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高麗葬)을 아시나요?
늙으신 부모님을 몰래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설로,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우리민족을 비하하기 위해서 고려장이라는 표현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록이야 어쨌던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孝)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생매장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렸을때 고래장터라는 얘기를 많이 했었다. 우리도 늙으면 고래장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과함께...
특히, 신촌리 친구집에 놀려가면 사랑방에 깨어진 토기 한두점은 다들 가지고 있었고,
또한 도굴꾼들이 금가락지를 캤다는 둥 그런 얘기들이 많이 돌았다.
당시 소나무는 그리 크지를 않았으며, 학교뒷산에는 온통 고분군이었다.
상미국민학교에서 탑꼬라고 부르는 고개를 넘어도 되고, 대곡마을에서 옹시(옛날말)를 거쳐 고개를 넘어가면 된다.
대부분 황토산인 걸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소나무들이 많이 자랐으리라.
학교때 멀리 송계 다리가 놓아졌을때 쑥골(웅곡)-천곡-심지를 거쳐 송계까지 소풍도 갔었던 추억도 있다.
쑥골은 숲골이라 불렀던 지명이 세월을 보내면서 숲골이 되었다가 쑥골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고개 구릉 언덕주위 사방으로 고분군이 즐비하게 분포되어 있고, 또한 탑꼬라는 고객이름이 었었던걸 보면
옛날 큰절이 있었고 탑이 서 있었으라라 생각된다.
어릴때부터 고래장터로 부르고 있지만, 경상대등의 현지답사 결과 온 산에 분포된 고분의 대부분이 심하게
도굴되었으며 드러난 유구와 흩어져 있는 유물파편을 보면, 5C 후반부터 6C로 원삼국과 가야유물 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주어다 놓은 상당 의 토기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리고장 어느 곳을 가보아도 고분이 온전히 보존돼 있는 곳이 한군데도 없으며, 지금도 전문도굴꾼이 돌아다니고 있다니
남아 있는 유적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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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역사로 미루어 볼때 우리가 살던곳은 역사는 깊은 곳인 것만은 사실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터전인 것만은 진실이다.
탑꼬..오랜만에 기억해낸 고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