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견율비바사 제7권[1]
법사가 말하였다.
“이제 계율 중의 문구를 해석하겠습니다.
율본에서 말씀한 이름[名]이란 단순히 한 가지 사람에 따라서만 맺을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人身]ㆍ닦아 익힘[修習]ㆍ태어남[生]ㆍ이름[名]ㆍ성[性]ㆍ계율ㆍ절[寺]ㆍ행[行]ㆍ나이[年紀]를 낱낱이 알 것이니, 나는 이제 분별하여 해설하겠습니다.
‘사람의 몸’이라 함은 하나의 사람에 따라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며 붉기도 하고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며 살지기도 하고 파리하기도 합니다.
‘닦아 익힘’이라 함은 혹은 선정을 닦고 혹은 상가 일을 닦고 혹은 학문을 닦음이니, 이를 닦아 익힘이라고 합니다.
‘태어남’이라 함은 혹은 찰리(刹利) 집에 혹은 바라문(波羅門) 집에 혹은 비사(毘舍) 집에 혹은 수타(修陀) 집에 태어남이니, 그러므로 태어남이라고 합니다.
‘이름’이라 함은 혹은 불타륵힐다(佛陀勒詰多)라 하고, 혹은 담무륵힐다(曇無勒詰多)라 하고, 혹은 승가륵힐다(僧伽勒詰多)라 하니, 이것을 이름이라 합니다.
‘성’이라 함은 혹은 성이 가전연(迦旃延)이기도 하며, 혹은 성이 바사차(婆私叉)이기도 하며, 혹은 성이 구사야(拘私夜)이기도 하니, 이를 성이라 합니다.
‘계율’이라 함은 그 지니는 바의 계율을 따르므로 계율이라 합니다.
‘절’이라 함은 그 머무르고 있는 절집을 따름이니, 이를 절이라 합니다.
‘행’이라 함은 업을 따라서 행하므로 행이라 합니다.
‘나이’라 함은 혹은 다섯이며 혹은 열, 스물, 서른이기도 하므로 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계율 중의 문구라고 합니다.
만약 비구가 돌아다니면 이 비구는 얻는 것입니다. 비구라 함은 구걸하는 사람이니, 얻기도 하고 얻지 않기도 하나 역시 구걸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이는 다 선인(善人)의 행위이니 부처님ㆍ벽지불ㆍ성문들이 다 걸식을 행하였습니다. 가난 했거나 부자였거나 집을 버리고 도를 배우며 소와 전답의 일이며 살림살이하는 속가의 일을 버리고서 걸식을 하며, 살림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사해(四海)를 의지하여 집을 삼으니, 이를 비구라고 합니다.
‘끊어 자른 옷을 입는다’ 함은 옷 값어치가 천만짜리라도 비구가 얻으면 곧 끊어 잘라서 입으며, 옷은 값어치를 무너뜨려 바늘과 실로써 꿰매고 가늘고 연한 것을 헐어서 마침내는 거칠고 나쁜 것으로 만들며, 옷이 먼저 산듯하고 흰 것을 나무껍질로써 그 본래의 빛깔을 없애버리면 곧 이것이 헌 옷이니 비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끊어 자른 옷을 입는 이를 비구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미(沙彌)’라 함은 비구라고도 하니, 만일 어떤 단월이 와서 비구를 청하면 사미가 비록 구족계를 아직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구의 숫자에 들어가니, 이것을 이름만의 비구[名字比丘]라고 합니다.
‘장로여, 나도 비구라고 합니다’라고 하는 이것이 가명비구(假名比丘)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무엇을 가명 비구라고 하는가?
마치 장로 아난이 밤에 가다가 한 계율을 범하는 비구를 보고,
‘에끼, 이는 누구시오?’라고 하자,
계율을 범하는 비구가,
‘나는 비구입니다’라고 하면,
이것이 가명이니, 견고한 실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왔구나, 비구여’라고 함은 어떤 속인이 부처님에게 와서 출가할 것을 구할 적에 여래는 그 근기와 인연이 완전히 갖추어져서 제도할 만하다고 관찰하시면 곧 부르시면서 ‘잘 왔구나, 비구여’라고 하시니, 수염과 머리칼이 저절로 떨어져서 비구가 되는 것입니다.
‘부르신다’ 함은 여래께서 누더기 속으로부터 오른 손을 내십니다. 손은 황금빛이요 범음성으로 ‘잘 왔구나’라고 말씀하시어, 맑은 행을 닦아 괴로움의 근원을 다하게 하시니, 부처님 말씀이 아직 끝도 나지 않아서 문득 비구가 되고 구족계를 얻으며, 세 가지 옷과 바리가 왼쪽 어깨 위에 입혀집니다. 바리 빛깔은 푸른 울바라 꽃과 같고 가사는 선명해서 붉은 연꽃과 같으며, 바늘ㆍ실ㆍ도끼ㆍ물거르는 주머니가 다 갖추어지니, 이 여덟 가지 물건은 출가한 사람이 항상 사용하는 것으로서 자연히 위의가 있어지며 두루 갖춥니다.
세존은 곧 화상(和尙)이 되시며 또한 계사(戒師)이시니 부처님께 와서는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처음 도를 얻고 열반하시기까지 ‘잘 왔구나, 비구여’라고 하신 그 수가 몇이나 됩니까?”
대답하였다.
“이와 같은 비구의 수는 1천 3백 41인입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은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등 5인이며, 다음은 야수(耶輸) 장자의 아들과 그의 아는 이들 54인이며, 발군(拔群)에 30인이 있고, 사치라(闍致羅) 1천인과 이 두 큰 성문과 2백 50인이며, 앙굴마라(鴦掘摩羅) 1인이므로 율문에서 1천 3백 41인을 찬탄했습니다.
1천 3백
41인은
큰 신심이 있어
다 부처님께 갔네.
여래는 자비로써
금빛 손을 드시어
범음으로 부르시니
때에 맞게 중이 되어
옷과 바리는 저절로 내렸으니
모두 다 잘 왔구나 하는 이네.
큰 지혜가 있는 이는 다 ‘잘 왔구나, 비구[善來比丘]’라고 하지만,
이들 비구만이 ‘잘 왔구나’라고 하신 것이 아니요,
다시 ‘잘 왔구나’하는 비구들이 있으니, 사루(斯樓) 바라문이 3백인과 함께 왔고,
또 마하겁빈나(摩訶劫賓那)가 1천인과 함께 왔고,
가유라위(迦維羅衛) 나라에서 또 1만이 함께 왔고,
또 1만 6천인이 있어서 바야라니(波夜羅尼) 바라문과 함께 출가하였으니,
다 잘 왔구나하는 비구입니다.
이는 수다라 안에서 말씀한 것이요, 비니장에서는 그 이름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3귀(歸)로써 구족계를 얻는다’ 함은 이와 같이 세 번 삼귀를 말씀하여 구족계를 얻는 것입니다.
율문에서 ‘≺잘 왔구나!≻ 비구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3귀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중요한 법을 받음으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심부름을 보냄으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여덟 가지 말로써 구족계를 얻으며,
아뢰고 갈마함으로써 구족계를 얻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잘 왔구나, 3귀’로써 구족계를 얻음은 이미 말하였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가르침을 받는다고 합니까?”
“부처님은 가섭에게,
‘너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나는 상ㆍ중ㆍ하의 자리에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내리라≻고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가섭에게,
‘너는 이제 일체 선한 법을 듣되 뼈에 들이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나는 이제 마음을 거두어 귀를 기우려 법을 듣노라≻고 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부터님은 가섭에게,
‘너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몸을 생각하되 버리지 않는다≻고 하여야 한다. 너 가섭은 마땅히 배우라’고 하셨으니,
대덕 가섭은 가르침으로써 구족계를 얻는 것입니다.
가섭의 구족계는 모두 부처님의 신력으로 얻었습니다.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구족계를 얻는다’ 함은 수바가(須波迦)는 부처님께서 구족계를 받을 것을 허락하셨으니,
그때 세존은 부바라미(富婆羅彌) 절에서 거니시면서 수바가 사미에게 물으시되, 혹은 띵띵하게 부풀음[膖脹]의 이름을 물으시고 혹은 색(色)의 이름을 물어,
≺이 두 가지 법은 동일한 것이냐, 각기 다른 것이냐?≻ 하시며,
10부정을 인연하여 수바가에게 물으셨는데, 곧 물으시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찬탄하시며 ‘좋도다’ 하셨습니다.
또 ‘너의 나이 몇이냐?’ 하시니,
수바가가 ‘저의 나이 일곱 살이옵니다’하므로,
세존은 수바가에게,
‘너는 일체 지혜 있는 이와 같이 물음에 대답을 잘하니, 바른 마음으로 나는 너에게 구족계 받을 것을 허락하리라’고 하셨으니,
이를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구족계를 얻는다고 합니다.
‘중요한 법을 받음으로써 구족계를 얻는다’ 함은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 비구니는 여덟 가지 중요한 법을 받음으로써 곧 구족계를 얻었습니다.
‘심부름을 보냄으로써 구족계를 받는다’ 함은 반가시니(半迦尸尼)는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여덟 가지 말로써 구족계를 얻는다’ 함은 비구니로부터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를 비구승에게 다시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를 얻는 것이니, 이를 여덟 가지 말로써 구족계를 얻는다고 합니다.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로써 구족계를 얻는다’ 함은 이는 지금 세상의 비구가 항상 여덟 가지 말을 씀으로써 구족계를 얻는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율본을 가져다 증거를 삼겠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3귀가 끝나면 구족계 받는 것을 허락하리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구족계 받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선’이라 함은 악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범인으로서 선을 닦거나 내지 아라한은 다 선인(善人)이라 합니다.”
“무엇을 선이라 합니까?”
“선이라 함은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이 5분(分)과 합하면 이를 선인(善人)이라고 합니다.
‘참됨[眞]’이라 함은 계율은 으뜸가고 참됨이 되니, 이를 참됨이라 합니다. 비유컨대 흰 모직물에 푸른 빛깔로 물들이면 이미 빛깔을 이룬 뒤에는 곧 푸른 모직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참된 비구도 그러하여 계율로 말미암아 참된 비구라고 이름하니, 번뇌를 버리고 안의 번뇌가 다한 아라한도 참됨이라 합니다.
‘배움[學]’이라 함은 범부와 7학인(學人)은 3학(學)을 배우므로 이를 배우는 학비구(學比丘)라고 합니다.
‘배울 것 없음[無學]’이라 함은 배우는 자리는 이미 지나고 위 과위[上果]에 머물러서 이로부터는 다시 달리 배울 것이 없으며, 모든 번뇌는 이미 다하였으니, 이를 배울 것이 없음이라 합니다.
‘모인 상가의 비구’라 함은 가장 적게 모인 상가가 5인이니, 많은 것은 모임의 다소에 따르며, 욕(欲)을 하고 싶어 할 이면 욕을 하고, 실제로 상가가 이미 화합하여 꾸짖을 것이 없으면 곧 화합 갈마를 짓습니다.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라 함은 한 번 아뢰고 세 번 갈마 하는 것이니, 갈마 해야 할 것이면 법으로써 갈마를 짓습니다.
‘악하지 않음’이라 함은 사람 몸에 어지러움과 아룀과 갈마 할 것이 없고 마음이 선하여 여러 사람들이 무너뜨릴 수 없는 이로서 경박함이 없으므로 악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선’이라 함은 법을 행하여도 선이요, 여래의 가르침을 행하여도 선입니다.
‘족(足)’함이라 함은 최상인 모습[上相]이며, 또 지극하다고 말합니다.”
물었다.
“무엇을 최상인 모습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비구의 모습을 최상인 모습이라 하니,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로써 최상인 모습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구족계의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라고 합니다.
나는 이제 이 가운데서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를 말하였으니, 다른 것은 나중에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아파루가(阿波婁加)ㆍ백갈마(白羯磨)ㆍ백이갈마(白二羯磨)ㆍ백사갈마(白四羯磨) 이와 같이 차례로 건타가(騫陀迦)로부터 파리바라(波利婆羅)에 이르니, 갈마본에서 만일 구절에 이르면 나는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만일 중간에 말하면 처음 바라이에서 어지럽고 뒤섞일 것이기 때문에 구절에 이르러 차례로 말하는 것이 남들을 이해하기 쉽게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상가가 이미 대중을 모아 마치고, 아뢰고 세 차례의 갈마한 비구로서 만약 이 비구가 부정을 행하면 바라이 죄를 얻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비구들은 같은 이름의 비구이니, 비구와 비구들은 목숨이 다하도록 계율 법에 듭니다.
계율은 배워야 하는데, 배움에는 3학이 있습니다. 상계(上戒)ㆍ상심(上心)ㆍ상혜(上慧)를 3학이라고 합니다.”
물었다.
“무엇을 상계라고 합니까?”
“상(上)이라 함은 같음이 없음[無等]을 말함이요, 계(戒)라 함은 배움이니, 같음이 없는 배움[無等學]이라고 합니다.
상심은 과위(果位)의 마음이요, 상혜는 업을 지음으로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움이라 하며 무엇을 상학(上學)이라 합니까?
무엇을 마음이라 하며 무엇을 상심이라 합니까?
무엇을 지혜라고 하며 무엇을 상혜라고 합니까?”
“5계와 10계는 배움이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세간 중에는 이 계율이 항상 존재합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실 때에는 부처님과 성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아직 세상에 나오시지 않으실 때에는 벽지불ㆍ업도사문(業道沙門)ㆍ바라문ㆍ전륜성왕과 모든 큰 보살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몸소 스스로의 지혜로 사문ㆍ바라문을 가르치고 만약 이 공덕을 배우는 이면 죽어서 하늘에 나며 혹은 인간에 태어나서 모든 즐거움을 받으니, 이를 배움이라 합니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라 함은 같음이 없는 배움이라 합니다.
모든 광명에서 햇빛이 왕이며, 모든 산에서 수미산이 으뜸이요, 일체 세간의 배움에서 바라제목차가 으뜸입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시면 이 법이 존재하며, 만약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이 없으면 중생들로서 이 법을 세울 수 없고 몸ㆍ입ㆍ뜻으로 여러 악한 업을 행하므로 부처님은 같음이 없는 배움으로 바로 잡으십니다.
또 만약 여기에 들면 같이 도의 결과에 드니, 이를 상학이라 합니다.
‘마음’이라 함은 6욕(欲)에 여덟 가지 공덕심(功德心)이 있으며, 세간에 여덟 가지 심삼매(心三昧)가 있으니, 이를 상심이라 합니다.
일체 세간의 마음을 초과하여 오직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야 만이 이에 이 마음이 있으니, 이를 상심이라 합니다. 이것이 도과(道果)의 마음입니다.
만약 이 마음이 있으면 부정한 법을 행함이 없습니다.
‘지혜’라 함은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으며 업(業)은 인이 되고 보(報)는 과가 되니, 지혜로써 압니다. 이를 지혜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나오시지 않거나 이 법은 있으니, 부처님과 성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만약 세상에 나오시지 않을 때면 업도사문ㆍ바라문ㆍ전륜성왕과 모든 큰 보살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니, 아구라(阿拘羅)가 만년을 크게 보시를 하고 외라마(畏羅摩) 바라문과 비타라(脾陀羅)와 여러 큰 지혜 있는 사람이 크게 보시를 하여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서 위로 천상에 나서 여러 쾌락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전륜왕의 삼상(三相)’이라 함은 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이니, 이를 상혜라고 하며, 상학과 상심 이 두 가지 법은 지혜가 가장 훌륭한 것이니, 이를 상혜라고 합니다.
상혜는 오직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야 만이 이 법이 있으며, 도과(道果)의 지혜도 상혜라고 하므로 비구는 3학의 안에 들어가서 부정한 행을 행하면 바리이 죄를 얻습니다.
이 3학 중의 바라제목차의 배움 가운데에 들면 이를 목숨이 다하기까지 (잘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모든 비구들은 한 종족이 아니요, 각각 국토와 고향이 달라서 같지 않으며, 하나의 성(姓)이 아니요, 하나의 이름이 아니나 같이 한 곳에 머무르면서 하나의 배움을 함께 하므로 또한 함께 삶[共生]이라 하며, 바라제목차의 배움에서 범하지 않는 이것을 목숨이 다하기까지 (잘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계율이 쇠약[戒羸]하되 나타내지 않음’이라 함은 계율을 버리지 않되 계율의 쇠약한 형상을 남에게 말하지 않으며, 혹은 계율의 쇠약함을 남에게 말은 하되 계율을 버리지 않으며, 계율 또한 나타내지 않은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어찌 계율을 버린다고 하지 않으면서 계율이 쇠약하다고 하는가?
계율본에서 ‘두세 밤을 넘지 않되 함께 자면 죄가 된다’고 함과 같습니다.
말하기가 쉬으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 계율이 쇠약함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언어도 좋으면 설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계율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뜻이 이미 충분한데 어찌 쇠약이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비유컨대 대왕이 시종하는 사람이 없고 또 천관(天冠)과 영락이 없으며 장엄도 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보고 좋게 생각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그 때문에 먼저 계율이 쇠약함이라고 하고, 나중에 나타내지 않음이라 합니다.
두 글귀가 화합한 것을 좋음[善]이라 하고, 계율이 쇠약함이 있되 나타내지 않으며 계율은 쇠약하지 않되 나타냄이니, 배움의 안에서 마음에 싫어하여 지니지 않는 것을 계율이 쇠약함이라 합니다.
‘근심과 걱정’이라 함은 불법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좋아하지 아니하여,
혹은 ≺오늘 나는 떠나가겠다. 내일 나는 떠나가겠다≻고 하며,
혹은 ≺이 길을 따라 가리라. 저 길로 가리라≻고 하여,
한숨지어 길이 탄식하며 마음이 산란(散亂)하여 오롯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과 걱정이라 합니다.
‘사문의 법을 버리고자 한다’ 함은 비구로서의 형상을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싫어하고 미워한다’ 함은 비구로서의 형상을 극히 부끄럽고 욕된다고 여김이니, 비구 형상 보기를 마치 똥을 보듯하고 속인의 형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차례로 율문 중에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나는 이제 부처님을 버리노라. 좋도다. 나는 부처님을 버리리라’고 말을 하여 남에게 알리는 이와 같은 것은 계율이 쇠약하되 계율을 버림은 아닙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다시 달리 계율의 쇠약함이 있으니,
‘나는 부처님을 버리고ㆍ법을 버리고ㆍ상가를 버리고ㆍ배움을 버리고ㆍ비니를 버리고ㆍ바라제목차를 버리고ㆍ화상을 버리고ㆍ아사리(阿闍梨)를 버리고ㆍ같이 배운 이를 버리고ㆍ제자를 버리고ㆍ아사리의 제자를 버리고ㆍ화상과 함께 같이 배운 이를 버리고ㆍ아사리 화상과 함께 같이 배운 이를 버리리라’고 하는 이 열넷 구절은 다 계율이 쇠약함의 시초입니다.
‘나는 이제 속인이 되고ㆍ우바새가 되고ㆍ정인(淨人)이 되고ㆍ사미가 되고ㆍ외도가 되고ㆍ외도의 우바새가 되고ㆍ나는 사문이 아니고ㆍ나는 석가종의 제자가 아니다’고 하는 이 여덟 구절은 다 계율이 쇠약함의 인(因)입니다.
이로부터 스무 구절을 합하여 1백 10구절이 있으니, 계율이 쇠약함이라 합니다.
이로부터 이후로 ‘나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함을 처음으로 삼아 열일곱 구절이 있습니다.
‘밭[田]’이라 함은 논과 밭을 처음으로 삼습니다.
‘곳[處]’이라 함은 이로부터 단 과실ㆍ채소며 혹은 잎사귀를 내니, 이를 곳이라고 합니다.
‘기교(技巧)’라 함은 혹은 토기(土器)를 만들 수 있고 혹은 부림을 당하기도 하는 이와 같은 것을 처음으로 삼습니다.
‘오히려 집을 그리워한다’ 함은 ‘나는 부모가 계시므로 이제 돌아가서 공양하리라’고 하는 것이 처음이 되어 아홉 구절이 있으며,
이로부터 의지하여 ‘나는 어머니가 있으므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할 것이며 어머니도 생각하시어 나를 기르리라’고 하는,
이 같은 것을 처음으로 삼아 열여섯 구절이 이로부터 됩니다.
‘맑은 행을 하는 사람은 한 끼니와 한 잠으로 매우 행하기 어려움을 한다’ 함은 처음으로 삼아 여덟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능하지 못하며 나는 차마 하지 못하며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는 이 같은 것을 처음으로 삼아 쉰 구절이 있으며, 또 1백 10십 구절 또 다시 1백 60구절이 있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차례로 계율이 쇠약함을 이미 말하였으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계율을 버림[捨戒]이라 함의 구절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비구’라 함을 법사가 말하였다.
“이 구절은 차례로 알기 쉽습니다.
‘나는 부처님을 버리고ㆍ법을 버리고ㆍ상가를 버리고ㆍ비니를 버리고ㆍ바라제목차를 버리고ㆍ같이 배운 이를 버리고ㆍ화상의 제자와 아사리의 제자를 버리고ㆍ화상의 제자와 같은 이를 버리고ㆍ아사리 제자와 같은 이를 버리고ㆍ같이 배운 이를 버린다’고 하는 이 열 넷 구절은,
버린다[捨]는 말과 서로가 비슷한 것이니, 사람들에게 말하여 알림이요,
이것이 법으로부터 하직하기 위하고 비구승으로부터 하직하기 위하여서 사람들에게 말하여 알게 한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부처님을 나는 버린다’고 말하기 위하여 우물거리면서,
‘나는 부처님을 버린다’라고 하면,
천축(天竺)에서의 공정한 말이 아니요, 되는대로 한 말로서 말함이니,
‘나는 부처님을 버리고 나는 법을 버리고…’
이와 같이 차례로 하여 같이 배운 이까지에 이르러야 율본에서 말씀한 바로 같습니다.
거룩한 이익[聖利]이 원만하고 구족함에 있어서,
‘나는 제1선정에 들려 한다’고 하면서 우물거리며 잘못 말하여,
‘나는 제2선정에 들려 한다’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말하면 이 사람은 비구 형상을 버리고자 하므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만약 아는 이면 계율을 버림이 되니, 제석과 같이 범마(梵魔)와 같이 떨어짐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법으로부터 떨어져서 속인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부처님을 버렸다. 나는 부처님을 버리려한다. 나는 부처님을 버릴 것이다’ 하는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말이요, 심부름을 보내거나 그리거나 혹은 손도장을 찍어서 사람에게 말하면 이는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으며 혹은 부질없는 거짓말을 하여 손으로 형상을 나타냄으로서 무거운 죄를 얻는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이 버리게 되면 남들을 향하여서 버리며 마음에서 말로서 꺼낸 연후에 말을 하여야 계율을 버림이 되고,
만약 말을 꺼내 한 사람에게 말을 하였는데,
만일 이 사람이 이해하면 계율을 버림이 되고,
만일 이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곁에 있던 사람이 이해하여도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두 사람에게 말할 적에 한 사람은 이해하고 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여도 계율을 버림이 되며, 또 다 이해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만약 백천 사람에게 말할 적에 이해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혹은 비구로서 음욕 때문에 괴로움을 받으므로 같이 배운 이에게 말을 하려 하다가 다시 스스로 꺼리어 그대로 가리워진 곳에 있으면서 큰 소리로,
‘나는 지금 부처님을 버리겠노라’고 하면,
이해하는 이가 있는 것에 따르니, 문득 곁에 있던 사람이 이해하고서,
‘이 비구는 계율을 버리고 여래의 법을 버리고 타락하고자 하는구나’ 하면 곧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게 이 비구의 말을 이해함은 세간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이 비구가 말한 것을 즉시 이해 못하고 오래오래 생각한 연후에 이해하여 ‘계율을 버리려 하는 이’라고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말처럼 추악한 말ㆍ자신에게 공양하게 함ㆍ나의 성냄 때문에 헛된 말과 같은 이런 말들과 이런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마음에 두고서 이해하면 얻게 되지만 만약 의심이 있어 오랫만에 이해하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와 같이 계율이 쇠약한 이면 계율을 버림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속인은 나를 받아들이소서. 나는 속인이 되려고 합니다. 나는 이제 속인이 됩니다. 나는 속인이 되었습니다’고 하면,
말하는 이는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지만,
만약 ‘오늘 속인들이 나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이제 알면서 마음속에 두고 말합니다’ 하면,
천축어거나 천축어가 아니거나 만약 남이 이 말을 이해하면 계율을 버림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차례로 우바새가 처음이 되어 이로부터 일곱 구절ㆍ여덟 구절ㆍ열넷 구절ㆍ스물 두 구절입니다.
‘나는 쓸데없으니, 이것이 무엇하겠는가?
부처님은 나에게 이익이 없도다’라고 하는 것을 나는 이미 이 넷 구절을 말하였으니, 그대들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문구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이치는 하나로 돌아갑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다 해설할 수 없으니, 차례로 율본에서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우파리는 ‘부처님에게 1백의 이름이 있고 법의 이름도 그와 같으며 다른 구절들도 그와 같다’라고 하셨으니, 나는 이제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부처님을 버리고 계율을 잃으며ㆍ나는 삼막삼불타를 버리고ㆍ나는 한량이 없는 뜻[無量意]을 버리고ㆍ나는 견줄 수 없는 뜻[無譬意]을 버리고ㆍ나는 보리지(菩薩智)를 버리고ㆍ어리석음이 없는 것[無愚痴]을 버리고ㆍ일체를 통탈한 것[通達一切]을 버리노라’고 하면 이렇게 명호를 따라서 함은 다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또 ‘법을 버리노라’고 하면 이는 명호는 아니지만 곧 계율을 버림이 되니, ‘선분별(善分別)을 버리고ㆍ현신보(現身報)를 버리고ㆍ불이(不異)를 버리고ㆍ내견(來見)을 버리고ㆍ능제출(能濟出)을 버리고ㆍ지혜진실지(智慧眞實智)를 버리노라’고 함이 이것입니다.
또 ‘나는 지음이 없는 법[無作法]을 버리고ㆍ욕심 여읨[離欲]을 버리고ㆍ사라짐[滅]을 버리고ㆍ감로법(甘露法)을 버리고ㆍ『장아함』을 버리고ㆍ『단아함』을 버리고ㆍ『범망』을 버리고ㆍ『초본경(初本經)』을 버리고ㆍ『승술다』를 버리고ㆍ『앙굴다』를 버리고ㆍ『본생경』을 버리고ㆍ아비달마를 버리고ㆍ공덕법(功德法)을 버리고ㆍ공덕과 공덕 아님도 아닌 것을 버리고ㆍ식처(識處)를 버리고ㆍ선치(善置)를 버리고ㆍ신통지(神通地)를 버리고ㆍ섭령(攝領)을 버리고ㆍ용맹(勇猛)을 버리고ㆍ보리를 버리고ㆍ도를 버리고ㆍ과(果)를 버리고ㆍ열반을 버리고ㆍ나는 8만 4천법 무더기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와 같은 명호로써 하면 다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상가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 말은 명호가 아니나 ‘선종승(善從僧)을 버리고ㆍ정수(正隨)를 버리고ㆍ이치로써 따르는 것을 버리고ㆍ모임의 상가[集僧]를 버리고ㆍ4쌍승(雙僧)을 버리고ㆍ8배승(輩僧)을 버리고ㆍ응공(應供)을 버리고ㆍ차수공양(叉手供養)을 버리고ㆍ위없는 복밭[無上福田]을 버리노라’고 불러서 상가를 이름함도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계율을 버리노라’고 하는 이 말은 명호는 아니로되 계율을 버림이 되니, ‘비구계를 버리고ㆍ비구니계를 버리고ㆍ상학(上學)과 상심(上心)을 버리고ㆍ상혜(上慧)를 버리노라’고 하는 버린다고 부름은 곧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비구의 비니와 비구니의 비니를 버리고ㆍ맨 처음의 바라이와 제2, 제3, 제4 바라이를 버리며ㆍ승가바시사(僧伽婆尸沙)를 버리고ㆍ투란차(倫蘭遮)를 버리고ㆍ바일제(波逸提)를 버리고ㆍ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를 버리고ㆍ돌길라(突吉羅)를 버리고ㆍ두바화다(頭婆和多)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와 같은 계율 이름도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바라제목차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것도 명호는 아니로되 곧 계율을 버림이 되니,
‘비구 바라제목차를 버리고ㆍ비구니 바라제목차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 명호도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학(學)을 버리노라’고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되니,
‘비구학과 비구니학과 제1, 제2 내지 바라제목차학을 버리고ㆍ삼막삼불타학과 한량없는 뜻의 학을 버리고ㆍ지혜학을 버리고ㆍ이학[離學]을 버리며, 이와 같이 차례로 나는 이제 버리리라.
화상은 나를 제도하여 출가 시키고 구족계를 주셔서 아무 곳에서 나는 출가를 하게 되고 아무 곳에서 나는 구족계를 얻었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버리노라’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은 화상을 버린다는 명호로써 화상을 버림이니 계율은 역시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아사리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 말은, 명호는 아니지만 계율은 곧 버린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이 나를 지도하고 어떤 사람이 나를 가르치고, 아무 곳에서 의지하여 묻고 배웠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버리라’고 하여 이렇게 아사리의 명호로써 말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제자를 버리노라’고 하는 이 말은 명호는 아니지만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을 내가 제도시키고 내가 구족계를 주고 나의 처소에서 출가를 하였고 구족계를 얻었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이제 버리노라’고 하여, 이렇게 제자를 버린다는 명호로써 하기 때문에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아사리 제자를 버리노라’라고 하면 곧 계율을 버린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을 내가 출가시키고 가르치기도 하고 나에게 묻던 이었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버리노라’고 하여, 이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같이 배운 이를 버리노라’고 하면 계율을 곧 버리는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을 나의 스승이 제도 시키고 구족계를 주시어 나의 스승의 곳에서 구족계를 얻었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버리노라’고 하여, 같이 배운 이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아사리에게 같이 배운 이를 버리노라’고 하면 계율을 곧 버리는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을 나의 아사리가 제도하고 구족계를 주시어 아사리 처소에서 물었고 나의 아사리가 가르쳐서 알게 하였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버리노라’고 하여, 이렇게 아사리에게 같이 배운 이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일체 같이 배운 이를 버리노라’고 하면 곧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어떤 사람이 나와 함께 마음을 배우고 함께 지혜를 배웠지마는 이 사람을 나는 버리노라’고 하여 이렇게 일체 같이 배운 이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속인이 되겠노라’고 하면 곧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나는 옛날처럼 다시 돌아가서 나는 상인(商人)이 되겠노라. 나는 이제 밭을 갈고 소를 기르며 5욕을 쌓겠노라’고 하여, 이렇게 속인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우바새가 되겠노라’고 하면 곧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나는 이제 우바새가 되겠으며(두 번 말함), 우바새가 되겠노라(세 번 말함). 나는 5계를 지니고 혹은 10계를 지니겠노라. 나는 이제 우바새가 되겠노라’고 하여, 이렇게 우바새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정인(淨人)이 되겠노라’고 하면 계율을 곧 버리는 것이 되니,
‘나는 대중 스님에게 몰아쳐 부림을 받으며 나는 이제 죽을 나누고 쌀을 나누고 과일을 나누노라’고 하여,
이렇게 정인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사미가 되겠노라’고 하면 곧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나이 젊은 사미가 되겠노라. 작은 사미가 되겠노라’고 하여,
이렇게 사미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이제 외도가 되겠노라’고 하면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니건타(尼乾陀), 아인바가(阿寅婆迦)가 되겠으며, 다파수(多波須)가 되겠으며, 파리바사(波利婆闍)가 되겠으며, 반랑구(畔郞具)가 되겠노라’고 하여,
이렇게 외도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외도의 우바새가 되겠노라’고 하면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니건 우바새가 되겠으며, 아인바가 우바새가 되겠으며, 다파수 우바새가 되겠으며, 파리바사 우바새가 되겠으며, 반랑구 우바새가 되겠노라’고 하여,
이렇게 외도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사문이 아니다’고 하면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나는 파계(破戒)의 행위인 나쁜 법을 짓고 청정한 행을 더럽히는 부법(覆法)을 짓겠노라’고 하며,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하고, 맑은 행이 아니면서 맑은 행이라 하고 속에 더러움만 담았다하여,
이러한 사문이 아닌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나는 석가 종족의 제자가 아니다’고 하면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니,
‘나는 삼막삼불타의 제자가 아니며 한량이 없는 뜻의 제자가 아니며, 견줄 수 없는 뜻의 제자가 아니며, 보리지의 제자가 아니며, 용맹한 이의 제자가 아니며, 어리석음이 없는 이의 제자가 아니며, 통달하여 걸림이 없는 이의 제자가 아니며, 훌륭하고 훌륭한[勝勝] 이의 제자가 아니다’고 하여,
이렇게 석가 종족 제자의 명호로써 하면 계율을 버림이 됩니다.
이 인연을 쓰기 때문에 이 표현을 쓰기 때문에, 이 방편을 쓰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를 쓰기 때문에 이러한 말이 끝나면 다 이는 계율을 버림의 원인입니다.
부처님 버리는 것을 처음으로 하여 다시 다른 말로라도 계율을 버린다고 하면 옳지 못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계율을 버리는 형상을 나는 이미 나타냈습니다. 계율을 버림이 아닌 것에 의심 내지 말도록 나는 이제 계율의 버림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사람으로 인한 것을 처음으로 삼으니, 사람으로 인하여 계율을 버림이 되고, 사람으로 인하여 계율을 버림이 아니기도 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율본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어떤 것이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는 것이냐?≻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구절에서 미치광이를 말씀하셨는데 혹은 야차(夜叉) 미치광이와 첨(瞻) 미치광이니, 다른 것은 뒤바뀐 마음에 따라서 계율을 버리는 것 같지마는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습니다.
미치광이가 계율을 버림에는 뜻에 매우 계율 버림에 즐거워하는 것 같으나 미치광이는 계율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계율을 버림이 되지 않습니다.
실심(失心)한 이도 야차 미치광이와 같아 다름이 없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야차 미치광이와 첨 미치광이는 이 죄가 없으니, 나중에 해설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실심으로 계율을 버려도 버림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의 핍박을 당한 이는 괴로움의 칼이 이미 맞닥뜨려서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계율을 버린다고 하여도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혹은 고통을 받는 이를 향하여 말하여도 고민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천신에 향함’이란 지신(地神)을 처음으로 하여 아타니차(阿咤貳杈) 천신에 이르기 까지 혹시 이 여러 신을 향하여 계율을 버린다고 하여도 계율은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축생에 향함’이란 마후라가ㆍ가루라ㆍ긴나라ㆍ코끼리ㆍ원숭이며 모든 축생인 이런 무리를 향하여 계율을 버린다고 하여도 계율은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미치광이가 미치광이를 향하여 하는 것도 모르기 때문에 계율은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여러 신들을 향하여 계율을 버리면 빨리 아니, 왜냐하면 그 큰 공덕 때문이요, 3인(因)으로 수태(受胎)하는 까닭에 빨리 압니다.
만약 이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나는 계율을 버리고자 한다’고 하면 천신들은 벌써 알며,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이 쉬이 움직임을 보호하시어 계율을 잃지 않게 하시므로 부처님은 결단 하시되,
‘천신을 향하여는 계율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사람에게는 결단하지 않으셨으니,
함께 한 이거나 함께하지 않는 이거나 같은 실례에 있는 이거나 같은 실례에 있지 않는 이거나 속인을 향해서거나 출가한 이를 향해서거나 이해하는 사람을 향하여 계율을 버리면 다 버리는 것이 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모두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이 이치를 말하였습니다.
‘선한 말[善語]’이라 함은 무엇을 선한 말이라 하겠습니까?
선인의 소행인 까닭이니, 바로 마갈국(摩竭國) 말입니다.
만약 변방 땅이면 안타(安陀), 나미국(羅彌國) 말이어서 마갈국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혹은 다른 나라 말도 있지만 점점 서로가 말하여도 다 이해하지 못하니,
‘그대는 이런 말을 하여라’고 하고 만약 모르면 먼저 가르쳐서 알게 한 것입니다.
실없이 하여 웃기는 말과 빨리 하여 잘못하는 말로서 ‘나는 부처님을 버린다’고 하여 어리석은 이가 이렇게 모두 계율을 버려도 계율을 버리는 것이 아니요,
지혜로운 이가 빨리하다가 혹은 말을 잘못하여도 계율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려 한 것이 아니면서 버린다고 말함은 마치 사람이 계율을 읽는 것과 다름없으며,
사람이 계율을 듣는 것과 같아 다름없으며, 사람이 계율을 독송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가르침과 다름이 없으니, 이와 같은 여러 말들은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향하여 말하려 하되 말하지 않는 것은 이미 계율이 쇠약한 형상이 있으면서,
‘나는 이제 계율을 버리노라’고 하는 이 말을 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말하려 하되 말하지 않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향하여 말하는 이며, 늙은이를 향하여 말하며, 토상(土像)과 목상(木像)을 향하여 말하며, 혹은 들 가운데 어린 아이를 향하여 혹은 향하지 않고 말을 하는 이 같은 말은 다 계율(戒律)을 버리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단언하리니 일체의 방편을 따라서 ‘나는 이제 부처님을 버리노라’고 함을 처음으로 하여 곧 계율을 버리는 것이 되지만 나머지 것은 계율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제 부정한 법 행함을 처음으로 하여 나는 이제 분별하여 뜻을 말하겠습니다.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정한 법을 행함이라 함입니다.”
물었다.
“무엇이 부정한 법입니까?”
대답하였다.
“좋은 법이 아니요, 선인(善人)의 법이 아니요, 야인(野人)의 법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법입니다.
율본에서 말씀한 것처럼 큰 죄로부터 물[水]을 고요한 곳에서 잡는 두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 나쁜 법은 구절의 뜻에 따르면 잡고, 닿고, 지나고, 누름이니, 다 큰 죄가 되며, 물로써 발단을 삼으므로 이는 부정한 행이 됩니다.
‘가려 감춰진 곳에서’라 함은 고요한 곳에 사람이 없는데 부정한 행을 행하는 두 사람이 그러함이니, 이를 부정한 행이라 합니다.”
“무엇을 부정한 행을 행한다고 합니까?”
“두 사람 모두가 음행하고 모두 즐거워함이요, 또한 두 사람 모두가 음욕을 느끼는 것을 말하니, 이를 부정한 행을 행한다고 합니다.
율본에서 말씀함과 같이 남자의 겉면을 여인의 겉면에 두고 여인의 겉면을 남자의 겉면에 두어 남근을 여인의 근(根)에 넣는 것이니, 하나의 참깨만큼이라도 들어가거나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이나 습한 곳인 이 같은 곳에 들어가면 바라이 죄가 됩니다.
여근의 사면과 중앙인 이 다섯 곳의 사면과 중앙은 다 죄를 범함이요, 남근도 사면과 대가리와 오무라듬이 있으니, 이 여섯 가지가 만약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바라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오무라듬이라 함은 손가락을 굽히는 것과 같고 저울대가리와 같으니, 높은 데거나 낮은 데거나 모두 범한 것입니다.
만약 남근에 지장이 생겨 시들어져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돌길라요, 즐거움을 느끼면 바라이가 되며, 남근의 터럭을 손가락 끝만큼이라도 넣으면 돌길라가 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것이 부정한 법을 행함이니, 왜냐하면 이는 악하고 선하지 못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 장로가 이 부정한 행을 말함을 들으면 부디 놀라거나 괴히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은 사문으로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마음을 지극히 해야 하니,
왜냐하면 여래는 우리들을 자비하시기 때문이며,
부처님은 이와 같이 세간 가운데 왕이시어서 모든 애욕을 떠나시고 청정한 것을 얻고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며,
계율을 정하시기 위하여 이 악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와 같이 여래의 공덕을 자세히 살피면 혐의스런 마음이 없어집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이 일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바라이 죄ㆍ투란차ㆍ돌길라가 되는 줄을 알겠습니까.
만약 법사가 사람들을 위하여 강의하면 듣는 이나 말하는 이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부디 이빨을 들어내어 웃지 말 것이요, 웃는 이가 있거든 쫓아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막삼불타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금구(金口)로써 말씀하심이니, 그대들은 부끄러운 마음을 일으키어 들어야 하겠는데 무엇 때문에 웃겠습니까. 쫓아 낼 것입니다.
‘내지 축생과 함께 한다’ 함이란 이는 극히 낮은 말이니 축생과 함께 하여도 바라이 죄가 되는데 하물며 여인이겠습니까?”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차례로 해설하겠습니다. 발이 있고 발이 없는 축생에서 발이 없는 것은 뱀이요, 발이 있는 것은 두 발 돋치로서 아래로는 닭에 이르고 위로는 금시조(金翅鳥)에 이르며, 네 발 돋치로서 아래로는 고양이에 이르고 위로는 개에 이릅니다. 뱀이며 이무기며 일체 긴 것으로서 그 중 세 곳에 다 참깨만큼이라도 들어가면 바라이가 되며, 나머지 감당해 내지 못할 만한 것은 돌길라입니다.
‘고기’라 함은 온갖 고기ㆍ거북ㆍ악어ㆍ자라ㆍ대합ㆍ조개 등이니, 역시 앞에 말과 같이 세 곳이면 죄가 됩니다. 이 중에 조금 다름이 있으니, 대합조개 입이 아주 커서 혹시 남근을 대합조개 입에 넣되 족하지 못하며 부스럼에 넣음과 같아 다름이 없을 것이나 투란차가 됩니다.
혹은 닭ㆍ까마귀ㆍ새ㆍ꿩ㆍ비둘기며 온갖 새들이면 세 곳에 바라이가 되기도 하고 돌길라가 되기도 합니다.
혹은 고양이면 여우ㆍ삵ㆍ개ㆍ미친개도 앞과 같이 세 곳에서 죄가 됩니다.
‘바라이’라 함은 나쁜 곳에 떨어짐이니, 이는 비구로서의 죄입니다.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아난에게 ‘부처님은 발사자를 위하여 바라이 계율을 정하여 이와 같이 성취하였으니, 너희 비구는 바라이 죄를 얻으면 이것이 바라이라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사람이 이 계율을 범하면 바라이라 하므로 바라이 품의 게송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바라이를 말하니
너는 일심으로 들으라
이는 나쁜 곳에 떨어지나니
바른 법을 어겼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한다
이것을 바라이라 하느니라.
이 바라이의 중한 죄를 범한 이 사람을 타락이라 하며, 또한 여래의 법에서 타락하였다고 하며, 석가 종족의 제자가 아니요, 비구 법에서 잘못 된 것이니 이를 바라이라 합니다.
‘함께 살지 못한다’ 함은 함께 수행하지 못함을 처음으로 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차례로 죄를 해설하겠습니다. 상가에 4행(行)이 있으니, 계단(戒壇)에 네 가지 법사(法事)의 화합(和合)을 짓는 이것이 1행(行)이라고 하며, 5행(行) 바라제목차라고도 하며,
한군데서 바라제목차를 말할 것이니, 부끄럼이 없는 사람은 들지 못하며,
한 대중 일에 같이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서 밖에 있으니 이것을 함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포살과 모든 갈마를 함께 하지 못하며, 이 비구는 바라이 죄를 얻어 함께 살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본의 말씀은 끝났습니다.>
이렇게 차례로 계율 글귀를 해설하였으나 혹은 곳곳에서 범하는 이가 분별하여 알려고 하므로 여래는 이 문구를 맺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