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 남한강공원묘원에 엄마 아버지 두분이 합장되어계신다.
묘비 뒤쪽에는 父尹基賢1925年生 1980年亡. 母 金淑伊 1927年生 2004 年亡 새겨져있다.
아버지 21살 어머니 19살에 결혼하셔서 위로 아들 둘과 아래로 딸 셋, 우리 5남매를 두셨다.
아버지는 고향 김해군 장유면 하봉림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할머니 말씀에
'조선에 있으면 징용끌려갈까봐 아무도 모르게 일본으로 도망보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일본 큐슈에서 전문학교를 졸업하시고 해방후 부산 외자청에서 공무원으로 사회 첫출발하셨다.
그리고 직장이 있는 부산에 서대신동집을 마련하고 그때까지 시골할머니댁에 계시던 엄마가 부산으로 오게 되면서 완전하게 분가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는 늘 '일본놈' '왜놈들' '그 독한 놈들'하시면서도 기분이 좋은 날은 늘 일본노래를 부르셨다.
당신의 힘들었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듣고 싶지 않은 고생담뿐이었다.
'겨울에 다다미 방이 너무 추워서 빤쓰도 벗고 내몸으로 스스로 덮혀야 했다'고 하시고
'그때는 일본놈들도 전쟁통이라 먹을게 없었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 둘 소리없이 그자리를 빠져나가버렸다.
아침에 일찍 일어 나셔서 약국앞 거리청소까지 다하시고
그때까지 늦잠자고 있는 오빠방 앞에서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이런 노래로 잠을 깨우셨다.
전쟁당시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는 대부분 16살이나 17살이었는데
이때는 명분만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목숨을 던지는 나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셨다.
또 큐슈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사촌 형을 구해내서 열차타고 배타고
일본순사의 감시망을 피해 고향마을까지 살아서 왔던일,
일본사람이나 조선사람이나 매일 폭격이 쏟아지는 전쟁에서 서로를 도우면서 고비를 넘겼던 일 등은
거의 매일 듣는 밥상머리 레퍼토리였다.
그때 얼마나 건성 들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아마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 고생스럽게 공부해서 오늘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거니까
'공부 열심히하라'는 나름대로 교육적인 의도가 아니었겠는가 싶다.
그렇다면 아버지 교육법은 완전 실패였다.
아버지는 우리동네의 군주였다.
1950년대 중반까지 외자청과 약국을 함께 하시다가 중간에 직장을 그만두고 약국운영에만 전념하셨다.
당시에 서대신덩 시장입구에 약국은 우리집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리동네에서 안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일한 의료기관이었던 셈이다.
물론 주변에 종합병원도 2곳, 의원도 몇군데 있었지만 병원은 서민들이 찾기에 문턱이 높았던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의사는 허가난 도둑'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던 걸 보니 서민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비쌌던것 이겠지.
밤12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우리집은 12시5분에 문을 닫아야했을 정도로 사교중심이었다.
밤10시가 넘으면 약국 응접 테이블은 술상이 되고 난로를 가운데 두고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모여 놀았던 것같다. 다 김사장 박사장 아저씨 아줌마 들이었다.
당연히 청요리를 부르고 술과 노래, 돈거래가 이루어졌다.
한참 지나면 누가 누구 돈을 떼먹고서울로 도망갔다느니, 누구는 알고 보니 순사기꾼이라느니 하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우리집 바로 앞에 있는 파출소 순경아저씨도 그 청요리가 있는 술판에 어울려 놀았다.
순경아저씨가 12시가 되어야 마지막으로 박카스 한병 얻어마시고 오늘 '야간당직'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녹색등이 푸르스름한 파출소로 들어가셨다. 순경아저씨까지 가고 나서 문을 닫으니 그때는 12시를 넘겨 5분이었다.
나와 동생들은 10시,11시가 되어도 어른들이 청요리를 부를때까지 졸린눈을 비비고 엄마치마폭을 감고 버티고 있었다.
만약 졸려서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나와있는 청요리 빈그릇을 보면 억울해서 부아가 나서 엄마한테 심통을 부리곤 했다.
'왜 나 자는데 저거들만 몰래먹고 잉~잉~ '하며 울고 난리쳤다.
30대, 40대를 맞이한 아버지는 자신의 전성기 답게 주변에 있는 주택을 하나 둘씩 사들였고
시골에 할머니는 한풀이 하듯이 평소 눈여겨 보아두셨던 문전 옥답을 채곡채곡 사 모으셨다.
친구 엄마는 "너네 주사업은 약국이 아니고 부동산이야"라고 말씀 하셨을때 나는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부동산이라는 말의 뜻도 몰랐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오야봉"또는 "오야지"라고 불렀다.
나는 아버지를 다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동네 아줌마들은 우리집에 올때 조심조심 "이집 오야지있나?" 하고 물어보면
엄마가 '나가고 없다'하면 들어오곤했다.
계 오야하는 강교수마누라(이름은 모르고 다들 그렇게 불렀다.)이거나 밀수물건 팔러오는 충길이엄마였다.
약을 사러오는 손님이면 그렇게 눈치보며 들어올 필요는 없었다.
충길이 엄마가 풀어 놓는 밀수품은 황홀했다.
일본 라면, 미제 커피와 카네이션(커피크림), 각설탕..그중에
내 일제주름치마와 100%나일론 블라우스도 있었다.
강교수마누라는 결국 계를 빵꾸내고 온동네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했다.
마침 우리집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떼로 모여 '내 돈내놔라, 내돈'하며 강교수마누라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오야아줌마는 죽는 시늉을 하며 아우성을 치던 광경을 보았다. .
동사무소에 초본이나 등본을 떼러가도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지 않았다.
옆문으로 들어가 안쪽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 하고 있다가
누군가 서류를 갖다 주면 양복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 웃으면서 나오셨다.
작은 오빠가 갑자기 전학을 하게 되었다. 울며 불며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아버지가 우리학교의 기성회장, 나중에 육성회장, 이런 감투를 하게되면서 여러 학교에 흩어져 있던 우리들을
같은 학교에 데려다 논 것이다.
수업중에 교장실로 불려 갔다. "니가 윤기현씨 딸이냐" 물어보고 "예" 한마디 대답하면 "응 알았다 공부 잘해라"이런 식이었다.
중학교 입학식때도 나는 줄을 서서, 부모님들은 운동장 언저리에서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기다리다 지겹고 발도 시려 동동구를 정도가 되면 행사시작을 알리는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와 함께 아버지는 선생님들과 교무실에서 함께 나오셨다.
'참내, 아버지는 왜 나와 함께 운동장에서 기다리지 않는지..'모를 일이었다.
더이상 중학교의 육성회장도 아닌데 말이다.
저녁이면 낮에 약을 배달한 오빠들이 수금을 온다.
아버지는 순순히 약값을 수금 해주는 경우가 좀처럼 없다.
늘 '내일 받아가'하셨다.
순순히 돌아가지 않고 '오늘 주시라'는 사정하는 말로 얼마간 버티고 있으면 몇마디 욕과 함께 아버지의 손찌검이
그 오빠들에게 바로 날아갔다.
'이노무 새끼가 어디서'
따귀를 맞고 울면서 서서 그래도 '돈을 줘야 간다'고 버티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 엄마가 '걔들이 그냥달라고 하나? 약 갖다주고 받아가는 돈, 이왕 줄건데 내일 주면 돈이 새끼치냐?'면서
엄마가 얼마라도 돈을 쥐어 주면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보내곤 했다..
나는 약국에 나갔다가 종종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도 동화책에 나오는 착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약국근처에는 노점이 일체 가까이 올수 없었다.
지저분하다고 아버지가 절대 전을 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약국앞 길에 양동이에 물을 가득담아 길거리에 힘껏 끼얹으며 물청소를 하셨다.
수건을 돌돌말아 이마를 두르고 뒤로 질끈 동여매고 계셨다.
언젠가 일본에 갔을때 TV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확인했다.
허술한 웃저고리 차림의 남자가 수건을 말아 이마를 싸매고 바께쓰에 물을 떠서 거리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은 일본에서 아프게 배웠던 것들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첫댓글 아버지의 전성기라는 제목과 딱 어울리는 이야기네요. 그 당시에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이해가 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우리 자신도 성장하면서 생각도 바뀌니까요. 어렸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진행 선생님 마이크 소리~'는 '진행하시는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로 바꾸시는 게 좋겠습니다.
친절한 조언 감사합니다. 평생 우리 자식들과 화목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다시한번 생각해겠습니다.
울아버지 생각나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