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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국왕 세종대왕,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내이를위하야 어엿비너겨...’
아직까지 이 훈민정음 서문 전체를 제대로 외우고 있는 사람은 몇 없으렷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어도 성군의 자질을 지녔다하여 두 형을 제치고 국왕이 되신
조선의 성군이시다. 부왕 태종은 형제간에 피를 흘리고, 외척을 배제하기 위해 자신의 처갓집은 물론
사돈집까지도 몰살을 시켜가며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왕권을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종 치세 32년간 조선은 건국 후 처음 태평성대를 누릴 수가 있었다.
사전적 정의의 세종대왕의 프로필이다.
◆세종 이도(1397~ 1450, 54세): 재위 1418.08~ 1450.02(31년6개월),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시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용비어천가 등 편찬사업과 과학에서도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및 각종활자를
발명하고 제작 설치하였다. 이외에도 아악을 정리하고 국방에서도 함경도 6진 개척과 대마도정벌을
하는 등 내정, 외치, 문화에 찬란한 업적을 남기신 대왕이시다.
:: 훈민정음 원본과 성군의 동상
대왕은 덕치의 성군이셨는데 당신이 가신 뒤 남은 가족들은 뉘 덕(?)인지 엉망진창 되버렸소.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와 6~ 9명의 부인에게서 적자 8남2녀, 서자 10남2녀를 두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1395~ 1446, 52세)는 14살에 충녕군과 혼인을 올리고, 세종이 즉위하자 24세에
국모가 되었다. 곧 이어 부친 심온의 옥사로 혈족 모두가 노비로 전락되고, 폐비의 논의까지 있었으나 이미 3남 2녀를 두었고 임영대군을 임신 중인 관계로 구제되었다.
슬하에 총 8남 2녀를 두었으며 1446년(세종 28) 수양대군의 잠저에서 승하하였다.
당시 세종은 보령 50세였으나 계비를 두지 않았다. 그런 덕(?)에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큰 할배
양녕영감은 종손(從孫)를 없애라고 부추기는 추태는 있었을지언정, 외척이 날뛰는 꼬라지는 보이지
않았다. 계비 잘못 들여 조선역사 이상하게 만든 중종, 선조, 인조(세 분 나리들 바보 짓 하는 곳에는
꼭 빠지지 않으시네?), 그리고 영조대왕님!! 아무리 나랏님이래도 그렇지 66살 노구에 15살 새색시가
웬 어불성설입네까?? 성군 세종대왕이나 아님 슬기롭게 대처하신 숙종대왕에게 한 수 배우시라고요.
왕비는 처음 18세에 정소공주를 낳으시고, 이어 20세에 장남 문종을 두셨다. 22세에 차녀 정의공주를 생산하면서 연년생으로 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까지 거의 자동화 공장수준으로 생산하였다.
이후로도 생산은 계속되어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그리고 39세에 막내 영응대군까지 낳셨으니 가히 ‘조선의 왕자, 공주생산 제 1공장’이셨다.
다른 부인에서는 영빈 강씨가 서장남 화의군을 두었고, 신빈 김씨는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등 여섯 왕자를 보셨다.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죽자 수양모가 되시어
단종을 키워온 혜빈 양씨도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등 세 왕자를 보시고 그 외 다른 부인들에서는
옹주 한 분 정도만 있었다고 한다.
1450년 세종이 54세로 승하하자 부왕과 마찬가지로 미리부터 잘 준비된 문종의 즉위로 처음에는
언로를 열고 문무의 고른 등용으로 백성들의 희망이 매우 컸었다.
현군으로 준비된 문종이었지만 심약하여 차츰 왕권은 약화되어 가고 오히려 차남 수양대군, 3남 안평
대군 등 종친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가고 있었다. 본디 병약한 문종, 즉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로 승하
하면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새로운 조선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군 세종의 덕이 태종의 사무친 업보를 제대로 가리질 못하였던 것이다.
:: 양녕대군은 안평대군과 종손인 단종을 사사하라고 세조에게 간청한 인물이다. (지덕사, 상도동)
'살아서 국왕의 형이요, 죽어도 부처의 형'이라던 호탕함은 노구의 영달과 복수로 변하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 당시 36세의 수양대군은 할배 태종을 쏙 빼어 닮아 자질이 영특, 명민하였고
학문과 무예에도 뛰어났다. 할배의 족적을 따라 그대로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키며 수하의 한명회,
권람 등 신흥세력으로 수구세력 황보인, 김종서 및 집현전 세력을 제거하고, 방해되는 형제 중에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까지 모두 제거하고 대권을 쥐었다.
남겨진 세종의 가족들은 실리파와 명분파로 양분되어 득세한 수양대군에 가담한 가족들은 영달을
누렸고, 같은 가족이라도 반대쪽은 모두 명분 앞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형제 중에 계유정란 이전에 죽은 문종, 광평대군, 평원대군, 장녀 정소공주는 제외하고 동복형제 중에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친형 수양대군에 의해 유배 후 사사되었다.
영빈 강씨는 아들 화의군과 전북 익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죄로 사사되었고,
단종을 업어 키워온 혜빈 양씨는 수양과 대립하다 교수형을 당했고, 아들 셋 역시 모두 단종을 보호
하려다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 영빈 강씨(세종의 2부인)의 묘소.(전북 익산 미륵사지탑 인근-> 수양에게 사사되었다.)
신빈 강씨는 세종이 죽자 본인은 비구니가 되어 궁을 떠났지만, 조졸한 막내 담양군 외 다섯 형제가
모두 수양의 측근이 되어 계유정란의 공신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조선왕조를 세우려 할 때 장남 진안대군 방우는 고려의
녹을 먹는 신하로써 부친의 뜻에 반대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에 성공을 거두자 미련없이 즉시
가족을 데리고 철원에서 은거하다 조선 건국 이듬해 술병으로 죽었다는 졸기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에게도 자식 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자식이 있었으니, ‘금계필담’에
소개되는 수양대군의 장녀 세희공주가 그 주인공이다.
‘선원록(璿源錄)’이란 1680년에 편찬된 조선 왕실의 족보로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사항이 기록
되어 있다. 수양대군 즉 세조의 기록을 보면 자식으로 4남 1녀가 있었다고 한다.
파평 윤씨의 대모 정희왕후로부터 20세에 조졸한 장남 의경세자(추존 덕종), 의경세자와 띠동갑인
차남 조선 8대 예종, 장녀 의숙공주가 있고, 박팽년의 누이 근빈 박씨에서 서장남 덕원군과 서차남
창원군이 바로 세조의 자녀들로 기록 되어있다.
:: 선원록( 조선왕실 족보)과 담당관청 선원록아문 현판.
그러나 ‘금계필담’의 단종 편 내용에는 두 딸 중 장녀가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낸 일에 대해 아버지의
잘못을 탓하고, 더욱이 유배 보내는 것은 왕가의 폐도라며 뉘우치라는 간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사육신 등 충신들을 살해한 것에 반기를 들다 결국은 세조의 대노를 사게 되었다.
어머니 정희왕후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라고하자, 끝까지 이를 거부하다가 선원록에 조차 오르지
못하고 쫓겨난 세조의 큰 따님 세희공주란 분이 있었다고 한다.
공주는 모친의 도움으로 유모와 함께 겨우 서울을 탈출해 충청도 보은골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우연히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청년은 비록 행색은 남루하였으나 수려한 외모에 행동거지가 기품이
있어 보여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 청년이 계유정란에 죽은 대호 김종서의 손자였다고
한다. 실로 원수지간의 두 집안의 자손이 만나게 된 것이다.
:: 2011년에 방영되었던 KBS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세령공주(문채원扮)와 김승유(박시후) Love Story 원작: 계유정란 때 김종서 70세, 수양 35세이니 손자가 되어야 맞는 야그가 된다.)
훗날, 세조는 속리산 법주사를 찾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서 자신을 꼭 빼 닮은 손자를 보게 되면서
공주를 만나게 된다. 세조는 이들 부부를 용서하고 다시 품에 거두려 하였으나 세희공주는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울산 쪽으로 멀리 떠나 버렸다.
속리산 법주사 가는 길에 유명한 정2품송이 있는 마을에 ‘진터’ 또는 ‘가마골’이란 지명이 남아있어
세희공주와 연관된 전설을 지닌 곳이라 소개하고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 있는 석문사 사찰에는 아주 공주내외가 함께 살았다는 ‘보굴암’이란
바위굴이 있다. 원수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굴이라 하여 ‘보굴암’이라 불렀다 한다.
속리산 자락이라 할지라도 법주사로 접근하기에는 지금도 좀 힘든 접근로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회자되어 아직까지도 그렇게 불러지고 있나 보다.
:: 경북 상주 석문사의 보굴암이다.
그렇다면 과연 세희공주는 야사 속의 주인공인가? 아니면 실존인물인가??
[세종실록] 세종 112권, 28년(1446 병인/ 명 정통11년) 6월6일(임인) 2번째 기사이다.
‘예조판서 정인지가 英陵 지문(소헌왕후 승하)을 지어 바치다.’에서 정인지는 이 지문의 내용에서
가족을 소개하며 ‘首陽娶中樞院使 尹璠之女 生一男二女 男曰崇封桃源君 女皆幼’
(‘수양(首陽)은 중추원사 윤번의 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崇)은 도원군으로
봉하고, 딸은 모두 어리다.’) 이렇게 기록하였다.
두 딸이란 바로 세희공주와 의숙공주를 뜻하며, 1446년에 수양대군은 당시 30세이었다.
도원군은 9살, 의숙공주는 5살이었고, 예종과 서자 덕원군, 창원군은 모두 태어나기 이전이므로
자식을 낳을 때 보통 두세 살 터울을 두는 경우 세희공주는 당시 7살이 된다.
즉 세희공주는 1440년에 탄생하였고, 궁을 떠난 것은 15세 전후가 되는 것이다.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는 1452년(문종 2)에 옛 영릉터(현 헌인릉의 인릉 부근)에 세워졌다.
예종 때 부왕 세조의 유훈으로 현 여주 왕대리로 영릉을 천장할 당시 능의 석물과 신도비는 불편하다
하여 가져가지 않고 인근에 묻어(?)버리고, 왕릉에 무슨 비석이 필요하냐며 능표를 세우지 않았는데... May be 그것도 세조의 유훈이었던 듯 하다.
200여년이 지난 후에 송시열의 주장으로 1673년 현종 때 영릉에 능표를 세우는 것이 관철되었다.
그리고 다시 70여년이 지난 1745년 영조 때 겨우 영릉의 능표가 세워졌다. 그것도 아주 간단히.
:: 영릉 신도비(석비 받침돌이 발견되지 않아 새로 만들어 비석을 세웠다.)
1974년 내곡동의 옛 영릉터에 묻혀있던 신도비가 520년 만에 발견되었다.
비문은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우나, 비문의 내용은 ‘전주이씨 선원보첩’과 ‘열성지장통기’에
남아 있어서 전문 4,886자의 내용은 모두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비문에 초고는 분명 1446년 정인지가 작성한 것이 분명한데, 신도비문의 원고가 초고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특히 세조의 가족을 소개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首陽娶贈左議政尹璠之女 生二男一女 長德宗桃源君 餘幼 側室朴氏 生一男 幼’
(수양(首陽)은 증좌의정 윤번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덕종으로 도원군이다.
다른 아이들은 어리고, 측실 박씨에서 1남이 있는데 어리다.‘) 이렇게 바뀌었다.
초고 작성은 1446년, 신도비 건립은 세종 승하 후 2년이 걸렸으므로 1452년이다.
당시의 정희왕후의 부친인 윤번과 장남 도원군의 위치, 그리고 측실 박씨의 1남이 비교대상이다.
▶윤번(1384~ 1448, 65세): 본관 파평, 정희왕후의 부친으로 1446년 중추원사, 이듬해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1448년 졸하였고, 死後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에 추봉되었다.
▶도원군(1438~ 1457, 20세): 본관 전주, 수양대군 장남으로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다.
예종의 형이며 성종, 월산대군의 부친이다. 145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 후 요절한다.
1476년(성종 7)에 추존되어 덕종의 묘호가 올려졌다. 부인 인수대비.
▶측실 박씨의 1남: 여기서 측실은 근빈 박씨이며 어린 아들은 덕원군(1449년생)이다.
이 기록에서 분명 틀리게 수정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 ‘長德宗’임을 발견 할 수 있다.
즉 ‘장남 덕종’은 당시 15살로 살아있었을 때 인데 25년 후에 추존된 묘호를 미리 적어 놓았으니
최소한 1476년 이후에 적은 기록임을 스스로 증명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세희공주님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는 이제 스스로의 결정에 맡기겠다. - 了 -
Tips:: 금계필담은 1873년(고종10) 徐有英이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만 수록한 문헌설화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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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그저 세
이런 많은 역사 속 문헌과 기록들을 찾아내 연도 등을 짜맞추기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그저
설명해주신 글들 읽으며 이 글엔 이렇게 댓글
아일비빽
딱 하나만 여쭤볼게요.
왜 세
제가 볼 때는 소헌왕후도 자식제조기공장 수준이지만...대왕님도 그에 못지 않은 수퍼울트라캡에너자이저스테미너의 제왕이시라능
세
울세종대왕께서는 무지 바쁘셨을듯~
그많은 업적 남기실랴~9명정도의 비,빈 돌아봐주실랴~
옛날엔 그저 여인네는 특히 왕의 여인들은 무조건 회임이 장땡!
특히 아들만 나았다함 더더욱!
그러다 욕심이 과해 왕위를 탐내기도하고~화를 자초하기도~~^^
아니 영조대왕이 15살 소실을 두었다는거 첨 알았어요.. 와 대단한 분이시네요..
요런 된장이구마 감탱동무가 ㅋㅋ
역사적 사실은 가끔 생각지도 않게 회귀되는군요.
그냥,
세종대왕. 성웅 이순신 등으로 기억함이 속 편할 듯,,,,,
뒤늦게 공부 제대로 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제대로 공부하고 갑니다...
인사 꾸벅^^
읽긴 다 읽었는디 골아푼 철덜든 감탱임금 한분과 또 지조있는 세희공주님이 계셨다는것만 겨우 ㅎㅎ
정말 하늘같으신 아바마마께 간언? 드릴수있는 담력의 소유자 존경스럽네요
울 감탱 늘 우리유마보구 전주이씨라 도라고 예명으로라도 쓰라고 난린데 ㅎㅎ
잘모르던 역사 ‥
세세하게 기억에 담게되네요
감사합니다 하나의하나님^^*
역사의 현장을 환하게.....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전 공주의남자 본방땐 재미없어 안보다가 낮에 재방으로 쭉 재미있게
봤었는디
하나님 덕분에 사극이 더 재미있어질거라는...
주사랑님~~전 공주의남자 무진장 잼나게 봤었는데요.
생방 못보면 돈내고 쿡으로도 봤답니다.
일본에서 엄청 인기끌어서 박시후 대단했었는데
하필 지뢰여자한테 엎어져서(일본팬들 표현) 저리 힘드네요.
남자는 그저 여자 조심조심해야 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