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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법온족론 제8권
14. 수정품(修定品)
어느 때 박가범께서 실라벌(室羅筏) 서다림(逝多林)의 급고독원(給孤獨園)에 계셨다.
그때에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4수정(修定)]
“4수정(修定)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殊勝智見]을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勝分別慧]를 증득하게 되느니라.
또 닦아야 할 선정이 있나니,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諸漏永盡]을 증득하게 되느니라.
[현법락주의 증덕]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곧 자기 몸에 대하여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으로 인해서 윤택하여지고[滋潤],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하게 차고[充滿], 두루 가득하게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適悅], 두루 고르게 기뻐하기 때문에 여읨에서 생긴 희락이 자기 몸 속에서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나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뛰어난 지견의 증득]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광명상(光明想)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하고 잘 사유(思惟)하며,
잘 닦아 익히고 잘 통달하되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고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으며,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어서 마음을 열고 개(蓋)를 여의며,
비춤[照]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고 어두운 마음[闇昧心]을 제거해서 한량없는 선정을 닦나니,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의 증득]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느낌[受]의 생김[生]을 잘 알고 느낌의 머무름[住]을 잘 알고 느낌의 사라짐[滅]과 다함[盡]과 없어짐[沒]을 잘 알아서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住念]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생각[想]을 잘 알고 거친 생각[尋]을 잘 알아서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의 증득]
어떤 것을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만일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가?
어떤 필추가 5취온(取蘊)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을 따라 관(觀)하고 머무르되,
이를테면 ‘이것은 바로 물질[色]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의 발생[集]이다. 이것은 바로 물질의 소멸[滅]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발생이다. 이것은 바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하나니,
이것을 바로 ‘닦아야 할 선정이 있어서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다시 설명함]
그때에 세존께서는 앞의 뜻을 거두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탐욕의 생각[欲想]과 근심하는 번뇌를 끊고
혼침(惛沈)과 악작(惡作)을 여의면
청정한 사(捨)와 염(念)을 얻나니
법(法)에 심(尋)과 사(伺)는 그 앞에 행해진다.
현법락주(現法樂住)가 처음이 되고
다음에는 뛰어난 지견(智見)과 지혜로
무명(無明) 등의 번뇌를 깨뜨리며
마지막에는 해탈의 과(果)를 증득한다.
‘곧 자기 몸[身]에 대하여’라 함은,
몸[身]도 또한 몸이라 하고 신근(身根)도 또한 몸이라 하며,
5색근(色根)도 또한 몸이라 하고 4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무더기[聚]도 또한 몸이라 한다.
지금 이 뜻에서는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무더기를 ‘몸’이라 한다.
‘여읨으로 생긴 희락[離生喜樂]’이라 함은,
초정려(初靜慮)에 있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며 평등한 느낌[平等受]이어서 느낌에 속한 몸의 가볍고 편안함[輕安]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니,
이것을 바로 기쁨과 즐거움이라 한다.
이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은 욕(欲)과 나쁜 법[惡不善法]을 여읨에서부터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기 때문에,
‘여읨으로 생긴 희락’이라 한다.
‘윤택하여지고[滋潤],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히 차고[充滿], 두루 가득히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適悅], 두루 고르게 기뻐한다’고 함은,
곧 자기의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무더기인 몸에서 여읨으로 인하여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해서 윤택해지고 두루 윤택해지는 것이 그 하나의 뜻[一義]이요,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는 것이 그 하나의 뜻이며,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는 것이 그 하나의 뜻이어서,
하(下)ㆍ중(中)ㆍ상(上)으로 말미암아 자라고 길러지는 것에 차별이 있다.
비유하면 마치 농부가 처음에 적은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다음에 중간쯤 되는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맨 나중에 많은 물을 밭두둑에다 대면 그때에 밭두둑은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는 것과 같다.
필추도 역시 그러하여, 처음에 하품(下品)의 여읨으로 생긴 희락[離生喜樂]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다음에는 중품(中品)의 여읨으로 생긴 희락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나중에 상품(上品)의 여읨을 생긴 희락으로써 4대종으로 만들어진 몸을 양육하는 그때에 자기의 몸은 고르게 기뻐지고 두루 고르게 기뻐지며, 그 여읨으로 생긴 희락은 자기 몸속에 조그마한 부분까지도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게 되나니,
곧 발에서부터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그 여읨으로 생긴 희락은 자라고 기르는[長養] 일을 하면서 가득하게 차지 않음이 없다.
1) 선정1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修定]이 있어서’라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곧 자기의 몸에서는 여읨으로 생기는 희락으로 윤택하여지고, 두루 윤택하여지며, 가득하게 차고, 두루 가득하게 차며, 고르게 기뻐하고, 두루 고르게 기뻐하기 때문에,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흩어지지 않고,
어지럽지 않고, 가다듬어 그치고, 평등하게 지니고,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修]’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또는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더욱더 수행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유자재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법락주(現法樂住)의 증득]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증득하게 된다’ 함은,
이 선정을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현재 법[現法] 가운데서 즐거움[樂]을 느끼며 편안히 머무름[住]을 증득하는 것이니,
사랑할 만하고, 좋아할 만하고, 기뻐할 만하고, 뜻에 맞아서 희망할 것도 없고 사모할 것도 없으며 고요하고, 안온하기 때문에 ‘낙주(樂住)’라 하며,
이 낙주에 대하여 얻고 성취하며 친근하고 접촉해서 증득[觸證]하기 때문에 ‘증득(證得)한다’고 한다.
[심일경성(心一境性)]
또 다음에는 초정려(初靜慮)에 속한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말하여 ‘선정’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行)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고 짓는 바’는 그의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현법락주를 증득하게 된다’고 하는 데에 대한 뜻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광명상(光明想)]
‘광명상(光明想)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한다’는 등에서,
어떤 것이 광명정(光明定)의 가행(加行)이며,
어떠한 가행을 닦아 광명정에 들어가는가?
이 선정[定]에 대하여 처음에 업(業)을 닦는 이는,
먼저 마땅히 깨끗한 달[月輪]의 모양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한 해[日輪]의 모양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약물(藥物)ㆍ말니(末尼), 그리고 모든 천상의 궁전[諸天宮殿] 및 별[星宿]의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등불이나 촛불의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또 성읍(城邑)이나 하천이나 토지가 불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고,
혹은 또 산이나 진펄이나 너른 들판이 불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하며,
혹은 또 열 짐[擔], 혹은 스무 짐, 혹은 서른 짐, 혹은 마흔 짐, 혹은 쉰 짐, 혹은 백 짐, 혹은 천 짐, 혹은 백천 짐, 혹은 한량없는 백 짐, 혹은 한량없는 천 짐, 혹은 한량없는 백천 짐의 땔나무가 불에 타는 광명을 잘 취하기도 한다.
이들 불의 광명이 왕성하고, 극히 왕성하고, 환히 밝고, 극히 환히 밝은 어느 한 가지 광명을 취한 뒤에 자세히 살피고 사유(思惟)하며,
분명히 알고[解了], 관찰(觀察)하고, 뛰어나게 이해하고[勝解], 굳게 머물러서[堅住] 그것을 분별한다.
그는 그러할 때에 만일 마음이 산란하여 그 밖의 다른 경계에 내닫게 되고, 한 갈래로 나아가지 못하며 생각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의 반연[一緣]에 머물러서 취한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면,
이 정도로는 아직 광명정의 가행이라 하지 못하며, 또한 아직 광명정에 들었다고 하지 못한다.
그가 만일 그때에 자기의 마음으로 가다듬고 다잡아서 산란하여 다른 경계에 내딛지 않게 하고, 한 갈래로 나아가 염(念)에 머물러 하나에 반연하게 해서,
이러한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며,
이와 같이 사유해서 근(勤)을 일으켜 정진하되 나아가 격려하는 뜻을 쉬지 않으면,
이것을 바로 광명정의 가행이라 하며 또한 광명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도(道)를 낸 뒤에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기 때문에 곧 마음으로 하여금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고, 가까이 머무르고, 편안히 머무르며,
한군데로 나아가고, 평등하게 지니고, 둘이 없고, 물러남이 없게 해서,
이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면 이 만큼으로도 이미 광명정에 들었다고 하며,
그러나 아직 광명정상(光明定想)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광명정상]
어떤 것을 광명정상이라 하는가?
곧 앞의 광명정(光明定)에 의지하여 앞과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는 모든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과 분명한 이해와 형상을 취함[取像]과, 이미 낸 생각과 앞으로 낼 생각을 광명정의 생각[想]이라 하며, 이 광명정의 생각을 바로 광명상(光明想)이라 한다.
‘광명상에 대하여 잘 섭수(攝受)한다’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공경하면서 섭수하고 은근히 섭수하며 존중히 섭수하면서,
그것의 인(因)과 그것의 문(門)과 그것의 이치[理]와 그것의 방편(方便)과 그것의 행상(行相)을 사유하기 때문에 ‘잘 섭수한다’고 한다.
‘잘 사유(思惟)한다’고 함은,
자주자주 광명상(光明想)을 일으킨 뒤에 자주자주 광명의 모양에 대한 생각을 사유하는 것이다.
‘잘 닦아 익힌다[修習]’고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자주자주 익히고 자주자주 닦으며 짓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잘 닦아 익힌다’고 한다.
‘잘 통달한다’고 함은,
이 생각에 대하여 평등하게 알고[等了] 자세하게 알며[審了] 평등하게 살펴서 관찰하기 때문에 ‘잘 통달한다’고 한다.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낮 동안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밤 동안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밤 동안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낮 동안에도 또한 그러하니,
그 때문에 ‘낮에도 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마주 보고 대할 때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등뒤에 있을 때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등뒤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마주보고 대할 때에도 또한 그러하다.
또 이전에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지금에도 또한 그러하며,
마치 지금에 그렇게 한 것처럼 이전에도 또한 그러하였나니,
그 때문에 ‘앞에도 뒤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함은,
마치 하방(下方)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앞에서와 같은 모든 광명의 모양을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하는 것처럼,
상방(上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며,
또한 상방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방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나니,
그 때문에 ‘아래도 위에도 차별이 없다’고 한다.
‘마음을 연다’고 함은,
광명으로 환하게 비추어서 선명(鮮明)하고 청정(淸淨)함과 함께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개(蓋)를 여읜다’고 함은,
혼침(惛沈)ㆍ수면(睡眠)의 전개(纏蓋)를 멀리 여의고 마음의 작용이 명료(明了)한 것이다.
‘비춤[照]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는다’고 함은,
광명으로 환히 비추어서 선명하고 청정함과 함께 하는 마음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어두운 마음[闇昧心]을 제거한다’고 함은,
이 마음 가운데서는 어두운 모양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광명의 모양만을 일으키는 것이니,
마치 등불이나 촛불이 환히 비추어서 어두움을 없애는 것과 같이 한다.
‘한량없는 선정을 닦는다’고 함은,
한량없는 광명 모양[無量光明相]의 선정을 닦는 것이다.
2) 선정2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곧 광명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사유하고 분명하게 알며 관찰하고 뛰어나게 알며 굳게 머무르고 분별해서 일으킨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또는 닦고 또는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自在)하게 됨을 나타낸다.
[뛰어난 지견의 증득]
‘뛰어난 지견(智見)을 증득하게 된다’고 함에, 어떤 것을 뛰어난 지견이라 하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아서 원만한 지위에 이르면 옛 육안(肉眼) 쪽에서 색계(色界)의 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진 청정한 천안(天眼)에 일어나며 이 천안에 의하여 청정한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안식에 의하여 전후와 좌우와 상하의 모든 빛깔을 두루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색계의 대종으로 만들어진 청정한 천안이 옛 육안 쪽에서 생기되 여여(如如)하여 이와 같고, 이와 같이 청정한 안식을 내며, 이 안식에 의하여 저 모든 빛깔을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이 가운데 뛰어난 지견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뜻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이해하고 보게 되는데, 곧 사람의 육안이 변하여 천안이 되는 것을 뛰어난 지견이라 한다’고 한다.
지금의 이 뜻에서는 곧 앞에서 말한 청정한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지혜를 말하여 지(智)라 하고 또한 견(見)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천안의 안식과 상응하는 뛰어난 지혜가 저마다 모든 빛깔을 받아들이고 관찰하게 되는 것을 바로 이 가운데 뛰어난 지견이라고 한다.
그는 이 선정을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뛰어난 지견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니,
뛰어난 지견을 얻고 성취하며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證)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광명상(光明想)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선정[定]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다’고 함은,
그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뛰어난 지견을 증득하게 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느낌[受]의 생김[生]을 잘 알고 느낌의 머무름[住]을 잘 알며 느낌의 소멸[滅]과 다함[盡]과 없어짐[沒]을 잘 안다’고 함은,
느낌의 생김을 자세히 관(觀)하고,
느낌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하며,
느낌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住念]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느낌의 생김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具念], 바르게 알며[正知],
느낌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알며,
느낌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아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想]을 잘 알고 거친 생각[尋]을 잘 안다’고 함은,
생각과 거친 생각의 생김을 자세히 관하고,
생각과 거친 생각의 머무름을 자세히 관하며,
생각과 거친 생각의 소멸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염에 머무르되 염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함은,
생각과 거친 생각이 생김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具念] 바르게 알며[正知],
생각과 거친 생각이 머무름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알며,
생각과 거친 생각이 사라짐과 다함과 없어짐을 자세히 관할 때에 염을 갖추고 바르게 안다는 것이다.
3] 선정3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그는 그때에 생각하기를,
‘나는 모든 법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해서 착하지 않은 법은 일으키지 않고,
모든 착한 법을 일으키며 무기의 법[無記法]을 일으키지 않고,
유기의 법[有記法]을 일으키며 착하지 않은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게 하고,
모든 착한 법은 오래 머무르게 하며 무기의 법은 오래 머무르지 않게 하고,
유기의 법은 오래 머무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그러할 때에 또한 마음을 관찰하고 또한 심소법(心所法)도 관찰하는 것이니,
그는 이와 같이 심ㆍ심소법을 관찰할 때에 일으키는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을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하여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의 증득]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勝分別慧]를 증득하게 된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고 짓는 것이 많으면, 온갖 착하지 않은 지혜와 이치대로 이끈 것이 아닌 지혜와 온갖 착하지 않아서, 선정을 장애하는 지혜로 하여금 모두 다 파괴되고 버려 두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지혜는 생장하면서 굳건히 머무르게 되나니,
이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한다’고 한다.
그리고 곧 이 지혜를 얻고 성취하고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득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다음에 느낌과 생각과 거친 생각을 자세히 관하는 것과 함께 행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선정[定]이라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은,
그의 자재함을 나타낸다는 것과 ‘뛰어나게 분별하는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는 데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5취온(取蘊)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生滅]을 따라 관해서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물질[色]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알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안다.
4) 선정4
‘이것을 바로 닦는 선정이 있어서’라고 함에서, 어떤 것이 선정[定]인가?
5취온에 대하여 자주자주 나고 없어짐을 따라 관해서 머무를 적에 일어난 마음이 머무르고 평등하게 머무르며,
나아가 마음이 한 경계로 된 성품을 통틀어 선정이라 한다.
어떤 것을 ‘닦는다’고 하는가?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행을 더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통틀어 ‘닦는다’고 한다.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고 함은, 이 선정에 대하여 자재함을 나타낸 것이다.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의 증득]
‘모든 번뇌[漏]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한다’고 함에서,
번뇌라 함은 세 가지 번뇌이니,
곧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이다.
그는 이 선정에 대하여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으면 이 세 가지 번뇌로 하여금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고, 두루 다하고, 마지막까지 다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고 하며,
이 영원히 다함을 획득하고 성취하고 친근히 하고 접촉해서 증명하기 때문에 ‘증득한다’고 한다.
또 다음에, 제4 정려(靜慮)에 속한 청정한 사(捨)와 염(念)과 함께 행하는 아라한에 나아가는 무간도(無間道)에 딸린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성품[心一境性]을 ‘선정’이라고 하며,
곧 이 선정에 대하여 닦고 익히며 한결같이 짓고 항상 지으며 더욱 수행해서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하여 ‘닦는다’고 한다.
그리고 ‘익히고 닦으며 짓는 것이 많다’ 함에서,
그것의 자재함을 나타내는 것과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한다’고 하는데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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