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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계경 제7권
1.19. 조보리수법여품(助菩提數法餘品)
1) 다라니
① 네 가지 다라니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다라니(陀羅尼)라 하는가?
다라니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법(法)다라니이고, 둘째는 의(義)다라니이며, 셋째는 사(辭)다라니이고, 넷째는 인(忍)다라니이다.
법다라니는 보살이 마음에 새겨 기억하며 잊지 않는[憶念] 것이다.
염력(念力)으로 해서 큰 지혜를 얻고, 큰 지혜로 해서 모든 법계를 안다.
언사(言辭)와 자구(字句)를 단단한 마음으로 받아 지니어 한량없는 세간을 거치면서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의다라니는 법다라니에 따라 순리대로 좇아서 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한량없는 세간을 통하여 이를 받아 지니어 잊어버리지 않는다.
사다라니는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의 갖가지 악을 깨뜨리기 위해 신령한 주문[神呪]을 받아 지니어 읽고 외워서 통리(通利: 통달하여 걸림이 없음)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주술(呪術)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법을 받아서 지니는 것이니,
그 첫째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오신(五辛: 파ㆍ마늘 등 냄새나는 다섯 가지 채소)을 먹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사음(邪婬)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부정(不淨)한 집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을 구족하면 능히 한량없는 중생을 크게 이익되게 하며, 모든 나쁜 귀신과 모든 독(毒)과 모든 병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인다라니는 보살마하살이 지혜의 힘으로 해서 마음이 적정(寂靜)함을 좋아하여 남들과 함께 거처하지 않고 묵연(默然)히 말없고, 벗 없이 홀로 지내는 것이다. 음식에 대하여 만족함을 알아서 한 종류의 음식만 먹으며, 좌선(坐禪)하여 사유(思惟)하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다.
② 다라니주
이때 부처님은 곧 다라니주(陀羅尼呪)를 외우게 한다.
을치밀치기치비찬제반단나사바하
乙致蜜致羈致毘羼提般檀那莎 呵
보살은 이때 부처님으로부터 이를 받은 다음 깊은 마음으로 관찰하여 글자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글자에 뜻이 없으니 뜻이 있는 말이 없고, 뜻이 있는 말이 없으면 글 또한 뜻이 없으며 법 또한 뜻이 없다.
뜻이 없으니 모든 법은 모조리 설명할 수가 없다.
뜻이란 모든 법이 뜻이 없다는 뜻이다.
인력(忍力) 때문에 네 가지 다라니를 능히 명료하게 알며, 명료하게 알기 때문에 인다라니의 구족함을 얻는다.
능히 인다라니를 구족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게 된다.
보살마하살이 초아승기겁(初阿僧祇劫)에 행(行)을 닦을 때에 이 법(法)과 의(義)의 두 다라니를 얻었고,
이 법과 의의 두 다라니로 인하여 삼매를 닦았으며, 삼매를 닦아 서원(誓願)을 발함에 따라 다시 사(辭)와 인(忍)의 두 다라니를 얻었다.
보살이 만일 네 가지를 구족할 경우 네 다라니를 얻는다.
그 첫째는 다섯 가지 욕심을 탐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중생에 대해 질투심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능히 보시를 하고 보시한 뒤에 후회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바른 법[正法]을 즐겨 듣고 보살의 법장(法藏)과 보살의 마이(摩夷: 論藏ㆍ行母)를 받아 지니어 읽어 외우고 글씨로 쓰고 해설하는 것이다.
2) 큰 서원의 발원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큰 서원(誓願)을 발한다고 하는가?
거기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발심발원(發心發願)이고, 둘째는 유발원(有發願)이며, 셋째는 행발원(行發願)이고, 넷째는 선발원(善發願)이며, 다섯째는 대발원(大發願)이다.
처음 보리심을 발할 때를 발심발원이라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인천(人天)에 태어나기 때문에 유발원이라 하며,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무량심(無量心)을 닦는 것을 행발원이라 하고,
모든 보살의 선법(善法)을 닦는 것을 선발원이라 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고 바른 법을 보호하여 지키는 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이 만일 열 가지의 공양으로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에 공양하고 바른 법을 보호하여 지키며, 법을 지키는 자를 보면 공양하고 공경할 경우, 이를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도솔천 내지 대열반(大涅槃)에 태어나는 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처음의 발심(發心)을 좇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데까지 이르면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든 유(有)에 변재(遍在)하여 그에 따라 몸을 받으면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항상 대승보살의 법장(法藏)과 보살의 마이(摩夷: 論藏)로 중생을 교화하면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연설하는 것은 모두 이익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선근(善根)이 없는 자에게 선근의 싹이 생기게 한다. 이것을 대발원이라 한다.
3) 삼매
① 세 가지 삼매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이 공삼매(空三昧)를 닦는다고 하는가?
보살이 모든 법에 설할 만한 자성(自性)이 있는가를 깊이 본다면, 이 설할 만한 자성은 설할 수 없는 자성 중에는 없기 때문에 공삼매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무원삼매(無願三昧)라 하는가?
모든 법을 선설(宣說)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고,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苦]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때문에 모든 법은 선설할 수 없음을 알고,
이 때문에 나와 나의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으므로 새삼 원하고 구하지 않는다.
이것을 무원삼매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무상삼매(無相三昧)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이 선설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선설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의 모양[相]이 전혀 없고,
모양이 없으므로 적정(寂靜)이라 하며,
적정을 닦기 때문에 이것을 무상삼매라 한다.
② 3삼매를 설하는 까닭
여래는 어째서 세 가지 삼매를 설하는가?
모든 법에는 무릇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위의 유[有爲有]이고, 둘째는 무위의 유[無爲有]이다.
유위의 유는 나와 나의 것을 말하고 무위의 유는 이른바 열반이다.
유위의 유는 보살마하살이 모든 괴로움을 관찰하고 원하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무원삼매라 한다.
무위의 유는 이른바 열반이다.
보살마하살은 열반 중에서 즐겁다는 생각[樂想]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무상삼매라 한다.
무위(無爲)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보살마하살은 유(有)가 있음을 보고 무(無)가 없음을 본다.
유에는 무가 없고 무에는 유가 없다.
이것을 공(空)이라 한다.
보살은 이때 공삼매를 닦아 진실한 지혜를 얻는다.
이러한 삼매는 성문과 연각도 역시 닦고 배우나 능히 설하지는 못한다.
모든 법은 선설할 수 없는 것이지만 모든 불ㆍ보살이 중생들로 하여금 적정(寂靜)을 얻게 하기 위해 이 네 가지 법을 설한다.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무상(無常)이며, 괴로움[苦]이며, 무아(無我)이며, 열반적정이다.
모든 불ㆍ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네 가지 법을 설하는 것이니, 응당 이미 설한 모든 법계(法界)의 모든 법의 근본을 안다.
이것을 우타나(優陀那)라 한다.
우타나는 과거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이 또한 이와 같이 설한 것이다.
능히 위[上]를 짓는 것을 우타나라 하며, 선법을 증장하는 것을 우타나라 한다.
4) 유위법
① 유위법이 무상이라고 하는 것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은 유위법이 모두 무상임을 안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유위법이 가히 무상임을 설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有爲)는 무상이다.
모든 법성(法性)이 진실한 뜻에 있어서 인과가 없으므로 선설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모두 생겨나고 멸한다는 것을 모양을 지어서 말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유위]
이래서 과거의 유위는 역시 생기고 역시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법은 원인[因]이 있음을 보지 못하며 자성[性]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원인과 자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의 법이 이처럼 무상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법은 생기는 것은 알고 없어지는 것은 모른다.
현재의 법은 그 원인[因]은 보지 못하고 그 과보[果]를 보고 자성을 본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성은 알고 원인은 모르는 것이다.
미래의 유위법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원인은 있지만 과보는 알지 못하며 자성을 알지 못한다.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원인을 알지만 자성은 모른다.
이때 삼세를 보아 하나하나의 생각에 세 가지 모습이 있음을 관찰한다.
[네 가지 모습, 생주노괴]
만일 한 염을 지나면 네 가지 모습이 있다.
먼저 법이 멸하고 나면 차례로 유사한 법[相似法]이 생긴다. 이것을 생(生)이라 한다.
생기고 난 뒤에는 일을 짓는다. 이것을 주(住)라 한다.
맨 먼저 법상(法相)이 멸하는데 법상이 멸하고 나면 상사(相似)를 본다. 이것을 노(老)라 한다.
태어난 뒤에 주(住)하지 않고 이념(二念)에 이를 경우, 이것을 괴(壞)라 한다.
보살은 유위법의 모양[相]이 한 가지임을 본다.
생(生)ㆍ주(住)ㆍ노(老)의 경우에도 또한 이와 같다.
다만 허물어지는 상[懷相]만이 다르다.
어째서인가? 세 가지 모습[相]과 함께 주(住)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와 무]
이와 같은 네 가지 상을 보는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有)이고, 둘째는 무(無)이다.
유는 세 가지 상이고 무는 네 번째의 상[第四相]이다.
[보살이 유위법을 보는 것]
보살은 유위법(有爲法)을 보는 데 있어
생을 보지 않으며, 주를 보지 않으며, 노를 보지 않으며, 괴를 보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생ㆍ주ㆍ노ㆍ괴는 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색법(色法)으로서의 생, 색법으로서의 주, 색법으로서의 노, 색법으로서의 괴를 보며, 생ㆍ주ㆍ노ㆍ괴를 보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방편으로써 불견(不見)의 네 가지 상을 관찰한다.
방편으로 관찰한다는 것은 보살관(菩薩觀)이다.
만일 색법을 떠나 별도로 생(生)이 있는 것이라면 색법이 생길 때에도 생은 또한 당연히 생긴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법은 당연히 이생(二生)이다.
그 첫째는 색생(色生)이고, 그 둘째는 생생(生生)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생(生)은 법에 즉(卽)하기도 하고 법에서 떠나기[離]도 한다.
만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생생이 없으며,
만일 법을 떠나 별도로 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치가 그럴 수 없다.
만일 떠나지 않는다면 그럴 때에는 색(色)에 생(生)이 없나니, 생인연(生因緣) 때문이다. 생ㆍ주ㆍ노ㆍ괴가 역시 이와 같다.
만일 괴(壞)가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 괴 또한 생겨나고 허물어지는 것임을 안다.
만일 괴가 생기는 것이라면 마땅히 모든 유위법이 멸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
입정(入定)할 때나 입멸(入滅)할 때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언제나 다시 생기고, 색법이 멸할 때도 역시 다시 생긴다.
어째서인가? 이 허물어짐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모든 법이 당연히 항상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보살이 색법을 떠나서는 네 가지 상을 보지 못한다. 유위법의 자성이 무상함을 알기 때문에 또한 항상 유위는 무상이라고 말한다.
보살은 유위의 법에 세 가지의 괴로움이 있음을 본다.
고고(苦苦)와 행고(行苦)와 괴고(壞苦)이다.
이런 관계로 여래는 유위법은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② 유위법이 무아라고 보는 것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은 유위법이 무아(無我)라고 본다고 하는가?
무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무아(衆生無我)이고, 둘째는 법무아(法無我)이다.
중생무아란 중생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법이 없는 것도 아니며, 법이 있는 것[有法]과 법이 없는 것[無法]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중생무아라 한다.
법무아란 모든 법은 설할 수 있으나 설할 만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법무아라 한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무아가 있으므로 여래는 유위법은 모두가 무아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유위법에 대하여 현재의 인(因)을 끊어버리고 미래의 인을 막으면
이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데, 번뇌가 없으므로 적정(寂靜)이라고도 한다.
만일 보살이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열반을 관하거나, 성문이 아직 도과(道果)를 얻지 못하고 열반을 관하면, 모두 진실로 열반의 자성을 알지 못하는 바 역시 열반상(涅槃相)이다.
비유컨대 대왕(大王)이 자식을 위한다 하여 나무를 깎아 코끼리ㆍ말ㆍ사슴ㆍ토끼를 만들어 주면,
임금의 자식들은 진짜가 아닌 코끼리나 말 등을 진짜인 것으로 생각하고,
임금이 혹시 코끼리나 말을 찬탄하면 자식들은 모두 깎아 만든 코끼리와 말을 찬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나중에 바깥에 나가서 진짜 코끼리나 말을 보고는 그만 부끄러워하며 생각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코끼리와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코끼리와 말이라고 생각했으며,
어떻게 해서 이름이 같고 모양이 같다 하여 진짜라는 생각을 했는가?’
역시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성문인 사람이 아직 도과(道果)를 증득하지 못하여 생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여래가 이들을 위하여 열반의 적정을 설하면, 보살이나 성문은 듣고 나서 역시 참된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참된 열반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일어나는 마음을 열반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 뒤에 팔정도(八正道)를 닦은 다음 청정한 지혜를 얻어 생사의 집을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열반의 자성이 어떤 것인지를 참으로 알고 드디어 부끄러워하며 생각한다.
‘우리들이 어떻게 열반이 아닌 것에 열반이라는 생각을 일으켰을까?’
비유하자면, 병이 든 사람이 훌륭한 의원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이때 의원은 병을 고치기 위해 증세에 따라 약을 준다. 그러면 병자는 약을 받고 기뻐하며 진짜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먹는다.
약을 먹은 뒤 아프던 병이 낫지만 다시 다른 병[餘病]이 생긴다. 그러면 의원은 먼저 주던 약을 끊고 다시 다른 약을 준다.
그러나 병자는 이같이 말한다.
“대사(大師)께서 주신 먼젓번의 약이 매우 좋아서 능히 병을 고쳤습니다.
이 약은 능히 그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의원이 비록 이 약이 좋다고 해도 병자는 여전히 믿지 않는다.
그러다가 병자가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그때서야 약을 믿고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부처의 설법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중생이 듣고 작은 번뇌가 없어지면 즉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다시 번뇌가 생겨서 부처도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래가 이들을 위하여 다시 깊고 깊은 법을 설하면,
비록 다시 듣기는 하지만 정작 믿지는 않고 본래의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만일 보살이 청정한 도를 얻으면
그때서야 비로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여래를 실상(實常)이라고 하면서 생각한다.
‘내가 어째서 여래를 무상하다고 했는가?’
이래서 여래는 유위법이란 모두 무상이고, 괴로움[苦]이며, 무아(無我)이고, 열반적정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