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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shat Vayigash
ויגש
Torah: Genesis 44:18–47:27
Haftarah: Ezekiel 37:15–28
관계성을 매듭짓다
개관
우리는 지금 요셉의 이야기의 극적인 절정에 다가왔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이야기는 모든 성서에서 가장 흥분되며, 강렬하고, 그리고 아름답게 구성된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에피소드에서, 요셉은 마침내 그의 형제들에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의 아버지, 야곱과 재회 했고, 그리고 고대근동의 서부를 황폐화시킨 극심한 가뭄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에 그의 가족들을 위한 임시거처를 제공했다.
분석
이번 파라샤의 주석은 요셉의 이야기에 감정적인 결론의 네 가지 영역에 초점을 둘 것이다. 우리의 견해에서, 우리는 요셉에 관하여 언급할 것이다:
I. 관계성을 매듭짓다
II. 남은자를 보호한다
III. 구원을 준비한다
IV. 구원자를 묘사하고 있다.
이번 파라샤 바익가쉬의 발췌에서, 우리는 관계성을 매듭짓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다.
I. 관계성을 매듭짓기
A. 감정적인 종결
요셉의 이야기에는 이러한 역동적인 결론에서 표면에 기다리고 있는 너무나 많은 깊은 감정들이 있다. 먼저, 야곱을 생각해보라. 그가 47:9에서 바로에게 말했을 당시에 그는 130세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것 때문에 많은 시간을 슬픔 속에서 후반부의 인생을 보냈다. 비록 그는 11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편안함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재결합이 상당히 필요했다.
그 다음 요셉의 11명의 형들이 있다. 그들은 일어난 일에 관하여 어떻게 느꼈을 까? 이것은 요셉이 알기를 기다리며 그의 보좌에서 조마조마하게 앉아있는 무엇이다! 이것은 그가 그들에게 실행했던 시험들을 고안해낸 주된 이유이다. 그는 그들이 그의 떠남에 관하여 어떻게 느꼈는가를 알고, 그리고 어떤 회개와 양심의 가책이 있었는가를 보고자 했다.
우리는 정확하게 그들 모두가 어떻게 느꼈는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감정의 일부를 보게 된다. 그들이 어떻게 느꼈는가의 첫 번째 예는 45:3절에서 요셉이 먼저 그의 정체성을 그들에게 드러냈을 때이다. 본문은 말하길,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BDB에 따르면, “두려워하다”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b-h-l, ב-ה-ל )는 강한 당혹감이나 공포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두려워했는가? 비록 본문은 전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지만, 그것은 요셉이 그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두려워했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애굽의 모든 권력을 가진 한 사람, 요셉이 있다. 여기에는 질투의 분노로 형제를 살해하려고 한 죄인, 그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들은 요셉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관점으로부터, 그들은 그를 두려워할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그에게 했던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수 있는 이전의 포션에서 어느 정도 암시를 가진다. 예를 들면, 42장에서, 우리는 요셉이 그들에게 부여한 분명한 시험이 그에 대한 그들의 행동들의 결과 때문인지 심사 숙고하는 그들에 관하여 읽게 된다. 따라서, 42:21 언급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제 때문에 벌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고통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애원할 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JPS)
이러한 이전의 정보와 지금 그에게서의 그들의 두려움에 근거하여, 그들에게는 회개의 감정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셉으로부터 그들의 길에 닥칠 가능한 보복에 관하여 두려워했다는 것을 추축하는 것이 안전하다. 따라서,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와 화해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 요셉이 있다. 그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요셉이 그들 서로가 그에게 했던 것을 토론하고 있는 것을 엿듣게 되었을 때, “그는 돌아와 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안다. 다시, 두 번째 방문에서 그가 애굽에 온 이후 처음으로 베냐민을 보았을 때,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동생을 보고 깊이 감동을 받아, 요셉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울만한 공간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개인 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울었다”(43:30) 마지막으로 이번 포션에서, 요셉은 자신을 형들에게 드러냈을 때 세 번째로 울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아버지와 재회 했을 때 네 번째로 울었다. 아들아 하고 그가 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45:2에서 그의 형제들에게 그의 정체성을 드러냈을 때 요셉의 감정의 폭발에 초점을 두기 원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감정의 폭발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요셉의 사회는 달랐다. 그 당시에 그리고 세상의 그 부분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서양과는 아주 다른 조건들, 표준들, 그리고 사회적인 행동들 하에 살았다. 본문은 요셉이 “큰 소리로 울었다!’ 고한다 왜? 랍비 뭉크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행복과 오랜 시간의 상당한 시련들과 도덕적 고통의 종식을 마침내 보게 되는 큰 기쁨에 사로잡힌 눈물들이었다.
B. 화해의 단계
요셉의 눈물들은 그의 형들이 두려워 할 것이 없으며 그리고 화해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였다. 적절한 화해는 하나의 과정이지, 한번의 행동이 아니다. 분명한 상황들이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 확실한 태도들은 충분한 화해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공유 되어야 한다.
1. 정직
요셉이 45:3에서 그의 형들에게 그의 진정한 정체성의 소식을 알렸던 것으로부터 진정을 찾은 직 후, 그는 다시 그들에게 언급했다. 이번에 그는 자신을 그들의 동행 요셉으로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여러분이 애굽에 팔았던 그” 로서 스스를 설명했다. 왜 그는 그와 같이 했는가? 그는 쉽게 베냐민의 형, 요셉”으로 또는 “라헬의 장자, 요셉”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다. 비록 정확하게 요셉의 속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제안을 가진다. 아마 요셉은 화해의 과정에 관한 소중한 비밀을 알았을 것이다. 그 비밀은 이것이다: 정직
그들의 다시 새로워진 관계성의 바로 시작부터, 어쨌든 요셉은 그와 그의 형들 사이에 진정으로 다시 살아난 관계성이 지속될 것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정직에 근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요셉은 온화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그들이 그에게 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는 그들의 잘못을 축소시키거나 과장시키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들 앞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말했다.
이것은 항상 소원해진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화해 가운데서도 첫 번째 단계이다. 그들 사이에 건강한 관계성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거기에는 분리시키는 일들에 관하여 정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향을 따라 지속될 때, 주석가 나훔 사르나는 요셉의 진술을, “안심과 비난”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이 그에게 했던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비난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형제답지 않았다 할 지라도, 나는 형제로서 마땅히 해야 행동을 할 것이다”는 점에서는 안심이었다. 게다가, 그가 화해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보증이었다.
2. 용기
요셉이 그의 형들과 화해의 과정에서 한 두 번째 일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가 그의 형들에게 말했던 45:5에서 발견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는 그들이 이 점에서 매우 연약한 감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가 그들의 감정들을 말하고 그에 관한 한 그들은 그들이 느꼈던 것처럼 느낄 필요가 없다고 확신을 주었다.
이것은 화해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둘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어들면, 그것과 함께 항상 강한 감정들이 온다. 때로는 괴로움의 감정들일 수 있고, 때로는 요셉의 형들의 경우에서처럼 후회나 양심의 가책의 감정일 수 있다. 요셉은 그들이 했던 것을 축소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관찰 할 다른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주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화해 속에서 세 번째 단계로 이끌고 있다.
3. 하나님의 목적에 초점
우리는 그의 형들의 그에 대한 행동으로부터 그가 받았던 아픔에 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애굽 에서 태어난 그의 두 아들에게 준 이름으로부터 알고 있다. 그것은 그가 아들 중 하나를 “므낫세”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다. 왜냐하면 요셉은 직접 그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전적으로 나의 고통과 나의 부모의 집을 잊게 했다,” 때문이다. 이러한 이름은 요셉은 진실로, 그의 고통에 관하여 생각을 때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러한 것들에 초점을 두지 않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대신에, 그는 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시련들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에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형들에게 그가 그들을 너무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들 보다 앞서 나를 보냈던 것은 생명을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 (45:5)
45:5에서 이러한 신뢰할 만한 진술에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부분들이 있다. 첫 번째,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진실로, 그의 형들은 그를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사실, 우리도 그것을 보는 것은 어렵다. 대부분, 그들이 한 행동은 전적으로 수치스럽고 죄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진실로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었다는 것을 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 또한 그것을 볼 수 있는가?
게다가, 이러한 생각을 한발 더 나가보면, 하나님은 고통의 상황에 반응하거나 아니면 인간이 만든 사건을 직접 어떠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실질적인 면에서, 그것은 사람에게 주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요셉은 그것을 사실로써 알았다: 그의 뜻을 전적으로 수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높은 견지 없이,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이 그들의 차이로부터 벗어나 서로 화해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어떻게 그를 만드신 분의 주권적인 손이 선하고 악한 인간의 사건들 둘 다의 실력자라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요셉의 진술의 두 번째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이 하고 있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가의 인식이다. 하나는 하나님은 특별한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요셉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의 삶의 사건들을 조정하고 있었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그의 앎에 깊이 자리잡은 신뢰를 가졌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 가를 아는 것은 요셉이 그에게 잘못한 사람들과 화해를 하는데 보다 더 용이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잘못들 보다 그 이상을 바라보고 특별히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볼 수 있었다.
C. 그래서 이스라엘은 또한 눈물로 화해할 것이다.
고대 랍비들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의 화해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다. 미드라쉬의 인용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요셉은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그의 형들과 화해하게 되었던 것처럼, 거룩한 분은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 기록에 보면,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렘 31:9)
고대 랍비들 에게, 요셉의 잘못된 형제들은 하나님이 민족들에게 회개를 일으켰을 때 미래 언제간 그와 재회 할 고집 센 이스라엘의 그림이다. 그날에,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화해할 것이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애통의 시간을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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