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이 15일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되며 향후 10년간 중국을 이끌어 갈 최고지도자에 올랐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지속적인 개혁 개방 추구와 부패 척결을 과제로 제시했다. 외교에서는 “중국과 세계가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평화적 굴기(굴起 : 이성하 주 : 부상(浮上) , 떨쳐일어남, 우뚝 섬 , )’가 순항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습근평 (씨진핑) _ 習近平(Xi Jinping)
1953. 6 중국 베이징~. 중국의 정치가.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2008~)을 지냈다.
시진핑은 한때 중국의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당과 정부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시진핑이 1989년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 당시 정부의 대응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한 이후 눈밖에 났다.
1969년 문화대혁명 때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교육 받은 도시 청년이었던 어린 시진핑은 산시 성[陝西省]의 시골로 보내졌다.
그 곳의 농업 공동체에서 시진핑은 6년 동안 육체 노동을 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지역 소작농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CCP)에서 계급이 올라갈 때 명문가 출신의 시진핑이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4년에 시진핑은 정식 당원이 되어 당 지부의 서기를 지냈다. 다음 해에는 베이징[北京]의 칭화[淸華]대학교에 입학해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을 겸직한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3년 동안 일했다.
1982년에 비서직을 그만둔 시진핑은 대신 허베이 성[河北省] 중국공산당의 부서기직을 선택했다.
1985년까지 그곳에서 일을 한 시진핑은 푸젠 성[福建省]의 항구 도시 샤먼[廈門]의 당위원회의 위원이자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시진핑은 푸젠 성에 사는 동안 유명 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과 1987년에 결혼했다. 일을 계속하며 승승장구한 시진핑은 1995년에 지역 당부서기 직에 올랐다. 1999년에는 푸젠 성의 대리 지사가 되었고 다음 해 지사가 되었다.
푸젠 성의 수장으로서 시진핑이 관심을 가진 것은 환경 보존과 더불어 인근 타이완[臺灣]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부서기장과 지사 직을 2002년까지 지속하다 다시 한 번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 그 해 시진핑은 저장 성[浙江 省]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지사 대리를 지내다 2003년부터 당서기가 되었다.
저장 성에 있는 동안 환경 친화적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시진핑은 지역산업기반시설 재건에 집중했다.
시진핑의 행운은 , 상하이[上海]의 고위직을 둘러싼 추문으로 인해 시진핑이 상하이의 당서 기직을 이어받게 되었던 2007년 초에 또 다른 힘을 발휘했다.
그 직책을 맡았던 전임자는 광범위한 연금 제도 때문에 오점을 남긴 사람 가운데 1명이었다.
개혁 성향을 지녔던 아버지와 달리 시진핑은 신중함과 당의 정책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상하이의 당서기로서 도시의 재정적 안정과 재건을 정확히 홍보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을 대표하는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1명으로 선출됨으로써 짧은 기간 동안만 상하이의 당서기에 머물렀다.
이후 시진핑은 후진타오[胡錦濤] 대통령의 후임자가 되었다. 시진핑의 지위는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부주석이 된 시진핑은 환경 보존 노력과 국제 관계 신장에 힘을 쏟았다. 2010년 10월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최종 승계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강화했다. 시진핑은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함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넘겨 받아 당과 군을 동시에 장악하면서 임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내년 3월에는 의회격인 전인대에서 국가주석 자리도 물려받아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가 됩니다. 시진핑 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5세대 지도부가 공식 출범함으로써 중국 권력층의 세대교체가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시진핑 체제 앞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합니다.개혁 개방 이후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빈부격차가 커진 만큼 어떻게 민생문제를 해결할지가 핵심과제입니다.
정치개혁도 이뤄내야 하고 고질적인 부정부패도 척결해야 합니다. [(당 간부들의) 부패와 독직·형식주의·관료주의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중국의 새 지도부는 오늘(16일) 첫 전체회의를 열어 과제 해결 방안과 주요 업무 등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시진핑 시대 10년의 경제 전망은. ▲과거 10년 동안 평균 10%씩 성장했으나 올해는 부정적 요인이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성장률이 지금보다 하락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7% 대 성장률은 상당 기간 유지할 것이다.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 업무보고에서 2020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을 2010년의 2배로, 1인당 평균 국민소득도 2배로 끌어올린다는 목표가 제시됐다.
이를 위해서는 7%대 성장은 필수다. 향후 10년 동안 정책 중심이 내수확대로 바뀌겠지만 대규모 투자는 감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인플레이션의 부작용을 심각하게 경험한 만큼 2009년 4조위안(약 700조원)대 대규모 재정투자 같은 정책은 없을 것이다.
소비확대가 주요 과제가 되고 있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소득 분배제도 개혁이나 민간자본의 국유부문 진입이 생각만큼 빠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순위에 둘 정책들은. ▲과거 지도부는 투자와 수출을 양대 축으로 하는 성장 중심정책을 폈고 정치개혁 문제는 후순위였다.
새 지도부도 과거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고속성장을 중시할 것이다. 국내외 여건을 볼 때 낮지 않은 수준을 말한다.
물론 소득분배 개혁이나 경제발전 구조 업그레이드도 중요한 과제이겠지만 무게 중심은 여전히 고속성장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소득분배 개혁은 현존하는 이익집단의 이익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다소 신중할 것이다. 한 매체가 당대회 동안 네티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는 부정부패 척결과 소득분배 개선 문제가 2대 과제로 꼽혔다.
부패 문제도 걸림돌이 적지 않다. 짧은 시간에 해결되지 않고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정부측 투자가 안정적 성장을 견인하는 데 여전히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후베이, 광둥 등 각 지방정부별로 성장을 이끌 수 있는 재정정책을 내놓을 것이며 이 같은 추세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미 1조위안 규모를 넘었다.
대규모 투자에는 과거와 달리 민간자본을 활용하는 정책도 시행될 것이다. 철도부문 투자 등에서 국유자본 부족 문제를 민간자본으로 풀어갈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감세를 통해 민영부문을 활성화하는 조치도 아직은 구체적이지 않지만 중장기적으로 비전을 갖고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소비확대, 분배, 취업 등 현안을 어떻게 풀어갈 것으로 보나. ▲실업률은 몇 년째 4% 선에서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실업률은 향후의 성장문제와는 연관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새 지도부가 새로운 성장엔진을 만들 것이고 일자리는 그 방향에 따라 계속 창출될 것이다. 소비 확대정책도 새로운 추진 수단을 만들 것이다. 이제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향상에 분명한 무게를 둘 것이다.
소비를 성장의 중심 축으로 가져가려는 만큼 이들 현안이 향후 성장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전망이다. ―대외교역, 자원확보 등 대외관계는. ▲지난 9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사태 이전에는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중·일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 중국은 한국과의 FTA 쪽으로 더 치우칠 전망이다.
새 지도부는 미국, 유럽의 시장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 등으로 대외관계에서 많은 변화에 부닥칠 것이다. 결국 아시아권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중국은 현재의 성장속도에서도 자원 압력이 상당하다.
국유기업의 해외진출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해외 매체들은 향후 10년 이내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하는데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한·중, 북·중 관계는.
▲한·중 관계는 단순하다. 주로 경제적 관계가 중심이고 비경제적 요소는 별로 영향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 투자는 갈수록 상호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양국 모두 지도자가 바뀐다고 해서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중·일 관계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아 일본 제품 기피풍조가 상당하다.
일본 기업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투자처를 옮기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제품이 중국에 진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후진타오-원자바오 시대는 북·중 관계가 순탄했다고 보기 어렵다. 김정은을 비롯한 새 지도부가 탄생했는데도 고위층 방문이 없었다.
중국 기업의 대북투자 등 북·중 경제협력은 현재 초보적 수준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체제적 동질감 속에서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후진타오가 당·군 권력 처음으로 동시 이양 “군사위 주석 퇴임시기 예외 안돼” 당 지도부 회의서 합의 이뤄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11월 15일 시진핑에게 당과 군의 권력을 한꺼번에 물려준 것은 20여년 전 덩샤오핑에 의해 지금의 권력이양 체제가 확립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후 주석이 고심 끝에 선택한 승부수이자, 장쩌민과 시진핑의 행보에도 영향을 미칠 중요한 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후 주석이 ‘퇴임 뒤에도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할 것인가’는 이번 중국 권력교체의 최대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였다.
장쩌민이 ‘태상왕’으로 군림해온 상황에서, 후진타오도 2년 동안 더 군사위 주석을 유지한 채 시진핑 체제의 주요 군사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파벌 세력을 지원할 것이라는 관측이 계속돼왔다.
이와 관련해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도 계속 흘러나왔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완전한 은퇴를 선택함으로써 전임 지도자들의 나쁜 관례를 깼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종신 권력이었던 마오쩌둥 시기는 물론, 1989년 이후 덩샤오핑이 권력이양 체제를 만든 뒤에도 최고 지도자는 군 권력을 쉽게 놓지 않았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격언은 중국 정치의 불문율이었다.
덩샤오핑도 당·정의 타이틀을 넘겨준 뒤 2년 동안 군권을 유지했다. 혁명원로이자 군지도자였던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죽기 전까지 군대 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2002~2003년 후진타오에게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을 물려준 장쩌민도 중앙군사위 주석 승계는 2년 동안 미뤘다.
후 주석은 우선 장쩌민 등 원로들을 겨냥해 더이상 정치간섭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최근 당 지도부 내부 회의에서 후진타오가 “퇴임 뒤에는 절대로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야 하며, 군사위 주석을 포함해 어떤 자리도 퇴임 시기를 연장하는 예외를 인정하면 안 된다”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고, 지도부에서 이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완전한 퇴임을 통해 장기 ‘수렴청정’중인 장쩌민의 당내 영향력을 줄이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시진핑에게도 완전한 은퇴라는 새로운 규범을 남긴 셈이다.
후진타오는 이를 통해 과도한 정치간섭 관행을 끊은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정치적 유산을 남기게 됐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시진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는 해석도 있다.
시진핑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시진핑도 후진타오에게 그만큼 ‘정치적 빚’을 진 셈이다.
후진타오는 군과 정치권의 인맥을 통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 최근 단행된 군부 인사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인민해방군 4총부(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총장비부) 사령관에 후진타오와 가까운 인사들이 대거 포진했다.
중국 정치권 내부소식통들은 후 주석이 최근 군부 내 측근들을 핵심 보직에 승진시킨 만큼 이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중앙군사위를 떠날 수 있다고 전했다.
후 주석의 퇴임 뒤 서열도 중요한 변수다. 전임자인 장쩌민 전 주석은 퇴임 뒤에도 당·국가 행사에서 항상 후 주석에 이어 입장해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당 서열 2위 자리를 차지해왔다. 전문가들은 후 주석의 퇴임 뒤 서열이 장쩌민보다 앞서기는 어렵다고 본다. 시진핑과 장쩌민에 이은 서열 3위로서, 시진핑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후 주석이 시진핑과 장쩌민, 그리고 나머지 정치국 상무위원들에 이어 9번째 서열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 경우에도 후 주석이 완전히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은 아니며, 원로로서 중요한 자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 3월 전인대에서 후 주석이 국가주석직을 마지막으로 시진핑에게 물려주고 퇴임하기 전까지 4, 5세대 지도부가 ‘동거’하면서 인계인수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노래
01 첨밀밀 02 월량대표아적심 03 나에게넌 너에게난 04 소호강호 05 남아당자강
06 아래향 07 양호접몽 08 몽증인 09 돌아와요 부산항에 10 띵뚱
11 순정 12 스잔나 13 내남자 친구에게 14 티벳고원 15 알고싶어
16 내사랑 내곁에 17 화장을 고치고 18 성원
등려군 : 출생: 1953.01.29 ~ 사망: 1995.05.08 대표곡으로 물론 첨밀밀도 좋은 노래입니다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등려군의
등려군 때문에 중국어 공부를 다시했지요. 발음은 여전히 초급 등려군( 중국이름 등러쥔, 영어식 이름 테레사 등)은 중국의
한창 때의 등려군, 등려군은 일본 활동 이후 미국으로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 모두 중국 출신으로 홍콩으로
한마디로 대륙 사람은 홍콩에서 촌놈 취급을 결국 완전히 쪽박찼지요. 영화 첨밀밀은 등려군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