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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형 전업농부·작가
한 손엔 깁스, 한 손엔 소줏병
해거름 녘이면 개들을 데리고 저수지 둘레를 산책한다. 홀로 계신 할머니 집 담장 위로 붉게 익은 감들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익다 지친 단감들이 길바닥에 떨어져 퍽퍽! 터진다. 감의 잔해에서 초 냄새가 진동한다. 뭉그러진 감 위로 말벌들 잉잉대고, 물까치 떼가 몰려와 잔치를 벌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먼 산만 바라보시는 주인 할머니. 감 딸 손이 없으니 이 시골에선 아무도 못 따는 단감이 아무도 못 먹는 식초가 되어 길바닥에서 풍화 중이다.
할머니 집 단감나무.
떨어진 감을 보니 ‘불사조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몇 해 전,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그마한 몸집에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진 할아버지가 버스정류장을 등진 채 마을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계셨다. 왼팔에 하얀 깁스를 하고 오른손엔 검정 비닐봉지를 드셨는데 축 처진 봉지가 땅에 닿을 듯했다. 서행해 다가가 차를 세웠다. “할아버지, 어디 다녀오세요?” 여쭈니 “어~ 병원 갔다 와~” 하신다. “타셔요.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고 부축해 태워드렸다. 할아버지 손에서 받아든 묵직한 비닐봉지엔 됫병들이 소주 2병이 들어 있었다.
옆사람도 할아버지를 길에서 만났다 했다. 경운기를 몰고 가시던 할아버지가 그를 보시더니 “어이~ 여기 타!” 하셨단다. 그가 경운기에 올라타자마자 기어를 3단 고속으로 올리시더니 마을길을 무섭게 질주하시더라나. 평소엔 느릿느릿한 어른이 경운기에만 올라타면 폭주족으로 변한다며 옆사람이 웃었다. 아직도 반주로 소주 두 병을 거뜬히 비우신다는 이야기를 할 땐 은근한 흠모와 존경의 내색까지 비쳤다.
한동안 마을에서 할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경운기가 도랑으로 추락해 뼈가 부러지셨다고 했다. 연세가 팔십 후반, 병원에 입원하신 지 수개월이 지나도 못 나오시기에 그대로 돌아가시려나 했다. 하지만 웬걸. 들판에 푸른 벼가 넘실거리던 여름날, 마을길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할머니 품에 아기처럼 쏙 안긴 채 할머니의 전동차에 함께 타고 계셨다. 키는 더 줄어들었고 주름진 얼굴은 하얗고 핼쑥하셨다. 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오셨다고 했다.
사진 속 노부부는 다른 분들이시다. 뼈가 부러진 어른이 늙은 아내의 품에 안겨 계시던 모습도 이와 비슷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할아버지는 늦여름에 퇴원하셨다. 눈만 뜨면 논밭으로 나가시던 어른이 몇 달간 병원에 갇혀 계셨으니 오죽 갑갑하셨을까. 퇴원하자마자 할아버지는 성치 않은 몸으로 또 논밭을 기어 다니셨다. 집 안팎과 논두렁 밭두렁, 천지사방이 노인을 향해 손짓했을 것이다. 어서 와서 밀린 일거리 좀 해치우라고. 할아버지는 논길에 경운기를 세워놓고 네 발로 봇도랑을 오르락내리락하셨고, 구부러진 등허리로 벼포기 사이를 굼실굼실 오가셨다. 그렇게 조금씩 회복하시나 싶더니 아뿔싸, 이번엔 갈비뼈가 부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니, 어쩌자고 그 몸으로 감나무에 올라가셨대요!
늦가을 논둑의 감나무들에 대봉감이 가지가 찢어질 듯 주렁주렁 달렸다. 단감은 지금 따야 하지만 대봉감은 아직 이르다. 먼저 익은 감에 물까치들의 입질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따고 남겨둔 꼭대기 감만 ‘까치밥’이 아니라 먼저 익은 감도 까치밥이다. 익기 시작한 감을 새들이 쪼아대도 사람들은 감을 따지 않는다. 첫 서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대봉감은 서리를 맞아야 당도가 높아진다.
논둑의 감나무에서 대봉감이 익어가고 있다.
‘까치밥’을 배고픈 겨울새들의 양식을 걱정한 선조들의 측은지심과 생명존중으로 해석하지만, 실상을 말하자면 까치밥은 ‘따지 못한 감’이다. ‘여우의 신포도’인 것이다. 사람 체중도 감당 못하는 허약한 감나무의 목질과 2m도 안 되는 인류의 짧은 신장이 만들어낸 ‘따뜻한 신화’랄까. 소유 불가능한 것을 특별한 의미망에 가두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줄 아는 포유류가 인간이다.
허리 굽은 노인들에게 감 따는 일은 쉽지 않다. 높은 가지 끝에 달린 감을 올려다보기도 어렵거니와 그걸 따는 일은 더더욱 힘들다. 기다란 장대나 집게를 쳐들어본들 꼭대기까지 닿지도 않는다. 나뭇가지를 딛고 오르자니 위험천만이다. 감나무 가지는 삭정이처럼 잘 부러진다. 노인의 뼈도 나뭇가지처럼 잘 부러진다.
까치밥으로 놔두기엔 너무 탐스러웠던 감 때문에 할아버지는 또 병원에 실려 가셨고, 겨울 한 철을 돌아오지 못하셨다. 겨울이 가고 산과 들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났다.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부러진 몸을 일으켜 세워 모내기 들판으로 당당히 복귀하셨다. 죽음의 나락에서 한 레벨 더 강인해져 돌아온 <반지의 제왕>의 백색 간달프처럼.
“노인들, 병원 침대에서 못 움직이고 누워 있으면 근육이 다 풀려서 금방 돌아가시거든. 근데 두 번이나 살아서 돌아오셨어! 불사조야, 불사조!”
옆사람은 이때부터 할아버지를 ‘불사조 어른’이라 불렀다.
마을길에 세워둔 불사조 어른의 경운기를 충직한 그집 개가 지키고 있다.
옆사람과 함께 트럭을 타고 나가다 불사조 어른의 빈 경운기가 마을길 한가운데 서 있는 걸 보고 멈춰 섰다. 잠시 기다리니 길 아래쪽 도랑에서 어른이 네 발로 기다시피 천천히 올라오고 계셨다. 도로까지 힘겹게 올라오신 어른이 비틀비틀 손을 뻗어 경운기 손잡이를 붙들고 온몸을 끌어올려 운전석에 오르시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경외감을 가지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구 미래를 보는 것 같네…”
“그렇지.”
“저렇게 늙고 싶은 거야?”
“응, 멋져!”
그들도 힘들다
벼가 익어간다. 잘 익은 벼의 빛깔은 황홀하다. 노란색이란 말로는 부족한, 따뜻하고 꽉 찬 황금빛이다. 클리셰를 진저리치게 싫어하지만, 익은 벼 앞에서는 ‘황금빛 들판’이니 ‘풍요로운 가을’이니 하는 상투적 찬사들이 다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잘 익은 벼에 나는 매번 감동한다.
가을 하늘 아래 벼가 익어간다.
8월 중순 벼꽃이 핀 후 9~10월 두 달간은 알곡이 여무는 기간이다. 비록 병해를 입었지만,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알곡은 알곡대로 제 몫의 시간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수확량은 기대보다 적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다.
옆사람이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있다.
출수 이후 40일이 지나면 완전 물떼기를 해서 논을 말린다. 그래야 수확할 때 콤바인 작업이 수월하다. 물을 너무 일찍 떼면 미질(米質)이 나빠진다. 우리는 9월 하순에 물꼬를 터서 논을 말렸다. 논의 위쪽 수로에 논물을 대기 좋도록 수위를 높여둔 보(洑)가 있는데, 더 이상 논물 댈 일이 없으니 그것도 터 주었다. 수로를 막았던 판자를 제거하자 갇혔던 물이 한꺼번에 빠지면서 흙 위로 미꾸라지와 새우들이 펄떡거렸다. 느닷없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조금씩 흘러내리는 물에 하나둘 미끄러지며 하류로 이동해갔다.
물을 뺀 수로 바닥에 미꾸라지와 새우가 가득하다.
논둑이 또 파헤쳐졌다. 흙더미가 벼포기 아래로 밀려 들어왔다. 진흙 위에 멧돼지 발자국이 선명하다. 산과 인접한 논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멧돼지들은 뛰어난 후각으로 땅속 벌레를 찾아내고 단단한 코를 쟁기처럼 사용해 논흙을 들쑤신다. 멧돼지가 허문 논둑 흙이 쓸려내려 도랑을 막는 바람에 논물이 빠지지 않는다. 삽을 들고 도랑을 치면서도 옆사람은 그러려니 한다.
이번엔 멧돼지가 논 안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논 한복판에 종횡무진 멧돼지 길이 선명하다. 벼들이 이리저리 휩쓸려 쓰러졌다. 좀 놀라긴 했지만 걱정할 정도의 피해는 아니다. 멧돼지가 벼포기를 깔아뭉개 진흙 목욕을 한 것도 아니고 벼알을 쓸어 먹지도 않았다. 옆사람은 이번에도 그러려니 한다.
멧돼지가 논 안을 휘젓고 다닌 흔적.
논둑을 헤집어 벌레를 잡고 가끔 벼알도 훑어 먹는 행동은 멧돼지로서 자연스러운 먹이 활동이다. 애써 지은 농작물을 지키려는 갖가지 방어 행위도 농부로서는 당연한 생존 행동이다. 멧돼지와 인간은 먹이 영역을 놓고 대치한다. 고구마밭은 멧돼지에게 먹이 창고이고, 고구마밭 주인에게 멧돼지는 퇴치 대상이다. 농부들은 철제 또는 전기 울타리를 둘러쳐 멧돼지를 막는다. 인간들이 자연을 점령하고 야생의 최상위 포식자를 제거하자 개체 수가 늘어난 멧돼지가 인간들의 재배지로 밀고 들어왔다.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격돌이다.
몇 해 전 겨울의 일이다. 우리 집으로 웬 봉고차가 올라오더니 형광 점퍼에 총을 든 남자 둘이 사냥개 두 마리를 산에 풀었다. 겨울 동안 멧돼지 수렵이 허가된 것이다. 숲에서 육중한 달음박질 소리가 나고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의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 후 총성이 울렸다. “잡았어! 이쪽으로 와! 계곡 쪽으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후 아래로 내려가니, 계곡의 마른 낙엽 위에 피투성이 멧돼지가 쓰러져 있었다. 논둑 허물고 밭 헤집어 죽을죄를 지은 멧돼지였다. 덩치가 제법 컸다. 살아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우리 집 뒷산에서 먹고 자고 뛰어다녔을 녀석…. 마음이 무척 아팠다.
벌초와 울력의 계절
추석 즈음이면 마을 곳곳에서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바야흐로 벌초와 울력의 계절이다. 벌초는 가족 단위로, 울력은 마을 단위로 한다. 벌초의 경우, 맡아서 하는 자손이 있다면 모를까, 산소를 관리해온 어른들도 기력이 쇠하시고 도시 사는 자식들도 들르기 어려우면 인력을 사서 의뢰할 수밖에 없다. 그런 벌초 일거리가 간혹 50~60대 농부한테 떨어지기도 한다. 얼마 전 옆사람도 마을 어른의 부탁을 받아 예초기를 멨다. 진입로조차 보이지 않는 산길을 예초기를 휘두르며 길을 내어 올라갔는데 봉분의 규모가 꽤 크더란다. 잡목과 풀로 우거진 산비탈에서 산소를 발굴하다시피 했다 한다.
마을 어른의 부탁으로 산소를 벌초해드렸다.
울력은 마을 구성원이면 응당 하는 일이다. 사람 키만큼 자라 길 쪽으로 기울어진 쑥부쟁이와 소리쟁이들, 길 안으로 넘실대며 기어드는 칡넝쿨과 환삼덩굴 따위를 이맘쯤에 벤다. 집 앞길은 각자가 관리한다 쳐도 수 킬로에 달하는 마을 진입로는 혼자 책임지거나 감당할 일이 아니라서 울력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이런 울력도 최근 들어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마을 어른들 연세가 80~90대로 접어들면서 예초기 울력을 할 사람이 없다. 건너마을 어른께서 말씀하시길, 마을에서 예초기 들 사람이 70대인 본인과 ‘60대 젊은이’ 둘뿐이라 수 킬로에 달하는 마을길 풀을 둘이서 베었다며, 이젠 풀 베는 일이 너무 힘들다셨다. 그 연세에 왜 안 그렇겠는가.
마을 진입로를 예초기로 베었다.
며칠 전, 옆사람은 아랫집 아저씨와 함께 우리 마을 진입로 풀을 베었다. 도로를 향해 풀들이 넘실넘실 들어오는데 풀베기 울력하자는 말이 없다고, 내버려 두자니 오며 가며 눈이 불편해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그가 결국 아랫집에 전화를 한 것이다. 이장님도 연세가 많으시고, 할머니들과 어른들 제외하면 예초기 멜 사람도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둘이서 베자고. 그렇게 두 사람이 한나절을 애쓴 끝에 마을 진입로가 말끔해졌다. 이마에서 발등까지 풀 조각으로 범벅이 된 그를 보며, 우리 다음엔 이 일을 누가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80대가 되어도 풀은 여전히 강성할 텐데 말이다.
선대의 산소를 돌보는 일, 시시때때로 제사를 모시는 일, 명절에 대가족이 모이는 일, 울력으로 풀을 베는 일…. 이런 일들은 어쩌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