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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보살경 제5권
[4념처가 다함없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생각 두는 곳[念處]도 다함이 없습니다.
[몸 관참]
그것은 보살이 몸을 관찰하여 몸의 행을 닦아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몸의 뒤바뀜과 화합됨을 보되,
마치 바깥의 풀과 나무와 담과 벽과 기와와 돌이 인연을 따라 있어서 자라날 수 없고 얽매임이 없는 것처럼
이 몸도 그러하여 인연을 따라 생기므로 자라날 수 없고 얽매임이 없으며,
이 다섯 가지 쌓임[陰]과 열여덟 가지 경계[界]와 열두 가지 감관과 대상[入]속에 ‘나’나 ‘내 것’도 공(空)하며, 상(常)과 무상(無常)도 공하고,
이 몸은 ‘나’도 없고 ‘내 것’도 있지 않으며, 이 몸은 견고하지 않아 의지하거나 믿을 수 없으므로 마땅히 보리를 바르게 깨달은 몸을 구하여야 합니다.
보리를 바로 깨달은 몸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법신(法身)이며, 금강의 몸이며, 파괴할 수 없는 몸이며, 견고한 몸이며, 삼계에서 벗어난 몸입니다.
나의 몸에 비록 한량없는 허물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그 허물을 제거하고 여래의 몸을 성취하기를 서원하니,
이 보살이 모든 것을 견뎌내면서 오래도록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불타는 번뇌에 처하는 것은 다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밖에 있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네 가지 성분의 갖가지 문(門)과, 갖가지 짓는 바와,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기물(器物)과, 갖가지 쓰임이 다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처럼, 지금 나의 이 몸도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이 그와 같습니다.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이익 됨을 보고
몸의 여러 가지 고통을 관찰하고서도 싫어하여 여의려는 생각을 내지 않고,
몸의 덧없음을 관찰하여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관찰하여도 교화하기를 버리지 않고,
몸을 적멸하다고 관찰하여도 버림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보살은 안의 몸을 관찰할 때 번뇌를 내지 않고 바깥의 몸을 관찰할 때도 그러하며,
이 보살은 더러운 몸을 여의고 깨끗한 몸의 업을 이루어 미묘한 상호를 원만히 갖추어 스스로 장엄해서 하늘과 사람을 이익 되게 함이 많으니,
이것을 보살이 몸을 관찰하여 몸을 닦는 행이라고 합니다.
[느낌 관찰]
어떤 것이 보살의 느낌[受]을 관찰하고 느낌을 닦는 행인가?
보살은 모든 느낌이 다 고통이라고 생각하여 그 느낌을 잘 분별하고 지혜로 헤아려 느낌의 적멸함을 알아서,
즐거움을 느낄 때도 탐욕을 내지 않으며,
고통을 느낄 때에도 세 가지 나쁜 갈래[三惡道]를 관찰하여 크게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성내지 않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도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은 보살이 느끼는 대상을 바르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받은 느낌이 고통스럽거나, 즐겁거나,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거나 간에 이 모든 느낌에서 벗어날 줄 알고 닦을 줄 알며,
모든 중생의 느낌은 적멸하고 장엄하다고 관찰해서
‘이 중생들은 모든 느낌에서 벗어남과 닦음을 알지 못하므로
즐거움을 느낄 때는 탐착하고, 고통을 느낄 때는 곧 성내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는 곧 어리석음을 내니,
나는 이제 마땅히 나아가 지혜를 닦아서 일체의 느낌을 제거함과 동시에 선근을 내고 대비심을 일으켜 지혜를 거둬 가지며
또 중생들의 온갖 느낌을 제거하기 위하여 설법하되,
아직 느낌을 이해하지 못한 자에겐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이해한 자에겐 즐거움을 느끼게 하리라’고 합니다.
느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느낌이 없는 것이니,
‘나’와 남, 중생과 수명, 양육(養育)함과 장부(丈夫)가 없어서,
느낌을 거두어 가짐과 거둠과 가짐을 느낌과 느낌을 느낌과 존재를 느낌과 뒤바뀜을 느낌과 분별을 느낌과 모든 소견을 느낌과 눈의 모양을 느낌과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모양을 느낌과 빛깔의 모습을 느낌과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의 모양을 느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云何解受者? 所謂無受者, 無我人, 衆生, 壽命, 養育, 士夫. 除攝取受者, 攝者, 受取者, 受受者, 受有者, 受顚倒者, 受分別者, 受諸見者, 受眼相者, 受耳鼻舌身意相者, 受色想者, 受聲香味觸法想者.]
눈이 빛깔을 인연함을 느껴서 감촉이 생기므로 고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며,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마음은 법을 느껴서 감촉이 생기므로 고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니, 이것을 느낌이라고 합니다.
또 마음의 뜻을 분명히 깨닫는 한 가지 느낌이 있고,
안의 느낌과 바깥 느낌의 두 가지 느낌이 있고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느끼는 세 가지 느낌이 있고,
네 가지 원소[四大]를 분명하게 깨닫는 네 가지 느낌이 있고,
다섯 가지 쌓임을 생각하는 다섯 가지 느낌이 있고,
여섯 가지 감관[入]을 분별하는 여섯 가지 느낌이 있고,
일곱 가지 알음알이가 머무는 곳인 일곱 가지 느낌이 있고,
여덟 가지 삿된 법인 여덟 가지 느낌이 있고,
아홉 부류의 중생들이 머무는 곳인 아홉 가지 느낌이 있고,
열 가지 착하지 않은 법인 열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요약하여 말한다면 한량없는 중생들의 모든 느낌은 생각으로 반연한 경계의 모든 것을 느낌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그 느낌 중에서 느낌을 닦고 행을 관찰하여 큰 지혜를 일으켜서 중생들의 착하고 착하지 않은 느낌이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모양을 아니,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생각을 두는 곳을 바르게 느껴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마음 관찰]
보살이 마음의 생각을 두는 곳[心念處]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리의 마음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여 어지럽히지 않아서 마음을 관찰하되
‘이 마음이 나서는 사라지므로 머무는 모양이 없고, 안에 머물지도 않고 바깥으로부터 오지도 않는다.
내가 처음 일으킨 보리심은 이 마음이 이미 다 지나가고 변하고 달라져서 어떤 곳에도 이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으로 모은 모든 선근 등도 다 지나가서 사라져 변하고 달라져서 어떤 곳에도 이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의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함도 또한 사라지고 변하는 법이어서 어떤 곳에도 이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이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마음이 마음을 내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겠는가?
이 보리의 마음은 선근의 마음과 합하지 않으며, 선근의 마음은 회향하는 마음과 합하지 않으며, 회향하는 마음은 보리의 마음과 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일 보살이 이렇게 관할 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부지런히 정진한다고 합니다.
또한 보살은 깊고 깊은 12인연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인과(因果)를 잃어버리지 않으니, 이 심성(心性)은 뭇 인연에 속하여 길러낼 수 없고 지음도 없고 얽매임도 없으며, 모든 법도 다 그러하므로 법답게 수행하여 장엄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 이제 마땅히 닦아 익히고 장엄하여 심성을 여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심성은 어떤 것이고 장엄은 어떤 것인가?
심성이란 허깨비와 같아서 생겨남도 없고 지음도 없고 베풀어줌도 없으며,
장엄이란 짓는 보시를 모두 장엄하고 청정한 불국토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꿈에서 본 것과 같아서 마음의 모습이 적멸함이요,
장엄이란 계율을 원만히 갖추어 모든 신통을 닦는 것이며,
심성이란 거울 속에 비친 형상처럼 그 모양이 청정함이요,
장엄이란 모든 인욕을 닦아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법의 지혜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따뜻할 때 생기는 아지랑이처럼 구경에 가서는 적멸한 것이요,
장엄이란 모든 착한 것에 깊이 발심하고 정진하여 위없는 부처님 법을 원만히 갖추는 데에 회향하는 것이며,
심성이란 물질도 없고 상대도 없고 조작함도 없음이요,
장엄이란 모든 선정과 해탈 삼매 닦는 것을 부처님의 선정을 원만히 갖춤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모든 질문에 잘 분별하고 부처님 지혜를 원만히 갖춤에 회향하는 것이며,
심성이란 연(緣)으로 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항상 선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심성이란 인(因)으로 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보리를 도움으로 인하여 발심하는 것이며,
심성이란 여섯 대상[六塵]을 버리므로 그 마음에 일어남이 없는 것이요,
장엄이란 부처님 경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이 심행(心行)을 관찰하고 신통을 생각하여 신통을 얻고 나서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마음을 알고 나서는 그 마음의 국량에 따라 설법하는 것입니다.
또 심행을 관찰하고 대비(大悲)를 생각하여 중생을 교화하되 싫어하거나 지침이 없으며,
또 심행이 일어나지 않고 다 사라지고 변하여 달라지는 모양과 생사를 버리지 않아 번뇌가 서로 계속됨을 관찰하되 이 마음을 바르게 생각하여 생겨남이 없음을 알아 바른 결정을 이루니,
이와 같이 행한다면 성문ㆍ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고 이 마음의 힘을 다하여 일념(一念)의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마음의 생각을 두는 곳을 바르게 하여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법 관찰]
사리불이여, 보살이 법의 생각을 두는 곳[法念處]을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항상 지혜의 눈으로 모든 법을 보아서 도량에 앉을 때까지 중도에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 보살은 법을 관찰할 때 한 법이나 미세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원(願)이 없고 지음이 없고 나거나 사라짐이 없고 물질이 없음을 여읜다고 보지 않습니다.
또 한 법이나 미세한 모양에 이르기까지 12인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지 않으니,
보살이 법을 관찰하여 모든 법 아닌 것이 법이 아님이 없다고 봅니다.
무엇을 법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나’가 없는 이치와 중생이 없는 이치와 수명이 없는 이치와 사람이 없는 이치이니, 이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법이 아니라고 하는가?
이른바 ‘나’라는 소견과, 중생이라는 소견, 수명이라는 소견과, 사람이라는 소견, 없어진다고 여기는 소견[斷見], 항상 하다고 여기는 소견[常見], 있다고 하는 소견, 없다고 하는 소견이니, 이것을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법이 곧 법이고, 모든 법이 곧 법 아니니, 왜 그런가?
공하고 모양 없고 원 없음을 관찰하는 이것을 모든 법이 곧 법이라고 하는 것이요,
아만(我慢)과 교만과 ‘나’와 ‘내 것’과 거두어 가진 모든 소견 이것을 모든 법이 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보살은 법을 관찰할 때에 어떤 법은 보리의 인(因)이거나 세간을 벗어나는 도(道)의 인이 아니라고 보지 않으니,
이 보살은 모든 법이 다 세간을 벗어나는 도임을 알아서 걸림이 없는 대비를 얻습니다.
또 모든 법이 번뇌에 얽매임을 허깨비 모양과 같다고 관찰하여 이 모든 법은 번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번뇌가 없는 것도 아님을 아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이치는 두 가지 성질이 없어서 이 모든 번뇌는 숨기거나 감추는 곳이 없고 쌓거나 모임이 없으므로
만약에 번뇌를 안다면 곧 보리를 아는 것이요
번뇌의 성품이 곧 보리의 성품임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바른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서 한 가지 법도 분별할 것이 없고 아무런 장애가 없어 잘 이해할 수 있어서 바르게 법성에 머무르며,
법성에 머무른 것과 같이 중생의 성품에 머무르며,
중생의 성품에 머무른 것과 같이 허공의 성품에 머무르며,
허공의 성품에 머무른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에 머무릅니다.
보살이 법을 관찰할 때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바로 부처님 법임을 이해하니,
그 마음은 이때 번뇌가 다한 지혜[盡智]의 함이 없음을 내지 않으므로 비록 다하였더라도 다한 것이 아니어서,
생겨남이 없는 지혜[無生智]에 들어가며,
또 중생을 관찰하여 붙인 이름[假名]을 버리지 않습니다.
법의 생각을 두는 곳이라는 것은 일체의 모든 법을 바르게 생각함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니,
이른바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님이 아시는 임시로 붙인 모든 이름의 법을 미래가 다 되도록 끝내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요,
법의 생각을 두는 곳이라는 것은 한량이 없는 행을 연설하여 불법을 친근히 하고 모든 마구니의 무리를 파괴하여 자연의 지혜[自然智]를 얻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보살이 바른 법의 생각을 두어서 다함이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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