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와 설국열차
여름철 잠 못 이루게 하는 열대야가 계속돼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열대야 기준은 낮 최고 기온이 30도 이상이고, 밤 동안에도 최저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수면 적정온도는 20도인데 25도 이상 온도가 올라가면 체내 온도조절 중추가 자극받아 흥분되어 뇌의 각성상태가 지속되고, 불면증, 극심한 피로감, 집중력 저하, 두통, 소화불량, 심신 무력감 등이 따르는 이른바 열대야 증후군을 겪게 된다. 장마가 끝난 데다 지금 정치·경제마저 불통으로 꽉 막혀 더위 체감온도는 더욱 높아지는 형편이다. 열대야를 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낮잠 자기 않기, 자기 전 찬물보다 미지근한 물로 목욕하기, 물에 적신 목욕 수건을 짜서 덮고 자는 이집트식 수면법 등.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무더운 여름 밤을 나기에는 납량특집과 같은 시원한 영화가 제격이다. 냉방이 잘 된 좌석에 앉아 시원한 콜라를 마시며 스릴 있는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열대야는 다 식어버린다. 지금 폭염경보의 열대야를 뚫고 폭주기관차 같이 달리는 시원한 영화가 한 편 있다. 개봉 7일 만에 400만이 보았다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다. 난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어릴 때 1년에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20리 길을 오간 것을 생각하면 지금 시원한 멀티플렉스에 앉아 팝콘과 콜라를 들고 보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장르는 스릴러물을 좋아하고, 대체로 흥행으로 검증된 영화 위주로 본다. 하지만 가급적 스포일러를 피하고 타블로 라사(백지) 상태로 관람석에 앉는다. 영화를 본 뒤에는 폰과 컴퓨터로 내가 느낀 것, 빠뜨린 것, 배우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검색하면서 그 의미를 채우고 확장시켜 나간다. 가장 평범하고 평균적인 관람객이다.
우선 난 「설국열차」가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영화라는 게 믿음이 갔다. 또한 배우 송강호의 티켓파워를 염두에 두면서 좌석에 앉았는데 나오라는 송강호는 나오지 않고 외국배우들이 나와 종횡무진 활약하는 할리우드 영화라 처음에는 매우 당황했었다. 영어 대사는 우리말로 자막이 달리고 우리말은 영어로 자막이 달리는 광경을 보면서 ‘아, 이제 영화마저 최후의 보루인 할리우드 진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진영의 원더걸스가 미국 빌보드 차트 진입을 위해 버스로 대륙투어 콘서트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을 싸이는 「강남스타일」 뮤비 하나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다. 그 동안 심형래는 두 번이나 할리우드에 가 영화를 만들면서 재산을 다 말아먹었고 이병헌은 온갖 괄시를 받으며 미국영화에 출연했지만 그다지 큰 명성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아예 할리우드의 유명배우들을 한국의 스크린에 끌어들여 벌써 166개국에 해외 판매를 완료했다. 「설국열차」를 보면서 영화계의 「강남스타일」을 보는 듯했다.
이제 한국영화·한류영화가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류현진의 투구가 메이저리그에도 통할까라고 가슴 졸이며 중계를 보듯, 이제 한국영화도 전에 심형래의 영화 「디워」가 할리우드에 통할까로 가슴을 졸이며 보던 그런 시대가 온 것 같다.
며칠 전 한국의 외교비사를 읽어보았다. 1960~70년대 달러가 부족했던 박정희 시대에는 UN에서 한국의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로비자금을 나라마다 겨우 1천 달러씩 주었다고 한다. 그때 북한은 아프리카에 스포츠센터를 지어주는 등 우리의 1천 배 수준인 100만 달러씩 뿌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세계 꼴찌수준의 대한민국이 지금은 인터넷·반도체·휴대전화·LCD모니터·MP3·조선기술 세계 1위, 가전기술은 세계 2위, 고속전철·로봇개발·외환보유고 세계 4위, 원자력·철강생산 기술 세계 5위, 자동차기술·군사력 세계 6위다.
전 세계에서 110번째 크기의 국토를 지닌 초라한 나라 한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폭주기관차 설국열차처럼 무섭게 달려와 GDP 10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설국열차는 전복되고 인류 문명은 지구온난화에 의해 멸망되는 것으로 끝났다. 잠 못 이루는 열대야에 극장으로 피서간 우리들에게 던지는 봉준호 감독의 영상 메시지는 무엇일까? 문명이 내뿜은 열기로 북극의 빙하가 반이나 녹고, 갑자기 너무 더워진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라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결국 마지막 남은 희망은 사람 둘과 곰(웅녀?) 한 마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