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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요의론 제8권
[머무름 없이 반야바라밀을 닦다]
『칠백송반야바라밀다경(七百頌般若波羅蜜多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그대가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 마땅히 어느 곳에 머물러 반야바라밀다를 닦아야 하겠느냐?’
묘길상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전혀 머무르는 바가 없이 반야바라밀다를 닦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머무름이 없이 어떻게 반야바라밀다를 닦느냐?’
묘길상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참으로 가히 머무를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그대가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어떤 선근이 있어서 혹은 늘어나거나 혹은 줄어들기도 하느냐?’
묘길상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때 선근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혹은 늘어나거나 혹은 줄어드는 일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다를 닦는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떤 법이 있어서 혹은 늘어나거나 혹은 줄어드는 일이 없습니다.’”
「묘길상보살신변품(妙吉祥菩薩神變品)」에서 말하였다.
“어떤 천자(天子)가 묘길상보살에게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이 능히 그 뜻을 모두 아는 사람들은 조금뿐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천자여, 내가 말하였지만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어서 설령 적든 많든 능히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지혜는 집착도 없고 분별도 없고 가히 기록할 수도 없고 가히 설할 수도 없고 지어내 쓰일 것도 아니고 언어로 말할 것도 아니며, 마음과 생각과 의식을 여의었습니다.
설령 적게 알든 설령 두루 알든, 쉽게 모두 알 만한 것이 아닙니다.’
천자가 말했다.
‘만약에 부처님의 지혜를 능히 알 수 없다면,
모든 성문(聲聞)들은 어떻게 능히 모두 알 수 있으며,
보살들은 어떻게 물러나 되돌아감이 없는 경지에 머무릅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천자여, 여래께서는 훌륭한 방편으로써 문자를 빌어 지혜를 따라 깨달음을 열어 주시지만, 이 지혜는 문자가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불 속에서 불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얻겠습니까?
천자여, 여래께서도 역시 이와 같으셔서 설령 처음부터 부처님의 넓고 큰 지혜를 문득 설하시더라도, 곧 유정들 가운데 능히 부처님의 지혜를 아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말씀을 널리 설하시어 그 지혜를 열어 보이시지만, 이 지혜는 문자가 없습니다.’
천자가 말했다.
‘묘길상이여, 어떤 것을 이와 같은 종류의 말씀이라고 합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천자여, 지계(持戒) 및 제지(制止)의 법을 설하시거나 혹은 반야바라밀다에 서로 따르는 법을 설하시거나 혹은 입해보리분법(入解菩提分法)을 설하시니,
이러한 것을 설하신 이것을 여러 종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천자여, 혹은 생겨남도 여의고 스러짐도 여의는 법이나, 잡스러움과 잡스럽지 않음을 여의었다는 말씀이나, 더러움도 여의고 청정함도 여의었다는 말씀이나,
삶과 죽음을 여의는 일을 꺼리지 않는다는 말씀이나, 열반을 기꺼워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나,
앎도 없고 끊음도 없고 닦음도 없고 증험(證驗)도 없고 얻음도 없으며, 또한 지금 당장 가히 돌아갈 삼매(三昧)도 없다는 이러한 말씀들입니다.
이들은 청정하고 진실한 말씀이며 부사의(不思議)한 음성이라고 합니다.’”
『일체법결정무소득경(一切法決定無所得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묘길상에게 물으셨다.
‘모든 여래들께서 설하신 바는 부사의(不思議)하고 부사의한 경지라고 하는데, 마땅히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묘길상이 말했다.
‘이 부사의하고 부사의한 경지는 모든 여래들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지는 사유(思惟)를 여의며 마음이 행하는 바가 아니며 마음이 헤아리는 바가 아니며 심법(心法)이 간택(揀擇)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마음은 이와 같기 때문에, 이것이 곧 부사의한 경지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가히 사유함이 없으니 이 마음은 사유를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의 자성(自性)도 역시 있는 바가 없기에 이 사유하는 마음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그대로 실다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이것을 부사의한 경지라고 합니다.’”
이 경전에서는 다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너는 마땅히 문득 유정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데에 이 갑옷을 입지 말라.’
묘길상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유정들의 세계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유정들 가운데 어떤 것을 가히 교화하고 제도하여 열반에 들어가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에 누군가 저 허공을 능히 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정들의 세계도 또한 가히 교화하여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보리의 마음으로써 교화하여 제도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유정들도 역시 가히 발하여 일으켜서 교화하여 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체 법이 보리이며 또한 보리는 더러움이나 청정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너는 유정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데에 이 갑옷을 입지 말라고 설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유정은 더러움이 아니며 저는 또한 유정들을 제도한다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만약에 유정들이 있는 것이라면 곧 더러움과 청정함이 겉으로 보이겠지만,
이미 유정들이란 없는데 어찌 더러움과 청정함이 있어서 가히 겉으로 보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약에 법이 있는 것이라면 연(緣)을 따라 생겨나더라도 곧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연하여 생겨나는 법 안에서는 실로 가히 붙잡을 수 있는 더러움도 없고 청정함도 없습니다.
일체 법의 자성은 실로 연하여 생겨나는 성품이 없는 까닭에, 설령 연(緣) 안에서라도 역시 연의 뜻에는 가히 붙잡을 수 있는 청정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있는 바가 없다는 뜻이 연하여 생겨난다는 뜻이라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모두 압니다.
또한 다시 연하여 생겨난다는 이와 같은 뜻을 지혜로운 사람들은 한결같이 분별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뜻을 분별하지 않는 가운데에 있으면 곧 더러움도 없고 청정함도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술사나 혹은 마술사의 제자가 마술을 부려 누각이나 혹은 집을 만들어 놓으니, 모두 불꽃이 넓고 크게 한껏 타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용맹스럽고 능력이 있어서 저 누각 안의 불구덩이 속에서 멈추어 쉴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이에 그 육신을 허물고 다치기에 이르러 단지 고달픔만 더없이 생겨날 뿐 끝내 능히 이루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그러하고 그러하다.’
묘길상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정진(精進)의 갑옷을 입고 유정들을 교화하여 제도한다면, 역시 이와 같이 단지 더없이 고달플 뿐 끝내 능히 얻는 바가 없습니다.’”
이 경전에서는 또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너는 반드시 이 어떤 법을 부풀려 말하는지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펴야 한다.’
묘길상이 말했다.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있는 그대로 살피는 것 안에는 한 성품도 없으며, 여러 가지의 성품을 가히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종류도 없고 분별도 없는 가운데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핀다면 곧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바로 이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피지 않는 것을 부풀려 말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만약에 이미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피는 일을 이루었다면, 이 안에서 나는 범부라느니 나는 성인이라느니 하는 견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관찰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법에 범부와 성인이라는 견해를 세우지 않는다면, 바로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피는 일의 성취를 얻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에 선남자와 선여인이 능히 이와 같이 머무른다면 바로 법계(法界)와 상응할 수 없습니다.
이 안에는 사소한 법조차 없어서 혹은 평등이든 혹은 차별이든 가히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에,
설령 범부의 법은 차별이 있다고 해도 분별을 낳음이 아니며,
설령 성인의 법은 평등하다고 해도 분별을 낳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대상을 가히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마음의 대상 안에서 혹시 평등이나 차별을 붙잡아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은 곧 분별이지만, 이 분별의 성품은 전혀 있는 바가 없습니다.
만약에 저들 마음의 대상 안에 평등이나 차별이 있어서 가히 붙잡을 수 있다면, 곧 나의 법이니 그의 법이니 하여 이에 차별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하니, 결정코 가히 붙잡을 수 있는 법이란 없습니다.’”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말하였다.
“‘무엇이 병의 근본이 됩니까?’
‘이끌리어 연(緣)하는 것이 바로 병의 근본이 됩니다.
만약에 이끌리어 연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 병이 있습니다.’
‘무엇에 이끌리어 연합니까?’
‘삼계(三界)입니다.’
‘만약에 이끌리어 연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어디에 드러나겠습니까?
만약에 이끌리어 연하는 것을 붙잡을 수 없다면, 곧 얻을 것도 없습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두 가지를 보되, 얻을 것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두 가지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안을 보는 것과 밖을 보는 것을 말하니, 저들은 얻을 것이 없습니다.’”
이 경전에서는 다시 말한다.
“애견(愛見)보살이 말했다.
‘색(色)과 공(空)을 두 가지라고 하니, 색이 곧 공이며 색이 멸한 것이 공은 아닙니다.
색의 성품은 스스로 공합니다.
이와 같이 나아가 식(識)도 곧 공하되 식이 멸한 것이 공은 아닙니다. 식의 성품은 스스로 공합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온(蘊)을 만약에 모두 안다면 이것을 불이(不二)의 법문(法門)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말하였다.
“사리자가 수보리존자에게 말했다.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능히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자존자시여,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색(色)도 행하지 않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행하지 않으며,
색의 모양 있음도 행하지 않고,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의 모양 있음도 행하지 않으며,
색의 항상함도 아니고 항상함이 없음도 아닌 것,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닌 것, 나도 아니고 내가 없음도 아닌 것, 고요함도 아니고 움직임도 아닌 것,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닌 것,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닌 것, 바람[願]도 아니고 바람 없음도 아닌 것, 여읨도 아니고 여읨 없음이 아닌 것도 행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나아가 식(識)의 항상함이 아닌 것과 항상함이 없음도 아닌 것과 나아가 여읨도 아니고 여읨 없음이 아닌 것도 행하지 않습니다.
다섯 가지 온(蘊)은 이와 같이, 있는 바의 계처(界處)에 연하여 생겨나는 것과 보리분법(菩提分法)과 신통바라밀다력(神通波羅蜜多力)과 무외무애해(無畏無碍解)와 불공불법(不共佛法) 등과 나아가 여읨도 아니고 여읨 없음도 아닌 것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리자존자시여, 색과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은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며,
나아가 식(識)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식과 다르지 않으며, 식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식이며,
이와 같이 하여 계처에 연하여 생겨나는 것과 나아가 불공불법(不共佛法)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불공불법과 다르지 않으며, 불공불법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불공불법입니다.
보살마하살이 만약에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다면 이것은 곧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을 능히 아는 것이기 때문에,
저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대하여 역시
≺나는 행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나는 행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역시 행하기도 하고 역시 행하지 않기도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행함도 아니고 행하지 않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품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반야바라밀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전에서는 다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시가(礬尸迦)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반야바라밀다를 널리 설할 때 혹시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어 말함이 있는데,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어 말하는 것이겠느냐?
말하자면, 만약에 색(色)은 항상됨이 없으며 괴로우며 내가 없으며 청정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이와 같이 하여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 계처(界處)와 선정(禪定)과 무량무색정(無量無色定)과 염처(念處)와 정근(正勤)과 신족(神足)과 근력(根力)과 각도성제(覺道聖諦)와 무소외무애해(無所畏無碍解)와 불공불법(不共佛法)과 나아가 일체상지(一切相智)에 이르기까지, 항상됨이 없고 고통스럽고 내가 없고 청정하지 않다고
만약에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거나 이러한 말을 지어낸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어 말한다고 한다.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어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하자면, 만약에 설하여 말하되,
≺선남자여, 그대가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색(色)은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지 말 것이며, 색은 고통스럽고 내가 없고 청정하지 않다≻고 관찰하지 말 것이며,
나아가 일체상지(一切相智)도 역시 다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색의 자성은 공(空)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색의 자성이 공이라면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만약에 반야바라밀다 안에 언제나 가히 붙잡을 수 있는 색이 없다면 저 색은 이와 같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시 혹은 항상됨이든 혹은 항상됨이 없음이든 가히 붙잡을 수 있겠느냐? 수ㆍ상ㆍ행ㆍ식과 나아가 일체상지도 역시 이와 같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어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만약에 설하여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가 반야바라밀다를 닦을 때는 가히 넘어가야만 하는 법이 있다≻고도 하지 말 것이며,
≺가히 평안히 머물러야만 하는 법이 있다≻고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다는 일체 법 안에서 있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이 넘어가지도 않고 머무르는 바도 없다면 곧 일체 법의 자성은 한결같이 공하며,
만약에 법의 자성이 공하면 곧 법은 성품이 없으며,
만약에 법이 성품이 없으면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이 반야바라밀다 안에는 혹시 나오거나 혹시 들어가거나 혹시 생겨나거나 혹시 멸하는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설하면 곧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어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다는 얻은 바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며, 얻은 바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에 법이 둘이 있으면 얻은 바가 있고 만약에 법이 둘이 없으면 얻은 바가 없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둘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눈과 색(色)을 둘이라 하고 의식(意識)과 법을 둘이라 하고, 나아가 보리법(菩提法)과 불법(佛法)을 둘이라 한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얻은 바가 있음이 얻은 바가 없음입니까, 얻은 바가 없음이 얻은 바가 없음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저 얻은 바가 있음은 얻은 바가 없음이 아니며, 역시 저 얻은 바가 없음도 얻은 바가 없음이 아니다.
수보리야, 설령 얻은 바가 있든 설령 얻은 바가 없든 한결같이 평등하다.
이것을 바로 얻은 바가 없다고 한다.’
또다시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승의제(勝義諦) 안에 머무르지도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보를 깨닫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전도(顚倒)된 법 안에 머무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만약에 승의제 안에 머무르지도 않고 또한 전도된 법 안에 머무르지도 않고 정각을 이룬다면,
여래께서는 어떻게 보리의 과보를 증득하지 못하심이 아닙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나는 보리의 과보를 증득하였다.
그러나 함이 있는 세계든 함이 없는 세계든 한결같이 머무르는 바가 없다.’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나는 성품 없는 가운데 성품 없음을 가지고 능히 정각을 이룰 수는 없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성품 있는 가운데 성품 없음을 가지고 능히 정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만약에 성품 없는 가운데 성품 없음으로써 능히 정각을 이룰 수는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또한 수보리야, 나는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多經)』 안에서 이미 너에게 일러 말했다.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떤지 말해 보거라. 여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느냐,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의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제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알기로는, 여래께서는 어떤 법이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이 없으시며, 마찬가지로 여래께서는 어떤 법도 가히 설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령 여래께서 설하신 바의 법이 있더라도 그것은 가히 붙잡을 수도 없고 가히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현인과 성인들은 한결같이 함이 없는 법으로써 차별을 두시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는 단지 유정들을 교화하여 제도하시기 위한 까닭에 훌륭한 방편으로써 여러 가지 문을 여시어 이와 같이 심히 깊고 바른 법을 펼쳐 설하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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