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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구원
5. 연합을 위한 배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18~25).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말씀 드렸다. 형상으로 창조했다 함은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므로 배필이 되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뜻이다. 실재이신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필요하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한 것은 같은 이치이다. 남자가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해 여자를 지었다는 것이나 하나님이 영이시니 형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 창조의 최종적인 목적은 당신의 배필을 얻는 것이다. 이 배필이라는 말은 결혼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결혼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배필이 필요한 분이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스도와 교회도 그렇다. 그리스도도 배필이 필요하다. 돕는 배필이다. 형상을 따라 만든 것은 배필로 만든 것이다. 배필로 만든 것은 결국 그 분의 일을 하게 하려 하심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그렇게 하려면 배필이 되어야 형상이 되어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계없이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당신의 배필로 정해서 배필 안에서 당신의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형상을 따라 지었다 함은 존재적인 의미이고 산혼으로 지었다 함은 기능적인 의미이다. ‘숨을 불어 넣어 산혼이 되었다’, 산혼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이 기능이 하나님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산혼이라는 뜻은 기능적인 배필이다. 아내라는 말은 협력적인 배필이다. 생육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에 대해 협력적인 배필이 필요함을 말한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는 것도 있는데 창조 자체가 하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둘이 합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모두가 그렇다. 홀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배필과 합해서 무엇을 하도록 되어 있고 천지만물도 그렇고 사람 자신도 그렇다.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만드는 것도 다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기계를 보면 기계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이 있어야 움직인다든지 기계가 있지만 기름이나 전기가 들어가야 움직이게 되어 있다. 둘이 합해져 되게 되어 있지 홀로 스스로 되어 있는 것은 없다. 스스로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스스로 있는 것을 만들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 속에는 ‘스스로 있다’는 것이 없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있다’, ‘저절로 있다’ 하는 것은 이론이고 생각이다. 사실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육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음식이 들어가야 살 수 있는 것이다. 홀로 존재한다는 말은 물도 밥도 안먹고도 아무 것도 안 먹고도 살 수 있어야 한다. 근데 우리 육신 자체도 뭐가 들어가야 살 수 있지 뭐가 들어가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지금 과학에서는 기름 없이 갈 수 있는 자동차를 바라고 사람이 없어도 운전해 가는 자동차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이 없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무인 자동차도 사람이 조정해야지 스스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독존적인 것으로 존재 하는 것이 없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돕는 배필로 일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시고 서로 합해서 애기를 낳도록 되어 있다. 홀로는 안되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 세계는 다 이러하고 하나님도 그러하다. 아담이 독처함이 좋지 못함은 하나님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함이다. 하나님이 독처하는 것이 좋았다면 아담의 독처가 좋지 않았다고 하셨겠는가. 하나님이 홀로 계시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배필로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배필로 지어졌다. 하나님은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서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는데, 인간을 통해 정복하고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무리 전능해도 스스로 땅을 정복하고 통치할 수가 없다. 사람은 그런 필요로 창조가 되었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못하신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가 손과 발이 없다면 아무것도 못하겠지만 손과 발이 필요하다 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문제이다. 6.25전쟁 때 손과 발이 다 잘린 사람을 보았는데 아무 것도 못한다. 지금은 연금도 나오지만 옛날에는 구걸해서 먹고 살았다. 다른 사람이 메고 다니면서 구걸을 했다. 그래도 둘이 협력하니까 구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 절대적인 문제다. 하나님 생명을 생육하고 번성해서 충만하게 하려면 인간 없이 불가능하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 동물을 번성케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근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성품을 자기의 성품을 통해 생산 확장해 낼 수 있는 독특한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호랑이 토끼 등은 하나님을 낳을 수 없다.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육신을 가진 아버지이지만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는데 어떻게 영과 육신이 하나가 되겠는가. 육신 안에서의 하나 됨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 우리도 하나 되어 다 그분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또 잘 믿지 못한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 되는 원리나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되는 원리는 다 같은 원리이다. 다 인격이라는 자리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못할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육신 안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인격 안에서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라는 말을 유태인들은 잘못 알아들어 자기가 사람이면서 자칭 하나님과 동등이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건방지고 참람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동등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다 함은 한 운명 안에서 하나이다는 말이다. 이 운명은 인격이다. 그 안에서 하나이지 모양에서 하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도 운명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사람은 육신을 가졌지만 하나 될 수 있는 존재이다. 기도를 해서 육신적으로 무엇을 끌여 들여 자기 속에 모시고 하나 되려 한 사람들이 많다. 그 분과 하나 되는 자리에 가면 하나가 된다. 돌비는 하나님 말씀이 새겨져 있다. 돌과 말씀은 다르지만 말씀이 새겨졌기 때문에 하나다. 하나님 다르고 나 다르지만 어느 한 자리에 가면 하나가 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지성소이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안에 가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구약시대의 돌비이니까 그리스도 안에 가면 우리는 하나이다. 그 운명 안에 가면 하나님과 하나이고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먼저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하나이니까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이 인격 안에서 하나이고 이 인격 안에서 번식한다.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사람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이고 동시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해 주었는데 그 자리가 신기한 자리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거쳐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이끌어 오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고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만나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번식하도록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말씀과 같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올 때 모시고 나온 셈이다. 이 한자리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만날 수 있고 이 한자리가 아니면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어떤 방법으로도 만날 수가 없다. 기도해서 만났다 하는 사람도 있고 꿈을 꾸다 하나님을 만났다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다 모두 생각이다. 혹시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몇 천만명 가운데 한 명 있을까 말까이고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 자신을 알아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오직 유일한 한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졌다. 육신은 가졌지만 예수님을 밝혀 볼 때도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한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도 있고 독생자라는 말도 있는데 “자고로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아니면 이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일 때만 이 말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만일 육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예수님도 될 수 없다. 우리와 다른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다. 육신 때문에 안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는 위치가 없어서이다. 어차피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은 내 육체 속에 피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이 나와 하나 되는 자리가 있다. 하나 되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안된 것이지 육체 때문에 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최종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이 될 때 그의 협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 분을 도우려면 그분과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그분과 하나일 때만 그분과 협력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도우려면 내 마음과 맞는 사람이어야 하지 내 마음과 맞지 않으면 일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 내 마음과 맞지 않는 사람이 내 일을 도와주려고 하면 난감하다. 왜냐하면 일을 저지르니까, 내 생각과 다르게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누가 하나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인가? 그분과 하나인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을 도우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고 하나님 일을 한다는 사람도 많다.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 놓은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하나님과의 하나인 협력인가, 아니면 자기 힘대로 해서 성공을 해 놓은 것인지는 아주 회의적이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만이 검증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가 아니면 협력이 아니고 하나님 일이 아니고 자기 일 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 일인가? 얼핏 생각하면 선교사업 하는 것은 하나님 일이고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 일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선교를 하든 장사를 하든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이면 하나님 일이다.
하나님 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한 것이 하나님 일이다. 걸어가도 하나님 일 앉아도 하나님 일이다. 그분의 일이 하나님 일이니까. 그분과 하나된 사람의 일이 하나님 일이다. 하나님 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는가. 근데 하나님과 하나 된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 일 같지만 내용을 보면 하나님 일이 아니고 그 사람 일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사람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고 왜 이스마엘을 거절하고 이삭을 선택하셨는가? 그것은 그 아버지와 하나인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무엇을 하든 간에 자기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하나님 일로 간주된다. 같은 원리로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의 일은 하나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모두 하나님 일이다. 그의 사업이 선한 사업 좋은 사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잠을 자도 길을 가도 십자가 죽으셔도 다시 살아나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지어진 존재이다.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도울 수 있도록 지어진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의 위치는 얼마나 신성한 위치에 있는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사항은 내가 그분과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그분의 형상이 되어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형상이 되어 그분의 일을 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마지막으로 그분과 연합한 자리에서 일을 한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단지 육신적인 연합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와 '하나님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하나님을 위해 돕는 배필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한 생명 안에서 이루어졌다.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다.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라고 말하는데 한 생명이어야 연합이 되고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과 하나인 사람의 일이어야 부끄럽지 않은 일이고 하나님과 하나일 때만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십자가를 통한 한 운명을 통하여 연합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내가 어떻게 연합이 되겠는가?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고 말했다. 이는 연합되었다는 말이다. 연합되지 않고는 함께 못 박힐 수 없고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본 일이 없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았고 장사지냈다고 말하는데 이는 모두 둘이 연합 안에서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럼 어디에서 연합이 되는가? 십자가의 한 운명 안에서 연합이 되었다. 이 자리에 가지 않고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가 없다. 갈빗대를 빼서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었다 함은 그 사람의 죽은 자리를 말한다.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다 하는데 예수님이 깊이 잠든 자리가 십자가다. 이 말은 이분의 깊이 잠든 운명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그 자리에 내가 있으니까. 내가 죽으려고 노력할 일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이 죽은 자리에 가 보면 내가 있다. 나와 그분과 똑 같은 운명으로써 내가 죽어 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 앞에 가 보면 내가 거기에 내 육신이 아니라 내 운명이 죽어 있다. 바울은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말한 것이다. 갈보리 산에서 본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 똑 같이 예수를 본 적이 없지만 우리도 역시 그분과 함께 못 박히는 것이다. 바울이 본 자리나 우리가 본 자리가 똑 같으면 우리도 십자가에 못박힌 자리를 보는 것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연합될 자리가 없다.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가 누구이길래 바람과 바다를 순종케 하는가 했는데 이 말은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말이다. 사람이 아니구나 했을 때는 신앙 경배가 생긴다. 좋은 종교를 만들 수 있는 자리이다. 이적을 행한 자리에서는 종교는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분과 내가 하나될 수는 없다. 하나로 발견이 안된다. 물위를 걸어가는 사람과 물 속에 빠지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끼리도 실력이 있고 없고가 되면 차이가 생기게 되고 아이큐가 높고 낮아도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하물며 물위를 걸어가는 사람과 물에 빠지는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가 되겠는가. 그 자리에서는 하나라는 것을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너와 나는 하나라고 해도 만나질 수가 없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로 만나지는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로 만나진다. 거기 가면 내 운명이 거기에 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안죽는다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를 보고 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죽은 사람으로만 발견된다면 죽으려고 할 필요가 없어진다. 죽은 사람으로 발견된 사람이 또 죽으려고 하겠는가. 십자가 안에서 비로소 우리와 그분이 하나되고 하나된 자리에 부름 받은 것이 교회이다. 어디로 소집했나? 십자가의 죽으심 안으로 소집했다. 이것이 교회이다. 그 안에 소집된 사람들이 교회이다. 이 운명이 인격이다. 그분의 인격이고 우리의 인격이다. 우리가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갈고 닦은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것은 갈고 닦은 것이지만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소에게는 소의 격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격이 있다. 소도 개도 자기의 격을 닦은 적이 없다. 타고 나기를 소의 격으로 개의 격으로 태어났다. 사람의 격도 갈고 닦은 것이 인격이 아니라 타고 나기를 그 격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인격은 운명이지 갈고 닦은 것이 아니다. 인격을 도야한다고 하는데 갈고 닦는다는 것이다. 그릇을 만들 때도 갈고 연마하는 것을 보고 도야라고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인격은 도야한 인격이다. 참선을 하든지 명상을 하든지 도덕을 실천하든지 지식을 쌓든지 무엇을 해서 이루어 놓은 것을 보고 인격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는 인격이라는 말은 아주 정 반대의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운명 바로 그것이 사람의 격이고 인격이다. 이 인격 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또 우리는 이 인격 안에서 그분을 만났고 또 이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람이 하나이다. 기도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성막과 지성소를 왜 만들어 놓았는가? 하나님 만날 자리가 따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만날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가 왜 필요하겠는가? 기도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예수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나와 하나님이 직통하면 되지 않겠는가. 거추장스럽게 예수를 사이에 두고 기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분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지성소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을 비켜 가서 하나님 만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속는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이는 모두 한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와 사람의 연합 이도 한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그리스도라 한다면 그리스도와 사람의 연합을 교회라 한다. 이렇게 둘이 합해져야 뭐가 된다. 합해지지 않고서는 뭐가 되는 법이 없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한 육체가 된다”고 하는데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한다. 우리는 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합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사람이다. 사람은 무엇하고 합해야 하는데 사탄과 합할 수도 하나님과 합할 수도 있다. 창기와 합할 수도 있고 주와 합할 수도 있다. 사탄과 사람이 합한 것이 창세기 6장의 네피림이다. 네피림과 사람이 만든 것이 세상이다. 간단하다. 사람은 뭐와 만나서 만들어 낸다. 사탄과 만나면 네피림이 되어 세상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을 만나면 그리스도를 만들어 낸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연합을 위한 존재다. 밭은 연합을 위한 존재다. 밭 자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씨를 만나면 무엇을 낸다. 콩이라는 씨가 들어오면 콩이라는 열매를 내고 팥이라는 씨가 들어오면 팥을 만들어 낸다. 흙은 언제나 씨가 들어오면 연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색소와 페인트를 생각해 보면 하얀 혹은 무색 페인트에 빨간색을 넣으면 빨간 페인트가 되고 파란색을 넣으면 파란 페인트가 된다. 원래부터 빨간 페인트도 파란 페인트도 없다. 색소와 연합을 하면 어떤 색깔의 페인트가 되는 것이다. 빨간 색소를 넣어 칠하면 빨간 페인트가 되고 파란 색소를 넣어 칠하면 파란 페인트가 된다. 사람은 바로 그런 위치이다. 하나님도 사람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하고 사탄도 사람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한다. 하나님도 사탄도 스스로는 무엇을 할 수 없다. 사탄도 사람하고 연합해야 무엇을 할 수 있다. 사탄이 와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하고 연합하여 무엇을 하므로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직접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무엇을 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합세 해 하나님 말씀을 했다. 모세가 만약 사탄과 합했다면 사탄의 말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지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배필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중요한 위치에 있다. 우리가 누구하고 합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진다. 하나님과 사탄과 만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진다. 내가 하나님과 만나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내고 내가 사탄과 만나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열심히 세상을 만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탄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남자의 애기를 낳는다. 우리 집 강아지는 생산력이 좋아 계속 새끼를 낳는다. 암놈이니 어차피 씨를 받아 새끼를 낳게 되어 있다. 연합하도록 만들어졌으니 새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연합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합할 수 없다. 연합의 비밀은 신기하고 막을 수가 없다. 개들의 연합도 막을 길이 없다. 집안에 가두어 놓아도 어떻게 찾아오는지 찾아온다.
우리는 어차피 누구와 합해야 하는 존재이다. 창기와 합하면 한 육체가 되고 주와 합하면 한 영이 된다. 우리는 스스로 나를 지킨다든가 나른 만든다든가 어떤 사람이 된다든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 우리는 뭔가 합하는구나 합해서 무엇이 되는구나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주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 ‘무엇과 합할 것인가?’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와 합했을 때 율법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유대 사회 전체는 율법 세계이다. 앉고 서고 잠자는 것까지 모든 것이 율법 안에 있는 세계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의 윤리 가치관이 있다. 조선시대 하면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 남존 여비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유태사회는 율법이 정치경제사회 모든 전체사회를 지배했다. 중세시대에도 카톨릭의 가치관이 중세를 지배했다. 중세하면 컴컴한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을 억압하고 신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에. 문예부흥으로 세상이 뒤바뀌어져 혼란도 많았지만 중세는 어두운 시대였다.
똑 같은 하나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은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예수 시대는 어디를 가도 은혜 시대이다. “예수가 있는 곳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 위의 은혜더라” 하는 이 말은 모든 곳이 은혜라는 말이다. 무엇이 누구와 연합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사람은 독자적으로 독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계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연합을 통해 세계를 만드는 존재이다. 러시아 혁명이나 공산주의 혁명을 보면 사람이 공산주의 이념과 연합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중국대륙 북한 월남 캄보디아 등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 모두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사람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어떤 이념이 사람 속에 들어와 만들어 진 것이다. 저절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속에서도 이념을 빼 버리고 나면 다른 사람이다. 빨간 색 이념과 결합을 해서 빨간 색이 된 것이다. 러시아 사람이라고 중국 사람이라고 원래부터 공산주의 사람이겠는가? 아니다. 그 사람들은 무색 페인트와 마찬가지이다. 빨간 색소를 넣으니 빨간 페인트가 된 것이다. 중국은 10억 넘는 인구가 빨간 색으로 되었다. 내가 무엇을 행동하고 있고 이러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자기 스스로 하는 줄로 생각한다. 독자적으로 창안해서 자기 스스로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고 어디 주소도 본적지도 없는 무엇인가가 나와 연합을 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엇이 들어와서 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껍데기이구나’, ‘내가 주체자고 독존자가 아니고 무엇이 들어와서 그러는 것이구나’를 알게 된다. 무엇이 들어와서 그런 것이구나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엄청 크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한다고 한다. 그래서 고집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우기기도 한다. 자기 스스로의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아이들이 말 배울 때 보면 어디서 배웠냐고 물으면 자기가 배웠다고 하지 어디서 배웠다는 말을 안한다. 왜 그런가 하면 어디서 배웠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그냥 수없이 들었지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스스로 한 줄 안다. 그러나 사실은 어린아이가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말을 들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인데도 누구한테 배워서 무엇이 들어와서 말을 한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 벙어리가 애기를 키운다면 그 애기는 말을 하지 못한다. 부모가 말을 많이 한 애기들이 말을 빨리한다. 들은 것이 없으면 애기는 말을 못한다.
사람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과 합해 무엇을 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무엇과 합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번지도 주소도 없는 것과 합할 것인가 어디서 흘러들어 온지도 모를 것과 합할 것인가 불란서에서 들어온 것인지 미국에서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고 연합할 것인지 아니면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보증할 수 있는 사람과 연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에 윤동 형제가 학생 몇 명을 데리고 왔는데 김윤동 교수가 강의 때마다 나는 스승을 만나 이렇게 됐다고 해서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내가 놀랍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만나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내가 누구를 만나서 이런 인생이 됐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있다고 해도 그렇게 말을 못한다. 확실치 않은 불확실한 알지도 못한 어떤 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는 자기가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구체적으로 가령 김윤동 교수가 이현래를 만나 내 인생이 인격이 있다고 하니까 잘못되면 나에게 와서 항의할 수 있는 일이고 검증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자기 스스로 한 줄 아는 사람은 잘될지 잘못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분명하게 영향 받은 사람의 앞 일을 보면 자기도 그렇게 갈 것을 알 수 있다. 나에게 영향 받은 사람은 나를 보면 나도 저 사람 같이 되겠구나를 알 것이다. 그렇지만 불란서에서 뀐 방귀인지 미국에서 뀐 방귀인지 모르고 냄새 맡은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디서 자기에게 그러한 사상이 들어왔는지를 모른다. 그것이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를 물으면 모른다.
분명하게 연합을 한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갈 줄 안다. 옛날 충주에 있을 때 여학생 두 명이 와서 예언 잘하는 권사님께 장래 일을 알려고 간다고 하길래 장래일이 빤하지 장래 일을 알게 무엇 있냐고 했다. 나는 예수님께 이끌리고 있기 때문에 장래 일은 정해져 있고 알고 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줄 알고 내가 누구와 연합한지를 아니까 내 운명이 어떻게 될 지를 안다. 여러분이 누구로 말미암음을 안다면 자기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아는 것이다. 사기꾼이 좋아 사기꾼과 연합을 했다면 결국 사기꾼이 될 것이다. 사기꾼이 좋은 사람은 자연 사기꾼이 될 것이다. 자기 노는 대로 된다.
우리 교회 온 분들은 장래가 분명하다. 무얼 보고 왔기 때문이다.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분명하게 알고 간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앞에 누가 있지도 않고 자기를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어 자기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스스로 가고 있는가? 스스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많은 영향을 받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곳에서 잡동사니를 받아 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데 자기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겠는가? 자기가 누구를 보고 가는 것이 없는데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스도와 합하면 그리스도에게 간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와 합하면 아버지께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분이 가는대로 간다. 그분을 만나 그분과 합한 사람은 점쟁이 찾아갈 필요가 없다. 꿈꿀 필요도 없고 계시를 주십시오 할 필요도 없다. 그분이 우리의 계시이고 소망이고 그분이 우리 종착역이고 그분이 우리 목표이다. 그러므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 환하다. 빨간 꽃 핀 것은 빨간 감자 하얀 꽃 핀 것은 하얀 감자이지 캐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꼭 누구와 연합해서 일을 저지르는 자다. 내가 사고를 쳐도 누구와 연합해서 하는 것이고 선을 행해도 누구와 연합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한다면 하나님도 말릴 수가 없다. 어차피 스스로 하지 못하고 무엇과 합해서 되는 존재이므로 내가 설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대상과 합하면 나는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비록 내 삶이 엉망이다 하더라도 엉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과 연합을 하였기 때문이므로, 이제 희망이 있는 것과 연합을 하면 나는 희망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애기를 낳는 것과 이치가 똑 같다. 남자의 애기를 낳을 것인데 낳는 애기마다 싫은 것만 낳았다면 남편만 바꾸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여자는 참 편리하다. 남자는 자기 씨를 바꿀 수 없다. 여자는 바꿀 수 있다. 사람은 여자로 배필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사탄이 우리 남편이었다면 사탄의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결혼할 수 있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수 있다. 우리가 배필로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남자로 태어난 것은 영원히 바꿀 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으로 지어 준 것은 배필로 지어 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은 모두 여자이다. 여기서는 남자 여자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는 다 여자이고 배필로 지어졌다. 하나님과 합해서 하나님 것을 생산하기 위한 배필로 지어졌다. 어제까지 사탄의 생산물을 내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부터 하나님의 소산물을 낼 수 있다.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어떤 사람도 그렇게 못할 사람이 없다. 이 집회 오기 전까지 나는 사탄의 소산물을 내고 있었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집회를 나갈 때는 하나님의 소산물을 낼 수 있으니까. 시집을 다른 곳에 가면 된다. 남편만 바꾸면 된다. 참 남편이신 그리스도에게 시집을 가 버리면 지금까지 해결 못할 것 같았던 영원한 문제까지 다 해결되어 버린다. 옛 남편하고 살 때 그 남편 자식이 아닌 아들을 낳을 수 없지만 새 남편인 그리스도를 만나면 일시에 그 문제는 원인무효 되고 새로운 것을 생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전에 사탄의 자녀를 생산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아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다. 사람은 어차피 연합을 통하여 무엇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니까. 우리는 좋은 배필을 만나 좋은 생산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희망이 없어서도 오늘부터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되니까, 하나님과 합하면 되니까. 창기와 합하는 사람이 한 육체였듯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도록 지어졌고 그리스도의 성분을 생산할 수 있도록 지어졌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든 이유는 그분과 연합해서 그분의 것을 생산하려고 함이다.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생산된 그 생산이 온 땅을 점령하게 될 것이고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될 것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배필로 당신을 위한 짝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일로 여겼지만 이제 당신이 우리의 배필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우리처럼 복된 자가 없고 이처럼 복된 위치가 없습니다. 배필로서의 우리의 위치가 얼마나 신성하고 이 위치가 얼마나 견고하며 이 위치가 얼마나 복된 위치인지 주님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스스로 사는 자가 아닌 이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내가 독자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