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길가의 이정표는 부여에 가까워졌음을 알려준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면 강변길은 끝나고 공주 부여 간을 잇는 40번 국도와 합류하여 시내로 진입할 것이다.
강변을 벗어난 지 얼마지 않아 이내 길가엔 올망졸망 낡고 초라한 집들이 잇달아 늘어선 것이 전형적인 지방 소도시의 외곽 풍경이다. 부여로 들어선 것이다.
내가 부여를 처음 구경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봄 수학여행 때이다. 그때 우린 이미 국어 교과서에 실린 명문장의 ‘부여 기행문’을 배운 후이기에 부여는 우리에게 전설 속의 고도로 각인되어 있었다.
작은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작은다리 큰다리 건너 덜컹거리는 비포장의 불암나루 들길을 지나고, 십자거리 석성도 지나 부여를 다녀왔던 기억은 지금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때 어린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유적(?)은 부여 5층탑도, 처마 끝이 땅에 잇닿은 박물관 건물도, 낙화암 고란사도 아닌 군청 앞 로타리의 계백장군 동상이었다. 오른쪽 앞다리를 추켜들고 세 다리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버텨 선 말 위에 늠름하게 올라 앉아 있는 장군의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매우 뛰어난 조각품으로 보였던 것이다.
내가 대전에 내려와 살기 시작한 지 어느덧 20년, 근거리의 부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자주 찾는 드라이브 코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익숙한 시내 길을 운전해가다보니 이내 계백장군의 동상이 나타난다. 오늘은 부여가 목적이 아니니 그냥 지나쳐 규암으로 나가야겠다.
부여에서 규암으로 가는 길엔 백제교를 건넌다. 이 백제교는 우리가 부여로 수학여행을 왔던 무렵에 준공되었던 것 같다. 우리의 여행 일정엔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시 우리는 황산나루보다도 먼저 규암나루에 다리가 놓인 것은 부여 출신 실력자인 JP가 힘을 썼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주장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부여에서 규암 방향으로 금강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강가에 수북정이 있다. 백제 시대의 유적은 아니지만 부여 8경으로 꽤 이름이 알려진 정자이다. 그 정자 아래엔 백제 흥망의 전설이 깃든 자온대가 있고...
규암 사거리는 충청 내륙지방에 위치하여 청양, 보령, 서천으로 두루 나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오늘은 금강을 따라 떠난 백제 여행길이기에 좌회전하여 임천, 세도 방면으로 가는 29번 국도로 들어섰다.
길은 잠시 강변을 따라 나아가다 곧 비닐하우스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들길로 들어선다. 하긴 그 옛날 백제시대에는 수도권 지역이었을 이곳에 이처럼 넓은 들이 있었기에 왕도 사비는 한결 풍요로웠으리라.
임천의 옛 이름은 가림군, 아주 먼 옛날부터 번성했던 유서 깊은 고을이다. 백제의 웅진시대에 이미 이 지역의 진산인 성흥산에 산성을 쌓고 이 지역 방어의 기점으로 삼았음을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백제가 망한 후에는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던 흑치상지가 이곳에 주둔하며 나당 연합군과 대항했던 곳으로 지금도 산성에서는 전몰한 백제 부흥군의 충혼을 기리는 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29번 국도는 성흥산의 서쪽 사면으로 지나지만, 반대편인 동쪽 면에는 봉화대와 함께 오래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어 강경 옥녀봉의 느티나무와는 세도벌판의 동서쪽에서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곳만을 목적으로 여유롭게 찾아와 성흥산에도 오르고, 가림성과 대조사도 둘러봐야겠다. 또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성흥산의 느티나무 아래 서서 석양 속에 더욱 밝게 빛날 옥녀봉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봄비 속에 촉촉이 젖어가는 성벽을 먼발치에서 그냥 지나쳐 갈 뿐이다.
임천 다음은 양화이다. 양화는 선친께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본향 서천을 떠나 맨 처음 이사했던 고장이다. 이곳에서 큰형과 누나, 그리고 둘째 형까지 태어난 후 강경으로 나와 정착했기 때문에 내 어린 시절에는 이곳 양화의 이야기를 무시로 들으며 자랐다. 양화 지경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만나는 ‘입포’도 아주 낯익은 지명이다. ‘입포(笠浦)’는 우리에겐 ‘갓개’로 더 많이 알려져서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강경장’ 다음으로 많이 들으며 자란 말이 ‘갓개장’이었다. 군산에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조깃배들이 강경에 닿기 전에 들러 선상시를 벌이던 곳이 ‘갓개포구’이고 이 ‘갓개포구’에서 열리던 장이 ‘갓개장’이다.
아직 서천에 남아있는 선산을 다녀오려면 강경에서 세도로 건너 와 이 길을 지나는 것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한 해에도 몇 번씩 다니며 익숙해진 길이다. 그때마다 다음으로 미루며 그냥 지나쳤던 갓개나루도 들르고 웅포대교로 금강을 건너 익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늘의 여정이다.
서천으로 가는 29번 국도를 잠시 벗어나서 이정표를 따라 왼쪽의 좁다란 길로 들어섰다. 산모롱이를 돌아들자 곧 이백여 가구 남짓 아담한 농촌 마을과 함께 굼실굼실 파도치는 넓은 금강이 나타난다.
채만식은 그의 대표작 ‘탁류’에서 부여를 지나온 백마강 맑은 물은 강경에 이르러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이 깨어지며, 충청 전라의 접경인 이곳에 이르러서는 강 넓이가 제법 양양하게 퍼지고 조수까지 섭슬려 더욱 탁해지니 이제부터가 온전한 금강이라고 하였다.
그 거칠고 탁한 물살이 굼실거리는 금강은 옛 모습 그대로이겠으나 북적이고 흥청댔을 ‘갓개나루’나 ‘갓개장터’는 흔적조차 없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봄비 흩날리는 조용하고 소박한 농촌마을로 바뀌어 이처럼 옛 추억을 더듬으려 찾아오는 여행객에겐 세월의 무상함만을 더해줄 뿐이다.
제법 굵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 저만큼 웅포대교가 흐릿하다. 강 건너 익산은 황혼기 백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였던 서동의 땅이다. 금마, 망성, 왕궁 등은 그에 얽힌 전설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강경에서 자란 우리들에겐 너무도 낯익고 반가운 이름들이다.
갓개포구에서 다시 29번 국도로 나와 서천방향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웅포대교’로 가는 길이 좌측으로 갈라진다.
아직은 차량 통행이 뜸한 웅포대교를 건너 익산 땅으로 들어갔다.
익산은 우리에게 결코 낯선 외지가 아니다. 참 많은 인연들로 우리는 익산과 연결되어 있다. 초, 중, 고교 시절의 친구들 중엔 익산으로 진학하거나 반대로 익산에서 유학 온 친구들을 많다. 나에겐 외가가 있어 익산이 더욱 친숙하고 정이 가는 고장이다. ‘익산’이란 이름이 주는 정겨운 어감을 특히 좋아하기에 ‘이리’ 시가 ‘익산’ 시로 개명하였을 때에는 내 일처럼 기뻐도 했었다.
강변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웅포는 내가 자주 찾는 곳이고, 단골로 들르는 음식점도 있다. 처음엔 우여회가 맛있어 찾기 시작한 집인데, 커다란 뚝배기에 한가득 담아주는 왕갈비탕이 또한 푸짐하여 빗속에 으스스 한기를 느끼는 오늘 같은 날엔 저녁을 먹으며 몸을 녹이기에 그만이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당초에 집을 나설 땐 돌아오는 길에 강경을 들러 젓갈을 좀 사려고 했으나, 늦은 저녁 시간에 비에 젖어 추레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아내와 아이들 때문에 곧장 통과하기로 하였다.
논산에서 1번 국도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엔 백제 최후의 격전지 황산벌을 지난다. 백제를 테마로 떠난 오늘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그만인 코스다.
다만 한 가지, 얄팍한 상술로 값싸게 개발한 관광지를 보는 듯하여 지나칠 때마다 짐짓 외면하게 되는 것은 연산 부근에 조성되어 있는 계백장군 묘소이나, 어느덧 깜깜해져 차창 밖 풍경을 볼 수 없으니 다행스럽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줄기 속에 젖은 도로면에 반사되는 불빛만이 운전자의 눈을 부시게 한다.
첫댓글 여! 별밤! 그간 잘지냈는가? 오랫만에 카페에서 자네의 보고싶은 글을 대하니 반갑기 그지없네.어릴적 같이 컷던 죽마고우라서 그런지 공유하고있는 옛날의 기억과 느낌도 비슷하구먼... 오랫만에 자네따라 고향주변 한바퀴 돌으니 마음상쾌하고 즐겁네.자주 카페에서 만나길 비네. 참! 제수씨께 안부전함세.
별밤의 금강따라 떠나는 백제기행을 읽노라니 어느새 나도 한바퀴...작은다리, 큰다리, 불암나루, 십자거리, 석성, 부여.............서천,..임천 양화 세도...강경..그 길을 따라 떠나고 싶어지네...
별밤님의 여행기 너무도 자상하게 써 네려가 나도 같이 따라간 느낌이드네 고마워
글쓰는 솜씨가 소설가 이상입니다 카페에 이런 좋은 글를 써준 친구에게 다시한번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석성 언저리 얘기도 많이 써 줘 더욱 감명 깊었어 .. 어렸을때 우리집에서 바라보는 성흥산과 느티나무를 늘 쳐다보며 궁금했는데 지난해 집사람과 같이 가서 올라가 보니 매우 경치도 좋고 그곳에서 우리동네와 우리집이 보여 매우 좋았으나 친구처럼 글로 표현은 못했지 그 느티나무와 강경 옥녀봉 나무와의 관계는 친구의 글을 보고 새삼 느끼게 만드는군.. 역시 소설가는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