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학 시나리오 선집에 부쳐
글의 달인, 만능 글 꾼이 직조한 상상력 모음집
시나리오 작가이자 방송 작가인 지상학은 충북 충주출생으로 1969년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서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그림으로 일생의 승부를 걸 수 없었던 시절의 그는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처럼 영화와 문학에서 자신의 출구와 희망, 위안과 도피처로 삼았다.
문학의 여러 갈래 중, 유독 시나리오에 귀착한 그는 아마 배우나 감독으로서의 꿈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강한 자신감에서 출발한 습작에 이은 창작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직업이 되었고, 이제 그는 마이스터의 경지의 올라와 있다.
고생을 자처하며 언제나 이타행의 삶을 견지하고 있는 그는 한국시나리오 작가협회 이사장이다. 사람 좋기로 평판이 나있는 지 작가는 이지적 외양과는 달리 소탈한 화술, 영화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 서민적 취향으로 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유현목, 정진우, 김호선, 이두용, 이석기, 박철수, 신승수 ,송경식 등의 감독들이 지상학의 작품을 제작하고 연출했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 시대를 넘나드는 탁월한 그의 솜씨는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광화문>이 당선되고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70년 후반부터 지 작가와 교류를 해온 나로서는 충무로 도제수업의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내공을 겸비하고 있음에도 늘 겸손하며 자신을 낮추는 선비의 자세에서 인품이 돋보인다. 지금까지 그의 상상력은 한국의 영화계, 방송계를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신문 등 여러 매체에서 시나리오 및 영화소재 공모 등에 수차례 당선 및 입선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는 필력을 지니고 있다.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시나리오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한국 예술 발전상 등을 수상하는 등 작가의 위상은 확고하다.
이번 지상학의 시나리오 선집에는 의미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있다. 1.자녀목 2. 학생부군신위 3. 헬로 임꺽정 4. 엑스트라 5. 사방지 6. 소리꾼 (미발표작) 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의 정형을 답습하는 작품들이 아니라 작은 울림을 준 작품들이다.
그의 또 다른 영화 작품들인 <죽음보다 깊은 잠>,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 <우산속의 세 여자>, <칠수와 만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산부인과> 등 50여 편과 공중파 3사의 현란한 방송 대본으로 시대를 풍미해온 분이다.
검열과 제작자들의 요구를 피할 수 없었던 시절의 지상학은 자신이 고집하는 영화만을 만창작할 수 없었다. 임권택 감독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주변 환경을 쉽게 가늠할 수 있지 않은가? 장르와 소재에 관계없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창작 지론일 수도 있다.
울적할 때, 시대의 암울에 갇힐 때면 그는 즐겨 자연을 벗하며 갑사 칩거 같은 거사를 치르곤 했다. 이 당시 우연히 만나곤 했던 라이온스 호텔 앞 황실다방 앞에서 창작의 도구들을 머릿속에 챙기면서 서성이던 불안한 영혼의 모습이 어제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예술성 높은 레제 시나리오가 아닌 응용시나리오를 많이 써 왔던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들추어내서 나신을 보여주듯, 시대가 요구하고 통용되었던 육필을 가리방이 아닌 책을 통해 30여년에 걸친 기록을 남기는 작업은 절대적인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창의력을 무기로 은근과 끈기,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시나리오 텃밭을 일구던 그가 부농으로 가고 있는 길목에서 펴내는 지침서 ‘지상학 시나리오 선집’은 선배의 경험을 바탕으로 늘 푸른 감각으로 창작하고 자신을 비우라는 화엄경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지상학의 시나리오 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자녀목 (恣女木)
정진우 감독의 <자녀목, 1984>은 7년간에 걸친 지상학의 공주 갑사 칩거의 결과물로서 오리지널 시나리오 이다. 소재의 참신성과 원미경, 박정자, 전무송, 김희라로 짜여진 탄탄한 연기력으로 1984년도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등을 수상한 작품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하고 이 작품을 살펴보면 씨받이, 씨내리 이야기는 인권과 관계되는 민감한 사안이었음에 틀림없다. 시나리오 <자녀목>은 작가로서는 충분히 수집되었던 소재였고, 임충 각본의 <물레야 물레야>, 송길한 각본의 <씨받이> 등을 낳는 결과를 낳았다. 작가에게 사극의 묘미를 안겨준 이 작품은 이성춘 촬영과 한상기 음악으로 당시의 낭만과 분위기를 일을 수 있고, 제 4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영화로서는 최초로 특별상 수상작이 되었고, 제1회 동경국제영화제에서 세계 영화베스트 30에 뽑히기도 하였다.
●학생부군신위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 1996>는 제34회 대종상 각본상 (김상수와 공동수상) 수상작이다. 장례식 문화에 대한 김상수의 초고를 시놉시스 부터 정리, 선배 작가 문상훈의 조력으로 집필을 완성한 대본이다.
블랙 코미디 형식의 이 작품은 지상학 특유의 익살이 가득 담긴 장례 풍경을 담고 있다. 이후 우리영화에서 죽음과 장례에 관한 진지한 성찰 혹은 가볍게 보기가 본격 이루어 졌다. 방은진, 권성덕, 송옥숙의 연기력과 고인이 된 문정숙, 김일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영화 이타미 주조의 <장례식, 1984>이 있었지만 장례 풍습은 이청준 원작, 임권택 감독의 <축제>로 이어지고 우리 풍경에 담긴 장례식이 탄생되었다. <학생부군신위>는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감독상, 특별상과 해외영화제 수상도 이어졌다.
●헬로 임꺽정
박철수 감독의 <헬로 임꺽정, 1987>은 방송용 시츄에이션 사극 <암행어사>중 <거룩한 산중군자, 1983>를 ‘황기성 사단’에서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2년에 KBS TV 금요사극 24부작 시츄에이션 드라마 <비가비>로 부활, 방영되었다.
사극 임꺽정의 엄숙함을 우회하여 코미디의 한 방편인 신분 변환의 묘미를 보여준 지상학의 해학이 뭉실 풍기는 영화이다. 억압속의 민초에서 산적으로 변한 춘보와 봉달의 우직한 단순함과 아직도 남아있는 정의감의 실현이 탈 신분 욕망을 갖고 있는 민중을 대변한다.
주막에서 암행어사의 옷을 훔쳐 입고 벌어지는 좌충우돌 코미디는 정의 실현과 법치국가의 현실의 참담함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진짜 암행어사의 밀사에게 붙잡힌 주인공들이 임꺽정에 의해 구출된다는 구성은 재치가 있다.
코미디이면서도 교훈적 메시지를 듬뿍 담고 있는 이 익살활극은 갇힌 현실에서 시나리오가 가야하는 방향을 제시해준 작품이다.
●엑스트라
신승수 감독의 <엑스트라, 1998>는 임창정, 윤문식등의 연기자 이름만 들어도 상황이 짐작되는 작품이다. 신승수와 지상학의 만남은 유쾌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장점은 관객, 출연진, 감독 모두가 즐기면서 자기 작업에 임하도록 한 점이다. 지상학 시나리오는 대사 패러디, 장면 모방, 상황설정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등장인물들과 동일시하게끔 만든다.
이 작품은 지상학 시나리오의 테크닉이 능수능란한 궤도에 도달했음을 인지하게 해준다. 인물배치, 감칠 맛 나는 대사, 구성의 거친 틀 속에서도 여성적 유연함과 정을 스며들어있다. 목적에 부합되는 흥행작들의 장점을 충분히 연구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한 작품이다.
●사방지 (舍方知)
송경식 감독의 <사방지, 1988>는 안태근과 공동각본으로 구성된 각본이다. 이혜영, 방희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드문 성의 양성(兩性)을 들추어낸 작품이다. 시대를 감안하면 실로 파격적 작품이다. 지 작가는 아이디어를 영화로 엮는데 귀재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야사는 지 작가에게 늘 작품의 소재가 된다. 자신이 탐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늘 좋아하는 편이다. 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작품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그에게 쫒기는 시간에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은 구역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사방지는 양성소지 인간이지만 실제로는 남성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가미되었으면 심리학적 명제들이 촘촘히 박힌 더 재미있고 풍부한 내용이 담긴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소리꾼 <미발표작>
1985년도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에서 입선된 작품을 개작한 것으로, 영화화 될 뻔 했다가 무산되어 그 아쉬움으로 작품선집에 싣게 된 작품이다. 작가가 설정한 대로 모든 창작품이 영화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1986년에 TV문학관으로 제작되었는데 TV에 방영되지 않았다. 1984년 MBC-TV 암행어사 중 <바람 아니면 구름> 편을 모티브로 해서 새롭게 쓴 시나리오이다. 주인공 만석이 원수 덕구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함께 도망친 아내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이다.
모든 농수산물이 상품화되고 판매되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도 그러한 운명이다. 시기가 맞아야하고 수요자가 있어야한다. 풍향계는 매일 같은 바람을 맞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입맛이 늘 같을 수는 없다. 쓴 느낌은 버리고, 새로운 조류를 타고 항해를 해야 한다.
이상으로 우리 한국 시나리오계의 영원한 이야기꾼 지상학의 시나리오 몇 편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나리오 선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야기 틀을 만들어 가는 지상학의 무한한 잠재력과 능력을 점검하는 소중한 나침반이 되고 있음을 입증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