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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은 흙을 버리지 않는다. 이 사 (李斯)
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1) 중국 歷史上 최초의 천하통일,
한낱 변방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던 진(秦)나라가 강성해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가? 무엇보다 법을 현실에 맞추어 개혁하면서 체제를 안정시킨데 있다 할 것이다. 또한 특권적 영주의 권한을 박탈하고 왕권을 강화시킨 정책 또한 성공적이었다. 맹상군이나 평원군 같이 왕에 비견될 만한 호족(豪族)이 유독 진나라에는 보이지 않음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서 진나라는 국론을 통일시키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군대의 동원 능력도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뛰어 났으며, 이는 바로 왕권강화에 의한 중앙집권적 단일지배체제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 또 하나 진나라의 강성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제발전이다. 특히 파, 촉 지역을 점령한 이후 그 비옥한 땅으로부터 생산력이 급속하게 확대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 영토는 전중국의 1/3에 불과했으나 경제력은 2/3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편 진나라의 위치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빈번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비켜 있을 수 있어, 그것이 경제발전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 또한 다른 나라들은 관렴적인 유교사상이 지배적이었던데 비해 진나라는 실용주의적인 묵가(墨家)사상이 지배적이었으므로 그것이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또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장의의 연횡책(連衡策)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진나라의 국력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특히 6국의 합종책(合從策)을 깨뜨린 것은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밖에도 진나라의 개혁적 분위기는 보수적이었던 다른 나라의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많은 인재들이 진나로 모이게 했다. 이러한 유능한 인재들을 천하통일의 패도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상앙(商鞅)을 비롯하여 장의(張儀), 범수, 이사, 여불위 등 진나라를 이끌었던 중신(重臣)들이 대부분 외국에서 온 이른바 ‘외인부대’ 였던 점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진나라는 합종책을 분쇄하고 연횡책을 관철시킴으로써 6국을 각개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해 갔으며, 범수의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은 진나라의 우위를 확고하게 정착시킨 전략이 되었다. 또한 장평 싸움에서는 명장 백기의 활약으로 천하통일의 가장 큰 관문을 통과했으며, 왕전과 몽염장군의 활약이 역시 대세를 결정지었다.
한편 이사의 법가(法家) 사상과 적국에 대한 공작, 그리고 군현제도(郡縣制度)의 정착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지 불과 10년 만에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2)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에는 작은 마을에 말단 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사가 관청의 변소엘 갔는데 불결한 찌꺼기를 먹던 쥐가 깜짝 놀라 달아나는 것이었다. 한편 관청의 커다란 창고에서 곡식을 먹던 쥐는 사람을 보아도 놀라지 않고 먹던 좋은 곡식을 느긋이 계속 먹더란 것이다. 이를 본 이사는 한탄했다.
“사람이 어질다, 어리석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해 있느냐가 말해주는 것이로구나,”
그는 순자(荀子)에게서 제왕의 도리에 대한 공부를 마치자 초나라왕은 섬기기에 부족하고 6국은 모두 약소하여 큰일을 도모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 진나라로 가기로 결심했다. 순자에게 작별 인사를 드렸다.
때를 얻으면 노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 나라들이 서로 세력을 타투고, 유세객을 부르고 있을 때가 바로 선비들의 때가 아닌가 합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남의 부귀를 비난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올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가난보다 더한 슬픔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에서 일을 해 보렵니다.
진나라로 간 이사는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여불위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바로 벼슬을 주었다. 이윽고 이사는 왕의 눈에 띠어 진언할 기회를 얻었다.
<옛날 진나라의 목공(穆公)이 패자가 되고서도 끝내 6국을 병합할 수 없었던 것은 제후들이 여전히 강했고, 주나라 왕실의 덕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춘추 5패가 차래로 일어나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 효공 이후로는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여 제후들이 계속 득세했기 때문에 함곡관 동쪽에 6국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진나라가 확실한 주도권을 잡고 부려온 지 벌써 여섯 임금 째입니다. 이제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는 모습은 마치 진나라의 한 행정구역이 된 것과 같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강대한 힘과 대왕의 현명함으로 모든 나라를 멸망시킨 후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아낙네가 부엌의 먼지를 터는 일처럼 손쉬운 일입니다. 이는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다 제후들이 다시 강성해져 모두 합종이라도 맺게 되면 설사 삼황오제(三皇五帝)가 한꺼번에 오더라도 6국을 병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매우 흡족하게 생각하여 이사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그 계책도 받아들였다. 그런 후 유세객들에게 황금을 주어 은밀히 다른 나라로 보내어 매수할 수 있는 사람은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자객으로 하여 없앴으며, 적국(敵國)에 대해서는 왕과 신하 사이를 이간질한 다음 뛰어난 장군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
3) 태산은 흙을 버리지 않는다,
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
그 무렵 한나라 사람 정국(鄭國)이 진으로 잠입해 진나라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운하공사를 꾸미다가 그 음모가 발각되었다. 정국이 만들던 운하는 자그마치 3백리에 이르는 대규모 공사로 진나라 인력과 비용을 탕진시켜 국력을 약화 시키려는 한나라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나라를 피폐에 빠트리려던 이 운하가 황무지를 비옥한 땅으로 바꿔 진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후 중국의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진나라에서는 타국사람을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타국에서 온 사람들은 진나라를 섬기는 척하지만 실은 군주와 신하사이를 이간하려는 첩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모두 추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타국인에 대한 추방령이 내려졌고, 추방 대상자 중에는 물론 이사도 포함 되어 파면되었다. 이사는 탄원서를 냈다.
<지금 관리들이 타국인의 추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옛날 목공은 인재를 구하면서 동방의 초나라로부터 백리해(百里奚)를 비롯하여 유족의 유여(由余)(융나라에 살던 관리로, 융왕이 여색에 빠져 있어 융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규순 진나라에 크게 기여했다.) 송나라의 건숙(蹇叔)(백리해의 친구 백리해의 추천으로 상대부에 올랐다)그리고 진나라의 비표와 공손지를 등용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목공은 그들을 중용하여 서융(西戎)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또 효공은 상앙의 법을 채용하여 나라의 질서를 잡았기 때문에 백성은 부유해지고 국가는 부강해졌으며, 그로 인해 제후들이 속속 복속하였고, 초나라와 위나라를 격파하여 천리의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우리나라가 융성함을 자랑할 수 잇게 되었던 것입니다.
혜왕은 장의(張儀)의 계책에 따라 삼천(三川)의 땅 <황하, 낙수, 이수가 합치는 한나라 땅>을 빼앗고, 촉을 합병하였으며, 북으로 상군을 취하고 남으로는 한중을 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나라의 언과 영을 점령하고 동쪽으로는 비옥한 성고의 땅을 빼앗았으며, 드디어 6국의 합종을 깨뜨리고 진나라를 섬기도록 하여 그 공적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소왕은 범수를 얻어 양후를 내 쫓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결국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제업(帝業)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이 네 분의 군주는 모두 타국인을 중요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네 분의 군주가 타국인 배척하여 등용하지 않고 인재를 멀리했다면 진날의 강대함은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곤륜산에서 나는 옥을 바치게 하시고, 화씨의 구슬을 갖고 계시며, 허리에 밝은 달처럼 빛나는 진주가 달려 있는 태아(太阿)의 검(劍-초니라 태아라는 사람이 만든 명검)을 차고 계시며, 섬리(纖離)의 명마를 타시고, 취봉(翠鳳)의 깃발(물총새와 봉황의 깃으로 장식된 깃발)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여러 가지 보물 중 진나라에서 나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폐하께서 그것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반듯이 진나라에 나는 것이어야 한다면 정나라와 위나라의 여자를 후궁으로 둘 수 없고 아름답고 그윽한 조나라의 여자도 폐하의 곁에 둘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좋고 나뿜을 가리지 않고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물리치고 타국인은 무조건 추방하려 합니다만, 그렇다면 결국 여색과 주옥은 다른 나라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재만을 예외로 취급하시는 것이 됩니다.
“땅이 넓으면 곡식이 많이 나고, 나라가 크면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하면 병사가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이고(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황하는 아무리 작은 물줄기라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깊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천하의 패자(覇者)는 어떠한 사람도 물리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엄을 온 세상에 떨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타국인이라며 무조건 추방하여 천하의 인재를 다른 나라로 보내어 적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양을 대 준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진실로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 물건도 소중한 것이 많으며, 진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진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타국인을 추방하는 것은 적국을 이롭게 하고 원수를 돕는 격이며, 이는 안으로는 스스로 인재를 버리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한을 사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나라의 부강과 발전을 원해도 실현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사의 탄원서를 읽고 난 왕은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추방령을 취소하고 이사를 복직시켰다. 그의 계책이 중용되었으며 이윽고 이사의 벼슬도 높아져 정위(廷尉)에 임명되었다.
4) 秦始皇의 꿈
겨우 열세 살의 어린나이에 왕이 된 정(政)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천하를 평정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어느 날 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천하는 임이 통일이 되었는데 이 크나큰 업적을 영원히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제왕이라는 호칭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겠소, 그대들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그러자 신하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폐하의 덕은 삼황(三皇)보다 낫고 그 공적은 오제보다 높사옵니다. 옛날 태곳적에 천황, 지황, 태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태황이 가장 존엄했습니다. 앞으로 왕을 태황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러자 진시황이 말하였다.
“그러면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라 칭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짐(朕 )이라 칭할 것이다.”
그때부터 왕은 짐이라 불려졌다. 그 후 진시황은 다시,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기로 한다. 짐의 뒤는 차례대로 2세, 3세 등으로 하여 이를 천만 세까지 이어 나아가도록 하자,”고 하여 진나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진나라는 천만 세는커녕 겨우 2세 황제에 이르러 멸망해 15년의 짧은 황조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5) 분서갱유(焚書坑儒)
천하통일이 이룩된 후 이사는 승상(承相-조선시대의 영의정과 같은 지위)이라는 최고의 벼슬자리에 올라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시황제 34년 어느 날 함양군에서 연회가 열렸는데 주청신 등이 시황제의 위엄과 덕망을 칭송하였다. 이에 순우월이 나서서 말했다.
“殷, 周나라가 천년 동안이나 사직을 보존한 까닭은 왕족과 공신들을 제후로 삼아 주변을 튼튼히 하여 왕실을 보존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폐하의 아들이나 아우들은 일반 백성에 불과합니다. 이러다가 어떤 불행한 일이 생기면 폐하를 대신할 신하가 없으니 어찌 나라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시황제는 순우월의 의견을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승상 이사가 글로 순우월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제 막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셨는데 그 땅들은 공신과 왕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춘추전국시대라 해서 천하가 전쟁터로 변한 것은 주나라가 그 가족과 공신들에게 나라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자식과 공신들 간의 사이가 멀어져 문제가 생기고 그 갈등으로 전쟁으로 발전해도 주나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황제께서 천하를 직접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또 군을 현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통치하셔야 사직이 온존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군현(郡縣)제도는 이사가 이룬 큰 업적중에 하나요, 오늘의 중국 지역행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제도이다.
지금은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고 흑백을 가려 하나의 기준을 확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사사로이 익힌 학문과 견문으로 조정을 비난하고 황제를 비방하는 말들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당장 금지시키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파당이 만들어집니다.
신은 주청합니다.
사관(史官)이 갖고 있는 사료 중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우고, 개인이 <시경>, <서경>및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갖고 있으면 관청에 바치게 한 후 태우도록 하십시오, 또 “시경, 서경”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방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되, 만약 관리가 그것을 알고도 처벌하지 않으면, 같은 죄로 다스야 합니다.
다만 의약과 역서, 농사관계 서적은 페기하지 않아도 부방하다 생각합니다. 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즉시 시행토록 했다. 그리고 옛것을 들추어 현실을 비판하는 많은 유생들을 한 구덩이에 묻고 생매장을 했다.
이것을 가리켜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부른다.
법을 제정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오직 시황제만의 권한이 되었으며 문자와 도량형이 통일되고 별궁이 곳곳에 지어졌다.
첫댓글 진나라의 천하통일,이사의 이야기,황제 시황제 짐의 호칭이 만들어진 유래 그리고 그 참혹한
" 분서갱유(焚書坑儒)등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장문을 올리시느랴 수고하신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