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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2016년 12월 25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히13:8,9]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영원한 예수의 구속
변하고 쇠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여호와는 변하지 않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지탱하게 해주는 기둥과도 같은 말씀이다.
오늘은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에 대해서 말씀한다. 히브리서 13장 8~9절이다. “변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은 없다. 고정불변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지만 “여호와는 변하지 않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다 변하지만 여호와는 변치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이 결국 이스라엘의 믿음을 지켜주는 대들보 같은 말씀이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가 영원한지, 않은지를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헬라인들 같으면 창조주라면, 절대자라면, 이치로 보아서 당연히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어떻게 사람이 영원한지를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영원한지 아닌지를 아냐는 것이다. 헬라인들 같으면 우리들도 그렇지만 창조주라면 절대자라면 이치로 봐서 당연히 그렇겠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절대자니까 창조자니까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생각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받은 은혜로 이것을 증거한 것이다. 전에도 은혜를 주셨으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사상이 아니고 자기들이 받은 은혜를 따라서 한 말이다. 그러니까 같은 말 같아도 전혀 다른 말이다. 전에도 은혜를 주셨으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창조자니까 절대자니까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런 말이 아니라 전에도 은혜를 베푸시고 오늘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은혜를 베풀실 분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존재를 알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생겼는가? 우리가 뭘 보면 물건을 볼 때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알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여호와는 형체가 없으시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어떤 모양도 만들지 말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떤 모양도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이런 모양이다, 저런 모양이라고 아무리 해도 하나님은 그런 모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자라든지 뭐라고 하든지 인간의 말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모양을 만들지 말아라. 어떤 것으로도 내 모양을 만들지 말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영원한지 아닌지를 알았겠냐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하나님이 하신 일만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영원하다.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기를 영원히 사랑한다.” 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이 나타나신 것은 존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행하심이 나타났다. 그분의 행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행하심이 영원하니까 존재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희랍인들과는 생각이 정반대다. 존재가 영원하니까 행함이 영원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유태인들은 그것이 아니고 그분의 행사를 보니까 영원하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그분의 행사만 말할 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역사(歷史)를 우연이냐 필연이냐, 재수냐 악수냐, 누가 강하냐 약하냐 하는 데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에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우연이냐 필연이냐 또는 재수가 있나 없나 또는 누가 강하나 약하냐는 이런 입장에서 보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은 약소국가이고 주변에는 강대국이 있어서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분명히 우리나라도 강대국 틈에 끼여있다. 지정학적으로 아주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대륙은 엄청나게 큰 중국이 있고 바다 앞으로는 일본이 있고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불안한 위치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가 일본에게 먹혔다. 일본에게 먹힌 이유가 사실은 우리가 약해서 그런 것이다. 힘이 없으니까 일본에게 먹혔다. 역사는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일본에게 먹혔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힘이 없어서 먹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같다. 일본이 침략정책이 어떻고 해서 우리가 먹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역사를 배우면 맨날 배워도 옛날 일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먹혔는지를 알아야 고칠 수가 있다. 우리가 힘이 부족해서 먹혔다고 알아야 힘을 기를 것인데 일본의 야심이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느 세월에 일본이 고쳐지겠나.
우리가 교회생활해보니까 그렇다. 자기의 어떤 불행이 다른 사람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항상 남 탓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서 변화가 되겠나. 가깝게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데 그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한테 맞춰지도록 바꿔지겠냐는 것이다. 내가 바꿔지는 것이 쉽다. 뭐 좀 문제가 되면 자기를 바꾸려고 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다. 하나만 바꾸면 되니까 그렇다. 그런데 주변을 바꾸려고 생각하면 이것은 대통령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연이냐 필연이냐, 강하냐 약하냐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냐 없냐 이렇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특이한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약해서 그렇다고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약해서 그렇다는 말이 없다. 분명히 약해서 침략당하고 그랬는데 약해서 그렇다는 말이 없고 “하나님을 잘못 섬겨서 그렇다. 여호와를 배반해서 그렇다.” 이렇게 그들은 역사를 해석한다. 특이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가 영원하니까 그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한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은혜를 경험하고 자기들을 보호해준 그 은혜를 경험하고 약속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을 보호해줬다는 그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그 은혜가 영원한 은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은혜를 주시는 여호와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이치로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힘의 논리로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은혜 베푸심이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는데 어떻게 영원하시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늘로 올라갔으니까 영원히 동일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알면 큰 도움이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구속을 보면 그것이 영원하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을 했을 때 이것은 철학적인 관념으로 한 말도 아니고 인간적이거나 종교적인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영원하니까 그분은 영원한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임을 당했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서(벧전3:18참) 우리 구속이 되셨고, 새 인류를 위한 구속자로서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이다.
육신으로는 이미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없다. 다시 부활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일단 죽임을 당했으니까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육신으로는 죽이심을 당하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벧전3:18참)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구속을 하신 분으로서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있다. 새인류를 위한 구속자로서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계신다.
그러니까 옛날에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또 그렇게 되고 있고 우리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오는 사람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히 계신분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육신으로는 죽임을 당해서 없는데 그렇게 말한다.
무덤에 가보니까 빈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체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났는데 40일 동안 제자들과 있다가 구름타고 가벼렸다고 한다. 결국은 없다는 말이다. 구름을 타고 갔으니까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다. 바울이 받은 때가 언제인가? 그런데 지금 나도, 우리도, 모두 다 꼭 같이 그 은혜의 구속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은 그분의 구속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이다.
바울이 받은 때가 언제인가? 벌써 이천년 전이다. 그런데 지금 나도 여러분도 꼭 같은 은혜를 받는다. 그분은 바울에게 살아있던 것과 꼭 같이 우리에게도 살아계신다. 그러니까 나와 그분과의 관계에서 그분은 영원한 분이고 항상 계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살아 계셔서 우리 구속함이 되신다. 천지가 변할지라도 이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이다(고전1:30보).
예수는 살아계신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구속함이 되신다. 천지가 변할지라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서 나왔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할 때 놀랐다. 그런데 그것도 변했다. 어느 날 가서는 그것이 없어졌다.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렸다. 그때 사람들은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십자가에 가니까 없어졌다. 다 없어졌다. 기대했던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히고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나 비기독교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물론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문자적으로 다 믿고 있다고 하지만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는 별말이 다 있다. ‘예수는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바울이 만든 종교다.’ 이런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그래서 앞으로 시대가 변하는 만큼 어떤 학설이 나오고 어떤 이론이 나올지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 그것을 방어하려고 온갖 교리나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 봤자 늘 변하는 시대에 늘 변하는 것 속에서 고정 불변하는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뛰어 내리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만은 확실한 것이다. 그것은 누가 죽어도 확실한 것이다. 그러니까 확실하다. 예수님이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꼭 예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 다른 예수라고 하더라도, 또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예외가 없다. 뛰어 내리지 못한 것은 예외가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 없이 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만이 마지막 보루다.
나는 그래서 예수를 절대로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것도 못 믿겠느냐고 물어 본다. 못 믿겠다고 못 한다. 자기도 그렇기 때문이다. 안 그렇겠는가? 여러분이 가서 전도를 해 보라.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가?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게 아니겠는가? 그러면 성경에 이렇다 저렇다고 성경으로 증명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다. 성경을 그 사람이 믿으면 증명이 되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증명되겠는가?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증명하면 되지만 성경을 안 믿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이야기 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예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이야기 한 것 같지만 사실은 내 이야기고 그 사람 이야기란 말이다. 그러니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탄은 이 사실을 역사의 한 편으로 돌리고 사랑과 은혜와 희생과 같은 그럴듯한 것들만 부각을 시켰고 또 다른 면으로는 기사와 이적을 재현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있다고 증거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제쳐버린 것이다.
이것을 사탄은 아주 묘하게 따돌렸다. 이 사실을 은폐시키고 따돌렸다. 그리고 사랑이니, 은혜니, 희생이니 이런 것들을 그럴듯하게 부각시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봉사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사랑과 은혜와 희생 같은 것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들이다. 자기는 못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다 환영한다. 다 좋아한다.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은혜를 싫어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으며, 희생과 봉사를 싫어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어딜가도 대 환영이다. 동사무소를 가도 환영하고 구청에 가도 환영하며 시청에 가도 다 환영한다. 그래서 천주교가 그런 것을 많이 하기 때문에 천주교는 동사무소, 구청, 시청, 중앙청이고 다 환영한다. 수녀들이 일을 하러 가면 다 잘해준다. 좋은 일을 한다고 말이다. 좋은 일을 하는 기관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좋은 일은 좋은 일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이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것과는 다른 것이란 말이다. 다 버리고 가 버린 것이 아닌가? 동사무소에서 환영하고 구청에서 환영하고 시청에서 환영하는 것이라면 왜 죽었겠는가? 다 버리고 간 것이다. 다 버리고 간 것이니까 완전히 다른 것이다. 좋기는 정말 좋은 일이다. 사랑과 은혜와 희생과 봉사는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십자가를 가려 버리면 십자가의 본질은 없어져 버린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딱 가려 버린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사와 이적을 약속한다. 그런 집회소에 가 본 분도 있고 그런 교회를 다녀 보신 분도 있을 것이다. 기사와 이적,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에 가장 쉬운 것이다.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 하노니 고침을 받아라.’ 해서 고침을 받아 버리면 누구든지 예수를 잘 믿을 게 아닌가? 금방 믿게 된다.
처음에 목회를 하러 갔는데 아쉬웠다. ‘이것만 있으면 사람들이 다 믿을 것 같은 데 왜 나는 이게 없는가?’ 이것만 있으면 누구든지 안 믿겠는가? 그것을 보고 안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잘못 쓸 가 봐서 그랬는지 하나님이 안 주셨다. 그래서 못 해보고 말았다. 감기도 한 번 못 고쳐 보고 말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것을 재현시킴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있다.’ 이렇게 말한다. 이런 데 가면 제일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예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칩니다.’ 이런다. 이렇게 증거한다. 그런데 이것도 참 좋은 일이다. 병원에서는 못 고칠 병이 부흥회를 가서 안수 받고 기도하고 나았다. 좋은 일이 아닌가? 죽는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다. 이런 혜택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들에 의해서 증거된 예수의 십자가의 효능은 사람이 그의 정신을 본받아서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교훈이고, 그 영은 현재적으로 이적을 행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것을 가려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서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은 사람이 ‘그의 정신을 받아서 좋은 사람 노릇을 해라.’ 이런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굳이 예수를 안 믿어도 된다. 공자님 말씀을 잘 들어도 되고 부처님 말씀을 잘 들어도 된다. 그런 말은 어디든지 많이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 파에서는 그 영이 현재적으로 살아서 이적을 행한다. 이적을 행함으로써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래서 ‘예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그런 지식이 되거나 아니면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능력이 되거나 그렇게 남았다. 예수라고 하면 그렇게 남았다. 두 면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여러 종교들에 널려 있고 특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 변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죽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어느 종교에도 다 있는 것이다. 종교치고 이런 것이 없는 종교는 없다. 그러니까 그것은 특별한 게 아니다. 다 일반적인 것이다. 나쁘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 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는 많이 고쳐졌는데 요즘에는 많이 안 고쳐진다. 옛날에는 큰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지금은 안 일어난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이런 데 선교를 하고 오신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곳에서는 이적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말도 못 알아듣고 그러니까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데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가면 변하게 된다.
구속은 인간 본래 위치를 되찾은 것이다. 이 위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손바닥을 보듯이 선명하게 사람이 무엇인가, 그 위치가 어디인가가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구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무슨 힘으로도 사람을 원위치로 돌릴 방법은 없다. 죽지 않고서는 옛 것이 끝나지도 않는다. 죽지 않고서는 새 것이 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사실만은 영원히 변치 아니한다. 구속이라는 것은 인간이 본래 위치를 찾는 게 아닌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가는 것인데 제 위치가 어딘 줄 알아야 찾는다. 길을 알아야 찾지 길을 모르는 데 어디를 가서 찾겠는가? 나는 누군가, 어디로 가는가? 이 이 뭐꼬? 아무리 해 봤자 모르는 데 어떻게 찾겠는가? 어느 사찰에 가면 큰 돌에다 ‘이 뭐꼬?’라고 써 놓았다. 이 뭐꼬? 돌이지 뭔가?
사람의 본래의 위치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다. 아주 확실하게 말이다. 이론이 아니다. 사람이 뭐냐, 인간이 뭐냐?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보면 안다. 명백하게 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사람의 모습이 그 모양이다. 보통 우리 같은 사람이 그러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적을 행하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행하신 분이 지금 그렇단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을 지라도 사람은 사람이다.’ 이 말이다. 하나님 같을 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 같이 되면 다른 것이 될 줄 알았는데 하나님 같아도 사람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명백한 일이 없다. 안 그런가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라. 이보다 더 확실한 일이 있는가?
예수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그 시대에서는 하나님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 같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단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진실인가? 하나님 같은 그것이 진실인가, 십자가에 죽어 있는 그것이 진실인가? 죽은 그것이 진실이다. 하나님 같은 것은 그분의 능력이든지 그런 것일 수 있다. 가짜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분의 능력이란 말이다. 그분 자신이 아니다. 존재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그분 존재 자체는 십자가에 못 박으니까 그냥 죽는 그 사람이다. 이것은 변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거짓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이적에 대해서 과학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믿지도 않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을 해서 최면술이라든지 하는 여러 가지 그런 것들이 있다. 이렇게 안 믿어도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단 말이다.
예수는 그런 것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왔던 유리겔라라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이적을 행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가 예수를 믿어서 그런 줄을 안 믿는다고 했다. 그랬으니까 그렇지 이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으면 둘 다 믿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적은 꼭 하나님만 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란 말이다. 그러니까 누가 행한다고 할 수가 없고, 또 무엇이 그렇게 한다고도 할 수가 없고 그렇다. 그러니까 애매하다. 그런데 이런 것으로는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예수를 따르다가 그만두었다. 예수님 같이 돼보려고 따르다가 그만 둔 것이다. 예수같이 돼보려고 그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같이 돼 보려고 그 말이 아니고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다가 그만 두었다. 또 한편에서는 예수 같은 그런 훌륭한 분이 되기 위해서 따르다가 그만 두었다. 다 그만 두었다. 십자가에 갔을 때는 다 그만 둬 버렸다. 손바닥을 보듯이 빤한 일, 사람이 무엇인가? 사람의 위치가 어디인가가 명백히 드러났는데 이것을 안 보려고 한다. 안보고 안 들으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부끄러우니까, 그것이 자기라고 하면 창피하니까 그래서 아니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돈이 없지만 돈이 없다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분명히 돈이 없다고 하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해야 누가 밥을 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배는 고프지만 돈 없다는 얘기는 하기 싫은 것이다.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배고프다고 하면 ‘에이 저 비겁한 놈이다. 그것도 못 참고 남한테 가서 한다.’이렇게 생각하기가 싶다. 세상 살기 어려운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해야 하는데 고프다고 할 수 없는 괴로움, 배가 부르면 부르다고 할 수 없는 괴로움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사람 살기는 공연히 어려운 것이다. 그냥 솔직히 살면 쉬운데 공연히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형편이다. 우리가 조금 돈 좀 벌었다고 까불지만 나라가 조그마하다. 우리가 아무리 돈이 조금 많아 보았자 중국의 몇 분의 일이겠는가. 미국의 몇 분의 일이겠는가. 인구가 오천만 밖에 안 되는데 많이 가진들 얼마나 가지겠는가. 인구에 비례해서 GNP가 계산되니까 인구 비례에 대해 삼만 불 시대이지만 중국에 풀어놓으면 얼마나 되겠는가. 백 불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난 체 할 형편이 안 된다
그런데 사단은 이 위치를 감추고 십자가의 효능을 왜곡시키고 인간이 좋아하는 것들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사탄은 이 위치를 어떻게 감추고 십자가에 효능을 왜곡시킨다. 인간이 좋아하는 것으로 포장해버렸다.
그 결과 아직도 도를 구한다는 사람들 견성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실재를 찾는다는 사람들 모두 다 나는 누구냐? 나는 무엇이냐? 하고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좋아하는 것으로, 그리고 아직도 도를 구한다는 사람이 있다. 지인도를 구한다고 한다. 견성을 한다. 견성이 진짜 참 자기를 자아를 본다는 것이다. 실제를 찾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확실하게 있는 데도 십자가를 보면 확실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는 무슨 도를 찾으면 견성은 무슨 견성을 하며 실재는 또 무슨 실재가 있는가.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는데, 그래 놓고 나는 누구냐? 나는 무엇이냐? 인생이란 무엇이냐 하고 찾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불을 보든 빤한 것을 제쳐 버리고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를 찾는다는 망언만 하고 있는 것이다. 더 고상한 자기를 찾아보려고, 더 위대한 자아를 세워 보려고, 더 아름다운 자기를 꾸며 보려고........ 다 아담이 말한 대로 두려워서 숨어 있으면서 그 자리에서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제쳐 버리고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를 찾는 것이다. 나무 뒤에 숨어 자기를 찾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망언이다. 더 고상한 자기를 찾아보고 더 위대한 자기를 세워보고 더 아름다운 자기를 꾸며 보려고 다 아담이 말한 데로 두려워 숨었다. 그러다보니 두려움이 왔다. 두려움에 숨어 있으면서 그 자리에서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변명뿐이다. 진실은 조금도 없다. 위치가 이탈되었으니 진실이 있을리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인간을 보시고 어이가 없어서 웃으신다 하였다(시2:4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변명뿐이다. 아담은 변명뿐이다. 그러니까 진실이 조금도 없다. 이 십자가의 진실을 알고 나면 세상에서 말하는 진실이니 의이니 하는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전에는 속는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실에 속게 되고 세상에서 말하는 정의에 속게 되고 이런데 속는다. 십자가 안에 있는 이 진실을 알고 나면 그 의를 알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다 변명이구나 그렇게 알 수 있다. 그래야 세상을 아는 것이고 그래야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치가 이탈되었으니까 진실이 있을 리가 없다. 계장이 계장 위치를 이탈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진실하겠는가. 진실할 수가 없다. 위치를 이탈하면 아무리 진실하려고 해도 진실할 수 가 없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인간을 보시고 어이가 없어서 웃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을 보시고 웃으시리로다.
그러나 예수의 진실은 그의 변치 못할 위치에서 나온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진실은 그의 변치 못할 위치에서 나온 것이다. 변치 못할 위치에서 나온 것이다. 진실하려고 진실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진실한 것이 아니라 그 위치가 정확하기 때문에 위치가 진실하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변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우라늄이 안 봤지만 거기서 방사능이 나온다고 하는데 우라늄이 의지가 있는가 뭐가 있는가. 그 놈의 돌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금은 왜 빛나는가? 지가 스스로 빛나려고 하는가? 금이기 때문에 그냥 빛나는 것이다. 태양이 뭐 뜨거우려고 하는가? 자기가 스스로 불덩어리니까 뜨거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진실은 변치 못할 진실이다. 왜냐하면 위치에서 나오니까 위치가 진실하니까. 위치를 이탈해서 반역하려고 하는 사람은 겉으로는 참 진실한 척하지만 그렇지만 이미 속에서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듣는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진실하구나 하면 속는 것이다. 이 사람이 지금 반역을 꿈꾸고 있는데 앞에서는 진실한 말을 하면 속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반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무리 좋은 말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따뜻하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차다. 위치가 그 사람의 진실을 보증하는 것이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따듯하다. 아주 춥다가도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따듯하다. 왜? 남쪽은 뜨거운 곳이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에도 춥다. 왜? 북쪽에는 얼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치에서 진실이 나오는 것이다. 남쪽에서 찬바람이 올수 없다. 북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올수 없다. 위치가 진실을 보증한다. 진실만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시림들은 다 자기가 진실하다고 말한다. 자기는 절대로 진실하다고 한다. 그런데 위치가 진실하지 않으면 진실할래야 할 수가 없다.
개는 개 대로 깨끗하려고 한다. 하지만 개 정도밖에 개밖에 안 된다. 우리 이웃집에 개가 많으니 이놈들이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안다. 아는데 몰래 들어와서 잔디밭에 똥을 싸고 간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싸놓는다. 밤에 어떻게 몰래 들어와서 싸놓는다. 그놈은 그것밖에 모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람의 진실은 그 사람의 위치가 보증한다. 위치가 정확하면 좀 잘못한 것은 실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위치가 잘못되면 아주 잘한 것 같은데 실수가 아니고 일부러 한 것이다.
예수의 위치, 그 얼마나 진실하고 변치 못할 위치인가! 그 위치에서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쳤고, 베드로를 꾸짖었으며, 빌라도의 심문을 받았고, 대제사상의 심문을 받았으며, 그 위치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의 일생에서 남은 것은 그의 위치뿐이다.
예수님의 위치, 얼마나 신실하고 변치 못할 위치인가. 그 위치에서 마귀를 물리쳤다. 그 위치에서 물위로 걸어간 그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으로 마귀를 대적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이 위치에서 이 진실한 이 위치에서 인생의 위치에서 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이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로 떡이 되지 못하게 한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냥 사람이다.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을 내 놓았는데 마귀가 물러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베드로를 꾸짖었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것도 이 자리에서 받았다.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을 때도 이 위치에서 받았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을 때 그때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능력으로 한 방 쳐버렸으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심문 받아야 할 사람으로 그 위치에서 십자가를 졌다. 그러니까 못 뛰어 내린다. 당연히 못 뛰어 내린다. 만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위치에서. 그것이 자기 위치라면 뛰어내린다. 거기다 못으로 어떻게 받겠는가. 못 박는다. 박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헛일이다. 하나님을 못 박아 놓으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런데 그분은 인생의 위치에서 자기의 정해진 그 위치에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의 일생을 총 결산해도 거르고 거르고 남아보면 위치뿐이다. 내가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예수를 추구한 결과는 이것뿐이다. 나는 ‘아 예수는 여기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여기까지 왔다. 그것뿐이다.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이 위치에서 다 알아진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하나님이 정한 위치로서 변할 수 없는 위치이고 인간은 누구나 다 그의 위치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으로서 살아있는 사람이 된다.
이 위치는 정한 위치다. 하나님이 정한 위치다. 변할 수가 없는 위치다. 바위도 변하지만 이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 그 위치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된다. 회개하면 용서 받는다. 물론 용서를 받는다. 하지만 또 짓는다. 회개를 하고 죄를 안 짓습니까! 또 짓는다. 매일 짓고 회개하고 짓고 회개하고 맨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생활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인생의 위치로 돌아오면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 죄사함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 것이 죄다. 그러니까 무슨 수로 회개한다고 이것이 없어지겠습니까! 위치가 다른 곳에 있는데 회개를 아무리 한들 없어지겠냐? 역적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회개를 늘 해! 늘 한다고 이것이 없어지겠습니까! 용서한들 이것이 용서가 되겠습니까!
왜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이것이 안 없어지는가? 이유가 바로 여기 있고, 이것을 교리로 확정시켜서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지 않냐? 성경에 너를 사한다고 되어 있지 않냐? 이것을 믿으면 된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이것도 어거지다. 믿어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까지 믿어지냐 하는 것이다. 그 정도를 생각하면 아주 미달이다.
그러니까 참으로 죄사함을 받으려면 죄사함 안에 있어야 된다. 구속 안에 있어야 죄가 없어지는 것이다. 구속이 없는 자리에서 아무리 회개를 해도 허리만 아프지 아무것도 안 된다. 차라리 3천배 하는 것이 더 낫다. 3천배하면 허리 아파서라도 딴 생각을 못한다. 물론 우리가 작은 것은 그 때 그 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은 회개를 할 문제가 못 된다. 그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구속 안에서 죄사함, 화목 이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사함 따로 있고 화목 따로 있고 한 것이 아니라, 죄를 사했으니 화목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은 죄다. 이 죄는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이다. 가령 고양이가 개같이 되려고 한다. 그것이 죄다. 개가 고양이처럼 되려고 한 것이 죄다. 그러니까 이것이 없어져야 둘 사이가 원만해진다. 이것 놔두고 어떻게 원만해지겠냐!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이 그래야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볼 때 살아 있는 사람! 이 사람을 보고 산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치 않은 사람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하고 이 사람은 살았다고 한다. 하나님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 되었다는 말이다.
이 위치는 변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죄 사함(구속)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화목도 변하지 않는다.
이 위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죄 사함도 변하지 않는다. 회개하고 변하고 회개하고 또 변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위치가 딱 바뀌어지면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화목도 변하지 않는다. 얼마나 안전합니까!
그는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셨다. 아무 이적도 행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변하지 않으므로 그의 구속도 변하지 않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그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못했다. 이적도 행하지 못했다. 그 흔한 이적도 못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기 때문에 우리 위치도 우리 구속도 변하지 않는다. 그분이 만일에 어떤 능력이나 선심이나 이런 것으로 우리를 용서했다든가 우리와 화목했다면 우리를 구속했다고 하면 그것도 변할 수 있다. 왜 예수님도 그 문제는 변했으니까! 능력을 행하는 것은 변했다. 그랬으니까 그분이 하기에 따라서 우리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변치 않는 위치에 통해서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에 우리 구속은 변치않는다. 그러니까 옛날처럼 잘 믿었는데 믿음이 떨어졌어! 이런 것이 아니다. 이런 세계가 아니다. 믿음도 그렇다. 믿음도 잘 믿다가 떨어질 수도 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잘 믿었다. 잘 믿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니까 믿음이 다 없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내년이맘때 사라에게 태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아이고 내가 지금 나이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내 나이가 어때서가 아니고 내 나이를 모르십니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라도 그 말을 듣고 장막 뒤에서 웃었다고 돼 있다. 이것은 어이가 없어서 웃은 것이다. “아이코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그 자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편치 않는다. 그 자리로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에 우리도 편치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속도 편치 않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사람이다. 왜 하나님이 영원 하시니까 그렇다.
다른 교훈에 끌려가지 말 것
그러므로 다른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히13:9). 당시에는 율법의 계율이나 종교적 습관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때였으므로 그런 것들이 십자가의 효능을 제치고 왜곡시켰다.
왜 이 말을 했는가 하면 다른 교훈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이 말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여려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서 할 것이 아니니 이렇게 돼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데 무슨 다른 교훈이 있냐는 것이다(히13:9). 왜 다른 교훈을 좇아 가냐는 것이다.
동방번개가 왔다고 간 사람이 있다. 구속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밖에 없는데 동방번개가 오는지 서방번개니 오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동방번개가 왜 필요하고, 전능자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동방번개를 보고 전능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능자가 왔다고 중국에 전능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가지고 한국의 상당수 사람들이 전능자가 왔다고 따라다니고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어디서 영원토록 동일한가? 십자가에서 안에서 영원토록 동일하다. 그런데 무슨 다른 교훈이 또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교리에 이런 말이 아니다. 이런 곳에 안 끌려가려고 교리를 확정 시켜서 기독교 안에서 아주 중요한 교리들을 만들어 놨다. 니케아신조니 우리가 제일 많이 아는 사도신경이니 이런 것들이 신조다. 이것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거기에 고정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해 놓은 것이다. 거기서 고정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이 은혜는 십자가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을 말한다. 거기서 마음이 아름다워 져야지 교리로 아름다워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교리를 심봉 해서 마음이 아름다워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다른 교훈에 끌려 다니면 안 되는 것이다. 교리에 끌려 다녀도 안 되고, 다른 교훈에 끌려 다녀도 안 된다. 그 필요가 없어야 된다. 그 필요가 전혀 없어야 된다.
그런데 그 필요가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있으면 지금 무엇인가 잘 못 됐다는 것이다. 전능자도 필요하고 번개도 필요하고 그러면 속에서 뭔가 잘 못 됐다는 것이다. 구속이 제대로 안 됐다는 말이다. 안타가운 일이다. 말씀을 들었는데 못 알아들었다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다. 율법이나 계율이나 종교적 습관, 관념 이런 것들이 유태교가 오래 됐으니까 거기에 습관이 있다. 그런 것들이 “예수만” 이러고 나니까 뭔가 허전해 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쫓아 다니는 사람이 생겼던 것이다. 종교적이 습관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들이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교회도 그렇다. 우리교회서 태어나서 우리교회에서 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데 있다가 온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아무것도 없나!’ 이런 생각이 퍼뜩 든다. 여기 집회 참석 참석하면 첫째 느껴지는 것이 ‘여기는 어찌 아무것도 없네!’이렇게 느껴진다. 그런데 뭐가 없는 것인가 하면 의식이 없다. 어떤 격식이 없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에는 이상한 것이다. 그런 격식 속에 살던 사람은 그게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거짓말 속에 살던 사람은 거짓말 없어도 이상하다.
사람은 다 언제나 보수적(保守的)이다. 자기가 있던 어떤 것이 갑자기 없어지면 사람이 허탈해진다. 털이 있다가 털이 빠진 것처럼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가짠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이거 교회가 이상하네. 좀 더 알아봐야 되겠네.’ 이렇게 생각한다.
말씀을 들을 생각은 안하고 이런 외형 같은 것 그런 것에 사람이 끌린다. 오랫동안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간다. 이것이 굉장히 간단한 문제 같은데 어려운 사람한테는 굉장히 어렵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다 통과하고 온 사람들이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당하는 사람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이것이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도 이건 있어야 되지 않냐! 그래도 이건 해야 되는데~’하는 이런 것이 남아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써졌다. ‘그래도 이건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래도 이건 있어야 되는데 그래도 찬송가는 600곡 찬송가를 불러야 되는데’ 하는 그런 것이 있다. ‘금요일 날 가니까 찬송가 가사도 틀리고 뭐 이상하던데’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게 생각이 되면 십자가의 효능이 가려져 버린다. 왜곡시켜져 버린다.
그러니까 섞여 버리고 마는데 이것이 어떤 것을 섞어 놓으면 제 맛이 안 난다. 다른 맛이 난다. 비빔밥 해 놓으면 다른 맛이다. 그런데 비빔밥은 비빔밥대로 맛이 있다. 그러니까 비빔밥을 먹어 버릇하면 늘 비빔밥을 먹는다. 한 번 비빔밥을 먹어서 맛이 들면 그냥 밥 먹으려면 이상하다. 꼭 비벼서 먹어야 입맛에 맞다. 비빔밥에 맛이 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쌀밥 맛도 안 나고 보리밥 맛도 안 나고 다른 맛이 난다. 쌀밥이 맛있다는 것은 그것만 먹어 봐야 맛이 있다. 쌀밥이 굉장히 맛있는 밥이다. 그러니까 좋은 쌀로 밥을 잘해놓으면 아무것도 안 먹고 그것만 먹으면 아주 맛있다. 나는 쌀밥을 먹어보면 반찬 먹기가 싫다. 반찬 먹으면 이 밥맛을 버릴까봐 그렇다. 그래서 입맛이 돌때까지 나는 맨 밥만 계속 씹어 먹다가 침이 좀 마르고 그러면 그때 김치 하나만 넣고 또 먹는다. 왜냐하면 그 쌀밥 맛을 알면 다른 반찬 먹기가 싫어진다. 반찬은 따로 먹고 밥은 따로 먹고 이래야지 섞어 버리면 맛있는 밥맛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도 그렇다. 그것만 딱 들어야 하는데 뭘 섞어 버리면 다른 맛이 되어버린다. 다음에는 항상 섞어 먹어야 되고 그렇다.
안동지방 가면 양반들이 비빔밥을 안 먹는단다. 그건 머슴들이나 먹는다고 안 먹는다. 그러니까 여러분 비빔밥 먹을 때는 ‘나도 이제 머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먹어야 한다.(하하하) 왜냐하면 머슴들은 그릇도 많이 들고 하니까 한 그릇에 다 집어넣어서 비벼줬다. 그러니까 양반들은 안 먹었다는 말이 맞다. 우리 00형제가 잘 안다. 이 이야기는 00형제한테 들어서 하는 것이다. 안동에서는 양반들은 비빔밥을 안 먹는다고 한다.
십자가의 효능을 퇴색 시켜 버린다. 그런 것이 너무 좋은 것이 들어오면 밥맛은 어디가고 없고 다른 맛만 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가? 기독교의 전통, 교리, 의식,....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십자가의 효능은 가려지고 왜곡되고 흐려진 것이다. 다른 면으로 보면 십자가가 정확하게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득세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어떤 것이 대신하고 있느냐 하면 교리, 전통, 의식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거기에 매료되게 딱 만들어 버리면 진짜 본질은 왜곡 되어 버리고 다른 것만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효능은 가려지고 왜곡되고 흐려지고 만다.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그것이 잘 안 된다.
사도 시대를 지난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끌려 국교화의 길로 갔고, 그 길에서 당연히 황제나 교황에게 어울리는 종교가 만들어졌는데 이때에 구속을 위한 예수의 십자가는 거침돌이 되고 만 것이다.
사도 시대를 지난 교회는 그때의 시대적 상황에 끌려 국교화로 가게 된다. 핍박을 많이 받고 있다가 점점 길이 열려서 결국 황제까지 교회를 나오게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국교화가 되는 것이다. 그 길에서 당연히 그런 정도가 되려니까 황제가 나오려니까 황제에게 어울려야 된다. 우리 교회 같으면 지금은 좋지만 옛날에 식당에서 집회할 때라면 황제를 모시기가 어렵다. 황제에게 거기에 와서 앉아있으라고 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황제가 나오게 되면 황제에게 어울리는 교회가 되어야 된다. 교황이 또 있다. 교황이라는 사람이 잠바나 하나 입고 앉아있으면 되겠는가? 뭔가 어울려야 된다. 여기에 어울리는 종교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천주교는 아주 화려하게 되었다.
이때에 구속을 위한 예수의 십자가는 거침돌이 되고 만 것이다. 황제가 예수를 믿고 앉았는데, 뛰어내리지도 못하는 예수가 그 앞에 와 있다고 생각하면 거침돌이 되지 않겠는가. 저걸 없애야 되는데... 좀 화려한 예수가 있어야 되는데... 그럴 듯한 예수가 있어야 되는데... 그러다 보니 십자가가 무엇이 되는가? 사랑과 희생과 봉사와 같은 것으로 변질되었다. 황제도 좋아할 수 있는, 황제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오히려 거침돌이 되고 말았다. 그림은 근사하게 그려놓았지만 거침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 미덕을 산출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전락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 미덕을 산출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을 나타내는 하나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십자군 전쟁 때는 십자가를 들고 전쟁에 나갔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인류 구속을 위해서 동일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인류 구속을 위해서 꼭 그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인류 구속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뛰어 내렸어도 안 되고, 거기서 빛이 나도 안 되고, 그냥 그 자리여야 우리가 구속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꿀 수가 없다. 동일하게 구속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 구속을 위해서 최종적인 복음이다. 이 자리를 잃어버리면 도로 옛날로 돌아가 버린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러므로 다른 교훈에 끌려가면 안 된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다. 아멘!
이 복음 외 다른 복음은 없다. 교리가 화려하게 만들어지든지 신약이 굉장히 발전하든지 다 상관이 없고 이것이 최종적인 복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이것이 최종적인 복음이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러므로 다른 교훈에 끌려가면 안 된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베드로가 말한다. 무엇을 가지고 이렇게 담대한 소리를 하겠는가? 베드로 같이 무식한 사람이 세상의 다른 종교를 알겠는가? 아무것도 모른다. 오직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고 하였다. 이것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아멘!’하고 다른 교훈은 없구나. 이렇게 알 때까지 십자가를 깊이 알아야 된다. 다른 것은 다 필요가 없구나. 다른 것은 다 소용이 없구나. 이것밖에는 없구나. 이렇게 알 때까지 알아야 된다. 내 경험으로 보면 옛날에 내가 알던 십자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되는 십자가였다. 그리고 어떤 때는 좀 필요하고, 어떤 때는 필요하지 않은 십자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예수는 이것밖에 없구나. 나를 위해서 주실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구나. 나를 위해서 이적을 행하신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서 뭘 해준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또 변한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 영원히 해줄 수 있는 것은 구속 하나구나. 나를 원위치로 돌려준 이것 하나뿐이구나.
그런데 이것이 내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새 생명을 주는 것이고 새롭게 하는 것이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안에서 세상을 보니까 다른 세상이 보인다. 다른 세계가 보인다. 그러니까 사람이 두 번 사는 것이다. 거듭났다고 한다. 옛날 세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다 알고 있는데 또 다른 것이 보인다. 세상을 두 번 사는 것이다. 곱빼기로 사는 것이다. 자장면 곱빼기가 아니고 인생 곱빼기다. 신기한 것이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하였고,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하였다. 이것이 분명하다. 너무너무 확실하다. 옛날에는 이 말에 대해서 변명하기가 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것은 독선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베드로가 무식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고 이것은 기독교의 독선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반항할 수 있는,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성경이 틀리겠느냐, 이렇게 한다든가 베드로가 영감으로 말했는데 늘리겠느냐는 정도였다. 내 안에 그런 체험이 없으니까 누구를 만나면 두렵다. 온갖 질문이 다 들어온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이 다 들어온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서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된다. 온유한 마음으로 준비하라. 잘못하면 우기고 싸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온유한 마음이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만나도 똑같다. 사람의 생각은 똑같다. 한 사람 만나보면 다른 사람도 다 똑같다. 질문도 똑같고 생각도 똑같고 다 똑같다. 대답도 한 가지 뿐이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 기 도 ]
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여 인간답게 제 위치에 살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길을 찾고 있던 사람들인데, 이제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있어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그것이 길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그것이 생명이고 어떻게 살든지 그것이 진리인 이런 신기하고도 오묘한 세계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 우리가 그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그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도록 축복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