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은 뜻글자로 이루어진 철학서
한글전용정책이 실시되어 공식적으로 한자가 쓰이지 않거나, 신문지상에서 한자가 사라지거나,
학교에서 한문교과목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별도로 한문교육을 시켜왔다.
한문교육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교재가 천자문(千字文)이다. 조선시대의 서당에서건
현대사회의 학원이든 아니면 독학을 하든 천자문을 교재로 한문공부를 하는 것은 불문율이다시피 했다. 요즘도 훈과 음을 표기한 아이들 교육용 천자문 코팅지가 집집마다 벽에 붙여 있을 정도이다. 만화로 풀어쓴 마법 천자문’은 베스트셀러이다.
하지만 천자문은 초학자가 접하기에 결코 쉬운 글이 아니다. 각기 다른 글자 1천자를 모아서 4자씩 한 짝(句)으로 250구절로 이루어져 있는 천자문의 출처가 주역을 비롯한 여러 경전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는 앞 짝과 뒤 짝의 8글자 단위로 천문과 지리, 역사, 철학, 문학, 생활문화,
정치 등 모든 분야를 두루 망라하고 있다. 문제는『천자문』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수백년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천자문이 오히려 한문교육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천자문』은 동양의 文 ․ 史 ․ 哲을 담은 인문종합교양서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초교재가 아니다.
둘째, 조선시대의 선비들이나 지금 출간되어 있는 천자문 해설서 저자들이『천자문』의 인문종합교양서로서의 의미와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셋째,『천자문』에 주역을 비롯해 각종 경전(經傳)내용이 실린 것을 아는 학자들이라도 『천자문』을 ‘어린 아이들이 배우는 단순한 글’이라며 무시해왔다는 점이다.
넷째, 천개의 한자에 대해 무조건 훈과 음을 외우기만 하면 마치 『천자문』공부를 다 했다는 잘못된 인식이다.
그러다보니 서당훈장은 변변한 교본 하나 없이 자신의 지식 범위 내에서 천자문을 가르쳤고,
학동들은 뜻도 모른 채 밤낮 무조건 외우기만 해야 했다. 학동들은 급기야 “하늘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 박박 긁어서 선생님은 말구유, 나는 밥사발, 선생님은 똥가래, 나는 숟가락…”하면서 훈장을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인문종합교양서로서 철학책이나 다름없는 천자문을 무조건 암기하라는 명령에 대한 반발이다. 외우기만 하는 천자문 교육방식은 수백년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어느 나라든 철학책을 이치나 원리도 가르치지 않은 채 무조건 외우게 하지 않는다. 천자문의 첫
글자인 天에 대해 ‘하늘 천’이라는 훈(訓)과 음(音)만을 외우고 4자성어인 天地玄黃의 뜻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천자문 공부를 다한 것으로 안다면 이는 큰 착각이요 무지의 소치다. 조선시대 최고
학자중의 한분인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선생이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겪었던
이야기(例話)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기대승선생이 다섯 살에 천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천자 맨 첫줄 천지현황(天地玄黃)을 가지고
일곱 살까지 삼년을 배웠으되 모른다는 것이다. 화가 난 서당선생은 소를 끌어다 기대승 앞에
세워놓고 고삐를 잡고 위로 쳐들며 ‘하늘 천’하고, 아래로 숙이며 ‘따 지’ 하기를 몇 번 한 뒤에
고삐에서 손을 떼고 나서, ‘하늘 천’ 하니까 소가 머리를 위로 올리고 ‘따 지’ 하니까 머리를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훈장선생이 기대승에게 말하기를 “이것 보아라! 소 같은 짐승도 몇 번 가르치지 않아서 ‘하늘 천’
하면 머리를 하늘로 올리고 ‘따 지’하면 머리를 땅으로 내리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사람이면서
천지현황을 삼년을 가르쳤는데도 모르고 있으니 소만도 못하구나” 하고 꾸짖었단다. 그러자
기대승은 “천지현황을 삼년독(天地玄黃, 三年讀)하니 언재호야(焉哉乎也)를 하시독(何時讀)”고
하며 글을 읊었다고 한다.
천자의 첫 글귀가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네 글자이고 맨 끝줄이 ‘익기
언(焉), 익기 재(哉), 온 호(乎), 익기 야(也)’이다. 즉 천자의 첫 번째 줄 ‘천지현황’을 삼년 읽었으니 맨 끝의 ‘언재호야(焉哉乎也)를 어느 때나 읽을고’라는 뜻이다. 기대승은 이미 천자를 다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글방 선생은 기대승이 글 읊는 소리를 듣고 “아, 너는 벌써 천자를 다 읽고 있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소만도 못하다고 하였구나” 하며 미안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 기대승이 천자를 다 읽고 있으면서 천지현황에 대하여 3년 동안이나 그토록 모른다고 했을까? 어린 나이에 천자문을 배우면서 첫 번째 천지현황에 대하여 그 뜻을 알고자 했던 것이다.
이 천지현황은 비록 네 글자이지만 글을 많이 배운 어른도 알기 어렵다. 무조건 외우는데 그치지
않고 깊은 이치를 알려고 했던 어린 기대승은 역시 신동이었던 것이다.
천자문이 왜 철학책인지 첫 글자인 天의 예를 들어보자.
天은 부수(部首)인 ‘大’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一 + 大 로 이루어진 天은 하늘이 둘이 아닌 하나이며, 세상에서 제일 ‘크다’라는 퓜缺甄?
그리고 天의 ‘大’위에 있는 ‘ㅡ’은 주역의 양(陽 : −)을 의미한다. 天에 그 어렵다고 하는 주역의
원리인 양(陽 : −)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태초의 혼돈상황을 태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태극속의 음양 정기에 의해 천지(天地)가 창조되었다고 본다. 가볍고 맑은 양기운(ㅡ)은 위로 올라가 뭉쳐 하늘(天)이 되고, 무겁고 흐린 음기운(--)이 아래로 엉겨서 땅(地)을 이루었다고 본다. 이를 토대로 ‘一’에는 ' 유일(唯一)하다, 전체(하나), 덮다, 끝없이 이어진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덮을 부(覆)’가 있는 천부(天覆 : 하늘이 덮다)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天’이라는 글자 자체에 ‘덮다’라는 의미가 이미 들어 있다.
* 天의 大는 因(인:비롯하다,기인하다)이라는 글자의 口속의 大와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는
동양철학의 핵심사상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 담겨 있다. 因이라는 글자에 나오는
大가 바로 천지인 삼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는 ‘大’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因이라는 글자의 뜻이 ‘비롯하다,
기인하다’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을 뜻하는 천지인(天地人)을 표상하는 ‘大’를 ‘ㅡ’이 덮고 있는
형상을 글자로 나타낸 것이 바로 ‘天’이라는 글자인 것이다.
* 아울러 天은 하늘의 해(日)와 달(月)이 오고 가며 하루를 이루고, 하루하루가 쌓여 한 달을 낳고, 12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해를 거듭하면서 세월이 되는 시간의 이치를 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하는 선천과 중천, 후천이라는 단어에 天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 이유이다.
* 하늘(天)은 하나의 글자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상대가 되는 음기운인 땅(地)이 있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주역에서 음양의 변화 이치에 의해 세상의 삼라만상이 작동한다고 했다. 음양(天地)이 교역(交易)하는 현상을 밝히고 있는 철학이 바로 『주역』이다.
* 이렇듯 하늘 天이라는 한자는 단순한 한 개의 글자가 아니다. 뜻글자로서 형이상의 철학적 내용이 담긴 글자이다. 이 天이라는 글자의 출처가 주역이기 때문에 주역에 대한 이해가 없이
천자문을 공부하게 되면 곧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我自我書自書)’라는 말처럼 공부가 겉돌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늘 天이라는 글자 한 자 외웠다고 해서 천자문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무지로 인해 사서삼경과 관련된 해설서와는 달리 『천자문』관련 책은 훈과 음,
토를 단 책이 고작이거나, 붓글씨 연습용으로 발간된 해서(楷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 ․
전서(篆書) 교본용 책이 전부인 것이 그동안의 실정이다. ‘한석봉 천자문’은 대표적인 붓글씨용
내지는 암기용 교재이다.
근래 들어 전통문화와 동양철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중국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어린이와 일반인들을 겨냥한 『천자문』 해설서 및 만화들이 출간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저자들이 뜻글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 없이 자의적으로 천자문을 해석하다보니, 글자가 담고
있는 본래 뜻과는 거리가 먼 해설들이 난무하면서 왜곡까지 일삼고 있다. 심지어 공부깨나
했다는 강단의 학자들마저도 그렇다.앞서 ‘天’이라는 글자에서 살펴보았듯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쓰이고 있는 뜻글자인 한문의 경우, 표음문자인 단어 외우듯이 음과 훈을 무조건 외운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뜻글자는 왜, 어떻게 그런 글자가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글자가 만들어질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아하, 그렇구나!’ 하며 『천자문』을 이해하고 동시에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다.
'子'라는 글자를 예로 들어 보자.
훈과 음은 '아들 자'이다. 왜 ‘아들 자’라고 할까? 子라는 글자를 나누어보면 '마칠 료(了)'에
'한 일(一)'을 더한 글자이다. 자식이라는 것은 부모가 자신의 일생을 마치면 다시 이어 나갈
하나의 생명체란 뜻이다. '子'라는 글자가 아들만이 아니라 딸까지를 포함한 자식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씨 자, 열매 자’(오미자, 결명자…)로, ‘선생 자’(공자, 맹자…)로,
‘자식같이 사랑할 자’(子庶民 :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다)로 그 쓰임이 매우 넓다.
‘子’는 한문문화권에서 수천년간 사용되어온 60 간지(干支)의 12 地支중 첫 번째 글자로서 음력
달력의 11월(子月)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간상으로 子時(자시)는 하늘의 문이 열리는(天開於子)
때로 밤11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를 가리킨다.
이외에도 ‘箱子(상자)’란 단어에선 접미사로 쓰이고, ‘그대’라는 뜻으로도 쓰이며, 나이 많은
선생이 나이 어린 제후를 지칭할 때 ‘子’라고 하며, ‘英子’ ‘順子’처럼 사람 이름에도 쓰인다.
‘子’라는 글자가 보기엔 단순하고 쉬운 글자이지만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앞서 天에서도 보았듯이 한문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철학적인 내용이 담긴 뜻글자인 것이다.
첫댓글 천자문의 첫 글자인 天에 대해 " 하늘 천"이라는 訓(훈)과 音(음)만을 외우고 4자성어인 天地玄黃의 뜻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천자문 공부를 다 한 것으로 안다면 이는 큰 착각이요 무지의 소치다天地玄黃 三年讀 焉哉乎也 何時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