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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후 아버지는 계속하여 서울에 머물고 계셨다. 나는 졸업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훈성여중(나중에 현정화가 다닌 계성여중으로 이름이 바뀜)에 일년간 근무하다가 그 다음 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쌘 호제 주립대학교의 대학원으로 입학하였다. 대학원으로 가기 위해 간것이 아니라 미국내에서 종족음악학(ethnomusicology)으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그 학교에서 세계민속전통음악 클래스에 한국음악을 강의할 사람으로 내가 가게 된 것이었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음악대학장인 Dr. Gibson Walters가 나와의 회담에서 '자 우리 이렇게 타협합시다, 당신이 대학원에 가서 공부한다면 우리가 장학금을 지불하고 당신은 대학에서 한국음악을 가르키는것이 어떻습니까' 라 하여 마치 장사꾼 거래같아 좀 이상했지만 가만 생각하니 기왕 미국에 온 김에 그것도 괜찮은 생각같고 반대할 특별한 이유도 생각이 안나 승낙을 하였다.
점잖은 교수님께서 어찌 장사꾼처럼 말씀하시는가 하는 의문은 그 후 바로 그것이 우리와의 다른 문화차이라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적으로 먼저 신뢰하고 대충 시작하는것에 비해 그들은 기계적일만큼 처음에 꼼꼼히 계약을 하여 사람을 못 믿는 건가 싶을만큼 불편한데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것이 문제를 발생할지도 모르는 많은 기회를 아예 차단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한 것 같다. 외국 기업 상담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회사대포들과 상담을 하면 대충 해놓고 우선 술부터 한잔 합시다 한다고 비지니스는 철저하지 못하고 근무중에 술을 마시는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해도 될까 하며 계약체결을 망설인다는 얘기들도 같은 문화차이일것이다.
물론 비지니스에도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친해지면 더 좋치만 만일 둘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그래도 우리 식의 인간적인 유대를 더 선택하고 싶다. 기계적인 인간보다 사람냄새나는 인간, 아름답고 여유있는 세상을 위해선 필수적인 인간상 아닌가.
젊다는것은 무모하리만큼 용감하다는 장단점이 있으니 도대체 나의 영어실력은 생각치도 않고 무턱대고 '다야다리' (이건 일본말이 가장 적격이다) 한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생각도 못할 무모함이었지만 그 때는 그렇게 정열만 가지고 대 들었다.
나는 젊어서 남들보다 좀 어려 보이는 편이였고 특히 동양인은 더 어려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은 내가 고등학생같아 보인다 하였다. 그때 미국엔 한창 히피족이 유행할때라 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길게 길러 옷도 일부러 허름하게 입는 그들이 내게는 마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같이 어른스러 보이고 어떤 학생들은 산적이나 해적같이 보여 무섭기도 하였다. 처음엔 떨고 문법도 엉망인 영어로 떠듬거리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난다. 점점 그것도 습관이 되어 되던 안되던 강의를 해 나갔는데 그들은 우리나라 학생들과는 달리 강의시간 중 질문을 많이 해대어 혼이 났다. 질문 좀 안하면 좋겠는데 질문하지 말라할 수도 없고,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물어 나는 답을 어떻게 할 것인가 보다 질문 자체를 알아 듣기 힘들어 난감하였다.
항상 그렇치만 젊은이들이 쓰는 용어는 어느나라나 어른들과 조금 달라 내가 배운 교과서 영어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매번 못 알아듣는다고 말할 수가 없어 대충 겐또(또 일본말)를 쳐서 적당히 둘러 대답하면 질문의 욧점은 그게 아니라며 정확하게 알아들을 때 까지 거듭 질문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슬랭같은 젊은이들 영어단어는 쓰지말고 천천히 말해달라'라고 주문하였다. 모두 웃으며 그러겠다고 하여 그 후론 또박또박 말해 주어서 한결 나았다. 예를 들어 good 이란 단어를 groovy 라고 (우리말로 치면 '끝내준다' '죽여준다'식) 하니 어찌 알아 듣겠는가.
그것도 한번 새 단어가 생겨서 계속 쓴다면 알게 되겠는데 귀에 익을만 하면 그 단어도 곧 다른 단어로 바뀌니. 그 후에 한번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최신식 유행어를 쓴다며 groovy! 라고 했더니 젊은애들이 그게 무슨 뜻이냐하여 설명을 해 주었는데 아 그런 뜻이라면 뭐라며 새 단어를 가르쳐 주던 걸 지금은 기억을 못하겠다. 기억해봤자 지금쯤은 또 바뀌었을테니 머리에 혼란만 올 것이겠고.
해외 나가보면 정말 느끼는 것이 우리나라 영어교육이라는 것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 고등학교까지만 해도 6년은 주(週) 너덧시간은 배우고 있는데 도대체 쉬운 회화하나 못한다는 것은 학생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교육방법에 단단히 큰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시험치기위한 무슨 암호같은 문법만이 아닌 일이년만 배워도 회화위주로 살아있는 교육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내가 쓰는 문법이 미국에선 더 이상 안 쓴다 하여 당황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lest it should be.. (.. 뭐뭐 할가봐) 같은 표현을 쓸 일이 많은데 그들은 알아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점은 실용주의를 주장하는 미국 식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에 오는 미국인들은 우리말을 약 반년만 배우고 와서도 회화를 하지 않는가.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우리도 그 교수 법을 좀 배워오면 좋겠다.
그런데 처음엔 그들이 남녀학생들 모두 나보다 거의 키도 크고 성숙해 보여 내 강의를 권위있게 받아 줄 것인가, 고등학생한테서 무얼 배우는것 처럼 나를 우습게 보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들에 비해 모두 일당백(一當白)으로 여물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의 우수한 유전인자인 탓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동안 처해왔던 환경은 대장간의 연장들처럼 뜨거운 불과 망치질로 단단하게 단련되어 왔다는 것을 그들을 보며 느낀다. 별로 단련될 거친 환경 조건도 거치지 않은 안락한 풍요속에서 커온 그들은 덩치만 컸지 속은 어린애처럼 순진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TV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가 보면 하나도 우습지 않은 얘기들을 어른들도 배를 쥐고 웃고, 정부에서 하는 말은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국영화들도 보면 무슨 만화캐릭터가 중간에 끼어든다던지 주인공이 갑자기 괴물로 변하거나 하는 어린애들 만화같은 비 현실적인 스토리가 많치 않던가.
나는 수업시간에 준비해간 닐 테잎(그땐 아직 카셑태잎도 안나왔을때라)의 녹음된 우리 음악을 들려 주었다. 예로 대금가락을 틀어주고 'Liste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인가' 하며 내가 눈을 스르르 감고 감상하면 그들도 같이 눈을 감고 천상에나 간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쉽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우리음악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이 없는 그들은 곧이 곧대로 우리 음악의 그 우수한 절대 가치 속으로 금방 빠져들어 어떤 의미에선 우리나라사람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쉬웠다고도 할 수 있다. 음악이 끝난 다음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가락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라 하며 무서운 표정으로 쏘아보면 'No, no!' 하며 어린애들처럼 고개를 마구 흔들어 속으로 웃음이 났다.
가끔 특별 서비스로 한복도 입고 가고 가져간 거문고를 직접 연주해 보이기도 했는데 멋있는 연주라고 무척 신기해 하고 그 때만 해도 20대 초반의 젊을 때라 옷걸이가 괜찮았는지 한복도 모두 예쁘다고 감탄을 하였다. 거기에다 나는 한복의 선(線)에 대해 설명하면서 팔을 들어 소매의 이 곡선을 보라, 또 버선발을 들어 보이며 버선과 고무신의 곡선에 대한 미와 의미를 그럴 듯하게 설명하면 완전히 매료되어 모두 한국의 팬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정말 아름다운 사람(beautiful person)이라 했는데 그 이유는 내게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이 매 순간 넘쳐난다며 '우리는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We love the person who loves his or her country)' 라 하였다. 그들이 만일 우리나라의 친일파와 그 자손들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We hate the person who betrays his or her country! 라 하며 ugly person 이라 하지 않았을까.
캠퍼스에선 연일 베트남전쟁반대 데모로 확성기를 틀어놓고 시끄러웠다.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모두 수업은 들어가면서 틈틈이 빈 시간에 데모에 참석하는 그 또한 실용주의 모습이라 나는 그것이 또 이상하였다. 수업이고 뭐고 확 다 때려 치우고 화끈하게 거리로 나가 데모를 하고 취루탄을 맞아가며 온 몸으로 대항하던 식을 보다 미국애들 데모하는 걸 보니 시시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어쨋든 학생들은 매우 진지했고 그들은 수업과 공부도 해가며 최선을 다해 틈틈이 항의하고 있었다.
그 대학엔 베트남 학생들이 제법 많이 유학와 있었다. 전쟁중에 어떻게 유학을 그리 올 수 있었나 했더니 미국 정부에서 베트남 전역에 공고하여 시험으로 우수한 학생들을 수백명씩 선발하여 풀 스칼라쉽으로 미국유학을 시키고 있던 케이스였다.
전쟁 중이라 그 유학조건은 더 달콤했으니 거기 뽑혀 오는 학생들은 전국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층이었고 과연 그들은 미국에 와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정부에선 그들에게 아파트와 생활비 책 학용품 등록금 등 일체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대신 주말에는 모두 모여 미국의 현대시설을 관람하거나 최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는 등 서서히 미국의 문명의 이기에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절대로 미국내에서 결혼을 하면 안되며 졸업하면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도 있어 그들끼리 사랑엔 빠져도 결혼까진 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그렇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들이 고국으로돌아간 다음 모두 국가의 중요자리에서 중요일을 담당하면서 친미파로 활동할것을 미리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빅 브라더의 음흉한 음모를 보는 것 같아 끔찍스러워 될수 있으면 그들을 피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들 중 한명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자 금새 표정이 굳어지면서 한국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자신의 동족을 죽이고 있는가를 아느냐 했다. 나는 한국 정부에서 월남에 군인들 파병하는 것을 절대 반대하는 많은 한국인들 중 하나이다, 정말 미안하다 했더니 그는 표정이 부드러워졌고 그 대화는 금방 그들 사이에 퍼져 그다음부터 나는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 또한 미국에 팔려 온 벨도 없는 애들이라고 그들을 피하고 있었는데 그 후에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미국은 헛돈을 쓰고 있었고 그들은 공부는 하지만 정신은 조금도 흩으러지지 않고 조국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같으면 빨갱이라며 북쪽을 욕했을텐데 그들은 이데올로기보다 동족이라는 형제애가 더 강하여 한국군들이 자기들 형제들을 죽인다고 분개해하는것이 내게는 참 신선해 보였다.
그 후에 월남이 패망하고 미국이 철수하고 난 후 미국정부의 돈으로 공부한 그들이 혹시 숙청당하거나 벌을 받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전후 베트남은 아까운 인재를 그렇게 낭비하진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 그들 월맹 월남 모두가 그렇게도 존경하고 따르던 호 아저씨(호지명)의 '이적행위자를 죽이지 말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라 모두가 우리 국민이다' 라는 말씀을 그들은 저버리지 않았을 터이다. 그 다음해 호지명은 죽었지만 죽은 날 미국까지도 국기 조개게양을 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 정도로 호지명은 지구상 모든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 주말엔 그 학교 한 교수부인이 몇몇 외국인 학생들을 초대해 포드 자동차공장을 견학시켜 주겠다하여 나도 참석하였다. 가보니 나 외에도 동양인 남학생 세명이 와 있어 나는 여학생이라고 앞자리 교수사모님 옆 조수자리에 앉고 남학생들은 뒷자리에 세명이 앉았다. 그런데 두명은 활발하고 한명은 무언가 우울하고 시무룩해 보였다. 차에서 서로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두명은 베트남에서 왔고 나머지 한명은 놀랍게도 한국에서 왔다 하였다. 내가 먼저 한국에서 왔다 할때도 아무말도 없어 나는 인상으로 중국인인가 했더니, 확인해 보려고 우리말로 정말 한국사람이냐 물었더니 한국말로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선 차(車)를 만든다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그 때 포드 공장의 광경은 내게 충격이었다. 처음엔 자동레일위로 움직이는 뼈대만 있는 차에 직공들이 부품들을 척척 조립해 넣으면 차가 레일위를 천천히 지나 끝에 도달할때는 완벽한 차 모양이 순식간에 완성되어 있었다. 아 우리나라는 언제야 이런 공장을 세우고 차를 만들수 있을까 싶어 나는 부러워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로부터 몇해 안가 우리도 차를 만들고 이어 그 미국에 수출까지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상상이나 했겠는가.
돌아가는 길엔 쑤퍼마켙에 들려 간단한 야채를 사서 그 교수댁으로 가서 내가 한국요리를 선 보였다. 납작한 남비에 숙주 당근 양파 버섯 등 야채들을 돌려담고 가운데엔 소고기채를 담아 그냥 부글부글 끓이기만 하는 전골요리였는데 모두 참 맛있다고 많이 먹었다. 전기밥솥이 없던 시절 그냥 남비에 밥을 하고 공기에 밥을 다 푼 다음 바닥에 누른 밥에 뜨물 받아둔것을 붓고 다시 끓여 누른밥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한국인인 미스터 리가 그날 눈을 빛내며 얼마나 많이 먹던지, 특히 마지막 누른밥은 정말 맛있다며 부엌을 자꾸 드나들며 더 먹어 대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말이 없고 시무룩하기만 하던 그가 얼굴이 밝아지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그는 지독한 음식향수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학교에선 자주 외국 유학생들을 위해 강당을 빌려주며 할당된 학생회 회비를 희사해 주었다. 어떤 저녁은 'Chinese Night' 'Japanese Night' 'Iranian Night' 'Indian Night(인도의 밤)' 'Indonesian Night' 등등 이었고 그날만 되면 학생들이 그 나라의 전통옷들을 입고 전통문화, 주로 음악을 알리는 행사로 온통 그 유학생들의 신나고 즐거운 대 축제가 되고 각국의 많은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이 같이 관람하며 하룻밤을 즐기곤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부끄럽던것은 Korean Night 을 하라고 하면 그 당시 유학생 수로 2위를 달리던 많은 한국학생들이 그 누구도 한국악기를 연주하거나 보여줄 어떤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보여줄것이라곤 그저 기타를 치며 미국 팝송이나 부르는 정도였고 그것을 '한국의 밤'에 부를수도 없어 우리는 문화적으로 고아신세가 돼 있었다. 도대체 그 많은 유학생들이 있으면서 자기 나라의 전통예술을 보여줄수 없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나는 외국인학생클럽에서 만나 친구가 된 마사꼬가 자기도 출연한다며 특별히 나를 초청해서 '일본의 밤'에 참가해 보았다. 학생들 모두 기모노와 전통의상을 입고 와서 일본말을 지껄여대어 나는 마치 일본에 와 있는 듯 하였다. 마사꼬는 사미셍을 치며 노래를 불렀는데 신청자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끼리 기량을 보고 뽑은 중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자기가 합격했다고 아주 좋아했고 다른 출연자들도 자부심들이 대단한듯 했다. 마지막은 다도(茶道)시범을 보여주는 프로였는데 매우 정적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정을 오랫동안 보여주는것은 좀 지루하여 무대작품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다도라는것도 실은 세조때 조선을 방문한 일본 승려가 김시습에게서 차를 전수받아 가서 다도를 완성시켰으니 일본 다도의 출발은 조선이 전해준 풍습아닌가.
우리 조선의 역사와 전통은 모두 열등한것으로 조선인들에게 열심히 세뇌시켜놓고 정작 자신들 전통은 사랑하도록 한껏 장려하고있는 그들이 나는 그날 밤 솔직히 분노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들 탓만하고 분노만 삭이며 가만히 죽어 지낼것인가. 왜 우리는 깨어나서 우리의 우수한 전통을 되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일년에 한번은 International Fair(국제 장날) 라고 캠퍼스에 각나라 학생들이 모여 자기나라 음식을 만들어 팔며 선보이는 축제가 있었다. 한국학생회라는 것도 있긴 했지만 여학생들은 한 명도 없고 모두 남학생들만이었는데 한국남학생들은 하나같이 어려서부터 남이 해주는 음식만 받아 먹을 줄 알지 자신이 무엇을 만들 줄은 몰라 이 또한 한국학생들만 고아들처럼 참가할수 없는 행사였다. 다른 나라들 학생들은 모두 남학생들이 주도를 하고 여학생들은 그냥 참가만 하는 정도인데 왜 우리만 그런가 싶어 나는 캠퍼스를 거닐며 우울하였다.
나는 그날 캠퍼스 한쪽에서 열린 국제 패션쇼에 초대받아 한복을 입고 무대위를 거닐었다. 모델워킹이란걸 한번도 해 본일이 없지만 TV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 천천히 걸으며 우아하게 미소까지 만들어 보였다. 외부에서 특별히 초대되온 듯한 40대의 디자이너로 보이는 세련된 여자가 학생들의 옷을 보며 즉석 해설을 했는데 내가 나서자 대단히 아름다운 한국 옷이라고 찬사를 보내며 내 색동저고리옷(요즘은 왜 어른들이 색동옷을 안입는지 모르겠다) 이 참으로 colorful 하고 어떻고 하며 칭찬을 늘어 놓다가 끝에 가서 pragnant woman (임산부)들이 입으면 참 좋겠다는 멘트 한마디에 그만 내 기분이 잡쳐 버렸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만 어린 아가씨에게 할 소리인가.
베트남 학생들은 그 축제 한달 전부터 들떠서 모두 모여 회의를 열고 어떻게 본국으로부터 그 특수재료들을 공급받을것인가 또 한사람 당 얼마를 갹출하는가 등 세부 계획을 짜는것에서부터 이미 그들만의 즐거운 축제는 시작되어 있었다. 새우를 양념해 어떤 특별재료로 싸서 기름에 튀기는것이 그날의 주요 메뉴인데 그 재료란 지금보니 월남쌈에 모든 재료들을 싸는 그 쌀로 만든 투명한 얇은 막 같은것이었다. 나는 집없는 고아처럼 부러움으로 그들의 축제를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내가 도울수 있는 것으로 그날 포장마차앞에 써 붙일 안내판이 좋을것 같아 정성껏 새우그림이랑 음식그림을 그려주었더니 아주 잘 되었다며 좋아하였다.
그날 지나다 보니 그 새우그림을 높이 매달아 놓고 있어 나로서는 큰 생색을 낸 셈이다. 나는 그들의 독립과 통일하려는 의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한국군들이 잔인하게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데 대해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었다. 사실 나는 프랑스제국주의자들을 자력으로 내몰아내고 이번엔 미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데 대해 속으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Fried Shrimp, only 10 cents!" 라며 베트남 한 여학생이 포장마차 앞에서 씩씩하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는데 아 나도 저렇게 장똘뱅이 아즘마처럼 한국 포장마차앞에서 소리높이 외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하였다. 그날 장사는 대 성공을 거두어 나중에 계산해보니 상당한 이익금이 남아 한사람 당 꽤 많은 액수가 돌아갔다고 한다.
그 날 월남 여자애들은 모두 하늘하늘 하얀 아오자이를 입고 나와 일하는것이 너무 아름다워 몇일 후 한 여학생에게 나도 꼭 한번 그 아오자이를 입어볼수 없겠느냐 말해 보았다.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한참 떠들더니 그 다음 날 자기들중에선 그래도 제일 덩치가 있다는 한 학생의 옷을 빌려주었다. 나는 좋아서 당장 입어 보았는데 맙소사, 한국인 치고 그래도 좀 가는 편인 내게도 그 옷은 들어가지 않았으니 몸집이 작고 날씬한 그들의 옷은 마치 내게 소인국나라 사람들속에 들어간 대인처럼 더 입으려면 옷이 찢어질것 같아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인들은 내가 본 중에선 (피그미족은 안 보았으니 모르겠고) 지구상 가장 키와 몸집이 작은 민족 같았는데 가장 덩치가 큰 미국인들과 싸워 이긴것을 보면 어찌 대단하다하지 않겠는가. 유럽인들은 미국인들에 비하면 그렇게 크다 할수 없으니 미국인들은 유럽에서 환경 좋은 대륙으로 건너가 마음껒 잘 먹고 잘 살아 더 커진것 같았다. 다만 그들의 역사가 우리 동이족인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거의 다 잡아 죽인다음 그 무덤위에 세워진 죄악의 문명이니 그 죄값은 언젠가 다 받을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믿는다.
그 축제에서 일본남자애들은 머리에 일본국기가 그려져있는 흰 띠를 질끈 매고 테리야끼와 스끼야끼를 만든다고 온갖 맛있는 냄새와 연기를 풍기며 야단들이었고 중국애들은 본시 요리에는 모두 일가견이 있는지라 요리하는 남자애들이 모두 신이 나 있었다. 이란애들은 신이 나서 못 참겠던지 음식 파는것은 한 두명에게 맡겨 제쳐두고 포장마차 옆에서 열댓명이 어깨동무를 하여 원을 만들어 자기나라노래를 크게 부르며 돌아가면서 춤추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들이 모두 참으로 아름답고 귀엽게 보였다.
우리도 불고기나 비빔밥 떡 등을 만들어 판다면 그들보다 얼마든지 더 훌륭한 음식이 될텐데 싶고 그 포장마차옆에서 돌아가며 아리랑춤을 덩실덩실 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부럽기만 하였다.
나는 천천히 각국 나라 학생들의 포장마차들을 구경해 보았다. 조금 가다 보니 한 작은 관목(bush)나무 그늘아래 숨어있듯 혼자 외톨이처럼 앉아있는 한 남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눈에 익다 싶어 가까이 가보니 그는 몇일 전 포드자동차 견학에 같이 갔던 이군(李君)이었다.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그는 서울대 수학과 2학년을 다니다 이 학교 1학년으로 들어온지 얼마 안되며 아직 모든것에 익숙치 않아 고생이 많은 듯 했다. 그런데 내게 이상하게만 듣기는 것이 그는 말 하는것 마다 불평과 죽는 소리만 하여 미국에선 자신의 안 좋은소리는 될수있으면 예의상 안하는 풍토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음식이라는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자기가 먹던 자기나라의 음식을 먹으며 만족할수 없다면 정신상태나 심리상태도 병적이 된다는것을 깨닫는다. 그 정도까지 되면서 왜 자기 손으로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을수 없었을까.
그때 나는 그 이군과 같이 고아처럼 망연자실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뼛속깊이 느꼈다. "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지 못하는자는 국제적 고아가 된다" 고. 실지로 지구상엔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가 없는 신흥 나라도 있고 그런 나라는 할수없이 남의 것이라도 수입하고 배워야 하겠지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우수한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외면하고 있다 생각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다시 신채호선생이 말한것이 생각났다. "우리는 곳간에 금은보화를 쌓아 두고도 남의 집 문앞에 가 엎드려 밥빌어 먹고 있다" 던 말씀이.
그로부터 약 십년 후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말해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그 말은 내가 먼저 깨닫고 그 후 학생들에게 노상 말하던 것이었다. 누가 먼저 말했다는게 중요한것은 아니니 앞으로 그 말의 실지 뜻을 국민 모두 깊이 깨달아 실천해 나갔으면 한다.
또 그 학교엔 한해에 한번씩 'International Night'이라는것이 있어 여러나라 학생들이 한사람씩 나와 전통음악이나 춤을 보여주는 축제가 있어 나는 거기에 초청받아 당당하게 한국 춤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단체보다는 개인이 강하다더니 그날 그 모든 나라 학생들의 공연 중 한국 춤이 단연 돋보였던 것이다.
나는 미국오기 전 국립국악원에 가서 두주일동안 한국춤을 배웠다. 살풀이춤과 부채춤으로 두주일이란것은 춤사위 순서만 겨우 익힐수 있었을 뿐 구체적인 동작에 대해선 배울 틈은 없었다. 살풀이는 그냥 영어로 Salpuri 라 하고 부채춤은 Fan dance 라고 하였는데 그날 많은 다른 나라 학생들의 춤 중 가장 열열한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나중에 무대 뒤에 긴 줄이 서 있길레 무엇인가 했더니 나를 만나기 위한 관객들의 줄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확 한꺼번에 몰려들어 환호를 하고 멋있었어요! 라던지 하는 소리를 내 지르는데 비해 그들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차분히 줄을 서 기다려서 나는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그날 미국학생들은 자신의 문화를 보여준다며 장발머리를 휘날리며 몸에 달라붙는 이상한 옷을 입고나와 6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사이키델릭 락을 연주하였는데 곡이 끝나자 지역주민들이 과반수였던 관객들 중 한 중년 여성이 "Too loud!" 라 소리쳐서 관객들이 모두 공감어린 폭소를 터트리었다. Too loud to stand, 일렉트릭 기타와 고함치는 듯한 노래들은 참고 들어주기엔 너무 소리가 커 견디기 힘들다 라는 뜻인데 20 대였던 나도 귀가 아파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60년대에 접어 들면서 미국을 시발로 해서 팝음악은 세대 간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지역주민들과 학생들은 '내가 본 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이다' '너무도 감동스런 춤이었다' '천상에서 천사가 추는 것 같다' '당신의 춤엔 나를 감동시키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등 나를 포옹하고 입을 맞추고 손을 잡고 흔들어 그날 나는 뺨에 구멍이 나는 줄 알았고 내 손은 아예 내 놓은 남의 손 같았다. 나는 우리 춤이 아름다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줄은 몰라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여러곳에 초청을 받아 춤을 추게 된다. 춤을 추고나면 대개 내가 얼마나 오래 춤을 배웠길레 그렇게 추는가 하고 묻는데 2주일 배웠다는건 하나마나한 기간이라 그냥 한번도 배운일이 없고 한국인이면 다 이 정도면 출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럴리가 있느냐고 모두 놀래서, '한가지 내가 말할수 있는건 내가 한 춤동작 하나하나 출 때마다 나는 내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나의 춤을 조국에 바친다는 염원으로 춘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도 느껴졌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또한 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는것 같았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건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은 마친가지 일테니까. 그러나 확실히 우리 한민족의 나라사랑은 역사도 짧고 별로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는 미국인들과 비교할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본다. 만일 그들이 우리나라처럼 다른나라에게 침략을 당해 식민지가 된다면 과연 우리처럼 오랫동안 목숨바쳐가며 투쟁하려는 의지가 있었을까.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문제가 생기는것이 같은 꽃노래도 한 두번이라고 같은 춤만 자꾸 보여주게 되니 고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국악원에서 좀 더 많은 춤을 배워 올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그런 후회할 여유도 시간도 없어 나는 궁리를 하기 시작하였고 궁즉통이라, 드디어 내 스스로 작품을 창작하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곡에 제목을 붙이기로 하여 그냥 Salpuri라고만 하던것을 예를 들어 'The Ancient Mystery(태고의 신비)' 라 하여 이미 내가 춤을 추기전부터 어떤 환상적인 선입견을 갖게 하였고 그것도 출때마다 제목을 다르게 하여 'Moonlight in Paradise(천상의 달빛)' 이라든지 'The Shadow of Angel(천사의 그림자)'같은 제목으로 미리 내가 천사처럼 보이게 그리고 무대불빛도 미리 부탁하여 어두운 무대에 스팟라잇으로 내가 나타나는 곳을 비추게 한다던지 고심을 많이 하였다. 옷도 조금씩 다르게 치마 저고리를 바꿔입고 머리 모양도 큰 조화를 사서 머리에 꼽고 큰 귀걸이도 하기도 하였다. 원래 우리춤엔 머리에 꽃을 꼽고(북한에선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귀걸이를 하는건 아니지만 Who knows! 나는 우선 어찌하든 매번 다르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은 누가 정하는가, 내가 그 법을 깬다. 누군가 처음엔 깨는것 아닌가! 반주 음악도 다른 음악으로 바꾸었고 춤사위도 내가 즉흥으로 지어내었다. 창조와 발명은 본시 절박한 필요에 의해 태어나는 법이니. 사실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우리춤을 보면 그렇겠지만 같은 춤사위인지 다른것인지 잘 인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사람들은 처음 시작할때와 끝날때만은 구분을 하여 그것만은 다르게 하였다. 어느날은 무대 왼쪽에서 나오고 어느날은 오른쪽에서 또는 무대 한가운데 엎드려 있다 서서히 일어나기도 하고.. 그러니까 Miss Wu-in Lee 라는 사람만 같고 춤과 음악 제목 모든것이 다른 춤이라 사람들은 무조건 내 춤을 보러 오기 좋아 하였다.
나는 그 지역사회에서 유명 인사가 되어 신문에도 한면 가득 춤추는 사진과 함께 크게 실리기도 하였다. 한면 가득이라 하면 대단한것 같지만 우리나라는 그 때 일간신문이 총 4면에서 막 8면 즉 두장으로 늘려지기 직전이었지만 미국에선 80페이지나 되어 그 많은 면을 매일 무슨 사건으로 채우는 건지 나는 의아스러웠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파리만 날아가도 기사화되는 식이었던 것 같다. 나는 마치 이사도라 던컨이나 최승희나 된 기분으로, 매번 출 때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행위이고 나의 조국에 바치는 의례라는 자부심으로 부풀어 있었다.
혹자는 그럼 국제장날같은 날엔 내가 나서서 한국남학생들을 가르쳐 가며 음식을 만들수 있지 않았나 싶겠지만 실상 나는 대학원 공부로 엄청나게 시달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 한국학생들이 열심히 요리를 배우려는 자세가 돼 있으면 그래도 나을 것이지만 도무지 그런 의욕조차 없는 애들을 억지로 끌고 온다는 것부터가 내 에너지로서는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대학원 교수들마다 강의 시간은 그냥 지난 주 학생들이 낸 논문에 대한 전체 평가와 그 외 잡담식으로 보내면서 다시 새로운 논문 숙제들을 내 주는데 그 제목들이 수 많은 책들을 읽고난 뒤의 결론을 내 생각으로 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된 책이라도 읽어내기 힘든 분량을 영어로 사전 찾아가며 읽으려니 미국학생들보다 열배는 더 힘들었다. 그들은 체력이 좋아선지 몇일을 밤새워 읽어도 끄떡 없는데 나는 하루만 안 자도 그 다음날 눈을 뜰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만성적으로 항상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논문 제목은 '그리스음악과 중국음악을 비교 분석하라'인데 그 두가지 분야를 충분히 공부하지 않으면 한 줄도 쓸수 없는것들이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그리스음악에 대해 써라'하면 학생들이 도서관 책들을 열심히 베끼면 되는 식이 아니었다.
만일 어떤 책에서 몇줄이라도 인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annotation(註)라는 표시를 하고 아래 그 출처를 기입해 넣어야 한다. 만일 그런 표시 없이 한줄이라도 무단 인용했다간 대번에 빨간 줄이 좍 그어지는데 어찌 그것이 인용인지 아닌지를 다 알아내는지 역시 대학원교수들은 귀신이구나 싶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식이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만인이 공유(共有)한다는 관념이 있어 별 죄의식없이 인용하는데 비해 그들은 지식마저 이원론(二元論)으로 내것 네것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그런 것이 지나쳐 우리나라 교수들이 권위의식으로 제자들 논문을 빼았는 것은 좀 지나치다 하겠지만.
펜으로 쓰는것이 아닌 타이핑으로 깨끗하게 쳐서 격식에 맞춰 제출해야 받아주기 때문에 나는 할수없이 첫 학기에 대학 교양과목인 타이핑클래스에 들어가 수업을 들어 그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그 다음시간에 논문첫장에 점수가 매겨져 돌려주는데 보면 예를 들어 A/B 라는것은 A는 내용점수이고 나중 슬래쉬 뒤의 B는 글의 문법에 대한 점수였다. 예상외로 미국학생들도 문법은 잘 모르는 것 같았고 나는 그들과 비교도 할수없이 빨간 펜으로 많이 그어져 있었으니, a 나 the같은 정관사, 부정관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없거나 안들어가야 할 자리에 들어가도 빨간 펜으로 그어졌다.
특히 우리나라사람들이 혼동하는 그 관사 문제는 항상 스트레스였다. 정말 나는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어려웠다' 고 말하고 싶다. 가끔 학장인 닥터 월터즈와 상담을 했는데 내가 논문쓰기가 정말 어렵다고 했더니 자기가 나의 매니저가 되 주겠다고 농담을 하면서 특별 지시로 비서와 직원들에게 이제부터 이 학생은 예약없이도 언제라도 자기 사무실에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 두었고 실지로 나는 자주 쓰던 논문을 들고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도움을 받기도 하고 미리 문법도 교정받아 그 후로 내 논문엔 빨간 줄이 좀 줄어들수 있었다.
가르치는것은 그래도 배우는것보다는 쉬웠던지 하루는 내 강의시간에 닥터 월터즈가 들어가 봐도 되겠냐하여 그러라 했더니 들어와 보고는 나중에 '너는 타고난 선생이다' 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아직도 너무나 부족한 학생이다 가르친다는건 참 어려워 자신이 없다' 라고 했더니 자기는 평생 수십년간 교육계에 있어 이제 한번 척 보면 이 사람이 좋은 선생이 될 것인지 아닌지 잘 알수 있는데 내가 말하는 내용, 말투, 눈빛, 표정 등이 딱 좋은 선생의 재질을 타고 난 사람이라며 자기말을 믿으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대학원을 마친후에도 계속해서 그 학교에 남아 한국음악을 강의해 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계속하여 미국에 눌러앉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다가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내 인생의 전환점인 그 시점에서 붙잡히면 왠지 영원히 내 나라로 못 돌아갈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결심의 정점에는 언제나처럼 나의 아버지가 계셨다. 내가 만일 미국에 붙잡혀 산다면 아버지 가슴에 또 하나의 커다란 상처를 드린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