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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6권
3.3. 버림의 마음을 성취함(2)
[보시의 과보]
[문] 보시의 과보를 말해라 하리라.
어떤 것이 보시의 과보인가?
[답] 간략하게 말하자면,
보시에는 한 가지 과보가 있는데, 이른바 받아 씀[受用]이다.
또 두 가지의 과보가 있는데,
이른바 현재에 받는 과보이며, 미래에 받는 과보이다.
또 세 가지 과보가 있는데,
곧 이 두 가지에 다시 반야(般若)를 더한다.
또 네 가지 과보가 있는데,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과보는 있으나 받아씀이 없으며,
둘째 받아씀은 있으나 과보가 없으며,
셋째 과보도 있고 받아씀도 있으며,
넷째 과보도 없고 받아씀도 없는 것이다.
과보는 있으나 받아씀이 없다 함은
지극하지 않은 마음으로 보시하고 자기 손수 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한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보시하였으면 비록 한량없는 가지가지의 과보를 받는다손 치더라도 받아쓸 수는 없다.
마치 사위(舍衛)의 천자가 비록 한량없는 갖가지의 값진 보배를 얻었다손 치더라도 받아쓸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받아씀은 있으나 과보가 없다 함은
자신이 보시하지는 않았으나 남이 행하는 보시를 보고서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비록 받아쓸 수는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과보가 없다.
마치 천자의 물건을 온갖 사문과 바라문 등이 비록 옷과 밥을 얻으며 받아쓴다 하더라도 자신은 과보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전륜성왕의 네 가지 병사들이 비록 옷과 밥을 얻는다 하더라도 과보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과보도 있고 받아씀도 있다 함은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하지 않은 것이니, 마치 수제가(樹提伽)의 여러 장자들과 같다.
과보도 없고 받아씀도 없다 함은 보시한 뒤에 그대로 곧 없어져 다하였거나 혹은 세간을 뛰어난 성인의 도(道)로 막혔기 때문이니, 마치 번뇌를 멀리 여읜 성인과 같다.
또, 다섯 가지의 과보가 있다.
목숨[命]을 얻음과 빛깔[色]과 힘[力]과 즐거움[樂]과 변재[辯才] 등이다.
마치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음식으로 인하여 목숨을 얻나니, 그러므로 음식을 베풀면 곧 이는 목숨을 베푸는 것이며 이 인연으로써 뒤에 긴 목숨을 얻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빛깔을 베풀고 힘을 베풀고 즐거움을 베풀고 변재를 베푸는 것 등이니, 모두가 역시 그와 같으니라”고 하심과 같다.
또 다섯 가지의 훌륭한 과보가 있나니,
이른바 아버지ㆍ어머니ㆍ병든 사람ㆍ법사(法師)ㆍ보살에게 베풀어 주면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
부모를 은혜롭게 봉양하면 몸과 목숨을 생장하게 하나니, 그러므로 보시한 이는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
또 병든 사람이라 함은 외롭고 불쌍한 이이니, 이런 이치 때문에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병든 사람에게 보시하면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
또 법을 말씀하는 이는 법신(法身)을 내고 법신을 더욱 자라게 할 수 있으며, 착함ㆍ나쁨ㆍ공평하고 바름, 공평하고 바르지 아니함, 뒤바뀜ㆍ뒤바뀌지 아니한 것 등을 보이며 인도하나니, 그러므로 보시하면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
또, 모든 보살들은 모두가 중생을 껴잡고 이롭게 할 수 있고 마음을 유쾌하게 하고 인연이 없이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며, 3보를 껴잡아서 끊이지 않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니, 이 이치 때문에 보살에게 보시하면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
또 다섯 가지 과보가 있나니, 곧 현재의 몸으로 얻는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 인자함의 삼매[慈三昧]에 들어감이며,
둘째 다툼 없는 삼매[無諍三昧]에 들어감이며,
셋째 생각 끊은 선정[滅盡定]에 들어감이며,
넷째 도를 봄[見道]이며, 다섯째 아라한의 과위이다.
만약 보시하는 이면 곧 과보를 얻는다.
큰 인자한 정[大慈定]에 들어간다 함은
마음을 내어 한량없는 중생에게 편안하고 고요한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며 한량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인자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 인자한 마음으로써 제 바탕을 다스리고 닦으면 그 때문에 처음 인자한 마음의 삼매가 일어나나니, 곧 보시하는 이는 현재에 과보를 얻는다.
또 다툼 없는 삼매에 들어간다 함은
일체 중생의 모든 번뇌의 마음을 다 막고 보호하며 널리 중생을 껴잡고 이롭게 할 수 있으므로 제 바탕을 다스리고 닦으면 그 때문에 처음 다툼 없는 삼매가 일어나나니, 곧 보시하는 이는 현재에 과보를 얻는다.
또 생각 끊은 선정에 들어간다 함은 곧 한량없는 공덕을 껴잡고 한량없는 공덕을 취득할 수 있으므로 제 바탕을 다스리고 닦으면 이 삼매는 열반과 흡사하여 그 때문에 처음 생각 끊은 삼매가 일어나니, 곧 보시하는 이는 현재에 과보를 얻는다.
또 도를 본다 함은
견도위(見道位)의 번뇌를 여의고 거룩한 도의 힘으로써 제 바탕을 다스리고 닦으면 이 이치 때문에 처음 도를 보게 되나니, 곧 보시하는 이는 현재에 과보를 얻는다.
또 아라한의 과위라 함은
수도위(修道位)의 온갖 번뇌를 멀리 여의고 마음에 자재함을 얻으면 그 때문에 처음 아라한의 과위가 생기나니, 곧 보시하는 이는 현재에 과보를 얻는다.
또 보살마하살의 보시 과보는 무진의수다라에서와 그 밖의 온갖 수다라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나니, 그런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보시를 수행하되 다른 사람의 보시보다 훌륭하며, 자신이 취득할 즐거움을 여의고 다른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기 때문에 보시를 행한다.
[보시의 공덕]
또 간략하게 말하면,
보살은 두 가지의 법을 구하기 때문에 보시를 행한다.
첫째는 큰 부자의 자량을 구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보살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나니,
‘내가 만약 많은 자량이 없다면 비록 보시할 마음이 있다손 치더라도 재물을 보시할 수 없으리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어 자량을 성취하고 큰 부자로서 중생들에게 베풀어 주려 한다.
이런 보시에 의하기 때문에 원수와 친한 이를 평등하게 껴잡아서 이롭게 하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보시에 의하여 한량없는 복덕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원수를 껴잡을 수 있으며,
둘째 항상 일체 중생에게 옷과 밥 등의 물건을 주어 구제하며,
셋째 마음에 겁을 내지 않으며,
넷째 다른 친한 이가 속이지 않으며,
다섯째 언제나 뭇 사람들에게 공경함과 믿음과 존중함을 받으며,
여섯째 온갖 권속이 그의 말을 믿고 받으며,
일곱째 대중에 들어갈 때에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며,
여덟째 온갖 원수와 적이 상해할 수 없으며,
아홉째 친척들이 기뻐하며,
열째 과보로써 나타나는 자량은 항상 존재하여 비지 않는다.
열한째 언제나 다른 이를 위하여 구하며,
열둘째 할 일을 다 마쳤으며,
열셋째 뜻에서 사랑하고 공경하는 이들이 언제나 저절로 에워싸며,
열넷째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다 멀리 여의며,
열다섯째 세간과 출세간의 이익되는 훌륭한 일을 모두 성취하고 언제나 온갖 친척들에게 경하함을 받으며,
열여섯째 만약 온갖 친한 이들을 이롭게 함이 없으면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열일곱째 온갖 악행으로부터 지키며, 열여덟째 스스로가 모든 선법 중에 편안히 머무르게 하며, 열아홉째 다른 이의 신통을 보고서 마음에 기뻐하거나 숭상하지 않으며,
스무째 항상 온갖 공덕을 찬탄한다.
스물한째 모든 허물을 숨기고 감춰주며,
스물둘째 온갖 장부 아닌 몸매를 버리며,
스물셋째 온갖 대장부의 몸매를 성취하며,
스물넷째 가난하고 하천한 걸인들이 보시하는 이의 눈치를 봄이 없으며,
스물다섯째 온갖 구하는 것이 마음에 맞고 일이 만족하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보시에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는 것으로 깊이 보고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려하고, 스스로가 이와 같은 힘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에 믿고 기뻐하면서 보시하며, 믿고 기뻐함에 의하여 보시를 행하기 때문에 곧 보시바라밀을 만족시킬 수 있다.
[마음과 복밭과 보시의 과보]
[문] 훌륭한 마음으로부터 깨끗한 보시의 과보를 성취하게 되는가?
훌륭한 복밭으로부터 깨끗한 보시와 과보를 성취하게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훌륭한 마음으로부터 깨끗한 보시의 과보를 성취한다.
왜 그러한가?
보시하는 일은 하나로 나타나 보이지만 과보는 차별되기 때문이니, 마치 종자와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마치 종자와 땅 등은 하나이지만 종자에 의하여 훌륭한 열매가 있음을 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보시한 물건은 바로 하나이면서 훌륭한 마음에 의하나니, 축생 따위에게 보시하는 데 이르기까지 마음의 힘 때문에 인간ㆍ천상의 과보와 전륜성왕ㆍ성문ㆍ벽지불ㆍ부처님 보리 등의 과보를 얻는다”고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훌륭한 마음에 의하여 훌륭한 과보를 얻나니, 그러므로 훌륭한 마음이 더 중한 것인 줄 알 수 있다.
이는 또 무슨 뜻인가?
만약 보시하는 일이 중하므로 보시하는 일에 의하여 깨끗한 보시의 과보를 성취한다면, 중한 보시하는 일을 여의고서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축생에게 베풀어 주고 복밭에 베풀어 주기를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과 같이 하더라도 으레 깨끗한 보시의 과보가 성취되지 않아야 한다.
또, 만약 유쾌하고 훌륭하고 존중하는 마음 등을 여의고서 여래에게 보시하면, 당연히 깨끗한 보시의 과보가 성취되어야 하겠지만 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이치 때문에 깨끗한 보시의 과보를 성취하는 것은 마음이 보다 뛰어난 원인이 되며, 보시하는 일과 복밭은 훌륭한 마음을 낼 수가 있다.
이런 이치에 의하여, 여래께서는 경전에서 복밭을 찬탄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훌륭한 복밭에 의하고 중하게 보시하는 일에 의하여 청정한 과보가 성취된다.
왜 그러한가?
복밭인 줄 모르고서 보시하여도 훌륭한 과보를 얻는다 함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부처님 등의 공덕과 복밭을 모르면서도 부처님 등에게 보시하면 훌륭한 보시를 얻나니, 마치 원숭이가 여래께 꿀과 바사타가시가(婆私咤加尸迦) 등을 보시하는 것과 같으며,
또 여인이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여러 번기와 일산ㆍ꽃다발 등을 본래 마음에서는 실은 아이의 탑에 공양하려 하였는데,
실은 벽지불의 탑에 공양하고서 이는 아이의 탑이라고 하지만 벽지불로부터 한량없는 복을 얻은 것이며, 본래 마음먹은 아이의 주변에서 복을 얻은 것은 아님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이런 이치 때문에 훌륭한 복밭과 중한 일로부터 훌륭한 과보를 얻는 것이며, 마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 그 때문에 복밭과 보시하는 일이 중한 것인 줄 알겠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복밭인지 복이 없는 밭의 일인지를 모르고서는 깨끗한 보시의 과보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다.
마치 어떤 한 사람이 니건자(尼乾子)에게 보시하면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낸다면 깨끗한 과보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마음은 복밭과 보시하는 일 등의 세 가지가 화합한다”라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보시할 이면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보시할 마음을 일으켜 복밭 등의 한량없는 공덕을 알고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복밭을 만나며 때로는 여래의 제자를 만나기도 한다.
존중하는 마음으로부터 보시할 마음이 일어나므로, 베풀 수 있는 것의 물건과 버리기 어려운 일이라도 능히 버리어 보시하나니, 세 가지가 화합하여야 비로소 깨끗한 과보(果報)가 성취할 수 있지만 마음이 더 중한 것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서 오직 마음의 한 가지만이 더 중하고 훌륭하다.
[버리는 이와 베푸는 이의 차별]
[문] 이 버리는 이[捨主]와 베푸는 이[施主]를 묻겠다.
버리는 이와 베푸는 이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어떤 구걸하는 이가 남의 물건을 가져다 보시하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자기 물건을 가져다 보시하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빌 적에 자기 물건을 가져다 보시하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만약 사람이 마음을 내어 귀중물을 구하면 입으로는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알고서 곧 보시하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또, 물건을 보시할 적에 아까운 마음이 자주자주 중간에 간간히 일어나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만약 아까운 마음이 자주자주 일어남이 없으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또, 비록 다른 이에게 물건을 보시하였다 하더라도 아까운 마음 때문에 스스로 과보를 구하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만약 다른 이에게 물건을 보시하고서도 아까운 마음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과보를 구하지 아니하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또, 기뻐하는 등의 마음을 여의고서 보시를 행하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같이 기뻐하는 마음으로 세 때 동안에 뉘우치는 마음이 없이 보시하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또, 미래의 훌륭한 과보를 구하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세간의 과보를 여의고 열반의 과보를 구하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또, 만약에 보시하면서 현재와 미래와 열반의 과보를 구한다면 이는 베푸는 이이며,
만약 마음을 내어 큰 보리의 결과를 구하면서 오직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에게 베풀어 주면 이는 버리는 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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