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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에 가다.
뜬금없이 울릉도엘 다녀왔다. 어찌보면 기행(記行)이 아니라 기행(奇行)이랄 수도 있겠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3년간 다녔던 회사를 정리하고 나오자, 집사람이 그동안 수고했던 말 대신 바람 쐬러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개진해 왔다. 지금까지 네 번쯤 변동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머리를 식히려 여행길에 올랐으니 이번에도 으례 그러려니
예견하면서 넘겨짚었다. 그런 심경인 집사람에게 요즘 부쩍 독도에 흑심을 드러내는 일본의 처사에 빈말삼아 '독도나 지키려 갈까? '
하는 말이 씨가되어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찾아 계약 하고 2박3일 일정을 잡아, 4월 8일 아침에 울릉도로 떠났다.
배편은 2011년 3월 4일부터 강릉시 안목항(安木港)과 울릉도 저동항(苧洞港)으로 오가는 씨스타호로 이용했다. 두 항 모두 기존항로인
묵호항(墨湖港)과 도동항(道洞港)에 비하여 여행객을 위한 편의시설은 아직까지 미비하여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낙제점으로 매겨졌다.
울릉도는 상고시대로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무릉(武陵), 우릉(羽陵), 우산국(于山國)으로 호칭되던 곳인데, 신라 지중왕
13년 장군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정벌되어 신라에 부속시킴으로서 역사에 등재하게 된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의
「해산(海山)」에 따르면,
'숙종(肅宗) 때, 삼척 영장(營將) 장한상(張漢相)이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서 흐름을 따라 배를 띄워 동남쪽을 향하여 이곳을
찾았다. 바람편에 이틀만에야 비로소 큰 돌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언덕에 오르자, 사는 사람은 없고,
옛날 사람들이 살던 유지(遺址)가 있었다.(肅廟朝, 三陟營將張漢相, 自咸鏡安邊府, 困順流發船, 向東南尋之, 風便二日始至,
見大石山, 聳立海中, 上岸無人居, 而有古人遺址) 라 적었다.
조선조에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펴기도 했던 이곳에, 왜구(倭寇)의 침입이 잦았다. 예전에는 삼(蔘)이 많이 난 듯, 삼척 수령(守令)의
역사인 척주(陟州) 선생안(先生案)에 보면, 영조45년(1769)에 영장(營將)인 홍우보(洪禹普)와 김수(金琇)가 울릉도에서 몰래 삼을 캔
일에 관련되어 파직된 채 귀양살이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본디 삼척영장(三陟營將)은 영동(嶺東) 9개 군의 병권(兵權)을 관장하는
자리인데, 현종 14년부터 울릉도 치안도 겸하게 했다.(三陟市誌)
해심(海深)의 가장 깊은 곳이 4,049m, 그래서 더 깊이 흔들어 사람의 속까지 토해내게 하는 바다를 지나 저동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예로부터 3무(三無 : 도둑, 공해, 뱀) 5다(五多 : 향나무, 바람, 미인, 돌, 물)의 섬 울릉도,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봄이
산색(山色)을 춘색(春色)으로 부지런히 바꿔놓고 있었다.
서면해안에서 바라본 울릉도 산, 울릉도 특유의 흰 벗꽃으로 이미 춘색이 완연하게 익었다. 그것이 화산으로 생긴
기이한 화산석과 짙푸른 바다, 또 향나무, 후박나무와 어울려져 춘색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내수전 일출전망대에서 바라 본 저동항과 급경사를 이룬 비탈밭
울릉읍은 저동(苧洞), 도동(道洞), 사동(沙洞), 독도(獨島)로 이루어져 있다. 저동은 어항(漁港)이고 도동은 여객항
(旅客港)이다. 그리고 현재 사동에 울릉신항을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흔히 뭍의 사람들은 여객항인 도동으로 통하여 울릉도로 들어온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여객운행장소인 저동에 내렸다.
저동은 울를도의 제일 큰 마을로서 가장 큰 어장이랄 수 있다. 그러니 특이하게도 집집마다 옥상에 오징어덕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바다로 내리달리듯한 급경사로 이뤄 오징어 건조장의 마련이 어려운 데에 대한 대안(代案)이리라.
저동항의 아침
저동항의 아침은 닭이 홰치는 소리와 괭이갈매기 울음소리로 시작된다.도동에 비하여 숙박시설과 식당들의 수요가 적고
다소 불편하다. 그러나 주말이면 번잡하지 않아 조용함을 즐기려는 여행객에게는 안성맞춤이다. 오징어 성수기에는 이곳이
가장 활기가 넘칠 것이다. 이곳에도 KBS 2TV 1박 2일의 인기를 실감케하듯 부두 오른쪽으로 도동등대까지 가는 산책로가 관광객
에게 인기있는 코스다.
마을 앞 바닷가에 우뜩하게 솟아오른 바위가 촛대암(燭臺岩)이다. 기이하고 독특한 형상의 바위마다 으례 하나의 전설을 달고
있듯 이 촛대암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동딸은 바다로 나간 아비의 환청에 사로잡혀 바다로 마중나가다가 파도에 휩쓸려 돌로
변했다는, 사부(思父)의 애절한 전설을 안고 동쪽 바다를 지켜보고 서있는 바위다.
대통령권한대행.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 박정희장군 시찰비(1963년 6월6일)
예로부터 닥나무가 많다고해서 이름이 붙은 저동(苧洞), 바닷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비석 하나가 스텐레이스
스틸 파이프 보호망을 둘러 싸여 있는데, 5.16군사혁명을 이끈 박정희 전대통령의 을릉도 순찰비다. 1963년 6월 6일
지방유지들이 뜻을 모아 세웠는데, 그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직함은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대장 박정희 장군'이었다. 벌써 48년의 세월이 역사 속으로 묻혔다. 이제는 나라가 근대화로 간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가 제창한 새마을운동은 아직도 개발도상국으로 뛰어오르려는 국가로 수출되고 있다.
건달꾼 오징어잡이 배들
조선(朝鮮)시대에는 한 때 울릉도를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편 적이 있었다. 그 시대 울릉도에 가면 해안이 물 반, 오징어
반이었고, 전복이 해변 바위에 새까맣게 붙어있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오징어라면 호박엿과 함께 이곳의 대표산물이다.
그런데 가장 큰 어장인 저동에 정박하고 있는 오징어잡이배는 지금 마치 건달꾼처럼 하릴없이 부두에 매어 빈둥대고
있었고, 도동등대까지 가는 해변가에는 울릉도에서 좀체 보기어렵다는 백화현상(白化現狀)으로 해안이 말라 있었다.
어판장에는 가오리만 몇 마리가 해풍에 몸을 말리고 있어 어판장이라는 걸 겨우 생색을 내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성어기는 고사하고 잡어마저 잘 잡히지 않는다고 식당여주인이 음식을 내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여객항인 도동항이다
여객항인 도동항이다. 뭍으로부터 오는 사람들, 뭍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또 독도와 죽도로 가려는 사람들, 또 내륙으로 여행하려는
사람들로 뒤엉켜 여객선이 닿을 때마다 북새통을 이뤄 시끄럽기 짝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반나절만 보내도 뭍에 비해 물가의 비쌈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그조차 수량이 넉넉지 않아 부르는 게 곧 값이고 거래금액이다. 군소재지가 이곳에 있어 그러한지 다른
곳에 비하여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현재 도동항에서 사동항으로 해안도로인 '우안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구름다리를 놓고, 화산으로 이루어진 단애(斷崖)를
포크레인으로 깎아내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 도로가 준공되면 사동항에서 저동항까지 퍽으로 낭만적인 해안 산책로가 이어질
전망이다.
서면 남양해변의 사자바위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섬들은 유난히 기이한 형상으로 독출나게 뛰어오른 바위들이 많고, 또한 당연히 그것의 형상에
따라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곤 하는데, 이 사자바위도 그런 바위들 가운데 하나다. 관음도(觀音島),촛대바위燭臺岩),
복저바위, 코끼리바위(空岩), 한반도바위, 죽암(竹岩), 청도(靑島), 삼선암(三仙岩) 등도 그렇다.
이 사자바위는 신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의 이야기가 얽혀있다. 마치 그 전설에 구색이나 맞추려는 듯 이곳
부근에는 사자굴, 투구바위, 국수바위, 나팔봉 등이 있었다.
우산국왕은 ‘우해’다. 그는 대마도에서 '풍미녀'라는 여인을 데리고 와서 왕후의 자리에 앉히고부터는 나라일을 잘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무릎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와 사이에 ‘별님’이라는 딸이 태어나자 왕으로서의 본부을 잃고,
왕후의 사치를 위해서 귀중한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금이 흔한 신라까지 노략질했다. 이에 신라의
백성들은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줄것을 여러번 호소했다. 백성들의 호소에 드디어 신라왕은 장군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첫번째 신라와 우산국의 수중싸움은 육군으로 구성된 신라군에 비하여 수군인 우산국이 이겼다. 그러나 패전의
고배를 마신 신라 장군 이사부는 세상견문이 좁은 우산국을 정벌할 계략과 수군을 훈련육성하여 다시 우산국 정벌에
나섰다. 그런 한편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우해왕은 전승(前勝)을 상기하며, 오히려 사신의 목을 베어 도전의사를
분명히 했다.
신라군은 신라를 떠날 때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세웠는데, 그 사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나
왔고, 군사들은 배 위에서 한꺼번에 화살을 쏘면서 우산국으로 쳐들어 갔다. 이에 우산국의 백성과 군사는 혼비백산했다.
듣고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우렛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은가. 사나운 짐승은커녕 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던 우산국 전사들은 그 짐승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나 둘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 배를 뭍에
대고 방책 뒤로 피했다.
이에 더욱 기세가 오른 이사부는 신라 군사를 시켜 뱃머리에서 큰 소리로 “당장 창과 칼을 거두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
들을 풀어서 너희를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우해왕은 결국 항복하기로 마음먹고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대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항복의 조건은 우해는 우산국에서 쫓겨나고,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으로서 해마다 공물을 바치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을 남겨두어 내가 죽더라도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주십시오.” 라는 부탁을 했고, 이사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결코 우해왕은
바다로 몸을 던졌다.그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었고,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되었다고 한다.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
만물상 전망대에서 바라 본 만물상과 주변의 그림같은 풍경들
역시 KBS 2TV의 1박2일의 바람을 탄 곳. 만물상(萬物象)과 그 주변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다. 지금 울릉도 여기
저기에서 산나물(거의 집에서 재배하다시피 하는) 채취가 한창이다. 더군다나 성어기(成漁期)가 아니어서 수입을
나물에 의존하는 듯했다. 또 때가 지금이라야 수확하는 나물이 맞물이어서 제일 맛있다고 버스운전하는 가이드(그는
엄청 수다꾼이었다.)가 일러주었다. 울릉도에서 특이한 것은 평군 25도 급경사의 경사진 곳에 밭들이 있다보니 모두
모노레일에 의지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이곳에도 예외없이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봉래폭포
같은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인데도 제주도는 건천(乾川)이 많아 물이 귀하지만, 울릉도는 곳곳마다 용출수(湧出水)가
뿜어져나와 물이 흔하고. 또한 알카리성분이어서 피부에 매끄럽게 감촉된다. 가이드가 수도세를 내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곳이 울릉도의 대표적인 폭포인 '봉래폭포(蓬來瀑布)'다. 성인봉(聖人峰 986.7m) 깊은 골짜기에서 층층으로 떨어져
내리는 수량이 풍부한 폭포다. 저동 부두에서 차량으로 20분정도 내륙으로 들어간 거리에 있다. 골짜기가 깊어 아직
잔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울릉도 동북방에 위치한 죽도다.
마치 햄버거 한쪽이 푸른 접시 위에 놓여있는 모양을 연상시킨다. 1가구가 빗물을 생수로 이용하여 살고있는데,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죽도(竹島)라 부르는 섬이다. 울릉도로부터 4Km 동북방에 위치. 해발 16m으로 더덕이 많이 생산되고,
후박나무도 많이 자생하고 있다. 선편은 도동항에서 30분 거리. 시간이 나지 않아 오르지 못했다.
태하향목관광 모노레일
태하항(台霞港)에서 향목전망대(香木展望臺)와 울릉도 등대를 오르기 위하여 이용되는 모노레일. 두 량으로 앞뒤에
탑승한 사람이 각각 등지고 오르내린다. 탑승시간은 고작 6분, 원경(遠景)에서 눈길을 거둬들이면 벌써 도착이다.
그곳에 오르면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의 군락지가 있고 울릉도 전망대가 있으며, 울릉도 북쪽인 현포항(玄圃港)과
현무암의 주상절리(柱狀節理)로 이루어진 공암(空岩), 노인봉(老人峰), 송곳봉과 천부항(天府港)까지 넉넉히 조망할
수 있다.
대풍감 향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49호)
한국 10대 비경에 든다는 대풍감(待風坎). 천연기념물 49호로 지정된 향나무자생지다. 처음에는 '대풍감'이라기에 감(枾)의
종류거니 했다. 옛날 배가 드나들 때, 배를 매어두기 위해 이곳에 구멍을 뚫어 배를 매었고, 돛단배이기 때문에 항해를 위해서는
바람이 불어야 하므로 그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 하여 기다릴 대(待)자를 써서 대풍감(待風坎)으로 명명하였단다.
대풍감 향나무 자생지는 바닷가 가파른 절벽이다. 심한 해풍의 영향으로 향나무들은 수고성장(樹高成長)이 빠르지 않으며 이곳에는
향나무가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동안 다른 집단과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향나무의 원종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 산불이 발생했는데 불에타는 향나무향기가 일본의 가까운 지방까지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괭이갈매기
들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향목전망대에서 본 해안절벽은 울릉도내 빼어난 절경의 하나로 울릉도(태하)등대와 함께 섬 비경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향남전망대에서 바라본 울릉도 북쪽 해안선
향남전망대에서 바라본 울릉도 북쪽 해안선이다. 바다로 방파제가 보이는 곳이 현포항이고, 바다로 떨어져 보이는 두 개의
바위가 공암(空巖 : 일명 코끼리 바위)와 수중바위이다. 그 앞쪽으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노인봉이고, 그 뒤편으로 우뚝하게
쏟아오른 것이 430m의 송곳봉이다. 이 송곳봉의 사진은 한국비경을 촬영한 사진첩에도 등재되어 있다.
향목으로 오른 길 숲의 동백나무
어느 시인이 읊었던가. 동백꽃은 가지에서 핀 자태보다 떨어져 누운 꽃잎의 자태에서 더 서러워서 곱다고
봄의 파란 전령이 서둘러서 오고있는 울릉도, 부지깽이도 설친다는 소생하는 계절, 울릉도의 어디에서나 이런 동백꽃이
붉은 꽃송이를 토혈(吐血)하면서 봄바람에 이을고 있었다. 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떨어져 누운 동백꽃잎이 이채롭기만
하다.
태하(台霞)의 황토굴
마을 우측 해변에 움푹 패인 석벽에 붉은 지층의 황토가 있어 '황토구미'로 불러지게 되었다. 조선조 옛지도에 주토굴(朱土屈)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조에는 이곳의 황토를 나라에 진상했다고 하며, 또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 삼척영장(三陟營長)을
이 섬에 순찰을 보내고 그 실행여부를 알기 위하여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 한다. 일종의 허위보고를 막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였다. 이곳을 바닷가에 황토를 파낸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큰황토구미'라 하였다. 후에 한자식 지명으로 표기할
때 '대하(臺霞)'라 하다가 다시 '태하(台霞)'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군청소재지의 위치는 지금의 성화신당이다.
성하신당, 예전 군청소재지 건물터
성하신당 내부
바다사람들이 최우선 신을 모시는 일종의 해신당(海神堂)이다. 다른 해신당의 그림과 달리 남녀 모두 젊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곳 서면 성하신당의 전설은 울릉도의 대표적인 설화다.
조선 태종 때(1417년) 삼척인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로 명하였다. 이에 김인우는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리에 도착하여 유숙지로 정했다. 그리고 도내 전선(全船)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내일이면
출발 귀임(歸任)할 작정으로 취침 중 기이한 꿈을 꾸었던 것이다.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남녀 2명(童男童女)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안무사는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별로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나 구애됨이 없이 다음날 출항할 것을 결심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하지 않던 풍파가 일어 출발을 중지하고 풍파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멎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 가기만 했다. 수일간은 기다리던 끝에, 안무사는 문득 전일의 현몽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동남동녀 2명에게. 일행이 유숙하던 곳에 필묵을 잊고 왔으니 찾아올
것을 명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동남동녀 2명은 발길을 재촉하여 총총히 밀림사이로 사라지자 그렇게 심하던 풍랑은 거짓말처럼 멎어
지고 항해에 적당한 바람만이 불어오는 것이다. 안무사는 결국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출항할 것을 명하니 배는 순풍을
받고 일시에 포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속은 줄도 모르는 어린 남녀는 아무리 찾아도 필묵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는 벌써 멀리 해상에서 쾌조로운 순풍을 타고 육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이 두 동남동녀는 땅을 구르며 고함을 쳤으나 배는 어느 듯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망스러워
울부짖던 두 어린 남녀는 이제는 지쳐 어쩔 수 없이 본래 유숙하던 자리로 돌아왔으나, 날이 저물어감에 따라 공포와 추위,
그리고 굶주림 에 시달리다 결국은 죽어갔던 것이다.
한편 안무사는 무사히 뭍에 귀착하여 울릉도 현황을 복명하였으나 당시 연민의 정과 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날이없었다. 그러다 수년 후 재차 울릉도 안무(按撫)의 명을 받고 입도(入島)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에 태하리에 착륙하여
수색을 하였던 바 전년에 유숙하던 그 자리에 두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白骨化)되어 있었던 것이다.
안무사는 이 정황을 보고 회한에 찼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그래서 혼령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 곳에다 간단한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귀임하였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농작이나 어업의 풍년도
소원하고 위험한 해상작업의 안전도 빌었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새로 건조한 선박의 진수가 있으면 꼭 태하의 성하신당에
제사를 지냈다.
대풍감낚시터에서 바라본 태하항 전경.
태하항은 화물항이다. 이곳에서 건축하는 모든 것들. 시멘트,모래,자갈 기타 건축재, 모두 뭍에서 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가옥을 짓는데 엄감생심 건축비가 비싸다고 말할 수 있으랴. 금기사항의 하나다.
벼랑에다 기둥을 박고 터전을 넓혀 집을 지었다. 울릉도를 여행하다보면 쉽게 눈에 뜨이는 광경이다
나리분지에서 서서 바라본 미륵봉(900.8m)
나리분지에서 서서 바라본 성인봉(986.7m) 능선
칼데라(caldera : 커다란 솥이란 스페인어) 화구가 함몰하여 형성된 나리분지(羅里盆地). 면적이 1.5-2km, 동서 1.5km,
남북이 2km.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제일 너른 평지여서 분지 가운데 서 있으면 울릉도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분지바닥에는 토질이 비옥하여 농토로 이용되는데, 명이나물(산마늘의 일종) 재배하는 밭이 파랗게 보였다.
분화구를 둘러싼 산은 온통 잔설이 쌓여 한겨울 맛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일행 가운데 2명은 등산차림을 이미 하고
온 듯 바로 성인봉으로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들과 같이 눈이 쌓여있는 산으로 오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나리분지에 있는 너와집이다
나리분지에 있는 투막집이다
화산 토질과 소라계단
저동항에서 도동등대로 가는 오른쪽 해안의 산책로 끝에 놓여진 57m STS 원형 계단이다. 빙빙돌아 타오르면 오금이
저릴 만큼 현기증이 인다. 계단을 올라 동백숲과 대밭을 내림길로 지나 왼쪽으로 돌면 도동등대로 가는 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도동항으로 이어지는 길이 고개를 내민다.
사진에서 누릿하게 보이는 것이 추위에 마른 댓잎이고, 회색은 돌이끼며, 푸른색은 풀들이다. 짙은 갈색을 띈 부분이
화산암인데 철분성분이 많아서 그런지 마치 철제구조물이 녹이 쓴 듯 보인다.
화산암 일부
역시 저동항에서 도동등대로로 가는 해안산책로 구름다리 부근에서 눈에 띄었던, 석질이 달리 섞여진 화산석의 일부
이다. 마치 화가가 그려놓은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울릉도에는 알카리성 화산암으로 되어 있고 해식작용(海蝕作用)이
성하여 기이한 구조로 변형된 암층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도등등대다
저동항에서 도동항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 해안도로 역시 관광객을 위하여 구름다리를 놓고 절벽의 길을
만들어 관광객의 산책로로 구며놓았다. 그래서 가로등도 설치해 밤바다 풍경을 느끼도록 해놓았다. 만약 오징어
성어철이면 그 길을 걸으며 바다 야경을 즐기는 맛도 상당하리라. 이 길 역시 KBS 2TV 1박2일의 유명세를 탔던 곳이다.
내수전 일출전망대에서 바라본 아담한 내수전 몽돌해변
내수전 일출전망대에서 바라본 내수전 성인봉쪽 풍경
김두경 할아버지와 최필남 할머니 거처집
2007년 10월 29일부터 그 해 11월 2일까지 KBS 1TV '인간극장' 「낙원의 케이블카」라는 다큐가 방영된 적이 있었다.
바로 울릉도 태하동(해발 125m) 향나무집에 사는 김두경(당시 78세)와 최필남(당시 77세) 노부부 이야기였다. 해발고도
125m이라지만 카파로운 길이라 농삿일은 모노레일을 의지하여 해결하는 삶을 그려낸 것이었다.
방영이후 향남전망대를 찾는 관광객들은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곳을 들려서 오고가고 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최필남 할머니
운전을 겸한 가이드 양반이 김두경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말씀도 잘하신다기에 들려보았다. 할아버지는 맞은 언덕에서
밭에 퍼렇게 자란 부지깽이나물 채취에 바쁘셔서 근처까지 갔다가 일손을 방해할까싶어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에 집앞에 오자, 마침 최필남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고 계셨다. 한마디로 후덕해 보였다. 내
가 여쭈어보았다. "할머니 티브 나가시고나서 사람들 때문에 귀찮으시지요? " "아니요,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니겠소."
대답 또한 넉넉하시다.
사진촬영의 양해를 얻어 한 컷만 간수한 채 쓸데없는 말이 폐될까 싶어 이내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릉도 묘지의 형태
나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묘지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고향이 삼척이라 그곳의 묘지들은 대체로
앞면이 둥그렇게 높고 뒤로 갈수록 꼬리가 길게 뒤로 벋어 가늘고 낮아진다. 경기도 지역은 전체적으로 둥근편이고 남도 쪽은
고리없이 둥글다. 울릉도의 묘지는 유난히 복판이 뽀족하니 솟아올라 뒤로 밋밋하게 벋어나가서 특이한 형체를 띄고 있었다.
분명 지방의 환경에 따라 변화가 있는 것같다는 생각만 했을 뿐 아직까지 그것에 궁구(窮究)하지 못한 채다.
독도(獨島)에서
높은 강도 지진, 천외한 쓰나미, 대책없는 방사성 노출. 그런 와중에서도 끈질기게 독도영토권을 주장하는 일본. 그 일본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소련과도 중국과도 끊임없이 영토확장에 매달려 산다. 요즘들어 교과서에다 올리기까지 해서 분노를
더욱 부채질해대고 있다. 때로는 그런 빌미를 제공한 우리나라의 일부 위정자들이 야속하다는 생각도 든다.
울릉도에 간 참에 반드시 돌아보고 오고 싶었다. 그 뿌리가 분명 우리 영토에 붙어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다소 일정이 밀리기는 하였으나, 일년 중 입도확율 15%밖에 되지 않는 독도로 가는 날, 오전 7시에 떠났다. 날씨는 드물게
쾌청하고 파도도 잠잠해서 입도에 성공했다. 그러나 동선(動線)은 자유롭지 않았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태극기를 안고
촬영하기도 했다. 그 사진은 일본기자가 찍어 NHK나 아사이신문에 실어야 했다.
서도(西島)다. 유일한 현지 주민의 숙소다. 단 한 채(2층 36평)다. 서도의 면적은 88,740m2 ,이다.
동도(東島)이다. 유인등대 1기, 경비초소, 막사 9동, 면적은 73,297m2으로 서도보다 작다.
동도(東島)의 북쪽이다.
동도(東島)의 남쪽이다.
접안지에서 동도쪽으로 본 경치
좌로부터 서도, 탕건봉, 촛대바위, 삼형제 굴바위들이다.
울릉도 식물들 또는 기타.
울릉도에서 바윗길이 아닌 곳의 도로에 가로수로 하였다는 마가목이다. 뭍에선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에서
많이 눈에 띄는 나무다. 붉게 익는 열매는 눈속에서도 붉은색을 잃지 않는다. 나무는 지팡이로 많이 쓰이고
열매는 약재로 쓰이기도 하고 술로 담아 먹기도 한다.
울릉도에서는 후박나무 군락지가 자주 눈에 띄었다.
나리분지에서 본 명이나물 재배지다.
명이나물이다. 산마늘의 일종이다. 장아찌로 담은 맛이 일품이었다.
울릉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지깽이나물 재배지다.
울릉도 엉컹퀴나물이다.뭍에 것은 잎가장자리에 가시가 있지만 이곳 것은 부드러웠다. 해서 이곳 음식 중에는
엉컹퀴해장국이라는 게 권장음식목록에 들어있었다.
삼나물 삶아 말리고 있다. 삼나물 무침은 마치 닭고기를 씹는 듯했다.
도동항에서 다개비비빕밥을 주문했을 때 나온 반찬인데 아주 특급에 속했다.
좌상으로부터 미역간장조림, 깻잎절임, 감자조림, 양념장, 멸치볶음, 전호나물생절임, 명이나물장아찌.
김치, 낙지무침, 부지깽이나물무침, 두부졸임. 모두 입맛에 맞았다.
봉래폭포 주차장에서 맛 본 호박막걸리에 삼나물 무침 안주다. 막걸리 맛도, 삼나물무침도 일품 맛이 났다.
나리분지에서 마셔보았던 씨앗막걸리보다 순했다. 한 뚝배기가 만원인데, 부부동반에는 오천원짜리인 반이
내 주량에는 적당했다.
도동에서 묵호항으로 돌아올 때 탔던 오션프라워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