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8경'의 하나로 경치가 빼여났던 한강 동호이었다.
동호는 두뭇개 앞을 흐르며 참으로 절경을 연출하여 시인묵객이 줄을 이었다.
지금의 한강은 저렇게 숨막히게 아파트군에 둘려쌓여 있다.
‘두뭇개’.
옥수동의 옛 이름이다. 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한강 물줄기와 북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한천(중랑천 냇물)의 두 물줄기가
이곳에서 합쳐진다고 하여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이다. 이를 한자식 음사(音寫)로는 두모포(豆毛浦)다.
일제 초기까지만 해도 두모동, 두모리 등으로 불려 왔던 두뭇개가 지금의 옥수동이란 이름으로 된 것은
1936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옥수정(町)이라 한 것을 광복 이후 우리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 마을 339번지에는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었기에 ‘옥정숫 골’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이 고장 앞을 흐르고 있는 강은 동호(東湖)라 하여 ‘한강 8경’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경치가 빼여났다.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정자를 짓고 자연을 노래하고 화폭에 담았다.
두뭇개 맞은편에는 세조의 측근 실세 한명희의 별장 압구정이 있었다.
압구정은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우고 한껏 권세를 누렸던 당대의 풍운아 한명회가
관직이 삭탁된 뒤 노년을 보내다 죽음을 맞이했던 정자다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일으킨 겸제 정선의 그림 압구정이 당시 두뭇개의 절경을 실감케 하고 있다.
이 두뭇개 일대는 조선시대 때에는 권세가들이 앞 다투어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였다.
강변 경관이 아름다운 것으로는 소문이 나서 유하정(流霞亭), 황화정(皇華亭) 등 궁실은 물론 김안로의
보안당(保安堂) 정유길의 몽뢰정 (夢賚亭) 조선조 말 조대비가 태어난 쌍호정(雙虎亭) 등 개인 별장도 많았던 고장이다.
순조 8년(1808) 12월에 태어난 조대비(문조비로 추존)의 생가 쌍호정이다.
쌍호정은 현재 옥수동 291번지에 있었다. 옥정초등학교 뒤편인 295번지에는 풍운부원군 조만영의 집이 있었다.
(1960년대까지는 집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사람들도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개발사업으로 인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국철과 지하철 3호선 옥수역 5번 출구로 나와 옥정초등학교를 왼쪽에 둔 채로 걸어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카페 토프레소, 오른쪽으로는 세븐일레븐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 ‘옥수 삼성유치원’이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서 뒤쪽 출구로 나가면 옥수동 삼성아파트가 나온다. 그 왼쪽 화단에 위에 표시석이 있다.
조대비의 생가 옛 모습이다.
순조 8년(1808년) 12월 6일 조대비가 이 곳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하던 날 밤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정자 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쌍호정이라 하였다. 조대비 생가 동쪽에 울창한 노송들이 있었고 그 옆에 있었던 조그마한
정자가 쌍호정이다.
조대비는 익종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2세 때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년 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에 추존되자 왕대비에 봉해졌다.
이 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세도를 이루게 된다.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 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못마땅해하던 흥선군 이하응,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 2월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 고 있었다.
그 후 조대비가 대거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것을 슬 퍼하였으며 나라가 재난에 시달리자 자신이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 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 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 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