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승(大乘)과 일심이문(一心二門)
제17강 법(法)을 풀이한다 (2)
지난 시간에 일심(一心) 이문(二門)에 대한 설명을 했지만,
완전하게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거 같아요.
일심(一心)에는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이문(二門)이 있습니다.
보통 진여문에서는 체(体)만 드러내는데,
생멸문에서는 체(体), 상(相), 용(用)이 다 드러납니다.
진여문에서 체(体)는 진여(眞如)를 얘기하고,
생멸하는 마음속에는 체(体)와 그 모습[相]과 쓰임새[用]가
다 들어가 있다는 얘기에요.
이 이야기를 원효스님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면 왜 저렇게 나눠서 얘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앞에 입의분(立義分)에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원효스님께서 다시 끌어들여서 얘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126p 보십시오.
《소(疏) - 10 – 1 - 별기(別記)(1)》
問이라. 若此二門이 各攝理事라면
何故로 真如門中 但示摩訶衍體이고
生滅門中 通示自體相用이오.
물음 : 이 두 길이 저마다 이(理)와 사(事)를 거두어들인다면
무슨 까닭으로 진여의 길에서는 다만 대승의 체(体)만 보이고
생멸의 길에서는 자체와 상(相)과 용(用)을 두루 보입니까?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데 있어서 수행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대답을 합니다.
《”》
答이라. 攝義외 示義니 異니 何者오.
真如門은 是泯相으로서 以顯理이나
泯相은 不除일새 故로 得攝相이고
泯相은 不存일새 故로 非示相이라.
대답 : 거두는 뜻과 보이는 뜻이 다르니 무엇 때문인가.
진여의 길은 모습을 없앤 것으로서 이를 나타내나
모습을 없앤 것은 아주 제거한 것이 아니기에 모습을 거둘 수 있고,
모습을 없앤 것은 모습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다. |
진여문에서는 체(体)만 있고 상(相)과 용(用)이 없어요.
그러면 왜 진여문에서는 체(体)만 보이고
생멸문에서는 체(体), 상(相), 용(用) 세 가지 다 보이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수행하는데 있어서 잘 알다시피 마음을 관(觀)을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모습이나 쓰임새를 다 없애 버리고
체(体) 만 추구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할 때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실제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몸이라는 것은 원래 허공같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이 세간의 모습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세간의 상을 부숴서
진실한 상을 구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을 없애서 비어 있는 본질을 구한다고 해서
없애는 수행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없애는 수행이
바른 수행이냐, 바르지 않는 수행이냐에 문제가 있습니다.
수행하는데 있어서 감각수행과 생각으로 수행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불교에서의 수행은 알아차림[正念]으로 합니다.
뒤에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보면
‘마음을 마음으로 제거하는데
바깥으로 치닫는 마음을 붙들어서 정념에 머무르라.’이랬습니다.
이때 정념이 알아차림이에요.
이 알아차림은 감각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에요.
이것이 정념이지만 또한 정관(正觀)입니다.
그러면 생각은 왜 안 되느냐 하면,
생각에는 과거 경험이 들어가 있고 자아관념이 들어가 있어요.
과거 경험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뿐만 아니라
생각에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도 마찬가지로 과거 경험이 들어가 있고
자아관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수행과 생각으로 수행하는 것은 다 오류라는 겁니다.
바르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지만
알아차림은 대상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판단할 때 전부다 ‘내가’라는 게 들어가 있어요.
감각도 마찬가지로 느낌에는 반드시 ‘내가’가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몸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불쾌하면 ‘내가 불쾌하다’가 되는 거죠.
그러면 알아차린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생각으로 공(空)을 구할 때 몸을 부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상상력으로 폭탄이나 칼을 만들어서 몸을 폭파시키거나 잘라서
몸을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공(空)을 찾는 방법이 있는데
그런 방법이 잘못 된 거예요.
그래서 원효스님께서 여기에
‘모습을 없앤 것은 아주 제거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분명히 얘기를 해 놓았어요.
모습을 없앴다고 제거한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유마경』‘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명상(明相)보살이 불이법문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색(色)을 소멸시켜서 공(空)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색(色) 자체가 비어있는 공(空)이라는 거죠.
물질을 소멸시켜서 나타나는 것은 공이 아니고 허공입니다.
허공하고 공하고 다른 거예요.
뒤에 가면 문답에서 나오는데,
허공은 분별의식 속에 나타나는 것이지 진여가 아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소멸시켜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공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허공이지 공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차이점은 이런 겁니다.
몸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의식만 남아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허공을 의식적으로 무한히 확장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확장을 시키면 전 우주가 허공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축소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허공은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데,
공(空)은 확장도 안 되고 축소도 안 되는 거예요.
공은 창조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는 겁니다.
이것이 다른 거예요.
여러분들 몸이 사라졌다고 혹시 이것이 공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을 의식적으로 늘였다 줄였다가 되면
이것은 허공이구나, 이렇게 판단하면 맞는 겁니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아무리 늘이고 줄이려고 해도 변함이 없다면
그것은 진짜 공입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 체(体)를 보이는 것도
물질을 소멸시켜서 보이는 게 아니고
물질의 세계, 현상계 자체가 그대로 체(体)고 진여라는 말이에요.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는 체(体)만 보인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생멸문에서는 체(体)뿐만이 아니라 상(相)과 용(用)을 보이는 것은
체를 가리고 있는 번뇌 망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야 됩니다.
그 제거하는 방법도 생각이나 감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알아차림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알아차림이 어떤 성격이기에 이게 가능한가.
우리의 마음은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복사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면 사물의 이미지가 그대로 마음에 저장이 되요.
그런데 그것은 대상이 변하지 않을 때 저장이 되는데
대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저장이 안 됩니다.
장미를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이게 뭐냐고 물으면 인식을 못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이것은 장미라고 인식시켜 주면
이 아이는 그 다음부터는 비슷한 모습만 봐도 장미라고 이해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그전에 장미라는 정보가
이미지로 저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런데 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마음에 이미지를 저장 시키려 해도 저장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무엇을 알아차리느냐하면,
변화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생멸문에서는 관행(觀行, 위빠사나)을 한다 했는데,
그것은 생멸인연의 모습, 변화하는 것을 관찰하라 했습니다.
그게 알아차림입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변화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에 이미지가 안 남아요.
그리고 마음이 점점 비워져 가고
대상도 점점 비워져서 없어져 가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바깥 현상계라는 것은
마음[망념]이 바깥으로 투영되어서 나타난 세계이기 때문에
변화를 보게 되면 마음에 망념이 안 생깁니다.
우리 생각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서 이미지가 안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점점 맑아지고
상대적으로 보이는 세계도 텅 텅 비어져 가는 겁니다.
그것이 위빠사나 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마음 관찰할 때만 그런 게 아니고
몸 관찰할 때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
집중적으로 말씀드릴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별기(別記)》에
‘모습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다.’하는 것은
실제로 모습을 없앤 게 아니고 모습 자체가 없는 거예요.
체(体)의 입장에서 그런 겁니다.
진여문과 생멸문이 같은 일심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변하는 현상계하고 변하지 않는 비어 있는 세계하고
본래 하나라는 얘기입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현상계의 바탕은 진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두 개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진여와 생멸을 잘 이해하게 되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수행해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
生滅門者는 攬理로 以成事나
攬理는 不壞이니 得攝理이고
생멸의 길은 이(理)를 가지고 사(事)를 이루나
이(理)를 갖고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理)를 거둘 수 있고, |
이 말은 많이 한 얘긴데,
금을 반지나 팔찌 목걸이를 만들었다면 모양이 있는 거고,
모양이 있는 것은 생멸이 있는 겁니다.
생멸이 있다는 말은 물리적인 힘을 가하면 모양이 바뀌잖아요.
그러면 생겼다 사라졌다하는 게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금의 성품은 안 바뀌는 거와 마찬가지로
현상계인 물질세계가 변형이 되지만 그 본질은 안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사(事)라는 것은 현상인데,
이 사(事)가 변하지 않는 이(理)를 다 거두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
攬理는 不泯일새 故로 亦示體니라.
이(理)를 갖고 있는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체(体)를 보이는 것이다. |
그래서 생멸문에서 체(体)가 보이는 겁니다.
질그릇 입장에서 흙먼지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 흙먼지가 체에 해당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현상계 입장에서 체(体)라는 것은 항상 있다 이거죠.
《”》
依此義故로 且說不同이나
通而論之이면 二義亦齊니라.
是故로 真如門中에 亦應示於事相이나 略故로 不說耳니라.
이런 뜻에 따른 까닭에 말하는 내용이 같지 않으나
통틀어 논한다면 두 뜻이 또한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진여의 길에서도 또한 사(事)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만
생략하였기에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
진여의 길에도 사(事)가 있다는 얘기가 그거예요.
아까 제가 얘기 했지만
흙먼지 입장에서 봤을 때 모든 질그릇은 흙먼지에요.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는 공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봤을 때
현상계가 그냥 텅 비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생멸문 입장에서 현상계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을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
물질 그대로 텅 비어 있는 것이고,
진여문 입장에서 보면 ‘공즉시색(空卽是色)’이고
다른 말로 하면 ‘공불이색(空不異色)’,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다 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입장에서 봤을 때
수행은 어떻게 들어가야 되느냐.
진여가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면
비어 있는 쪽[空]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비어 있는 쪽으로 들어가니까 마음은 늘 고요한 쪽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리고 생멸문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까
색은 생멸하기 때문에 생멸하는 쪽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들어갈 수 있는 통로[門]가 시설되어 있는 겁니다.
방편이 주어졌다는 거죠.
그 다음에 132p '진여의 길을 풀이한다' 들어가겠습니다.
주제별로 해야 되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제일 처음에 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
첫 번째 심진여(心眞如)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심진여에서도 여러 가지로 나눴는데
제일 처음에 진여체(眞如体),
말을 떠난 진여, 이언진여(離言眞如)를 얘기하고
두 번째, 진여의 이름[眞如名]에 대한 얘기를 할 거고
세 번째는 진여상(眞如相)에 대한 얘기를 할 겁니다.
이것은 말에 의지한 진여, 의언진여(依言眞如)를 얘기하는데
거기에는 공(空)과 불공(不空), 두 가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진여의 뜻을 통틀어 풀이함’ 보십시오.
(논 – 11)
心眞如者는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
所謂 心性이 不生不滅이니 一切諸法은 唯依妄念이어 而有差別이라.
若離妄念하면 則無一切境界之相이니
마음에 있는 진여는 곧 하나의 법계로서
‘전체 큰 모습으로 있는 법에 들어가는 길의 바탕’이다.
이른바 마음의 성품이 불생불멸이니
모든 법은 오직 망념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뿐이다.
망념을 여읜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없다. |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하나의 법계로서
‘전체 큰 모습으로 있는 법에 들어가는 길의 바탕’이다.’ 그랬습니다.
이 말은 심진여에서 첫 번째 진여체를 얘기하는 부분인데
한문으로 하면 일법계대총상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体)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체(体)는 진여체(眞如体)에서 체(体)와 같은 겁니다.
일법계(一法界), 법계는 하나라는 거죠.
그런데 실제로 법계는 제일 밑에서 부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 이렇게 십법계로 되어 있습니다.
일법계라는 말은 이 십법계가 하나다 이거죠.
이 법계라는 말에는 네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왔다,
무시시래(無始時來)의 존재, 영원한 존재라는 거죠.
두 번째는 일체법(一切法)의 의지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법계를 떠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세 번째, 윤회가 있고, 네 번째는 열반이 있습니다.
윤회가 있다는 말은 일법계가 하나인줄 몰랐을 때
우리 마음작용이 윤회로 흘러버리고,
일법계가 하나인줄 알면 열반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윤회의 길은 유전연기(流轉緣起)고
열반의 길은 환멸연기(還滅緣起)입니다.
이렇게 일법계라는 말은 네 가지 뜻이 있는데,
그 근원은 초기경전 『아함경』에 보면,
어느 분이 부처님에게 찾아와서 묻습니다.
“연기법은 부처님 당신이 만들었습니까,
다른 사람이 만들었습니까?”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이것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다.
법의 계는 상주한다[法界常住].”, 이랬습니다.
이 법계상주(法界常住)라는 말이
『잡아함경(雜阿含經)』 연기법경(緣起法經)에 나오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 다음에 얘기하는 게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것이 『아함경』에서만 얘기하는 게 아니고
『반야경』에서도 얘기하고, 대승경전에서 다 얘기합니다.
『여래장경』에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있거나 없거나 여래장은 상주한다.’,
『화업경』에서는 ‘일체법과 일체상은 상주한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게 일법계(一法界)입니다.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다 통틀어서 법계에요.
그렇게 통틀었다는 게 대총상(大總相)이에요.
큰 대(大)자가 들어 가 있고 전체적인 모습[總相]이 다 들어가 있는 거죠.
일법계에 대총상 전부다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법문체(法門体),
법문(法門)은 깨쳐 들어가는 문을 얘기합니다.
진여가 깨쳐 들어가는 문을 제시를 하는 거죠.
그 바탕[体]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심진여라는 것은 깨쳐 들어가는 바탕,
우리가 들어가야 할 세계가 진여의 세계입니다.
본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다르게 얘기하면
깨쳐 들어가게 하는 통로를 열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원효스님께서 133p에 보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소(疏) - 11》
略標中에 言에 卽是一法界者는
是擧眞如門所依之體이니 一心이 卽是一法界故이니라.
간단히 드러내는 내용 가운데 말한 '곧 하나의 법계'는
진여의 길이 기대는 바탕을 내세운 것이니,
한마음이 곧 하나의 법계이기 때문이다. |
일법계(一法界)라는 것이 일심(一心), 한마음이라 이거죠.
《”》
此一法界가
通攝二門이나 而今不取別相之門이고
於中에 但取總相法門이라.
然이나 於總相有四品中에
說三無性所顯眞如하니 故로 言하되 大總相이라.
이 하나의 법계는
진여의 길과 생멸의 길을 두루 거두지만 지금 따로 취하지 않고,
그 가운데 다만 ‘전체 모습으로 있는 법에 들어가는 길’만 취한다.
그러나 전체 모습에 네 가지 종류가 있는 가운데
세 가지 무성(無性)이 나타내는 진여를 말하므로 ‘전체 큰 모습’이라고 부른다. |
이것은 유식삼성(唯識三性)을 가지고 진여를 설명합니다.
전체의 모습을 설명을 하는 거예요.
《”》
軌生眞解이니 故로 名爲法하고 通入涅槃하니
故로 名爲門이라 하니 如一法界 擧體作生滅門이니라.
如是擧體 爲眞如門이어
爲顯是義하니 故로 言하되 體也니라.
이것을 축으로 하여 참된 이해를 하기에 ‘법’이라고 하고,
모든 중생이 다 열반에 들어가는 통로이기에 ‘길’이라고 하니,
이는 마치 하나의 법계가 전체로 생멸의 길이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하나의 법계가 전체로서 진여의 길이 되어
이 뜻을 나타내므로 ‘바탕’이라고 한다. |
원효스님께서 얘기를 했는데,
유식삼성(唯識三性)을 들어서 진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못하고
다음 시간에 유식삼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
첫댓글 일심 이문에 진여문과 생멸문 이문을 보다 상세히 깊게 말씀 주십니다.
진여문은 그대로 불성이며, 자성불임을 배웁니다..
생멸문은 우리들을 나타내며, 모두 체(體)와 상(相)과 용(用) 함께하며
진여문과 생멸문이 둘아닌 하나임을 봅니다..
생멸문으로 저희들 위빠사나(정념) 수행으로 진여에 들어가는 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믿음으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배워 정념으로 깊이 진여의 세계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많이 어려웁네요 ^*^ 조금씩 조금씩 익혀갑니다.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참마음님 잘 보고 있습니다. 단 하나 박스의 글이 겹쳐서 조금 불편함니다. 교정할수 있는거죠 ...나무아미타불_()_
네에..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노트북에만 네모박스에 글이 겹쳐보입니다
좋은 해결책으로 虛 堂님께서 해 주실겁니다
함께 공부하게 되여 행복합니다 무렴님
큰공부이루소서..()
무렴님 좋은인연속에 행복가득하소서...나무관세음보살 ()
노트북에서는 박스의 글이 겹처진부분이 약간씩 나타나고,
일반pc에서는 겹처보이질않고 깨끗하게 잘보입니다.
노트북에 있는 내용을 어떻게 해야 "참마음"님의 PC로 보낼수 있을 까요
(1)이멜의 주소를 모르고요
(2)또한 이를 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 보낼수 없고요.
(3)이멜의 전달방식으로 보내도 될까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충분히 말씀 알겠습니다 양재욱님
虛 堂님께서 좋은해결책으로 하시리라 여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함께 공부하는 인연 소중합니다..
부처님 지혜광명 충만하시기 기원합니다..()
양재욱님 편안한 밤 이루시고 건안하소서...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_()_
가온해님 좋은인연지어갑니다. 행복하소서...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정혜신님 함께해서 행복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열심히 공부하게 해주신 모든 수고하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_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大乘起信論 19 - 智雲스님 講義 - 3. 大乘과 一心二門 - 第17講 法을 풀이한다. (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
어렵긴한데 하나하나 깨쳐...무척 흥미롭습니다.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교재는 원순스님이 저술하신책인데 한글로 풀이하다보니 내용이 조금 길어지고 핵심을 잡기가 조금은 어렵습니다. 허당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제가 btn 홈페이지에 2004년2006년 대승기신론을 지운스님 동영상으로 강의할때 공부했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가장행복한 공부 카페에서 그대로 문자화에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양해를 얻어 모셔(아비라불교 밴드)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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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_()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