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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땡감골 원문보기 글쓴이: 도계
연주 현씨 (延州 玄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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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 : 현담윤[玄覃胤] | |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 |
연주(延州)는 평안북도 영변의 고호이며, 영변군은 영주와 무주 의 합명이다. 공민왕 때 태주로 이속되었고, 태종때 무산현이 되었다. 1419년 (세종 11) 연산과 무산을 합하여 영변으로 개칭하고 세조때 연주 를 나누어 운산군에 속하게 하고,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영변군으 로 개칭되었다. 고려 의종조에 장군을 지내고 명종때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 는데 공을세워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라 연산군에 봉해졌다. 지명인 연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순천(順天) 등 무려 106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에 전해지나 현존하 는 본관은 30여본에 불과하며 이들의 관향도 모두가 시랑공 현담윤 (玄覃胤)을 시조로 받드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자손들이 살았던 세거지명에 불과하므로 1747년 정묘보(丁卯譜)를 편수 할때 연주 현씨로 단일화하였고, 1982년에 간행된 임술보때도 문중의 합의에 따라 본관을 연주로 통일하였다. 덕수(德秀)와 이후(利厚)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적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훈공을 세워 맏아들 덕수가 경상도 안렴사를 역임한후 신종때 병부상서에 올라 팔거군에 봉해졌다가 후에 성산 부원군으로 이봉(移封)되었다. 1186년 문과에 급제했던 덕유(德裕)는 시조의 셋째 아들로 이부와 예부의 시랑(侍郞)을 거쳐 서경유수로 나갔다가 금자광록대부로 참지정사를 지낸후 대사공에 이르러 회원군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 들이 창원 현씨로 분관하였다. 성산부원군 덕수의 둘째아들 원고[元羔]는 영동정(令同正)으로 순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순천현씨로 분관하였다. 규(珪)가 판군자감사를 지내고 고부 군수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 와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규를 시조로 하여 성주현씨로 분적하였다. 고 민정을 보살폈으나 이듬해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벼슬을 버리 고 아들 보손(寶孫)과 같이 영천 묵방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종신 토록 절의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로 일컬어졌으며 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다. (錫圭)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중에 한 선비를 가리 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 로 접대하면서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누가 이 중에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길을 오느 라고 의관이 헤어지고 형용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원군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니, 세조는 "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며,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을 정하기 로 하시지요" 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이 그선비의 집안을 알아보 니 영남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그 선비가 바로 석규(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를 처리하였고,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답(冠峰問答)] 관봉유고(冠峰遺稿)]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학자 약호(若昊),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덕윤(德潤), 재덕(在德) 등이 가 문의 번영을 이루었고, 한말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병근 (炳瑾)과 익철(益哲) 이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씨(玄氏)는 남한에 총 17,297가구, 72,1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
3> 집성촌 | |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충남 천안군 일원 |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시흥리, 온평리 |
전남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 |
제주도 제주시 노형동, 아라동 |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 |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장포리, 대전리 |
경기도 옹진군 서면 장포리 |
평북 선천군 동면 인곡동 |
경남 밀양군 하남읍 양동리 |
황해도 장연군 낙도면 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