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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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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대사를찾아 스크랩 드디어 밝혀지는 남옥저(南沃沮)의 비밀
차돌 추천 0 조회 80 09.04.08 17: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드디어 밝혀지는 남옥저(南沃沮)의 비밀

 

무척이나 오랫동안 비밀에 숨겨져있던 남옥저가 드디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름조차 듣기가 생소하던 남옥저는 동옥저의 남쪽 해변을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통설로는 함경도의 원산 남쪽을 남옥저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였습니다. 당시의 창해나 동해는 한반도의 서쪽에 있던 평양의 서쪽바다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옥저는 요동반도의 남쪽바다에 임한 대고산(大孤山)이었습니다. 압록강의 서쪽으로 단동에서 서쪽으로 약 100키로미터 거리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곳입니다. 이곳은 호강하(胡康河)라는 강을 경계로 하여 동고려와 서고려가 갈라져 있습니다. 청국과 일본이 각각 다르게 제작한 지도에 이 고려땅이 기록되어 있는것입니다.더구나 이곳을 옛날 북부 마한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08/07/19일 배달국 카페의 정성일님과의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남옥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바 있습니다. 제목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옥저,동옥저>였고, 이 글은 09/04월현재까지 31696명이 열람한바 있습니다.

 

[지도를 놓고 요동반도를 살펴보시면 남쪽 대련에서 단동사이에 장하시라는곳이 있습니다. 그 장하시에서 북서쪽으로 국도가 나있는데 개마대산을 넘어 개주로 통합니다. 대장산도는(남옥저) 장하시의 서쪽에 있고, 북쪽으로 벽류하라는 제법 큰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의 중류에 물을 담아둔 큰 수고가 있습니다. 이 수고의 주변으로 요동반도에서는 가장 많은 고인돌 집단지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대략 여기쯤이 동옥저의 중심지쯤 될것입니다. 그리고 개주에 있던 난민들은 탁장군을 따라 이 산을 넘었다고 봅니다.

6.25전란을 상기하면 줄줄이 늘어서서 이고 지고 남쪽으로 피란하던 행렬들이 떠 오릅니다. 여기를 구산은 고구려 개마대산으로 봅니다.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가면 바다에 이르고 피구라는 포구가 나오는데 단기고사에 의하면 이곳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조선소가 필요한 여건을 갗추고 있습니다. 주변에 산림이 울창하여 조선자료를 조달하기가 편리하고 만이 깊어 해풍을 막아 주며 목적지로 건너려면 반드시 배가 필요한것입니다. 후한의 광무제가 재침하여 낙랑군을 수복하고 살수의남쪽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살수가 이 벽류하라는 주장을 구산은 줄기차게 하여왔습니다.]

 

 

 

 

청국대지도  1911년 동경일일신문제작  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소장

 

대고산항(大孤山港): 이곳을 남옥저라 하고 북부 마한이라고 한 기록은 요지음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질타를 받고있는 <<남당유고>>의 <백제왕기>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어떤사서도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지 못한 남옥저의 위치를 구체적인 지명을 제시하고 또 방향까지 병기하여 현재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켜놓은 배려는 참으로 감명깊은 행동이 아닐수 없습니다. 남옥저는 비교적 기록도 많지 않지만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해석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게 사실이고 따라서 무리한 억지 주장이 난무하였던것도 사실입니다.그동안 수많은 설전과 토론으로 피차의 가슴을 멍들게하였던 사연들일랑 깨끗이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흩어진 역사의 조각들을 복원하는데 열쇠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초대부통령 이시영선생께서 일제에 잃었던 조국을 수복하기위하여 전 재산을 쾌척하여 설립한 만주신흥군관학교를 세웠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뿐만 아니라 6.25

동족상쟁때 소련의 공군이 중공군으로 가장하여 한국전에 참가하였던 바로 그 비행장이 이곳에 있습니다. 특히나 당시 경상북도 안동땅에 계시던 동포들께서 신흥군관학교에 재정적 후원을 많이 하셨다는 기록과 이곳이 단동 이전에 안동이었다는 사실은 경북의 안동과 끈끈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하나 간과할수없는 사실은 항일독립운동과 더불어 역사광복운동을 벌리던 <<한단고기>>의 주인공들이 이곳을 통하여 활동하였던 사실입니다. 초대주인공인 계연수선생은 일제 경찰에게 암살되어 압록강에 시체가 유기되었고, 그의 제자 이유립선생은 수차에 걸쳐 나포되어 수감과 석방을 반복하다가 월남하여 한단고기를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자유지를 발행하여 역사찾기 운동을 벌리던 박창암 장군은 간도출신으로 이유립.안호상. 임승국.문정창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됩니다. 이들이 서로 얼키고 설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그들의 활동은 비밀이었습니다.

 

아래글은 크릭하여 읽으시면 선명합니다. 

다음글은 <<동사강목>><지리지>에 소개된 남옥저에 대한 기록입니다.

 

<<동사강목의 지리지>>에서 안정복은 남옥저의 위치를 알수 없다고 하면서 사료들을 검토할때 요동의 경계는 압록강으로 한계를 이루었을것이라고 하면서도 압록강의 남쪽인 함경도의 삼수.갑산.위원 근처가 남옥저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면서 그는 요동의 해주가 본옥저라는 <<성경통지>>의 본옥저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옥저가 무순에 있었다면 무순의 남쪽으로 800여리가 어디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통설대로 남옥저가 원산의 남쪽 지방이라면 북옥저인 무순에서 방향도 맞지않고 거리도 800리가 훨씬 넘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근거로 삼을수 없을것입니다. 더구나 삼수갑산에서 바다에 배를 띄우기는 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청나라 해안도: 이 지도에는 동고려와 서고려가 경계를 이루던 호강하(胡康河)라는 분기점이 있습니다. 이 호강하는 대양하와 벽류하 (필리하)의 중간 지점이며 동옥저와 남옥저는 같은 지역이지만 남쪽으로 해안에 가까운 지역을 남옥저로 불렀습니다. 이곳이 남옥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은 자료들을 동원하여 이미 올려두었습니다. 서한만을 고려도경에서는 요해라 부르고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남해라 불렀습니다. 삼국의 강역을 기록한 <<신,구 당서나 통전등>>에서 백제나 마한을 해도지상이라고 부르던 기록들은 모두가 이곳에 근거를 두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료 제공:향고도]

 

 

아시아동부여지도  1875년판 일본국제작 일본육군참모국

일본은 이 지도를 제작할 당시 고려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더구나 동고려(東高麗)와 서고려(西高麗)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은 청국에서 만들었던 위의 <청나라 해안지도>에서도 밝혀졌습니다. 대고산(大孤山) 즉 남옥저를 왜 북부마한(北部馬韓)이라고 하였는지는 남쪽으로 마한도(馬韓島)가 있었고, 또 장자도(獐子島)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지도자료 제공:향고도]

 

 

사서의 기록에 남옥저가 등장하는 대목

 

 

                       <<남당유고>><백제왕기>남옥저의 주석부분에서 남옥저는 북부마한 땅이었고 현재는 압록

                         강의 서쪽에 있는  대고산 땅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출전:라디오만들기]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 43년(서기 25년)  그 해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호가

부양(斧壤)에이르러 의탁을 원하니 온조왕이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입니다.

 

<<삼국사기>>#23卷-百濟本紀1-溫祚王-43年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 百餘集王宮. 日者曰: "鴻 , 民之象也, 將有遠人來

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그러나 <<삼국사기>>의 온조왕 43년은 비류왕의 13년을 합한 년대이기 때문에 온조왕의 실재 연대는

30년이 되는것입니다.
30년 (AD25년) 을유 8월에 왕이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자가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

가 있을 것입니다."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집이 부양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안치하였다.

 

 남당유고의<<백제왕기>><온조27>

二十七年 乙酉 八月 田牙山(咸從)之原 五日 九月 鴻雁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雁者 民之象也 將有遠人

來投者乎” 十月 南沃沮(鴨綠江西 今大孤山之地 時爲北部馬韓) 仇顔(頗백제본기)解等二十餘家 至斧壤

(平壤 斧山院) 納款 命置漢山之西

 

***남당유고의 <<백제왕기>><온조>27년은 <,삼국사기>>와 다시 3년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여기

에 남옥저가 당시 북부마한이었던 압록강 서쪽에 있는 지금의 대고산 땅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습니다.


27년 (AD25년) 을유 8월 아산(함종)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 기러기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日者가 말하기를 “기러기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장차 멀리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10월에 남옥저(압록강의 서쪽, 지금의 大孤山 대고산의 땅, 이때는 북부 마한.)

구안(파)해 등 20여 가가 斧壤부양에 이르러 귀순해오니 명하여 한산의 서쪽에 살도록 하였다.

 

 ***부양(斧壤)은  고려의 전신 대진국을 건설한 궁예가 도망하다가 최후를 마친 지명입니다. 이 부양이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었다는 얘기이지요.

 그리고 북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와 싸우던 고구려의 동천왕이 쫓겨 도망한곳도 남옥저였습니다.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산성모 파소가 배를 탄곳도 동옥저(남옥저)였고, 실성왕이 볼모에서 풀려나 배를

탄곳도 남옥저였습니다. 따라서 아슬라주의 위치도 요동반도의 남쪽을 벗어나기 어려운것입니다. 이들이

배를 타고 떠난곳을 대고산항으로 추정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음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갈때 배를

탔던 기록중 일부입니다.

 

*<琉璃光明>二十二年癸亥,十二月,上以<陜父>初附於<沸流>有蘊意至是罷之. <陜父>以瓢浮海入<新羅>.
**<琉璃光明>二十三年甲子,二月,....<鵲>太子浮海入<新羅>.

***<琉璃光明>二十七年戊辰,三月,....<新羅>以女妻<鵲>太子.
****<琉璃光明>二十九年庚午,六月,....<鵲>太子爲<新羅>太輔.

 

 

***요동반도의 남쪽에 삼한의 근거를 두고 배를 타고 왕래하던 기록은 적은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은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은것이 있습니다. 낙랑국의 최숭으로 부터 계산하면 기원전194년~.[주1] 이곳은 주몽이 동순하여 낙랑에 이르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가 시길의 딸 작부인을 아내로 맞어 대려왔으며, [주2] 대무신왕 역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들어가 최리의 내외를 사로 잡았다고 하였습니다.[주3] 이후로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이곳을 칠때도 역시 배를 타고 건넜으며[주4] 위(魏)나라경초때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어 낙랑,대방 이군을 평정할때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주5] 낙랑국은 시작하는 당시부터 최숭이 배로서 준왕의 보물들을 사전에 배에 싣고 옮겨왔고, 해성에 300석의 쌀을 바치는가 하면 이후로 마한도 왕검성(馬韓都王儉城)으로 옮겨와 한왕이 된  준왕을 보좌하였습니다.[주6]

 

***주석에 대한 자료

[주1][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 <<한단고기>><북부여기 상>

 

 [주2]**◎十五年戊戌,五月,東巡至<樂浪>,浮海<柴吉>納女<鵲>. <<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

 

#14卷-高句麗本紀2-大武神王-20年

 

[주3]○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삼국사기>>는 이 대목에서 <<고구려사략>>에서 보이는 도해(渡海)기록과 죽령군 설치기록을 제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상세한 부분에서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보다 훨씬 신빙성이 높은것을 알수 있습니다. 도해 기록과 죽령군 설치기록은 숨겨진 강역을 추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3]**◎二十七年甲寅,四月, <好童>太子將兵東巡獵, 微行至<崔理>新都(鴨口), 與<理>女交好. 女爲之破鼓角而迎, 王師大軍自<沃沮(尼古□)>浮海而入拔其都, 虜<崔理>夫妻而歸, 以其地爲<竹?郡>. <樂浪>自<柴吉>四世八十餘年而國除. 七月,<大解>太子薨.<<고구려사략>><추모대제기>

 

[주4]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下戶詣郡朝謁,皆假衣?,自服印綬衣?千有餘人.[三國志/魏書/卷三十 魏書三十/東夷/韓]

 

#14卷-高句麗本紀2-大武神王-27年

[주5]○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號爲<大武神王>.<<삼국사기>><고구려본기>

 

[주6]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한단고기>><북부여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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