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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1권
4.4. 초선(1)
79. 이때에(본삼매에 들었을 때)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 pī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Vbh.245)”
이와 같이 그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名支)들을 버렸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며,
세 가지로 좋고,
열 가지 특징을 가지고,
땅의 까시나를 가진 초선을 얻는다.
4.4.1. 초선의 주석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80. 여기서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란 감각적 욕망들을 떨쳐버린 뒤, 감각적 욕망들을 없애버리고,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벗어나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완전히(eva)라는 단어는 확정하는 뜻이라고 알아야 한다. 확정하는 뜻을 가졌기 대문에 초선에 들어 머물 때에는 비록 감각적 욕망들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 [감각적 욕망]들은 초선과는 정반대되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고, 아울러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버림을 통해서만 초선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81. 어떻게?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고 결정적인 뜻이 전해질 때 이 뜻이 설명된다.
확실히 감각적 욕망들은 禪과 반대된다. 그들이 있을 때 이 禪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어둠이 있을 때는 등불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버릴 때만 이 禪을 얻는다.
이쪽 기슭을 버림으로 저쪽 기슭에 도달하는 것처럼. 그러므로 확정하는 뜻이 된다.
82.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왜 완전히(eva)라는 단어가 앞의 구절에만 사용되었고 두 번째 구절에는 사용되지 않았나?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지 않고서도 禪에 들며 머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첫 번째 구절에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감각적 욕망의 요소(界)를 초월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과 반대되므로 이 禪은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출리란 곧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벗어남이다.(D.ii.275)”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eva가 없는] 것도
“비구들이여, 여기에만 오직(eva) 사문이 있고 여기에 두 번째 사문도 있다.(M.i.63)”라는 구절에서도 ‘eva(오직)’라는 단어는 [앞 구절에만 나타나고 두 번째 구절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인용하여 설명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이 아닌 다른 장애들이라 불리는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지 않고 禪에 들어 머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완전히 떨쳐버린 뒤”라는 두 구절 모두에 이 [완전히(eva) 라는 단어는] 적용되어야 한다.
비록 두 구절에서 모두 사용된 ‘떨쳐버리고(vivccā)’라는 단어는 공통적인 단어로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떨쳐버림 등과 몸으로 떨쳐버림 등 모든 떨쳐버림을 포함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몸으로 떨쳐버림, 마음으로 떨쳐버림, 억압으로 떨쳐버림의 세 가지라고 보아야 한다.
83. 감각적 욕망들이라는 이 단어는 『닛데사』(義釋)에
“무엇이 [충족시킬]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들인가?
그것은 마음에 드는 형상(色)들이다.(Nd1. 1)”라는 방법으로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을 설했다.
그곳과 『위방가』(분별론)에서
“열의인 감각적 욕망, 탐욕인 감각적 욕망, 열의와 탐욕인 감각적 욕망, 생각(saṅkappa)인 감각적 욕망, 탐욕인 감각적 욕망, 생각과 탐욕인 감각적 욕망, 이들을 일러 감각적 욕망, 생각과 탐욕인 감각적 욕망, 이들을 일러 감각적 욕망이라 한다.(Nd1. 2; Vbh.256)”라고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을 설했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감각적 욕망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알아야 한다.
이럴 경우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여 몸으로 떨쳐버림을 설했다.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들과 모든 해로운 법을 떨쳐버리고 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렇게 하여 마음으로 떨쳐버림을 설했다.
그리고 전자는 통해서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렸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에 대한 행복을 버림과,
후자를 통해서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의 떨쳐버림을 나타내기 때문에 출리에 대한 행복마저도 버림이 설명되었다.
84. 이와 같이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과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이라는 뜻으로부터,
첫 번째 단어에 의해 [갈애 등] 오염의 대상을 버림이,
두 번째에 의해 [형상 등에서] 갈애가 일어날 원인을 버림이,
두 번째에 의해서 원인인 무명을 버림이 설해졌다고 알아야 한다.
첫 번째에 의해 노력의 청정이, 두 번째에 의해서 성향의 청정이 설해졌다고 알아야 한다.
‘감각적 욕망들’이라고 설해진 감각적 욕망들 가운데서 이것은 ‘대상으로서의 감각적 욕망의 측면을 설한 방법이다.
85.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의 측면에 관해서는 열의, 탐욕 등 여러 분류를 가진 욕탐(kāmacchanda)이 바로 감각적 욕망(kāma)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해로운 법에 포함되지만,
『위방가』에서는
“무엇이 감각적 욕망인가? 열의(chada)가 감각적 욕망이다.(Vbh.256)”라는 등의 방법으로 禪과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했다.
혹은 오염원인 감각적 욕망이기 때문에 [욕탐이 감각적 욕망이라는] 첫 번째 문장에서 설했고,
해로운 법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문장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라는 단수] 대신에 감각적 욕망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했다.
86. 물론 다른 법들에도 해로운 상태가 존재하지만
“무엇이 해로운 법들인가?
욕탐이 … (Vbh.256)”라는 방법으로,
『위방가』에서 높은 禪의구성요소들과 반대되고 양립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장애들(五藏)을 설했다. 왜냐하면 장애들은 禪의 구성요소들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禪의 구성요소들은 그들과 양립하지 못하고, 그들을 제거하고, 그들을 부순다고 설했다.
그래서
“삼매는 욕탐(감각적 욕망)과 양립하지 못하고, 희열은 악의와, 일으킨 생각은 해태ㆍ혼침과, 행복은 들뜸ㆍ후회와, 지속적인 고찰은 의심과 양립할 수 없다”고 『뻬따까』(Peṭakopadesa, 藏釋論,Pe)에서 설했다.
87. 이와 같이 여기서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을 욕탐을 억압함에 의한 떨쳐버림을 나타냈다.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리고’라는 구절은 다섯 가지 장애들(五藏)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냈다.
그러나 반복을 피하면 첫 번째 구절은 욕탐(감각적 욕탐)을,
두 번째 구절은 나머지 장애들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첫 번째 구절은 세 가지 해로운 뿌리 가운데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대상으로 가진 탐욕을,
두 번째 구절은 [아홉 가지] 원한의 원인을 가진 성냄과 어리석음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폭류의 법 등에서 첫 번째의 구절은 감각적 욕망의 폭류, 감각적 욕망의 속박, 감각적 욕망의 번뇌,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간탐의 몸의 매듭, 감각적 욕망의 족쇄를,
두 번째 구절은 나머지 폭류, 속박, 번뇌, 매듭, 족쇄를,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첫 번째 구절은 갈애와 또 갈애와 함께한 법들을,
두 번째 구절은 무명과 또 무명과 함께한 법들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
첫 번째 구절은 탐욕과 함께한 여덟 가지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들이 일어남을,
두 번째 구절은 나머지 네 가지 해로운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일어남을 억압하여 떨쳐버림을 나타낸다고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에 대한 뜻을 설명한 것이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
88. 이제까지는 초선에서 버려진 구성요소들을 보였고 이제부터는 함께하는 구성요소들을 보이기 위하여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라는 등을 설하셨다.
여기서 생각함(vitakkana)이 일으킨 생각이다. 찬다는(ūhana)뜻이라고 설했다. 이것은 마음을 대상을 향하여 기울이는 특징을 가진다. 앞으로 향하여 치고, 뒤로 뒤집어서 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일으킨 생각으로 대상을 앞으로 향하여 치고, 일으킨 생각으로 뒤로 뒤집어 친다.’라고 설했다. 마음을 대상으로 인도함으로 나타난다.
지속함(vicaraṇa)이 지속적인 고찰이다. 계속 따라 움직인다는(anusa ñcaraṇa) 뜻이라고 설했다. 이것은 대상을 계속해서 문지르는 특징을 가진다.
함께 생긴 법들을 대상에 묶는 역할을 한다. 마음이 [대상에] 계속해서 일어남으로 나타난다.
89. 비록 어떤 마음에는 이 둘은 분리되지 않지만, [지속적인 고찰보다] 거칠다는 뜻에서 또 [지속적 고찰에] 앞선다는 뜻에서 마치 종을 치는 것처럼, 처음으로 마음이 [대상을 향하여] 돌진함이 일으킨 생각이다.
미세하다는 뜻에서 또 고찰하는 고유성질로 마치 종의 울림처럼 계속해서 일어남이 지속적인 고찰이다.
여기서 일으킨 생각은 움직임을 가진다.
[특정 대상을 향해서] 처음 마음에 날기를 원하는 새가 날개를 치는 것과 같고,
마음으로 향기를 따라간 벌이 연꽃을 향하여 내려오는 것과 같다.
지속적인 고찰은 고요한 상태이다. 마음의 심한 움직임은 갖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허공에 나는 새가 날개를 펴는 것과 같고,
연꽃을 향하여 내려 온 벌이 연꽃 위에 윙윙거리며 나는 것과 같다.
90. 『둘의 모음』(dukanipāta)의 주석서에서
“허공을 날 때 [바람이 강하면] 큰 새가 두 날개로 바람을 받으면서 날개를 [펴서] 고정시키고 움직이는 것처럼,
일으킨 생각은 대상에 마음을 얹어두는 상태로 일어난다.
[그러나 바람이 약할 때는] 바람을 받기 위해 날개를 흔들면서 날아가는 것처럼,
지속적인 고찰은 [대상을] 문지르는 성질로 일어난다.”라고 설했다.
이것은 계속해서 일어남이 있을 때 해당된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다섯으로 분류한 禪의] 초선과 제2선에서 분명하다.
91. 녹이 난 청동 그릇을 한 손으로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루와 기름과 양털로 만든 솔로 문지를 때,
그 사람의 꽉 잡은 손은 일으킨 생각과 같고,
문지르는 손은 지속적인 고찰과 같다.
같이하여 도공이 막대기를 저어서 바퀴를 돌려 도자기를 만들 대,
흙덩어리를 누르는 손은 일으킨 생각과 같고,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는 손은 지속적인 고찰과 같다.
같이하여 원을 그릴 때,
중앙에 고정시켜 박혀 있는 못은 [대상으로] 기우는 일으킨 생각과 같고,
바깥 둘레를 도는 못은 계속해서 문지르는 지속적인 고찰과 같다.
92, 이와 같이 이 [초선]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과 함께 일어난다.
마치 나무가 꽃과 열매와 함께하듯이 이 초선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위방가』에서는
“그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졌고, 구족했다.(Vbh.257)”라는 방법으로, 사람을 지칭하면서 가르침을 설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뜻을 이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93,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떨침(vivitti)이 떨쳐버렸음(viveka)이다. ‘장애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혹은 떨쳐졌음(vivita)이 떨쳐버렸음이다.
‘장애가 떨쳐진 禪과 함께한 법의 더미’라는 뜻이다.
’떨쳐버렸음에서 생긴’은 ‘그런 떨쳐버렸음으로부터 생긴, 혹은 .그런 떨쳐ㅓ렸음에서 생긴’이라는 뜻이다.
[희열과 행복이 있고]
94. ‘희열과 행복이 있고’:
유쾌하게 하는 것(pīṇayati)이 희열이다. 충분히 유쾌함이 그 특징이다. 몸과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혹은 [수승한 형상 등으로 몸을] 충만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의기양양하므로 나타난다.
희열은 다섯 가지이다. 즉 작은 희열, 순간적인 희열, 여기서
① 작은 희열은 몸의 털을 곤두서게 할 수 있다.
② 순간적인 희열은 순간순간 번개 불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③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희열은 해안의 물결처럼 자주 자주 몸에 나타났다가 부서진다.
④ 용약하는 희열은 강하다. 몸을 들어올려서 공중에 뛰어 오르도록 한다.
95. 이것은 뿐나왈리까(Puṇṇavallika)에 머물던 마라띳사(Mahā-Tissa)장로에게 일어났다.
그는 보르말 저녁에 탑전으로 갔다.
달빛을 본 뒤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대탑(Mahācetiya)을 향하여
‘지금 이 시간에 사부대중은 대탑에 예배를 드리겠구나.’라고.
전에 [대탑에서] 본 대상을 통해서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여 용약하는 희열을 일으키고 회로 만든 바닥에서 색칠한 공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허공에 뛰어올라서 대탑 앞에 섰다.
96. 그와 같이 기리깐다까(Grikaṇḍaka, 가시나무 산) 사원 근처에 있는 왓따깔라까(Vattakālaka) 마을의 한 선여인(kula-dhītā)에게도 일어났다.
그녀는 부처님을 대상으로 한 강력한 용약하는 희열을 통해 공중에 뛰어올랐다.
어느 날 저녁에 그녀의 부모는 법을 듣기 위해 사원으로 가면서
‘사랑스런 딸아, 너는 임신중이니 부적당한 시간에 나다니는 것은 옳지 않구나. 우리가 너를 위해 법문을 듣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나갔다고 한다.
그녀는 비록 가고 싶었지만 부모의 말씀을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집에 남아 정원으로 가서 달빛으로 기리 깐다까에 있는 아까사( Ākāsa, 허공) 탑을 보았다. 탑에 등불을 공양하는 것을 보았고, 사부대중이 꽃과 향으로 탑에 헌공한 뒤 오른쪽으로 탑돌이 하는 것을 보았다. 비구승가가 함께 염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그녀가
‘사원에가서 이러한 탑전에서 거닐고, 이렇게 감미로운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자들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진주 덩어리와 같은 탑을 볼때 용약하는 희열이 생겼다.
그녀는 공중에 뛰어 올라 그녀의 부모보다 먼저 공중에서 탑전에 내려 탑을 예배한 뒤 법을 들으면서 서 있었다.
97. 그때 그녀의 부모가 도착하여
‘사랑스런 딸아, 어느 길로 왔느냐?’라고 물었다.
그녀는 ‘길이 아니라 공중으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번뇌 다한 자들이나 공중으로 다닌단다. 어떻게 네가 공중으로 왔나?’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제가 달빛으로 탑을 바라보면서 서있을 때 부처님을 대상으로 크나큰 희열이 생겼습니다. 그때 저는 제 자신이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얻은 표상으로 공중에 올라 탑전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용약하는 희열은 공중에 뛰어오를 수 있다.
98.
⑤ 충만한 희열이 일어날 때 온 몸을 두루 적신다.
마치 가득 찬 물집처럼, 극심한 홍수가 침입한 산의 동굴처럼.
99. 이 다섯 가지 희열을 잉태하여 성숙하면 두 가지 편안함, 즉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을 성취한다.
편안함을 잉태하여 성숙하면 두 가지 행복, 즉 육체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행복을 성취한다.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하면 세 가지 삼매, 즉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본삼매를 성취한다.
이 가운데서 본삼매의 부리가 되고 증장하면서 삼매와 함께하는 충만한 희열이 이 뜻에 부합하는 희열이다.
100. 나머지 [술어인] 행복이란 행복해 함(sukhana)이다.
육체적 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몽땅(suṭṭhu) 먹어버리고(khādati)뿌리째 뽑아버리기(khaṇati) 때문에 행복(sukha)이라 한다. 이것은 기쁘게 함(sāta)이 특징이다. 함께한 법들을 증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도움으로 나타난다.
비록 어떤 [마음]에는 이 둘이 분리되지 않지만 원하는 대상을 얻음에 대한 만족이 희열이고, 얻어서 맛을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희열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있다.
그러나 행복이 있는 곳에 희열이 반드시 있는 것을 아니다.
희열은 상카라들의 무더기(行蘊)에 포함되고, 행복은 느낌의 무더기(受蘊)에 포함된다.
희열은 사막에서 목말라 기진맥진한 사람이 숲 속의 물을 보거나 혹은 들을 때와 같고,
행복은 숲 속의 그늘에 들어가 물을 마실 때와 같다.
이런 각각의 경우에 [이 둘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언급했다고 알아야 한다.
101. 이와 같이
‘이런 희열과 이런 행복은 이 禪의 것이거나(assajhānassa) 혹은 이 禪에 있다.(asmiṃ vā jhāne atthi)’ 라고 해서,
이 禪은 ‘희열과 행복이 있고’라는 용어로 한정하여 설하였다.
혹은 ‘희열과 행복’이란 합성어는 ‘희열(pīti ca)’과 행복(sukhañ ca)’으로 따로따로 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다.
마치 법과 율(dhammavinaya)’이란 함성어 등을 [‘법(dhamma ca)’과 율(vinayo ca)’로 따로따로 풀이해서 사용할 수 있듯이.]
떨쳐버렸음에서 생 긴희열과 행복은 이 禪에 속한 것이거나 이 禪에 있기 때문에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다.
마치 ‘떨쳐버렸음에서 생긴(vivekajaṁ)’이란 [술어가] 禪을 [한정하듯이] 그것은 희열과 행복을 한정할 수도 있다.
그 [떨쳐버렸음에서생긴 희열과 행복은] 이 [禪에] 속한다. 그러므로 단 한구절인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라 하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위방가』에서는
“이 희열과 함게한 이 행복(Vbh.257 )”이라는 방법으로 설했다.
그곳에서도 뜻은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102.
‘초선’: 이것은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119)
‘구족하여’: 도착하여, 증득하여라는 뜻이다. 혹은 성취하여, 생기게 하여 라는 뜻이다.
『위방가』에서
“’ 구족하여’란 초선을 얻음, 획득함 도달함, 다다름, 닿음, 깨달음, 성취함이다(Vbh.257)”라고 설했다.
그곳에서도 뜻은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103. ‘머문다’:
그 禪에 어울리는 자세로 머물면서 앞서 설한 것과 같은 禪을 갖추어 그는 자신의 자세 행실, 보호, 부양, 유지, 행위, 머묾을 생기게 한다
『위방가』에서 이와 같이 설했기 때문이다.
”’머문다’는 것은 자세를 취한다. 나아간다. 보호한다. 부양한다, 유지한다, 움직인다, 머문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문다’라고 설했다.(Vbh.252)”
붓다사 사낭 찌랑 띳타뚜(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