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구사론 제19권
5. 분별수면품(分別隨眠品) ①
앞(권제13 초)에서 세간의 차별은 모두 업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업은 수면(隨眠, anuśaya)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장할 수 있으며,
수면을 떠난 업은 유(有, 욕계ㆍ색계ㆍ무색의 3유)를 초래할 만한 공능을 갖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이며, 수면에는 몇 가지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면은 모든 ‘유(有)’의 근본으로,
이것의 차별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탐(貪)ㆍ진(瞋)과, 역시 만(慢)ㆍ
무명(無明)ㆍ견(見), 그리고 의(疑)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 수면의 본질
[수면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다]
이러한 수면은 바로 모든 ‘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떠난 업은 유를 초래할 만한 어떠한 공능(功能)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수면이 능히 ‘유’의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인가?
모든 번뇌는 현기(現起)하면 능히 열 가지 사업[事]을 행하기 때문으로,
첫 번째는 근본(根本)을 견고하게 하며,1)
두 번째는 [번뇌의] 상속을 일으키며,
세 번째는 자신의 소의신[自田]이 번뇌를 일으키기에 적합하게 하며,
네 번째는 등류(等流)[인 수번뇌(隨煩惱)]를 인기하며,
다섯 번째 업유(業有) 즉 후유를 초래하는 업을 일으키며,
여섯 번째는 자구(自具)를 포섭하며,2)
일곱 번째 [정혜(正慧)를 손상시켜] 소연에 대해 미혹하게 하며,
여덟 번째 식(識)의 흐름을 인도하며,3)
아홉 번째는 선품(善品)을 어기게 하며,
열번째는 널리 속박하는 것이니,
[유정을 속박하여] 자계ㆍ자지를 초월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수면은 이러한 열 가지 사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업은 이것에 의해 비로소 ‘유’를 초래할 공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2) 수면의 종류
[여섯 가지, 탐ㆍ진ㆍ만ㆍ무명ㆍ견ㆍ의]
이 같은 수면의 차별에는 간략히 여섯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탐(貪, rāga)과 진(瞋, pratigha)과 만(慢, mānā)과 무명(無明, avidyā)과 견(見, dṛṣṭi)과 의(疑, vicikitsā)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역시’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만’ 등도 역시 탐의 힘으로 말미암아 경계에 수증(隨增)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탐으로 말미암아 수증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뒤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
또한 [본송에서] ‘그리고’라고 하는 말은 여섯 가지 수면의 본질[體]이 각기 동일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일곱 가지, 욕ㆍ진ㆍ유ㆍ만ㆍ무명ㆍ견ㆍ의]
만약 모든 수면의 본질이 오로지 여섯 가지 뿐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경에서 ‘일곱 가지 수면이 있다’고 설한 것인가?4)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탐의 차이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가 되니
유탐(有貪)은 상(上) 2계의 그것으로
내문(內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생각을 막기 위해 [따로이 설정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로 앞에서 논설한 여섯 가지 수면 중에서 ‘탐’을 둘로 나누었기 때문에 경에서 일곱 가지라고 설한 것이다.
무엇을 일곱 가지라고 한 것인가?
첫 번째는 욕탐(欲貪)수면이며,
두 번째는 진(瞋)수면이며,
세 번째는 유탐(有貪)수면이며,
네 번째는 만(慢)수면이며,
다섯 번째는 무명(無明)수면이며,
여섯 번째는 견(見)수면이며,
일곱 번째는 의(疑)수면이다.
욕탐수면은 무슨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욕탐 자체가 바로 수면[欲貪體卽隨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욕탐의 수면[欲貪之隨眠]’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5)
그 밖의 다른 여섯 가지 수면의 뜻에 대해서도 역시 이같이 따져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에 과실이 있다.
만약 ‘욕탐 자체가 바로 수면’이라고 한다면 계경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어떤 존재[類]가 오랜 시간 동안 욕탐 전(纏)에 마음이 속박[纏]되어 머물지 않을 것 같으면, 설령 마음이 잠시 욕탐전을 일으켰을지라도 출리(出離)의 방편을 심구(尋求)하여 참답게 알 경우 그는 이로 말미암아 욕탐전을 능히 제거하고 아울러 수면을 끊게 될 것이다.”6)
그러나 만약 [욕탐수면이] 이같이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면,
수면은 바로 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이 되어야 하며, 그럴 경우 대법(對法)에 위배될 것이니,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는,
“욕탐수면은 세 가지 근(根)과 상응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욕탐 등의 본질이 바로 수면이다”고 설하고 있다.
그럴 경우 어찌 경에 위배되지 않을 것인가?8)
경에 위배되는 과실이 없으니,
[경에서] ‘아울러 수면’이라고 한 것은 아울러 수박(隨縛)을 [끊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9)
혹 어떤 경에서 [그것(욕탐)의] 획득을 일시 수면이라 설한 것으로,
불[火] 등에 대해 괴로움 등의 상(想)을 설정한 것처럼,
아비달마에서는 실상에 의거하여 온갖 번뇌를 설하여 수면이라 이름한 것이다.10)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수면은 바로 상응법이다.
어떠한 이치를 증거로 삼아 [수면이] 결정코 상응법임을 아는 것인가?
모든 수면은 마음을 오염시키고 어지럽히기[染惱] 때문이며,
마음을 덮고 가리우기[覆障] 때문이며, 능히 선을 어기기 때문이다.11)
즉 수면의 힘은 능히 마음을 오염시키고 어지럽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
이미 생겨난 선을 퇴실(退失)하게 한다. 그래서 수면의 본질은 불상응법이 아닌 것이다.
만약 불상응법이 능히 이 같은 작용[事]을 한다고 하면 온갖 선법은 마땅히 일어나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이니, 불상응법은 항상 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온갖 선법이 일어나는 때도 있었으므로 수면은 바로 상응법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올바른] 논증이 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수면이 상응법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자라면 앞에서 언급한 세 작용은 수면의 작용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2)
그래서 경부사(經部師)가 설하는 바가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경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욕탐수면은] ‘욕탐의 수면’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수면 자체는 심상응법이 아니며 불상응법도 아니니, [욕탐과는 다른] 개별적 실체[實物]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睡位]를 설하여 ‘수면’이라 이름하고,
깨어 있는 상태[覺位]를 설하여 바로 ‘전(纏)’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현행하지 않고 종자(種子)로서 수축(隨逐)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깨어있는 상태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번뇌가 현기(現起)하여 마음을 속박[纏]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번뇌의 종자라고 하는 것인가?
예컨대 염(念)종자가 [선행된] 생각[證智, anubhava jñāna,곧 5식에 따라 일어나는 의식상응의 智, 혹은 현량의 證智]으로부터 생겨나 능히 현재찰나의 생각을 낳는 공능(功能)의 차별이듯이,
또한 싹 등은 선행한 결과(즉 종자)로부터 생겨나 능히 후찰나의 결과(즉 열매)를 낳는 공능의 차별이듯이,
[전찰나의] 번뇌로부터 생겨나 능히 [후찰나의] 번뇌를 낳는 [색심] 자체 상의 차별되는 공능이다.
그런데 만약 번뇌와는 다른 별도의 수면이라는 심불상응법이 있어 그것을 번뇌종자[煩惱種]라고 이름한다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생각의 종자[念種]도 다만 공능의 차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는] 다른 불상응법으로서 존재하면서 능히 후찰나의 생각을 인생(引生)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그렇지 않으니, 그것이 어떻게 그러할 것인가?
즉 이 두 가지 사실을 차별할 만한 어떠한 인연도 획득될 수 없기 때문이다.1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육육계경(六六契經)』과 상위하게 될 것이니, 경에서는 ‘낙수(樂受)에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14)
경에서는 다만 ‘존재한다[有]’고 설하였을 뿐 ‘그 때에 바로 수면이 존재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15)
그렇다면 [탐수면은] 어느 때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이 잠자고 있을 때에 존재한다.16)
혹은 원인에 대해 수면이라는 말[想]을 일시 설정한 것이다.17)
이상 방론에 대해 마치고 이제 마땅히 본래의 논의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탐을 둘로 나눈다고 함은, 말하자면 욕탐(欲貪)과 유탐(有貪)이다.
여기서 유탐은 무엇을 본질로 삼는 것인가?
이를테면 색계와 무색계 중의 탐이다.
이러한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은 무슨 까닭에 오로지 그곳에만 설정하는 것인가?
그곳의 탐은 대개 내문(內門) 즉 내적인 경계에 의탁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오로지 그곳에만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상 2계에서 해탈하였다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으로,18) 그 같은 생각을 막기 위해서였다.
즉 상계에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여 그들의 소연(所緣)이 참된 해탈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여기서는 존재 자체(自體)를 설정하여 ‘유’라고 일컬었으니, 그곳의 모든 유정은 대개 등지(等至)나 소의지(所依止)에 깊이 미착(味著)하기 때문이다.19)
즉 그들은 오로지 그들 자체에 대해서는 미착한다고 설할 수 있을지라도 외적 대상[境]에 대해서는 미착하지 않으니, [그것에 대한] 욕탐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오로지 그곳에만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유탐이 상 2계에 존재하는 번뇌라고 설하였으니, 이러한 뜻에 준하여 볼 때 욕계의 탐을 욕탐이라고 이름한다.20)
그래서 본송 중에서 별도로 나타내지 않은 것이다.
[열 가지, 탐ㆍ진ㆍ치ㆍ만ㆍ의, 5견]
앞에서 설한 여섯 종류의 수면은 본론(本論) 중에서 다시 나누어져 열 가지가 된다.21)
어떻게 하여 열 가지가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견(見)의 차별에 의해 10수면이 되니
여기서 차별이란 말하자면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가 바로 그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수면 가운데 ‘견(見)’은 그 행상(行相)이 달라 다섯 가지가 되고,
그 밖의 나머지는 ‘견’ 아닌 다섯 가지(즉 탐ㆍ진ㆍ치ㆍ만ㆍ의)이니,
그 수를 합하면 모두 열 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열 가지 수면 중에서 다섯 가지는 바로 ‘견’의 성질로서,22)
첫 번째는 유신견(有身見)이며,
두 번째는 변집견(邊執見)이며,
세 번째는 사견(邪見)이며,
네 번째는 견취(見取)이며,
다섯 번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섯 가지는 ‘견’의 성질이 아니니,
첫 번째는 탐(貪)이며,
두 번째는 진(瞋)이며,
세 번째는 만(慢)이며,
네 번째는 무명(無明)이며,
다섯 번째는 의(疑)이다.
[아흔아홉 가지, 행상과 부와 계의 차별에 따른]
또한 앞서 설한 여섯 종류의 수면은 다시 본론(本論) 중에서 98수면으로 논설되고 있다.23)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아흔여덟 가지를 설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6수면은 행상(行相)과 부(部)와 계(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흔여덟 가지가 되니
욕계 견고(見苦) 등에 의해 끊어지는
열ㆍ일곱ㆍ일곱ㆍ여덟ㆍ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순서대로 [열 가지를] 다 갖춘 것과,
3견과, 2견과, 견(見)ㆍ의(疑)를 배제시킨 것이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진을 제외하니
그 밖의 것들은 욕계에서 설한 것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섯 가지 종류의 수면은 행상(行相)과 부(部)와 계(界)의 차별로 말미암아 아흔여덟 가지가 된다.
이를테면 6수면이 견(見)의 행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열 가지로 나누어졌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즉 이렇게 분별된 열 가지 종류의 수면은 각기 ‘부’와 ‘계’가 동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흔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부(prakāra)’란 이를테면 4제(諦)를 관찰하여 끊어지고 수습(修習)하여 끊어지는 다섯 갈래의 부류[五部]를 말하며,
‘계(dhātu)’란 욕ㆍ색ㆍ무색의 3계를 말한다.24)
[5부에 따라, 견고소단ㆍ견집소단ㆍ견멸소단ㆍ견도소단ㆍ견수소단]
바야흐로 욕계의 수면은 5부가 동일하지 않음에 따라 10수면에 근거하여 서른 여섯 가지가 되니,
말하자면 견고제소단(見苦諦所斷)으로부터 수소단(修所斷)에 이르기까지 그 순서대로 열 가지와 일곱 가지와 일곱 가지와 여덟 가지와 네 가지가 있으며,
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5부의 한 가지(견고소단)와 두 가지(견집소단ㆍ견멸소단)와 한 가지(견도소단)와 한 가지(수소단)에 있어서 그 순서대로 10수면을 모두 다 갖춘 것과,
세 가지 견과 두 가지 견과 견ㆍ의를 각기 배제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견고제소단은 10수면을 모두 다 갖추고 있으며,25)
견집제소단과 견멸제소단에는 각기 유신견과 변집견과 계금취를 제외한 일곱 가지가 있으며,
견도제소단에는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여덟 가지가 있다.
수소단에는 5견과 의(疑)를 제외한 네 가지가 있다.
이상의 수면을 모두 합하면 바로 서른여섯 가지 종류가 되는 것으로,
그 중에 앞의 서른두 가지를 견소단(見所斷)이라고 이름하니,
4제를 관찰할 때 그것은 바로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의 네 가지를 수소단(修所斷)이라고 이름하는데,
4제를 관찰하고 나서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자주자주 도(道)를 수습하여야 비로소 그것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사실로 볼 때 10수면 중의 살가야견(薩伽耶見, satkāya-dṛṣṭi, 유신견의 원어)은 오로지 1부에만 존재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이 바로 그것으로, 변집견도 역시 그러하다.
계금취는 2부에 모두 존재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과 견도소단이 바로 그것이다.
사견은 4부와 통하니, 이를테면 견고소단ㆍ견집소단ㆍ견멸소단ㆍ견도소단이 바로 그것으로, 견취와 의(疑)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그 밖의 탐 등의 네 가지(탐ㆍ진ㆍ만ㆍ무명)는 각기 5부와 통하니, 이를테면 견사제소단과 수소단이 바로 그것이다.26)
이 중의 어떠한 상을 견고소단이라 하고, 내지는 어떠한 상을 수소단이라고 하는 것인가?27)
만약 이러한 성제(聖諦)를 관찰하여 끊어지는 것(견소단의 번뇌 즉 見惑)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것이라면 견차제소단(見此諦所斷)이라 이름하고,
그 밖의 것은 수소단이라 이름한다.28)
이와 같이 6수면 중에서 견(見)은 열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의(疑)는 네 가지로 나누어지며,
나머지 네 가지는 각기 다섯 가지(즉 5부의 수면)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욕계 중에는 서른여섯 가지의 수면이 있는 것이다.
[3계에 따라, 욕ㆍ색ㆍ무색]
그리고 색계와 무색계의 5부에는 각기 진(瞋)이 제외되며,29)
그 밖의 다른 것은 욕계에서와 동일하기 때문에,
색계ㆍ무색계에는 각기 서른한 가지의 수면이 있다.
이에 따라 본론(本論)에서,
‘6수면은 [견의 차별적인] 행상과 [5]부와 [3]계의 차별로 인해 아흔여덟 가지가 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30)
[견소단ㆍ수소단은 결정적이지 않다]
이상에서 분별된 98수면 가운데 여든여덟 가지는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기 때문에 견소단이며,
열 가지는 지(智)에 의해 해손되기 때문에 수소단이다.31)
이와 같이 논설된 견소단ㆍ수소단은 결정적으로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인(忍)에 의해 해손(害損)되는 수면의 경우
유정(有頂)은 오로지 견소단이지만
그 밖의 나머지는 견소단ㆍ수소단과 통하며
지(智)에 의해 해손되는 것은 오로지 수소단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인(忍)이라는 말은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의 ‘인’을 모두 설한 것이다.
즉 ‘인’에 의해 해손되는 온갖 수면 중에서 유정지(有頂地, 즉 3계 9지 중의 가장 꼭대기인 非想非非想處)에 포섭되는 것은 오로지 견소단인데,
그것은 오로지 유지인(類智忍, 즉 고ㆍ집ㆍ멸ㆍ도 류지인)으로서만 비로소 능히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8지(地,욕계로부터 무소유처)에 포섭되는 것은 견소단ㆍ수소단 모두와 통한다.
즉 성자의 경우 법지인(法智忍, 즉 고ㆍ집ㆍ멸ㆍ도법지인)과 유지인에 의해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끊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견소단으로 수소단이 아니다.32)
그러나 만약 이생의 경우라면 세속지(世俗智, 즉 유루 6行觀)를 자주 되풀이하여 익힘으로서 끊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으로 견소단이 아니다.
지(智)에 의해 해손되는 온갖 수면으로서 일체 지(地)에 포섭되는 것은 모두 오로지 수소단이니,
모든 성자와 모든 이생이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무루지와 세속지를 자주 되풀이하여 익힘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외도의 모든 선인(仙人)들은 견소단의 혹을 능히 항복받아 끊을 수 없으니,
예컨대 『대분별제업계경(大分別諸業契經)』에서,
‘욕탐을 떠난 모든 외도들에게는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사견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33)
아울러 『범망경(梵網經)』에서도 역시,
‘그들에게는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온갖 견(見)이 현행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전제(前際)에 대해 분별하는 논자 중에,
어떤 이는 완전한 상주론[全常]을 주장하였고,
어떤 이는 부분적인 상주론[一分常]을 주장하였으며,
어떤 이는 제법은 원인 없이 생겨난다는 사실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34)
즉 색계의 혹(惑)은 욕계를 연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욕계의 경계에 대해서는 이미 탐을 떠났다.
따라서 그들은 바로 결정코 욕계의 온갖 견을 아직 끊지 못하였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그 경의 뜻을 해석하여,
“제바달다(提婆達多)의 경우처럼 견을 일으킬 때 잠시 물러난 것일 뿐이다”고 하였다.35)
3) 5견
행상[行]에 다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견’을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인데, 그 명칭은 이미 앞에서 열거하였다.
그렇다면 그 자체의 본질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我)ㆍ아소(我所)와 단(斷)ㆍ상(常)과,
없다고 부정하고, 저열한 것을 뛰어난 것이라 하며,
원인과 도(道)가 아닌 것을 그릇되이 그것이라고 말하는
이것이 바로 5견 자체의 본질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신견(살가야견)]
[5취온에 대해] 아(我, 즉 나)ㆍ아소(我所, 즉 나의 것)라고 집착하는 이 같은 견해를 일컬어 살가야견(薩伽耶見, satkāya-dṛṣṭi)이라고 한다.
즉 허물어지기 때문에 ‘살(sad=sat)’이라 하고, 취집된 것이기 때문에 ‘가야’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무상한 화합온(和合蘊)의 뜻으로, ‘가야(화합온)’가 바로 ‘살(무상)’이므로 살가야라고 이름하였다.
곧 이 살가야는 바로 5취온으로, 영속[常]과 단일[一]의 관념을 비판하기 위하여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요컨대 [영속 단일론자들은] 이러한 관념을 선행시키고 난 후에 비로소 자아를 주장하기 때문이다.36)
이에 대해 비바사자(毘婆沙者)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실재하는 것[有]이기 때문에 ‘살(sat)’이라 이름하고, 신(身, 즉 가야)의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즉 어떠한 소연도 없이 아(我)와 아소를 헤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은 실재하는 신[有身]을 소연으로 한다고 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살가야를 소연으로 하여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러한 견을 살가야견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
온갖 ‘견’으로서 다만 유루법을 연으로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살가야’라는 명칭으로써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단지 아와 아소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만 이 명칭을 나타낸 것은 이러한 견해는 살가야(즉 5취온)를 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그것이 진실의] 아와 아소가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아와 아소는 필경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세간의 사문과 바라문들로서, 자아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이 두루 관찰하는 일체는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37)
[변집견]
또한 바로 그같이 주장된 아ㆍ아소의 존재에 대해 단멸[斷]한다고 주장하고,
상주[常]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컬어 변집견(邊執見, antagrāha-dṛṣṭi)이라고 하는데,
그릇되이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에 집착하여 그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사견]
또한 실유의 존재인 고(苦) 등의 진리[諦]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일컬어 사견(邪見, mithya-dṛṣṭi)이라고 한다.
물론 일체의 그릇된 견해[妄見, 즉 5견]는 모두 전도되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마땅히 ‘사견’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4제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만을 사견이라고 일컬은 것은 그 허물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니,
마치 취소(臭蘇)나 악집악(惡執惡) 따위로 설하는 것과 같다.38)
또한 이것만이 오로지 감손(減損)의 견해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증익(增益)의 견해이기 때문이다.39)
[견취]
또한 저열한 것에 대해 수승하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견취(見取, dṛṣṭi-parāmarśa)라고 한다.
여기서 ‘저열한 것’이란 유루를 일컫는 말로서, 성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열한 것에 집착하여 수승하다고 하는 것을 모두 일컬어 ‘견취’라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치상으로 볼 때 ‘견등취(見等取)’ 즉 ‘견해 따위를 [수승하다고] 취하는 것’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해야 하겠지만, ‘따위’라고 하는 말을 생략하고 단지 ‘견취’라고만 이름하였다.
[계금취견]
또한 원인과 도(道)가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을 원인과 도라고 하는 일체의 견해를 모두 계금취(戒禁取, śīlavrata-parāmarśa)라고 이름한다.
이를테면 대자재천(大自在天, Maheśvara)이나 생주신(生主神, prajāpai), 혹은 그 밖의 존재는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님에도 그릇되이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등의 여러 가지 삿된 행은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 아님에도 그릇되이 참된 원인이라고 집착하며,
오로지 계금(戒禁)을 수지하거나 수(數)와 상응(相應)의 지혜 따위는 해탈의 도가 아님에도 그릇되이 해탈의 도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40)
또한 이치상 실로 ‘계금등취(戒禁等取)’라고 이름하여야 하지만 ‘등’이라는 말을 생략하여 다만 ‘계금취’라고 이름한 것이다.
5견의 본질은 이상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계금취견은 견집소단이 아니다]
만약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이 바로 참된 원인이라고 하는 견해(즉 非因計因의 계금취견)를 일으킨다면,
이와 같은 견해는 [원인에 미혹한 것인데] 어째서 견집소단(見集所斷)이 아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자재천 따위에 대해
원인이 아님에도 원인이라고 그릇되이 주장하는 것은
상도(常倒)와 아도(我倒)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견고소단(見苦所斷)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대자재천과 생주신 혹은 그 밖의 존재(이를테면 자성prakriti이나 시간kāla)가 세간의 원인으로 그것이 세간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이는,
반드시 먼저 그것의 본질이 상주하는 것[常]이며, 단일한 것[一]이며, 자아이며, 작자라고 헤아린 후에 비로소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잠시 고제(苦諦)를 관찰할 때 자재천 등에 대한 상집(常執)과 아집(我執)은 영원히 끊어져 남김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생겨난 모든 것의 원인[所生因]이라는 주장도 역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4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물이나 불에 뛰어드는 등의 여러 가지 삿된 행이 바로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다만 계금(戒禁) 등을 수지하는 것에 의해 청정도를 획득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즉 非道計道의 계금취견)은 견고소단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42)
그런데 본론(本論)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외도가 있어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논의를 주장한다.
만약 어떤 사부(士夫)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소처럼 행동하는 계[牛戒], 사슴처럼 행동하는 계[鹿戒], 개처럼 행동하는 계[狗戒]를 수지하면,
바로 청정과 해탈과 출리를 획득하여 모든 고락을 영원히 초월하며 고락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이와 같은 따위의 [청정 등의] 참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이 같은 일체의 견해는 바로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43)
나아가 그 밖의 내용 또한 그곳에서 널리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계금취는 견고소단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시 어떤 이유에서 견고소단이 되는 것인가?
고제(苦諦)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이다.44)
[그럴 경우] 유루를 소연으로 하는 혹(惑)은 모두 고제에 미혹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된다.45)
또한 어떠한 상의 차별을 갖는 계금취를 견도소단이라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온갖 견도소단의 법을 소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46)
그러나 그것도 역시 마땅히 고제에 미혹한 것이라고 일컬어야 하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47)
또한 도제를 소연으로 하는 사견과 의(疑)는 혹은 부정하고 혹은 의심하여 해탈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것(계금)들을 능히 영원한 청정(즉 열반)을 획득하는 도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48)
만약 그것이 참된 해탈도를 부정하고 그 밖의 별도의 청정의 원인이 있다고 하는 헛된 주장이라면,
그것은 바로 그 밖의 다른 도가 있어 능히 청정을 획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사견 등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견도소단의 제법을 소연으로 한다는 그 같은 이치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견집소단ㆍ견멸소단의 사견 등을 소연으로 하는 [계금취를] 청정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 같은 계금취는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집제와 멸제)을 관찰함으로써 끊어지는 것이 아닌 것인가?49)
따라서 [비바사사(毘婆沙師)가 앞서] 주장한 뜻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50)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계금취는 상주라는 전도(顚倒) 즉 상도(常倒)와 자아라는 전도 즉 아도(我倒)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전도만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네 가지 전도]
전도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첫째는 무상한 것에 대해 상주하는 것[常]이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며,
둘째는 온갖 괴로운 것에 대해 즐거운 것[樂]이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며,
셋째는 부정(不淨)한 것에 대해 청정한 것[淨]이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며,
넷째는 무아에 대해 자아[我]라고 집착하는 전도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전도의 본질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전도 그 자체의 본질은
말하자면 세 가지 견(見)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오로지 뒤바뀌고, 헤아리고, 증익하기 때문에 전도인데
상(想)과 심(心)의 전도는 ‘견’의 힘에 따른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세 가지 ‘견’에 따라 4전도를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변집견 중에서는 오로지 상견(常見)만을 취하여 상주의 전도[常倒]라 하였으며,
온갖 견취 중에서는 [괴롭고 부정한 것을] 즐겁고 청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만을 취하여 즐거움의 전도[樂倒]와 청정함의 전도[淨倒]라 하였으며,
유신견 중에서는 오로지 아견(我見)만을 취하여 자아의 전도[我倒]라 하였다.51)
그런데 어떤 이(毘婆沙師)는 설하기를,
“자아의 전도는 유신견 전부를 포섭한다”고 하였다.
자아의 전도가 어떻게 아소견(我所見)을 포섭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서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도경(倒經)』 에 따랐기 때문으로,52),
“아(我)를 주장[計]하는 모든 이는 그러한 존재[事, 즉 ‘아’의 소유인 5취온]에 대해 자재력을 가지니, 이것이 바로 아소견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아견은 두 가지 갈래[門]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아’와 ‘아에 속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53)
그러나 만약 아견과 아소견을 다른 견이라고 한다면, ‘아에 의한 견해’와 ‘아를 위한 견해’도 역시 마땅히 다른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54)
어떠한 까닭에서 그 밖의 혹(惑)은 전도가 아닌 것인가?55)
[전도의 세 가지 조건]
요컨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 두드러진 것만을 전도라고 한다.
즉 세 가지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한결같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며,
추리하여 헤아리는 성질[推度性]이기 때문이며,
그릇되이 증익(增益)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금취는 한결같이 전도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적으나마 청정을 연으로 하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다].56)
또한 단견(변집견의 일부)과 사견은 허무의 갈래[無門]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그릇되이 증익하는 것이 아니며,57)
그 밖의 번뇌는 능히 추리하여 헤아리는 성질이 아니니, 견(見)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58)
즉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 두드러진 것만이 전도를 성취하니, 그렇기 때문에 그 밖의 혹은 전도가 아닌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무상을 상(常)이라고 간주하는 것에는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전도가 있으며,
고와 부정과 무아의 경우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였던 것인가?59)
이치상으로 본다면 실로 오로지 ‘견’만이 바로 전도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상’과 ‘심’은 ‘견’과 상응하며 그 행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견’에 따라 역시 전도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6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수(受) 등은 [전도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세간의 상식적인 사실[極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심’과 ‘상’의 전도는 세간의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수’ 등의 전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61)
그리고 이와 같은 모든 전도는 예류과(預流果)에서 이미 끊어지니, ‘견’과 그 상응법은 견소단이기 때문이다.62)
그런데 유여사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전도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무상에 대해 상(常)이라고 헤아리는 전도 중에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세 종류의 전도가 있으며, 내지는 무아에 대해 아(我)라고 헤아리는 전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이 중에서 여덟 가지는 오로지 견소단이며,63) 네 가지는 견소단ㆍ수소단에 통하니,
이를테면 낙(樂)과 정(淨)의 ‘상’과 ‘심’의 전도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한 성자는 즐거움의 생각과 청정함의 생각을 떠났음에도 어찌하여 욕탐을 일으키는 것인가?”64)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낙(樂)과 정(淨)의 ‘상’과 ‘심’의 전도가 현행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성자에게도 ‘낙’과 ‘정’의 전도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성자도 역시 유정(즉 我)에 대한 생각[想]과 마음[心]을 일으키므로 역시 마땅히 ‘아’의 전도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인 등이나 자신에 대해 유정이라는 생각과 마음을 떠나 욕탐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계경에서,
‘만약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가 고성제에 대해 여실히 지견(知見)하고, 내지 [집ㆍ멸ㆍ도성제에 대해 여실히 지견하면] 그 때 그 성 제자는 무상을 상이라고 헤아리는 상과 심과 견의 전도를 모두 영원히 끊게 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상’과 ‘심’은 오로지 ‘견’의 전도와 상응하는 힘을 취하여 일어나는 것일 뿐이니, 전도란 바로 이런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65)
그런데 성자는 혹 어떤 때 잠시 미란(迷亂)하기 때문에 갑자기 경계에 대한 욕탐이 현전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마치 돌아가는 불바퀴에 대해, 그림으로 그려진 약차(藥叉)에 대해 잠시 미란하는 것과 같다.”6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존자 경희(慶喜)는 존자 변자재(辯自在)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을 것인가?67)
생각[想]에 어지러운 전도가 있기에
그대의 마음이 몹시 타오르는 것으로
그 같은 생각을 멀리 떠나게 되면
탐이 종식되어 마음은 바로 청정해지리라.68)
그래서 유여사는 다시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덟 가지의 ‘상’과 ‘심’의 전도는 유학의 성자로서는 아직 모두를 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전도는 종국적으로 참답하게 성제(聖諦)를 지견(知見)함으로써 비로소 영원히 끊을 수 있으며,
이를 떠나 그 밖에 달리 영원히 끊을 만한 방편이 없으니,
그래서 이와 같은 주장은 그 같은 경설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69)
4) 만
오로지 견(見)수면에만 많은 차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밖의 수면에도 역시 [차별의 상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慢)에도 역시 차별이 있다.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慢)은 일곱 가지로, 9만은 3만에 따른 것인데
그것들은 모두 견소단과 수소단에 통하지만
성자에게는 살생의 전(纏) 등이 현행하지 않듯이
수소단의 그것도 현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의 종류]
바야흐로 만수면의 차별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만(慢)이며,
둘째는 과만(過慢)이며,
셋째는 만과만(慢過慢)이며,
넷째는 아만(我慢)이며,
다섯째는 증상만(增上慢)이며,
여섯째는 비만(卑慢)이며,
일곱째는 사만(邪慢)이다.
즉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고 거들먹거리게 하는 것[高擧心]에 대해 모두 ‘만(慢)’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일어나는 행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일곱 가지 종류로 나눈 것이다.
[자기보다] 열등하거나 동등한 이에 대해 순서대로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거나 동등하다고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게 하는 것을 모두 ‘만’이라고 설한다.
[자기와] 동등하거나 뛰어난 이에 대해 순서대로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거나 동등하다고 하는 것을 모두 ‘과만’이라고 이름한다.
[자기보다]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만과만’이라고 한다.
오취온에 대해 그것을 자기[我]라고 하거나 자기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잘난 체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아만’이라고 한다.
아직 증득하지 않은 수승한 덕성을 이미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증상만’이라고 한다.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비만’이라고 한다.
아무런 덕도 없으면서 자기에게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일컬어 ‘사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론(本論)에서는 설하기를,
“만의 종류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동등한 이에 대해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만의 종류[我勝慢類]이며,
둘째는 동등한 이에 대해 나와 동등하다고 하는 만의 종류[我等慢類]이며,
셋째는 뛰어난 이에 대해 내가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만의 종류[我劣慢類]이며,
넷째는 뛰어난 이에 대해 그는 나보다 조금 뛰어난 점이 있다고 하는 만의 종류[有勝我慢類]이며,
다섯째는 동등한 이에 대해 그는 나와 동등한 점이 있다고 하는 만의 종류[有等我慢類]이며,
여섯째는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있다고 하는 만의 종류[有劣我慢類]이며,
일곱째는 그는 나보다 뛰어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勝我慢類]이며,
여덟째는 그는 나와 동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等我慢類]이며,
아홉째는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劣我慢類]이다.”70)
이와 같은 아홉 가지 종류의 만은 앞에서 언급한 7만 중의 세 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세 가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만과 과만과 비만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와 같은 세 가지 만이 만약 아견(我見)에 의거하여 행해(行解)를 낳을 경우,
차례로 두드러짐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만의 세 가지 유형(즉 9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71)
즉 처음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과만과 만과 비만이며,
중간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비만과 만과 과만이며,
마지막 세 가지는 순서대로 만과 과만과 비만인 것이다.72)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하다고 말한다면 ‘비만’을 성취하는 것이니, 잘난 체함[高擧]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의 종류[無劣我慢類]’에서 잘난 체 함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이와 같이 자신이 애락(愛樂)하는 뛰어난 유정의 무리에 대해 비록 자기 자신은 지극히 열등한 자임을 알고 있을지라도 스스로를 존중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73)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바야흐로 『발지론』에 의거하여 해석한 것이다.74)
그러나 『품류족론』에 의거하여 만의 종류를 해석할 것 같으면 바야흐로 ‘내가 뛰어나다고 하는 만[我勝慢]’은 세 가지 만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이를테면 만과 과만과 만과만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니, 열등하고 동등하고 수승한 경계를 관찰하는 데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75)
[7만의 끊어짐]
그렇다면 이와 같은 7만은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가?
일체의 만은 모두 견소단ㆍ수소단과 통한다.
모든 수소단의 만은 성자가 아직 그것을 끊지 않았을 때에 현행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이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76)
이를테면 수소단의 만일지라도 성자에게는 결정코 현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성자에게] 살생의 전(纏)이 현행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수소단이지만 모든 성자에게는 필시 현행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살생의 전’이란 이러한 혹(惑)에 의해 고의적인 의사[故思]를 발동시켜 중생의 생명을 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투도와 음행(즉 욕사행)과 허광어(즉 거짓말)의 전(纏)과, 무유애(無有愛)의 전부와 유애(有愛)의 일부도 역시 그러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무유애란 어떠한 법을 일컫는 말인가?
이를테면 3계의 무상(無常)으로, 이에 대해 탐구(貪求)하는 것을 무유애라고 한다.77)
그리고 유애의 일부란 이를테면 ‘원컨대 당래 애라벌나(藹羅伐拏, Airāvaṇa, 제석천이 타는 용왕) 대용왕 따위가 되리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살생 등의] 온갖 ‘전’과 ‘애’는 모두 수소단을 연으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수소단일 뿐이다.78)
만의 종류 등에 수소단이 있음을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아직 그것을 끊지 못한 성자에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만(慢)의 종류 등과 아만과
악작 중의 불선은
성자에게 존재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견(見)과 의(疑)에 의해 증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등’이라고 하는 말은 살생 등의 온갖 전(纏)과 무유애의 전부와 유애의 일부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이러한 만의 종류 등과 아만과 악업에 대한 후회(즉 악작)는 바로 견(見)과 의(疑)에 의해 직접적으로 증장된 것이기 때문으로,
비록 수소단이라 할지라도 그 배후의 법인 ‘견’과 ‘의’가 끊어졌기 때문에 성자에게는 능히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만의 종류와 아만은 유신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살생 등의 전(纏)은 사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온갖 무유애는 단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유애의 일부는 상견에 의해 증장된 것이며,
불선의 악작은 바로 의(疑)에 의해 증장된 것이기 때문에,
성자의 소의신 중에서 그 모두는 결정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5) 변행과 변행 아닌 것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바로 변행(遍行)이며, 몇 가지가 변행이 아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고소단ㆍ견집소단의
온갖 견(見)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不共)의 무명은
자계ㆍ자지에 변행한다.79)
이 중에서 두 가지 견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는 능히 상계를 연으로 하는데,
득(得)을 제외한 그 밖의 수행(隨行)도
역시 바로 변행에 포섭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고소단ㆍ견집소단의 견(見)과 의(疑)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과 상응하지 않는 불공(不共)의 무명은,
그 힘이 능히 자계ㆍ자지의 5부에 두루 작용[遍行]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열한 가지는 모두 변행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일곱 가지 ‘견’과 두 가지 ‘의’와 두 가지 무명의 열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80)
이와 같은 열한 가지는 자계와 자지의 5부(部)의 제법을 두루 반연하고, [5부를 두루 반연하여] 수면을 수증하며,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두루 5부의 염법을 낳으니,81)
이러한 세 가지 뜻에 근거하여 ‘변행’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한 ‘5부를 두루 반연한다’고 함은 점차적으로 소연[漸緣]이 된다는 말인가, 단박에 소연[頓緣]이 된다는 말인가?
만약 점차적으로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법도 역시 마땅히 변행이 되어야 할 것이며,
만약 단박에 소연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누가 다시 욕계의 제법에 대해 뛰어나다거나 능히 청정을 획득한다고 단박에 헤아릴 것이며, 혹은 세간의 원인이라고 헤아릴 것인가?82)
자계 자지의 일체의 법을 단박에 연으로 삼는다고 설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같은 변행혹은] 공능이 있어 능히 단박에 5부 [중의 일부]를 연으로 삼는다고 설한다.
비록 그렇다할지라도 변행은 역시 오로지 이것만이 아니니,
여기에 아견(我見)이 작용함이 있으면 여기에는 필시 마땅히 아애(我愛)와 아만(我慢)이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여기에 청정하다거나 수승하다고 하는 견해(즉 견취)가 작용할 경우,
여기에는 필시 마땅히 희구(希求, 즉 愛)와 거드름(高擧, 즉 慢)이 일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즉 ‘애’와 ‘만’도 역시 마땅히 변행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견소단ㆍ수소단의 법을 단박(한꺼번)에 반연하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애와 만)를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법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수소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경계를 뒤섞어 반연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땅히 견소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견’의 힘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83)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의 번뇌는 자상혹(自相惑)이지 공상혹(共相惑)이 아니어서 [5부의 법을] 단박에 소연으로 삼는 힘이 없기 때문에 변행이 아니다.84)
그렇기 때문에 변행은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 번뇌뿐이며,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볼 때 그 밖의 번뇌가 변행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나아가 이 같은 열한 가지 변행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가지 종류는 상계(上界)의 수면도 역시 능히 소연으로 삼는다.85)
여기서 ‘상’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상계 상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아울러 하지의 수면을 소연으로 삼는 법은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86)
그리고 이러한 아홉 가지 수면은 비록 자(自)ㆍ상(上)의 계(界)ㆍ지(地)의 수면은 능히 연으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이치상 자ㆍ상의 수면을 단박에 소연으로 삼는 일은 없다.
‘상’의 수면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에 있어서도 계(界)에 근거하여 설하여 보면,
혹 어떤 경우 오로지 하나의 계만을 소연으로 삼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 두 가지 계를 함께 소연으로 삼기도 한다.
그래서 본론(本論)에서,
“온갖 수면으로서 욕계 계(繫)이면서 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으며,
온갖 수면으로서 욕계 계이면서 무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으며,
온갖 수면으로서 욕계 계이면서 색계ㆍ무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으며,
온갖 수면으로서 색계 계이면서 무색계 계를 반연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7)
그리고 지(地)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계(界)에 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타계인] 대범천을 연으로 하여 유정의 견(見)을 일으키거나 혹은 상주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어째서 유신견과 변집견은 상계ㆍ상지를 연으로 삼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그것(대범천)에 대해 아(我)나 아소(我所)라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88)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을 헤아려 유정이라 하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어떠한 ‘견’에 포섭되는 것인가?
대법자(對法者)는 말하기를,
“이러한 두 가지는 ‘견’이 아니며 바로 사지(邪智)에 포섭된다”고 하였다.89)
어떠한 이유에서 그 밖의 수면(즉 견취ㆍ계금취ㆍ사견)으로서 그것(대범천)을 소연으로 하는 것은 바로 ‘견’이라고 하면서,
이것 역시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것임에도 ‘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종의를 정량(定量)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같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변행은 오로지 이러한 [열한 가지의] 수면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무엇이 또한 변행인가?
[이러한 열한 가지 수면과] 아울러 그 수행법(隨行法)이 변행이다.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열한 가지 수면과 아울러 그것에 수행하는 법은 모두 변행에 포섭된다. 그렇지만 그것의 득(得)은 제외되니, 동일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90)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어떤 이는 이같이 물어 말하였다.
“모든 변행수면은 다 변행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답하여 말하면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제1구(변행수면이면서 변행인이 아닌 것)는 이를테면 미래세의 변행수면이며,
제2구(변행인이면서 변행수면이 아닌 것)는 이를테면 과거ㆍ현재세의 변행수면과 구유(俱有)하는 법이며,
제3구(변행수면이면서 변행인인 것)와,
제4구(변행수면도 아니고 변행인도 아닌 것)에 대해서는,
이치에 맞게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91)
6) 수면과 유루ㆍ무루의 인
98수면 가운데 몇 가지가 유루를 연으로 하며, 몇 가지가 무루를 연으로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멸소단ㆍ견도소단의
사견과 의(疑)와, 상응 및
불공인 무명의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연으로 한다.
이 중에 멸제를 연으로 하는 것은
오로지 자지의 멸제만을 연으로 하며
도제를 연으로 하는 것은 6지와 9지의 그것을 연으로 하니
대치는 다르나 서로간에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탐ㆍ진ㆍ만과 두 가지 취(取)는
다 같이 무루를 연으로 하지 않으니
[무루는] 마땅히 떠난 것이고, 경계에 대해 원한이 없으며
고요하고 청정하고 뛰어난 성질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견멸소단ㆍ견도소단의 각기 세 가지, 즉 사견(邪見)과 의(疑)와,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과 불공인 무명 등의 여섯 가지는 능히 무루를 연으로 한다.92)
그리고 그 밖의 수면이 유루를 연으로 한다는 것은 이에 준하여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여섯 가지 중에서 멸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각기 자지의 멸제를 소연으로 삼으니, 서로에 대해 인과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93)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세 가지 수면은 오로지 욕계 제행(諸行)의 택멸(擇滅)만을 연으로 하며,94)
나아가 유정지(有頂地)의 세 가지 수면은 오로지 유정지의 제행의 택멸만을 연으로 한다.
그리고 도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6지와 9지의 도제를 연으로 한다.
즉 욕계에 계속되는 세 종류의 수면은 오로지 6지의 법지품(法智品)의 도제만을 연으로 하는데,
욕계의 혹을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혹(색계ㆍ무색계의 수혹)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든 모두 그것(욕계계의 세 수면)의 소연이 되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95)
또한 색계ㆍ무색계의 8지에는 각기 세 종류의 수면이 있어 각각은 오로지 능히 9지의 유지품(類智品)의 도제만을 연으로 하는데,
자지를 대치하는 것이든 혹은 그 밖의 다른 혹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든 모두 그것의 소연이 되니,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96)
어떠한 이유에서 멸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자지의 멸제만을 연으로 삼고 다른 지는 연으로 삼지 않으면서,
도제를 연으로 하는 수면은 6지와 9지에 동일한 종류로 통하는 것인가?
온갖 지(地)의 도제는 서로 간에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97)
[그렇다면 어째서 욕계계의 세 가지 수면은 6지의 도제만을 소연으로 삼고 9지의 그것은 소연으로 삼지 않는 것인가?]
비록 법지품과 유지품도 역시 서로 간에 원인이 될지라도 유지품은 욕계를 대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지품의 도제는 욕계의 세 수면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법지품은 이미 색계ㆍ무색계를 능히 대치한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그것은 8지의 각 세 수면의 소연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법지품)의 모두가 색계ㆍ무색계를 능히 대치하는 것은 아니니, 고ㆍ집의 법지품은 그것을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그(법지품) 전부는 색계ㆍ무색계를 능히 대치하지 않으니, 그것(색계ㆍ무색계)의 견소단을 능히 대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 가지 경우에서 처음의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2계의 세 수면은] 그것(법지품)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98)
즉 이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변행혹 중 고제ㆍ집제를 연으로 하는 것은 온갖 지(地)에 방해받는 일이 없으니, 대상[境]이 서로의 연(緣)과 인(因)이 되더라도 능히 대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탐과 진과 만과 계금취와 견취견은 무루단(無漏斷)이면서 무루를 연으로 하지 않는 것인가?99)
탐수면은 마땅히 사리(捨離)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탐수면이] 무루를 소연으로 한다면, 그것은 선법욕(善法欲)처럼 과실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마땅히 사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00)
진수면은 원망과 해코지[怨害]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멸ㆍ도제는 원망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만수면은 거칠고 동요함[麤動]함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지만, 멸제ㆍ도제는 고요한 것[寂靜]이기 때문에 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101)
청정하지 않은 법을 청정함의 원인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일컬어 계금취라고 하지만, 멸제ㆍ도제는 진실의 청정함이기 때문에 계금취의 경계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탐 등은 무루를 소연(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7) 수면, 소연으로 수증아는 것, 상응으로 수증하는 것
98수면 중 몇 가지가 소연으로 말미암아 수증(隨增)하는 것이고, 몇 가지가 상응으로 말미암아 수증하는 것인가?102)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변행수면은
자지(自地)의 일체의 법을
비변행의 수면은 자부의 법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수증한다.
무루와 상계 연의 수면은 그렇지 않으니
섭수되는 일이 없고,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수면은] 상응법에 따라
상응하기 때문에 수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변행의 수면은 널리 자지(自地)의 5부의 제법을 소연으로 삼아 수증하니, 능히 자지의 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밖의 5부의 비변행의 수면은 오로지 자부의 법에 대해서만 소연수증하니, 오로지 자부의 법만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설한 것이고, 개별적으로 분별하면, 여섯 가지 무루연혹(無漏緣惑, 무루를 소연으로 하는 혹)과 아홉 가지 상연혹(上緣惑, 상계 상지의 수면을 소연으로 하는 혹)은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하는 일이 없다.103)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루와 상지의 경계는 섭수되지 않으며, 아울러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104)
이를테면 만약 어떤 법이 이러한 지(地) 중의 유신견이나 아애에 포섭되어 거기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할 경우, 이러한 유신견과 아애의 지 중에 존재하는 수면은 소연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옷이 축축하면 먼지가 그것에 따라 거기에 머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온갖 무루의 법과 아울러 상지의 법은 하지의 온갖 유신견과 아애에 포섭되어 거기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연으로 하는 하지의 혹도 소연수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하지에 머무는 마음이 상지 등을 희구하는 것은 바로 선법욕(善法欲)으로서 수면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와 열반, 그리고 상지의 법은 능히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하지의 혹과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그러한 두 가지(무루와 타계를 연으로 하는 수면)는 소연수증할 리가 없는 것으로,
이는 마치 뜨거운 돌에 발이 따라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수면이란 바로 따라 순응한다[隨順]는 뜻으로, 무루와 상지의 경계는 온갖 하지의 수면에 따라 순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이것이 [하지의 수면에] 소연은 될지라도 수증하는 일은 없으니,
마치 풍병(風病)이 있는 자가 땀을 마르게 하는 약[乾澁藥]을 먹을 경우 병자는 그 약으로 인해 어떠한 수증(곧 효능)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소연에 근거하여 수증하는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상응수증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어떠한 수면도 자신과 상응하는 법에 대해서는 상응하기 때문에, 그러한 상응법에서 수증한다.105)
그리고 여기서 설한 ‘수증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앞의 게송 첫머리에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이라는 말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수면으로서 무루를 소연으로 삼지도 않고 상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면서 다만 소연이 아닌 상응법에서만 수증하는 것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수증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테면 상지를 소연으로 삼는 온갖 변행의 수면이 그러하다.106)
8) 수면과 선ㆍ불선ㆍ무기
98수면 중의 몇 가지가 불선이고, 몇 가지가 무기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 2계의 수면과 아울러
욕계의 유신견과 변집견과
이와 구기하는 치(癡)는 무기이며
그 밖의 것은 모두 불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색계ㆍ무색계의 일체의 수면은 무기성이니, 염오법(즉 불선이나 유부무기법)으로서 만약 불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고(苦)의 이숙이 있을 것이지만 고의 이숙과는 상 2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남을 핍박하거나 뇌란시키는 원인이 거기에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신견과 변집견의 두 견과, 아울러 이와 상응하는 치(癡, 즉 무명)로서 욕계에 계속되는 수면도 역시 무기성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은 보시 등과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니, 자아의 당래(미래세) 즐거움을 위해 현재에 보시ㆍ지계(持戒)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107)
그리고 단견에 집착하는 변집견은 능히 해탈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세존께서 설하기를,
“온갖의 외도들의 여러 견해의 갈래[見趣] 중에서 이 같은 견해가 가장 뛰어나니, 이를테면
‘나[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의 것[我所]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것도 역시 당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다.108)
또한 이러한 두 견(유신견과 변집견)은 자신의 5취온[自事]에 미혹한 것으로,
다른 유정을 핍박하거나 해코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선이 아니라 무기]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천상의 쾌락을 탐하여 구하거나 아만을 일으키는 것도 이 같은 예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선대 궤범사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소의신과] 구생(俱生)하는 유신견은 바로 무기성이니, 새나 짐승 등에게도 유신견이 현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분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바로 불선성이다.”109)
그 밖의 욕계에 계속되는 일체의 수면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것과 상위되는 것은 모두 불선성이다.
위에서 설한 불선의 혹(惑) 중에서 몇 가지가 불선근이고, 몇 가지가 불선근이 아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불선근은 욕계의
탐ㆍ진과 불선의 치(癡)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일체의 탐(貪)과 진(瞋)과 아울러 불선의 치(癡, 앞서 언급한 유신ㆍ변집견과 상응하는 것을 제외한 치)가 불선근에 포섭된다.
세존께서는 이를 그 순서대로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 불선근이라고 설하였는데, 그 본질[性]은 오로지 불선의 번뇌이다.
즉 모든 불선법의 근본[根]이 되기 때문에 ‘불선근’이라고 설정한 것으로, 그 밖의 다른 번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밖의 번뇌가 불선근이 아니라고 하는 뜻은 이 같은 사실에 준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본송에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110)
9) 수면과 무기근
위에서 논설한 무기의 혹 중에서 몇 가지가 무기근이고, 몇 가지가 무기근이 아닌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기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무기의 애(愛)와 치(癡)와 혜(慧)가 그것이며
나머지는 두 갈래와 잘난 체함에서 생기기 때문에 무기근이 아니다.
외방의 논사들은 무기근으로 네 종류를 설정하였는데
중(中)의 애(愛)ㆍ견(見)ㆍ만(慢)ㆍ치(癡)가 바로 그것으로
세 가지는 정(定)의 근거로서 모두 ‘치’의 소생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모든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무기근에도 역시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애(愛)와 치(癡)와 혜(慧)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으로,111)
아래로는 이숙생[의 혜]에 이르기까지 역시 무기근에 포섭된다.
어떠한 이유에서 의(疑)와 만(慢)은 무기근이 아닌가?
‘의’는 두 가지 갈래[趣]에서 일어나며,112) ‘만’은 잘난 체하는 것[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그 논사(가습미라국의 비바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는 두 갈래의 행상에서 일어나 그 성질이 동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며,
‘만’은 소연에 대한 거들먹거리고 잘난 체하는 상[高擧相]에서 일어나 뿌리[根]의 존재와는 다르기 때문에 ‘근’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반드시 견고하게 머물며, 마땅히 아래로 뻗어 내린다는 것은 세간이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근’이 아닌 것이다.”113)
그런데 외방(外方)의 모든 논사들은 무기근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114) 이를테면 온갖 무기의 애(愛)와 견(見)과 만(慢)과 치(癡)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무기를 일컬어 ‘중(中)’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선ㆍ악을 막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115)
어떠한 이유에서 이 네 가지를 무기근으로 설정한 것인가?
어리석은 범부로서 상계의 정려[上定]을 닦는 모든 이는 애ㆍ견ㆍ만의 세 가지에 의탁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세 가지는 모두 무명의 힘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이 네 가지를 설정하여 무기근으로 삼은 것이다.
10) 열네가지 무기, 묻고 답하는 논의의 네 가지의 종류
여러 계경 중에서는 열네 가지의 무기를 설하고 있는데,116) 그것도 역시 이러한 무기에 포섭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 경에서는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捨置] 할 물음에 근거하여 ‘무기’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니,
이를테면 묻고 답하는 논의[問記論]에는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응일향(應一向)ㆍ분별(分別)ㆍ
반힐(反詰)ㆍ사치(捨置)의 언표[記]이니
이를테면 죽는가, 태어나는가, 수승한가,
아(我)와 온은 동일한가 다른가 등에 대한 언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묻고 답하는 논의의 네 가지란,
첫째는 응일향기(應一向記)이며,
둘째는 응분별기(應分別記)이며,
셋째는 응반힐기(應反詰記)이며,
넷째는 응사치기(應捨置記)이다.
즉 이러한 네 가지는 그 순서대로 어떤 문자(問者)가 ‘죽는가’, ‘태어나는가’, ‘수승한가’, ‘아(我)와 온은 동일한가 다른가’라고 물은 것에 대한 것으로,
언표에 네 가지가 있다고 함은 바로 이러한 네 가지 물음에 대해 답하는 방식을 말한다.
만약 어떤 이가 ‘일체의 유정은 모두 마땅히 죽을 것인가, 죽지 않을 것인가?’라고 물으면,
‘일체의 유정은 모두 결정코 마땅히 죽을 것이다’라고 마땅히[應] 한결같이[一向] 언표[記]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일체의 죽은 이는 모두 당래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 태어나지 않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번뇌가 있는 자는 마땅히 다시 태어나겠지만 번뇌가 없는 자는 그렇지 않다’고 마땅히 분별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사람은 수승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저열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어떠한 처소에 비해 그렇다는 것인가?
만약 천(天)에 비해 그렇다고 말한다면 사람은 저열하다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하처(下處, 즉 악취)에 비해 그렇다고 말한다면 사람은 수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고 하여 마땅히 반문[反詰]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온은 유정과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는 것[捨置]으로 언표해야 할 것이다.
즉 유정(pudgala, 我의 다른 이름)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온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니,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石女]의 아들이 희다거나 검다는 등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117)
어떻게 대답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서도 ‘언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어떤 물음에 대해 ‘이는 마땅히 언표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와 같은 설을 주장하였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일체의 모든 이가 당래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결같이 언표해야 할 것이다.”118)
그렇지만 문자(問者)는
‘죽은 이는 모두 당래 다시 태어날 것인가, 태어나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치상으로 마땅히 그가 물은 바에 대해 분별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대답[總答]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전체적으로 알게 하였을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세 번째 물음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사람은 역시 또한 수승하기도 하고 역시 또한 저열하기도 하니,
마치 식(識)이 결과도 되고 원인도 되는 것처럼 상대하는 바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고 한결같이 언표해야 할 것이다.”119)
그렇지만 그것을 물은 이는 한결같이 물었으나 [다시 말해 두 가지 사실 중 어느 일단을 물었으나] 한결같이 언표할 성질의 물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하여 언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는 마땅히 묻는 이의 뜻이 어느 처소에 비해 그러하다는 것인지를 따져 물은 것으로, 그래서 이것을 일컬어 ‘응반힐기’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네 번째 물음의 경우에도 ‘온과 유정이 혹은 다르다거나 혹은 동일하다’고 이미 완전히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언표한다[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그가 물은 바는 이치상 마땅히 내버려두어야 할 성질의 문제이기에,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언표하여 말한 것이니,
어찌 ‘언표’라고 일컫지 않을 것인가?
즉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120)
일향기(一向記)란 만약 어떤 이가,
“세존은 바로 여래이신가? 마땅히 정등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 설한 법은 요컨대 바로 선설(善說)인가?
모든 제자 중(衆)의 행은 묘행(妙行)인가?
색 내지 식은 모두 무상인가?
고(苦) 내지 도(道)는 좋은 시설(施設)인가?”고 물으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언표하는 것을 말하니, 진실한 뜻과 계합하기 때문이다.
분별기란, 만약 어떤 이에게 정직한 마음[直心,진실로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원하건대 존자께서는 나를 위해 법을 설하소서”라고 청하여 말하면, 마땅히,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과거법과 미래법과 현재의 법이 그것으로, 그 중의 무엇을 설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고 분별해야 한다. 만약
“나를 위해 과거의 법을 설해 주소서”라고 말하면, 마땅히
“과거법에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 내지 식이 바로 그것이다”고 다시 분별해야 한다.
만약 색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색 중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선과 악과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고 다시 분별하여 말해야 한다.
만약 선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선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살생을 떠나는 것과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잡예어를 떠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분별하여 말해야 한다.
만약 그가 다시 살생을 떠나는 것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여기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무탐ㆍ무진ㆍ무치의 3선근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그것이다”고 분별하여 말해야 한다.
만약 그가 무탐에서 일어난 이(離) 살생에 대해 설해 주기를 청하면, 마땅히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표업과 무표업이 그것으로, 무엇을 설해 주기를 원하는가”고 분별하여 말해야 하는 것이다.
반힐기란, 만약 어떤 이에게 아첨하는 마음[諂心]이 있어,
“원하건대 존자께서는 나를 위해 법을 설하소서”라고 청하여 말하면,121)
마땅히 그에게 반문하여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도대체 무엇을 설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가?”고 힐난하여,
더 이상 마땅히 분별하지 않고서 그로 하여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든지,
혹은 스스로 알게 하여 시비를 걸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분별기와 반힐기)에는 도무지 법에 대한 물음은 없고 오로지 그것을 설해 주기를 청하는 것만 있으며, 또한 역시 대답[記]은 없고 오로지
‘무엇을 설해 주기를 원하는가?’ 하는 반문의 힐난만 있지 아니한가?
그러니 어떻게 이 두 가지를 묻고 답하는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치 어떤 이가,
“나를 위해 도를 설하여 주소서”라고 청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어찌 도를 묻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즉 반문하여 힐난하는 것으로써 그가 물은 바에 답한 것이니, 어찌 도에 대답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반힐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물은 이의 마음에 정직함과 아첨함의 차이가 있으며, 대답에도 분별함과 분별하지 않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치기란, 만약 어떤 이가,
“세간은 그 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따위에 대해 물을 경우,
이에 대해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으로,
그를 위해 아무것도 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이상 유부 아비달마논사의 四問記說)
그러나 지금 여기서 계경에 근거하여 묻고 답하는 논의[問記論]의 특징을 분별해 보면,
예컨대 대중부(大衆部)의 계경에서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하니, 묻고 답하는 논의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이를테면 혹 어떤 이가 물으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어떤 이가 물으면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應置]이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應一向記]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제행(諸行)은 다 무상한가?’라고 물을 경우, 이 같은 물음을 일컬어 ‘마땅히 한결같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마땅히 분별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應分別記]’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고의적 의사[故思]로써 업을 조작하고 나면 어떠한 과보를 받게 되는가?’하고 물을 경우, 이 같은 물음을 일컬어 ‘마땅히 분별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마땅히 반문 힐난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應反詰記]’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사부(士夫)라는 명상(名想)과 아(我)를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물을 경우,
‘그대는 어떤 아에 근거하여 이같이 묻는 것인가?
만약 거친 아[麤我, 5온의 假我를 말함]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라면 마땅히 명상과 다르다고 대답해야 한다’고 마땅히 힐난하여 말해야 할 것이니,
이러한 물음을 일컬어 ‘마땅히 반문 힐난하여 대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어떤 물음에 대해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應捨置]’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세간은 항상[常]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항상하고 역시 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세간은 끝이 있다[有邊]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끝이 있고 역시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래는 사후(死後)에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존재하고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영혼[命者, jīva]이 바로 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영혼은 몸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하고 물을 경우,
이러한 물음을 일컬어 다만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