한 바위. 어질고 순하고 강인한 바위. 네가 나에게 쏟아 부은 피와 땀. 눈물겨운 정성과 노력을 영원히 기억하겠고, 너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너를 대하듯 하겠다.”
그는 잠결에 부처님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었고, 벅차오르는 행복을 느끼며 부처님의 품 속에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단다. 그는 부처님과 한 몸이 되어 버린 거야.
그리고 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
천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모자 쓴 부처님, 저기 계신 갓바위 부처님뿐이었어.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갓바위 부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쭈욱 지키고 계시는데
갓바위 부처님께 돌장이와 같은 정성으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란다.
담이는 그새 쿌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애고. 나 혼자서 중얼대고 있었구나 하하 담이야 일어나 봐라 이제 집에 가자.”
할머니는 담이를 흔들어 깨웁니다.
내려오는 돌계단은 올라갈 적보다 훨씬 쉬웠습니다.
“쉬우면 탈이 더 나. 더 조심해야해.”
“네. 네. 담이는 걱정 말고요 할머니 꼭 조심하세요.”
때때로 어른 같은 담이가 더없이 사랑스러운 할머니는 쑤시고 결리는 다리를 잊었습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습니다.
버스 속에서 담이는 정류소에서 저만치 서 계신 엄마를 보았습니다.
“엄마!”
버스에서 내린 담이가 엄마에게 달려가는데
“아가. 어떻게 나왔어?”
할머니의 비명이 앞섭니다.
“늦게 오시니 걱정도 되고, 이상하게 몸이 가볍네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딨냐? 바깥에서 너를 보다니!”
집으로 들어서니 맛있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갓바위 부처님 뵈러가는 어머니와 담이를 보고 제가 누워만 있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니 일으켜지더군요. 밥을 짓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기어가며 밥을 지었는데 국도 끓이고 싶더라고요. 밥 짓고 국 끓인 기운으로 엉금엉금 문밖을 나서니 또 이렇게 나올 만 했어요.. 아직은 힘들지만 오늘만큼만 해도 이웃사람 부럽지 않겠어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일곱 살 담이가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을 만난 날 저녁, 3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쓰러진 엄마가 기운을 차려 마중을 나왔어요.
그리고 엄마가 지은 밥을 먹었군요.
어디 그뿐이겠어요.
담이는 그 다음 날도 엄마가 지은 밥을 먹었습니다.
또 그 다음날도.
그리고 이제
할머니와 담이의 새로운 소원은 아직 없습니다.
첫댓글 살가운 이야기를 눈으로 보듯
맘에서 맘으로..
반갑습니다. 문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