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년 6월 15일(토)
장소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광릉(光陵): 조선 제 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동원이강릉)
찾아가는길 : 온릉에서 광릉으로 대중 교통을 타고갔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음. 온릉에서 360번 버스타고 의정부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 하차 여기서 다시 21번 버스타고 광릉에 서 하차
서울로 돌아 올때는 광릉 맞은편 정류장 앞 21번 버스는 주말에 120분 간격이라 광릉에서 봉선사 까지 숲길 데크길로 도보 20분 가량 걷고 봉선사 구경하고 봉선사 버스정류장에서 2, 2-2 등으로 4호선 오남역까지와서 오남역에서 전철타고 귀가.(광릉 맞은편 버스정류장에서 21번을 탈 경우는 4호선 진접역 하차)
▷ 광릉(光陵) 이야기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사대석(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따라 능 내부의 방을 석실 대신 회격(灰隔, 석회와 가는모래, 황토를 섞은 혼합 물질)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왕릉 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원을 감소시켰다. 이 방법은 광릉 이후에 조성된 왕릉에 모두 적용되었다. 또, 병풍석이 생략되면서 병풍석에 새기는 십이지신상을 난간석에 새겼다. 이후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능의 이름을 동광릉(東光陵)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광릉과 같은 능역에 있다하여 광릉으로 합쳤고, 정자각은 두 능 사이로 옮겨지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조선시대에는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고, 입구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사진 왼쪽이 세조 오른쪽이 정희완후
▷ 세조(世祖) 이야기
세조(재세 : 1417년 음력 9월 29일 ~ 1468년 음력 9월 8일, 재위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 ~ 1468년 음력 9월 7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에 봉해졌고,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首陽大君)에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총명하고 영특하여 학문이 높았고 무예에도 뛰어나 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세종 시기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담당하였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참여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후에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지방의 군사조직을 강화하여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 또,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하였고,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에 여러 차례의 단종복위 운동으로 사육신 등과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였고, 단종을 폐위시켜 죽게 하기도 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왕위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왕세자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현 창경궁)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 정희왕후(貞熹王后) 이야기
정희왕후 윤씨(재세 :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18년(세종 즉위) 홍천 공아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진평(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다.
조선 선조 대의 이기(李墍)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수양대군의 부인을 간택하기 위하여 궁궐의 상궁들이 윤번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이때 수양대군 부인의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상궁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성품이 더 뛰어나 수양대군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이 일어날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정희왕후가 손수 갑옷을 입혀줄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고 한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에는 왕태비가 되었으며, 내지(內旨)를 내려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예종의 아들(제안대군)이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왕실의 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일찍 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둘째 아들 잘산군(성종)을 왕으로 지목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12살의 나이의 왕을 대신하여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성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종의 태평 치세의 발판을 닦아주었고, 7년 후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1483년(성종 14)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돌아 오는길에 봉선사를 들러 구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