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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12권
변차별품 ④
6.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6.1. 불상응행법이란 무엇인가?
무색법 중의 심과 심소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불상응행이란
득(得)과 비득(非得)과 동분(同分)과
무상과(無想果)와 두 가지 정(定)과 명(命)과
상(相)과 명신(名身) 등의 종류이다.1)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등’이라고 함은 구신(句身)과 문신(文身) 그리고 화합성(和合性)을 동등하게 취[等取]한다는 말이며, ‘종류[類]’라고 함은 그 밖의 생각해 보아야 할 법으로 바로 앞의 종류를 나타내니, 이를테면 ‘득’ 등을 떠나 온(蘊)과 관계하는 ‘득’ 등의 법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2)
이와 같은 온갖 법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심불상응행’이라 이름한 것으로, 심소처럼 마음과 동일한 소의와 소연을 함께 함으로써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심(心)’이라는 말을 설한 것은, 여기서 설한 ‘득’ 등은 바로 이러한 마음과 관계하는 종류[心種類]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소의와 소연이 모두 마음의 그것과 동일한 모든 심소법 역시 마음과 관계하는 종류이므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불상응’이라고 말하였다. 나아가 온갖 무위법 역시 마음과 관계하는 종류이지만 소의와 소연을 갖지 않기 때문에 역시 ‘불상응’이므로 이와 구별하기 위해 다시 ‘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6.2. 득(得)과 비득(非得)
1) 총설(總說)
이상 전체적으로 개괄하였으니, 다시 마땅히 개별적으로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먼저 득(得)과 비득(非得)의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3)
게송으로 말하겠다.
득(得)이란 말하자면 획득[獲]과 성취이며
비득은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이니
득과 비득은 오로지
자상속(自相續)과 두 가지 멸(滅)에 대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득(得)과 획득[獲, prātilambha]과 성취(成就, samanvāgama)는, 그 뜻은 비록 동일하지만 관점[門]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적인 명칭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즉 득(得)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찍이 얻지 못한 것과 일찍이 이미 얻은 것의 [‘득’이] 바로 그것으로, 일찍이 얻지 못한 것의 ‘득’을 설하여 ‘획득’이라 하고, 일찍이 이미 얻은 것의 ‘득’을 설하여 ‘성취’라고 한다.4)
그리고 비득(非得)은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얻지 못한 것과 얻고서 상실하는 것의 [비득이] 바로 그것으로, 아직 얻지 못한 것의 비득을 설하여 ‘불획(不獲)’이라 하고, 이미 상실한 것의 비득을 설하여 ‘불성취’라고 한다. 그래서 이생성(異生性)을 설하여 ‘성법(聖法)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5)
어떠한 법에 득과 비득이 존재하는 것인가?
먼저 유위법 중에서는 자신의 상속[自相續]에 대해서만 득과 비득이 존재하며, 타인의 상속이나 상속하지 않는 것[非相續, 무정물을 말함]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니, 만약 온(蘊)이 자신의 상속 중에 떨어져 존재하는 경우라면 [그것에 대한] 성취와 불성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며, 타인의 상속 중에 존재하는 온이나 무정물[非情]에 존재하는 온에 대해서는 필시 성취와 불성취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6)
그리고 무위법 중에서는 오로지 두 가지 멸(滅, 택멸과 비택멸)에 대해서만 득과 비득이 존재한다. 즉 일체 유정으로서 비택멸을 성취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래서 대법(對法) 중에서 “누가 무루법(곧 비택멸무위)을 성취하는가? 이를테면 일체의 유정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 또한 초 찰나에 든 구박(具縛)의 성자(聖者)와 그 밖의 번뇌에 속박된 일체의 이생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유정은 다 택멸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8) 그렇지만 결정코 허공을 성취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허공에 대해서는 ‘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불성취하는 일도 없으니, 비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법에 득이 존재한다면 비득 역시 존재해야 할 것이며, 만약 어떤 법에 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득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득’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색온과 행온은 하나의 득에 의해 획득되며, 그 밖의 다른 온(수온 내지 식온)과 행온도 역시 이와 같다고 설한다. 유루와 무루는 하나의 득에 의해 획득되며, 유위와 무위도 하나의 득에 의해 획득된다”--을 설하게 된 것이니,9) 이와 같은 따위의 존재에 대해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1) 경주(經主)의 종자설(種子說)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어떠한 근거에서 ‘득’이라고 이름하는 개별적 실체[別法]가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10)
그의 말에 대해 마땅히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고 답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선법이나 불선법을 성취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만약 “경에서는 ‘전륜왕(轉輪王)은 7보(寶)를 성취하는 일이 있다’고 설하였으므로 [여기(‘득’을 개별적인 실체로 여기는 것)에는] 커다란 과실이 있다”고 한다면,11)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전륜왕이 7보에 대해 자재 무애한 것을 ‘성취’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12) 만약 “다른 경에서 설한 ‘성취’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13) 이 또한 그렇지 않으니, 현재에 존재하는 자[現在者]는 오로지 현재의 것에 대해서만 자재력을 가지며, 과거나 미래의 것에 대해서는 자재력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륜왕도 현재의 7보에 대해서만 자재력을 갖지만, 그것은 [뜻에 따라 수용하는] 증상과(增上果)이기 때문에, 항상 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바에 따라 생겨나므로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법이나 불선법의 경우는 결정되어 있지 않으니, 바야흐로 선법과 같은 것은 그것이 현재전할 때만 보특가라가 현재의 선법을 성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ㆍ미래의 선법이나 불선법에 대해서도 마땅히 다시 진술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가 [그것에 대한] 현재의 ‘득’을 갖지 않았다면, 어떠한 별도의 법에 의해 자재(自在)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불선이 현전하여 선을 배척할 때도 역시 그러하거늘(선에 대한 자재를 성취할 수 없거늘) 하물며 [경량부처럼] 과거ㆍ미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無體]고 주장하는 경우 무엇에 대한 자재를 설하여 ‘성취’라고 이름할 것인가?
만약 “미래법을 능히 낳을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을 일컬어 ‘성취’라 한다”고 말한다면, 이치는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럴 경우 마땅히 애호(愛護)하지 않는 것도 [‘성취’라고 해야 하는] 과실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이생도 최후의 존재[最後有, 윤회의 마지막 단계의 존재]에서 결정적으로 무루를 낳을 것이라면 마땅히 성자라고 해야 할 것이며, 모든 아라한도 최후의 마음에서 결정적으로 무루를 다시 낳을 수 없게 된다면 마땅히 아라한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며-- 바로 물러나 이생을 성취하여 세속에 머문다고 해야 할 것이며--, 인위(忍位)에서도 견소단(見所斷)의 번뇌가 필시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예류과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14)
또한 만약 ‘득’이라 이름하는 개별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할 경우, 여기에 무슨 비리(非理)가 있을 것인가?(중현의 반문)
이와 같은 비리가 있다. 이를테면 [그대들이] 주장하는 득은 색(色)ㆍ성(聲) 따위나 탐(貪)ㆍ진(瞋) 따위처럼 실체(體, svabhava, 그 자체 자성을 지닌 존재)로서 알려지는 일이 없으며, 안(眼)ㆍ이(耳) 따위처럼 그 작용이 알려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득’이라 이름하는 개별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즉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리인 것이다.(세친)
이는 결정코 그렇지 않으니, 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인정하는 ‘득’은 이미 획득한 법을 상실하지 않게 하는 근거[不失因]이기 때문이며, 이것(所得法)이 저것(能得法)에 계속(繫屬)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지식의 징표[幖幟]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 다시 이를 능가할 만한 어떤 크나큰 별도의 작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것을 비존재[無]라고 말하는 것인가?(중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슨 필요에서 이러한 ‘득’을 주장할 것인가? 오로지 소의신 중에 어떤 법의 종자가 미발(未拔)ㆍ미손(未損)ㆍ증장(增長) 자재(自在)함이 있을 때,15) 이러한 상태에 대해 ‘성취’라는 말을 설정한 것일 뿐이니, 이에 따라 이미 획득한 제법을 상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 역시 이것이 저것에 계속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지식의 징표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또한 어떠한가? 바야흐로 선법(善法)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공력(功力)이나 수습(修習)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며, 둘째는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를 곧 생득선(生得善, 선천적으로 획득된 선)과 가행득선(加行得善, 후천적 노력에 의해 획득된 선)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공력이나 수습에 의하지 않고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 중의 [선법의] 종자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성취’라고 하고, 만약 소의신 중의 [선법의] 종자가 이미 손상된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불성취’라고 한다. 말하자면 선근을 끊은 자가 사견(邪見)의 힘에 의해 소의신 중의 선근종자를 손상시킨 것을 ‘단(斷)’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소의신 중의 선근종자가 완전히[畢竟] 손상되었을 때를 일컬어 ‘단’이라 한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6) 또한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 중에 그러한 법(선법종자)이 이미 일어나 그것(가행득선)[의 현행]을 낳는 공력이 자재하여 손상됨이 없으면 이것을 설하여 ‘성취’라고 이름하며,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불성취’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불선법이나 무기법의 경우 대치도(對治道)에 의해 그 종자가 끊어지거나 혹은 그 공력이 현행을 낳는 일이 없는 것을 ‘불성취’라고 이름하며, 이와 서로 반대되는 것을 ‘성취’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그대들이] 주장하는 ‘득’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17)(이상 세친의 해명)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전도된 주장은 다만 허언(虛言)일 뿐 실제적인 뜻이 없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어떠한 법을 일컬어 종자(種子, bīja)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명(名)과 색(色)이 자신의 결과를 낳을 때 갖는 전전(展轉)과 인근(隣近)의 공능(功能)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종자)은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에 따른 것이다.18)
‘명’과 ‘색’이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5온을 말한다.
어떻게 이것을 종자의 존재[種子性]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능히 선 등의 제법을 낳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능히 제법을 낳는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보편적 원인[總]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개별적인 특수한 원인[別]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서의 존재[自種類]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대가 주장하는 바는 오로지 이 중의 하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보편적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종자 자체는 마땅히 가설적 존재[仮]여야 할 것으로,19) 가설적인 존재가 실제적 원인이 된다는 것은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만약 이것이 개별적인 특수한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무기(無記)인 색의 종자가 선ㆍ불선과 같은 제법의 생인(生因)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 자체로서의 존재라고 한다면, 선법과 무간에 불선법이 생겨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될 것이니, 이 경우 무엇을 종자로 삼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20)(중현의 비판)
천애(天愛, 어리석은 이를 일컫는 호칭)여, 그대는 종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전 찰나의 마음과 함께 생겨난 사(思, 의지)의 차별로 인해 후 찰나 마음의 공능이 [전 찰나의 마음과] 차별되어 일어나니, 바로 후 찰나 마음에 생겨난 공능의 차별을 ‘종자’라고 설한 것이다. 즉 이러한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로 말미암아 미래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으로, 여기서의 뜻을 설하면 다음과 같다. 즉 불선심 중에는 선에 의해 인기(引起)된 전전(展轉)과 인근(隣近)이라는 공능의 차별이 존재하니, 이를 종자로 삼아 이로부터 무간에 선법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며, 혹은 선심 중에는 불선에 의해 인기된 전전과 인근이라는 공능의 차별이 존재하니, 이를 종자로 삼아 이로부터 무간에 불선법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세친의 해명)
지금 그대가 주장하는 공능의 차별로서의 종자와 그러한 선ㆍ불선심은 각기 개별적인 실체[別體]라고 해야 할 것인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어찌 선심이 불선심의 종자가 되고 불선심이 선심의 종자가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양식 있는 자[有心者]라면 그 누가 뜨거움[煖]과 불[火]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시금 ‘오로지 뜨거움만이 능히 태우고 불은 능히 태울 수 없다’고 말할 것인가? 어떻게 나락가(那落迦, 지옥) 등의 온갖 이숙과를 능히 초래할 불선심 중에 애호(愛護)할 만한 이숙과를 능히 초래하는 선한 의지[善思]의 차별에 의해 인기된 공능차별의 종자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어떻게 말노사(末奴沙, manuśya, 인간을 말함) 등의 온갖 이숙과를 초래할 청정한 선심 중에 참으로 애호할 수 없는 이숙과를 능히 초래하는 악한 의지[惡思]의 차별에 의해 인기된 공능차별의 종자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곧 모든 불선심 중에는 애호할 만한 온갖 이숙과를 초래할 만한 공능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청정한 선심 중에는 참으로 애호할 수 없는 온갖 이숙과를 초래할 만한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선ㆍ불선의] 두 가지 법이 [애호할 만하고 애호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숙과를 능히 초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사실은 바로 제불(諸佛) 세존께서 획득한 10력(力) 중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을 비방하는 것이다.21)
또한 [경주(經主)는] 마땅히 의지[思]의 차별에 의해 인기되는 공능차별의 종자와 마음을 동일한 결과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무루의 마음 중에도 역시 유루의 공능차별이 존재해야 하며, 그런 즉 무루의 마음도 역시 능히 3유(有)의 과보를 초래해야 한다. 또한 무루의 마음 중에도 역시 번뇌의 종자를 설정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무루의 마음도 역시 능히 번뇌의 생인이 되어야 한다. 혹은 성자의 소의신 중의 수소단의 혹(惑)은 마땅히 종자 없이 저절로 생겨나야 할 것이다. 또한 번뇌심 중에도 역시 무루의 종자를 설정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번뇌심도 역시 능히 무루의 생인이 되어야 한다. 혹은 성자의 소의신 중에 번뇌심 뒤에 일어나는 무루의 마음은 마땅히 종자 없이 생겨나야 할 것이며, 혹은 그 때를 마땅히 첫 찰나의 무루심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퇴법성(退法性)의 아라한은 [아라한과로부터] 물러나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22) 아라한인 무학(無學)의 마음 중에도 마땅히 3계의 번뇌종자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라한이] 번뇌를 일으켜 물러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뒤(제67권~69권)에서 응당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
또한 다른 종류의 법성(法性)으로 차별이 있다고 하면서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경우를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따라서 그(經主 세친)가 주장하는 바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23)
또한 전 찰나에 일어난 사(思)의 차별과 후 찰나의 공능차별의 마음은 어떻게 인과적 관계가 성립하며,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 하겠는가?
여기에 무슨 의심이 있을 것인가? 인과란 원래 그러한 것[法爾]으로, 요컨대 전 찰나에 ‘사’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바야흐로 후 찰나에 마음의 공능차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만약 전 찰나에 ‘사’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후 찰나에 마음의 공능차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전찰나의 ‘사’와 현행의 마음)는 인과적 관계를 지닐 수 있으며,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세친)
만약 ‘사’가 존재할 때 [마음의 차별공능이] 조금이라도 일어났다면 이러한 뜻(인과적 관계와 상응관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가 존재할 때에는 어떠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경량부에 의하면] 미래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 찰나의 ‘사’와 후 찰나의 마음은 [각기]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아 병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양자는] 인과적 관계이며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과거ㆍ미래를 분별하면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24)
그런데 그는 “소의신 중의 선근종자가 완전히[畢竟] 해손(害損, 손상)되었을 때를 일컬어 ‘단(斷)’이라 한 것이 아니다”고 설하고 있는데,25) 어떠한 이유에서 다만 [‘단’을] 완전한 해손이 아니라고 말한 것인가? 이 경우 다만 ‘완전히 해손되지 않는다[畢竟不害]’고 말해야 할 것이니, [그러한 상태에서는] 본래의 선근종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6) 또한 그가 설한 바는 계경에도 위배되니, 계경에서는 ‘완전한 끊어짐[畢竟斷]’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존께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선법이 은몰(隱沒)하고 악법이 출현하였다”고 설하였다. 이는 곧 수구행(隨俱行)의 선근으로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선근으로부터 그 밖의 다른 선근이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선근)도 그 후에 모두 끊어졌다면, 미세하고 저열한 선근을 포함하여 일체의 선근이 다 끊어진 것인데, 어찌하여 완전한 해손[畢竟害]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따라서 그는 다만 자신이 분별하고 조작한 도깨비에 홀려 이 같은 말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생득]선의 종자가 만약 사견에 의해 그 공용(작용)이 해손되어 싹을 낳지 못하게 되었다면, 설혹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기에 다시 무슨 공용이 있을 것인가? [그것에는 더 이상] 능히 선근의 싹을 낳을 수 있는 공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견의 힘이 능히 그러한 선근의 싹을 낳는 공용을 해손시키지 못하였다면, 이는 마땅히 ‘선근을 끊었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능히 선근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 중에 그러한 법(선법종자)이 이미 일어나 그것(가행득선)[의 현행]을 낳는 공력이 자재하여 손상됨이 없으면 이것을 설하여 ‘성취’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지만,27)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그의 종의에는 이러한 선근의 생기에 관한 뜻도 없는데 하물며 소의신 중에 그러한 법이 이미 일어나 그것(가행득선)[의 현행]을 낳는 공력이 자재하여 손상됨이 없다고 하는 뜻이 있을 것인가? 즉 앞서 그의 종의에서는 미래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미래 어떤 것에 대해 자재력을 가질 것인가? 즉 그것의 생인(즉 가행득선의 종자)은 이치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그 밖의 불생(不生)의 원인에 대해서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미 생인이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그것을 낳는 공력이 자재하여 손상됨이 없는 것을 [성취라고 이름한다]’고 설할 것인가?
이에 따라 ‘번뇌의 끊어짐’에 관한 그의 분별에 대해 이미 비판하였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치 종자가 불에 타 전변하여 그 이전과는 달라짐으로써 능히 싹을 틔울 만한 작용이 없어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의 소의신 중에 번뇌를 낳을 능력[生惑能]이 없어진 것을 번뇌의 ‘단(斷)’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세간도(世間道)로써 소의신 중의 번뇌종자를 손상시키는 것도 역시 ‘단’이라 이름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번뇌종자를 손상시키지 않은 것)을 일컬어 ‘미단’이라고 한다.”28)
이제 여기서 마땅히 이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루도로써 온갖 번뇌를 끊는 것과 세간도로써 온갖 번뇌를 끊는 것에 어떠한 차별이 있다는 것인가? 그것들은 모두 종자가 불에 타 싹을 틔울 만한 작용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종자가 지극히 손상된 것은 아니지만 싹 등을 영원히 틔울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세간도로써 번뇌종자를 손상시키는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해야 하거늘 오히려 이전처럼 능히 제행(諸行)이라는 결과를 낳으며 아울러 능히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종자가 손상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종자가 손상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싹을 낳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능히 싹을 낳을 수 있는 것이라면 ‘손상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속도에 의해 번뇌[惑]를 끊는 것도 역시 그러하여 만약 번뇌의 종자를 손상시켰다면 응당 마땅히 능히 [번뇌를] 낳을 수 없을 것이며, 그 후 이미 [번뇌를] 능히 낳았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손상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손상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끊어졌다[斷]’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한 찰나의 마음[一心] 중에 능히 끊는 것[能斷, 즉 대치도]과 끊어지는 것[所斷, 즉 번뇌]는 이치상 함께 존재하지 않기에 ‘끊어진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그가 말한 “명(名)과 색(色)이 자신의 결과를 낳을 때 갖는 전전(展轉)과 인근(隣近)의 공능(功能)을 일컬어 종자라고 한다”는 사실은 이치상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종자)은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에 따른 것이다. 무엇을 ‘전변’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상속 중에 전후의 성질을 달리함이다. 무엇을 ‘상속’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인과성인 삼세의 제행(諸行)이다. 무엇을 ‘차별’이라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무간(無間)에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공능을 갖는 것이다.”29)
이와 같이 구수(具壽)가 설한 일체의 주장들은 뜻을 달리하고, 말을 달리하며, 그것의 종지[首] 또한 다르다.30) 즉 비유자(譬喩者)는 어떠한 경우라도 상속 중에 전후 성질을 달리하는 일도 없고, 인과성인 삼세의 제행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무간에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공능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뒤에서 응당 분별하는 바와 같다.31)
곧 그들은 대법(對法, 아비달마)의 종의를 싫어하고 배척함으로써 성교(聖敎)에 대해 온갖 허물과 오류를 일으키고 있으니, 이를테면 ‘득’에 대해 비방하는 것도 성교에 대해 일으킨 이치에 어긋나는 수많은 허물과 오류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득’에 대해 실유를 인정하는 경우 성교에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경주(經主)는 이 점에 대해 비록 자신의 주장에 따라 설한 바가 많지만 성립할 만한 것이 없으니, 그가 주장한 종자는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으로, 종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하는 ‘득’은 이미 획득한 법을 상실하지 않게 하는 근거[不失因]이기 때문에, 또한 이것(所得法)은 바로 그것(能得法)에 계속(繫屬)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지식의 징표이기 때문에 결정코 작용을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작용을 갖는다는 사실이 이미 성취되었으니,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정하는 ‘득’의 본질과 작용은 지극히 잘 성취되는 것이다.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이 논의하는 종처(宗處)에 대해 여러 비유자(譬喩者)들은 대부분 자신들만의 주장인 제법(諸法)의 종자(種子)를 설하여 [성교의] 정의(正義)를 미혹 교란시켜 불분명하게 하였다. 또한 [비유부의] 여러 논사들은 이러한 종자에 대해 곳곳에서 그 의미에 따른 별도의 명칭을 설정하기도 하였으니, 혹 어떤 이는 ‘수계(隨界)’라 이름하였고, 혹 어떤 이는 ‘훈습(熏習)’이라 이름하였으며, 혹 어떤 이는 ‘공능(功能)’, 혹 어떤 이는 ‘부실(不失)’, 혹 어떤 이는 ‘증장(增長)’이라 이름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널리 결택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꺾고 올바른 종의를 정립하였던 것이다.
2) ‘득’의 제문분별
이와 같이 득과 비득의 자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이것의 차별되는 뜻에 대해 널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득’의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삼세법에는 각기 세 가지 득이 있으며
선법 등에는 오로지 선 등의 득이 있고
유계(有繫)에는 자계(自界)의 득이 있으며
무계(無繫)의 득은 네 가지와 통한다.
비학비무학법에는 세 가지 득이 있으며
비소단법에는 두 종류의 득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삼세법(三世法)의 득에는 각기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과거의 법에는 과거의 득이 있으며, 현재의 득이 있으며, 미래의 득이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와 현재법에도 각기 세 가지 종류의 득이 있다. 이는 즉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이같이 설한 것으로, 그 차별에 대해서는 바로 뒤(다음 본송)에서 마땅히 다시 분별하게 될 것이다.32)
또한 선법 등의 득은 오로지 선 등이니, 이를테면 선과 불선과 무기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선ㆍ불선ㆍ무기의 세 가지 득이 있는 것이다.33)
또한 유계법(有繫法, 3계에 繫屬되는 유루법)에는 오로지 자계(自界)의 득만이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오로지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세 가지 득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계법(無繫法, 3계에 계속되지 않는 무루법)의 득이라면 네 가지 종류와 통한다. 즉 계속(繫屬)되지 않는 법(즉 무루법)의 전체적인 종류로 말한다면 네 가지 종류의 득을 갖추고 있으니, 3계의 계(繫)와 불계의 득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해 본다면, 비택멸의 득은 3계계(界繫)와 통하지만, 그러나 만약 택멸의 득일 경우 색ㆍ무색계의 계(繫)와 불계(不繫)이고, 그것에 이르는 도제(道諦)의 득은 오로지 불계일 뿐이다.34)
또한 유학법(有學法)의 득은 오로지 유학이며, 무학법(無學法)의 득은 오로지 무학일 뿐이다. 따라서 유학과 무학법의 득에는 각기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학비무학법(非學非無學法)의 득에는 모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하여 보면, 5취온 전부(즉 일체의 유루)와 세 가지 무위법의 득을 모두 비학비무학법이라고 이름하니, 바야흐로 5취온과 비택멸과 그리고 성도에 의해 증득된 것이 아닌 택멸은 오로지 비학비무학의 득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유학도에 의해 증득된 택멸의 득이라면, 그것은 오로지 유학일 뿐이며, 만약 무학도에 의해 증득된 택멸의 득이라면 오로지 무학일 뿐이다.
또한 견(見)ㆍ수소단(修所斷)의 법에는 그 순서대로 견소단과 수소단의 득이 있으며, 비소단법(非所斷法)의 득에는 모두 두 가지가 있다. 이를 다시 개별적으로 분별해 보면, 온갖 무루법을 비소단이라고 이름하니, 만약 비택멸의 득과 성도에 의해 증득된 것이 아닌 택멸의 득이라면 오로지 수소단 한 가지 종류일 뿐이며, 만약 성도에 의해 증득된 택멸과, 도성제(道聖諦)의 득이라면 오로지 비소단 한 가지 종류일 뿐이다.
3) 삼세의 제법과 삼세의 ‘득’
앞에서 삼세법에는 각기 세 가지의 득이 있다고 말하였다. 모든 유위법이 다 결정코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부무기의 득은 [본법(本法)과] 구기하지만
두 가지의 신통과 변화심은 제외된다.
유부무기색의 경우도 역시 구기하며
욕계색의 경우에는 앞서 일어나는 일이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부무기법(無覆無記法)의 득은 오로지 [생겨나는 본법과] 구기(俱起)할 뿐 앞이나 뒤에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35)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무기무기법의 득은 모두가 다 결정코 그러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떠한가?
천안통(天眼通)과 천이통(天耳通), 그리고 능히 변화하는 마음[能變化心]을 제외하니, 이를테면 천안ㆍ천이통의 혜(慧)와, 능히 변화하는 마음은 그 세력이 강성하기 때문에,36) 가행의 차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비록 무부무기의 성질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앞(즉 法前得)과 뒤(즉 法後得), 그리고 동시에 생기하는 득(즉 法俱得)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위의로(威儀路)의 네 가지 온의 득은 대개 삼세단(三世斷)이고 찰나단(刹那斷)이지만, 오로지 모든 부처님과 마승필추(馬勝苾芻)와, 그리고 그 밖의 선한 위의로를 수습한 자는 제외된다. 혹은 공교처(工巧處)의 네 가지 온의 득 역시 대개 삼세단이고 찰나단이지만, 오로지 비습박갈마천신(毘濕縛羯磨天神)이나 그 밖의 선한 공교처를 수습한 자는 제외된다.37)
오로지 무부무기법의 득만이 [생겨나는 본법과] 구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유부무기색(有覆無記色)의 득도 역시 그러하니,38) 이를테면 오로지 색계 초정려의 염오한 신ㆍ어표업의 득만은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만 [생겨나는 본법과] 구기(俱起)할 뿐이다. 비록 상품의 염오함(번뇌심)에 의해 일어난 것일지라도 역시 능히 무표를 낳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세력이 미약하다. 이에 따라 본법(즉 생겨나는 법)보다 앞에, 혹은 뒤에 생겨나는 득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계의 온갖 색에도 역시 오로지 [본법과] 구기(俱起)하는 득 만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이를테면 욕계계(繫)로서 선ㆍ불선인 색의 득에는 본법보다 앞에 일어나는 것이 없으며, 오로지 함께 일어나거나 뒤에 일어나는 득만이 존재할 뿐이다.39)
4) 비득(非得)의 제문분별
이와 같이 ‘득’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렇다면 비득(非得)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비득은 정(淨)의 무기로서
과거ㆍ미래세에 각기 세 가지가 있다.
3계의 계(繫)와 불계의 법에도 세 가지가 있으며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異生性)이라고 이름함을 인정하며
법을 획득하고, 지(地)를 바꿈으로써 비득을 버리게 된다.40)
논하여 말하겠다.
3성(性)의 차별에 대해 말해보면, 일체의 비득은 모두 오로지 무부무기성에 포섭된다.41)
3세의 차별에 대해 말해보면, 과거와 미래법에만 각기 세 가지 종류의 비득이 존재한다. 즉 과거의 법과 미래의 법에는 각기 3세의 비득이 존재하며, 현재의 법에는 오로지 과거와 미래의 비득이 존재할 뿐 결정코 현재의 비득이 존재하는 일이 없으니, 현재의 법은 불성취(즉 비득)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42) 어떤 이도 말하기를, “현재법에 현재의 비득은 존재하지 않으니, 자성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계(界)의 차별에 대해 말해보면, 3계계(界繫)의 법과 불계(不繫)의 법에는 각기 세 가지의 비득이 존재한다. 즉 욕계계의 법에는 3계에서의 비득이 존재하며,43) 색계ㆍ무색계의 계(繫)와 불계의 법에도 역시 그러하다.44)
결정코 비득으로서 무루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성도(聖道)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異生性)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니, 본론(本論)에서 “무엇을 일컬어 이생성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45) 여기서 ‘획득하지 않는 것[不獲]’이란 바로 비득의 다른 명칭으로, 무루법을 어찌 이생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1) 방론-이생성(異生性)에 관한 경주(經主)설 비판
그렇다면 어떠한 성법을 획득하지 않아야 이생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일체의 성법을 모두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46) 아니면 오로지 고법지인(苦法智忍, 견도의 첫 번째 果位) 만을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일체의 성법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 이생 아닌 자가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일체의 성법을 모두 성취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47)
만약 ‘획득하지 않음[不獲]’만 존재하고, ‘획득한 것[獲]’이 조금이라도 섞여있지 않다면, 이것은 바로 이생성일 것이며, 만약 ‘획득한 것’이 섞여있다면 이생성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48) 따라서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본론(本論)에서는 마땅히 ‘순전히[純]’라고 하는 말을 설했어야 할 것이다.49)
반드시 그 말을 설할 필요는 없으니, ‘[성법이] 섞여있다[雜]’는 말에도 그러한 뜻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으로, 이러한 유형의 말은 ‘물을 먹고 바람을 먹는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50) 즉 여기에 비록 ‘순전히’라는 말이 없을지라도 그것들은 순전히 물과 바람만을 먹으며, 거기에 다른 어떤 것도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고법지인을 획득하지 않은 것을 [이생성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후(集法智忍 내지 道類智를 획득할 때)에 이를 버릴지라도 다시 이생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니, 앞(고법지인을 획득할 때)서 이미 그것의 비득을 영원히 해손(害損)시켰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대해 경주(經主)는 다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아직 성법을 낳지 않은 상속(相續)의 상태[分位]를 차별하여 이생성이라 이름한다.”51)
어떠한 이유에서 경주는 다시 이 같은 말을 설하게 된 것인가?
말하자면 이생성은 어떠한 경우라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어떤 상속의 상태인가?
말하자면 안(眼) 이(耳) 등이 상속하는 상태이다.
어찌 [아직 성법을 낳지 않은] 일 찰나의 안 등의 상태는 이생성이 아니라고 하면서 안 등의 상속을 바야흐로 이생성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일 찰나를 ‘상속’이라 말할 수 없으니, 찰나는 실제가 아닌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로지 말의 모순이나 의미상의 과실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계경에도 어긋나는 허물이 있으니,52) 세존께서 설하기를 “이와 같은 이를 일컬어 수신행자(隨信行者)라고 하는데, 그들은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 때 이생의 경지를 초월한다”고 하였다.53) 여기서 이생의 경지란 바로 이생성을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계경에 어긋남을] 알게 된 것인가?
이를테면 획득[得]과 버림[捨]을 설하였기 때문이니,54) 그 때 일찍이 획득한 안근 등 제법 중 어떠한 법도 버리지 않았지만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성법을 획득하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성자가 견도위에 있을 때라도 안 등 일체의 품류를 성취하니, 그것들은 모두 이전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결여되거나 감소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만약 이생성이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계경의 뜻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그럴 경우 초월할 만한 (혹은 버려야 할 만한) 별도의 이생의 경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악취가 바로 이생의 경지이다”고 한다면, 인위(忍位)를 획득하고 나면 마땅히 이생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55) 또한 만약 “안 등은 아직 성법을 획득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법을 떠나있기 때문에 그것(안 등의 제법)에 근거하여 이생이라는 개념[名想]을 일시 설정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생성은 견도에 들 때 그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계경에서] ‘이생의 경지를 초월한다’고 설하였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그 때 안 등의 제법은 본래대로 수축(隨逐, 상속)한다고 하면서 안 등을 초월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 안 등을 초월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 때는 안 등에 존재하는 번뇌의 끊어짐[結斷]을 모두 증득하였기에 비록 안 등을 성취할지라도 ‘초월하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같은 상태(즉 이생위) 중에서는 본래대로 구박(具縛, 9품에 걸친 일체의 번뇌)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에 앞의 비유와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만약 “아직 욕탐을 떠나지 못한 성자도 악취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것(악취)에 대해서는 이미 비택멸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56) 즉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성자라도 그것(악취로 나아가는 업)을 짓지 않고 그것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행하지 않으므로 [악취를] ‘초월하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여기서 논의하는] 견도위에서는 어떠한 안(眼) 등을 초월하였다는 것인가?
만약 “마땅히 항아리 등의 사물[物]과는 다른 항아리 등의 본성[性]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항아리 등을 깨트리는 것을 떠나 항아리 등의 본성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견도의] 무루심이 일어날 때에는 안 등은 본래대로 [상속]하지만 이생성을 버리기 때문에 그 같은 예증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이]생성 등의 예증에 대해 이미 비판하였다.
만약 “바라문 등의 본성은 어찌 그렇지 않은 것인가?”라고 말한다면,57) 이는 그가 성자와 이생의 결정적인 차별을 관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성자와 이생은 각기 [악업을] 짓지 않고 지으며, [악취로] 나아가지 않고 나아가는 등의 결정적인 차별이 일부 존재하지만, 지혜(智慧)나 공교(工巧, 기예)ㆍ제지(制止)ㆍ감능(堪能)에는 결정코 어떠한 차별도 없다. 바라문 등은 온갖 종류의 본성 중 오로지 한 가지에 대해서만 능력을 가지며, 그 밖의 것은 능히 짓지 못한다. 이에 근거하여 바라문 등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중국(中國)과 주변국[邊國] 등에 따라 일부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역시 관찰하였을지라도 별도의 본성을 갖는 것이 아니니, 차별의 근거로서 중동분(衆同分)이라는 별도의 법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58)
성법을 바로 성성(聖性)이라고 설하며, 이러한 존재[性]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성자’라고 이름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생법을 마땅히 이생성이라고 해야 하며, 이러한 존재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어찌 이와 같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다. 즉 온갖 성법은 오로지 성자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에 성법을 설하여 성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이생법은 성자에게도 역시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이생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생법이 오로지 이생에게만 존재하고, 모든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생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생법인] 악취와 무상정(無想定)과 북구로주(北俱盧州) 등은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생성이 아니며, 그 밖의 명근 등도 비록 이생에게 두루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오로지 이생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이생성이 아니다. 또한 오로지 이생에게만 존재하고 모든 이생에게 두루 상속하며, 성도와는 어긋나게 획득되는 것이 바로 이생성이다. 또는 어떤 법으로서 온갖 이생을 위한 소의신의 생기의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이생성이다.
어찌 업과 번뇌가 온갖 이생을 위한 소의신의 생기의 원인이 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이생성을 [소의신의 생기원인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러한 책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지금 바로 보건대 어떤 법은 그 밖의 다른 원인에 근거해야 비로소 능히 다른 법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업과 번뇌에 의해 생겨난 안(眼) 등은 4대종을 떠나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59) 따라서 오로지 이생성이라 이름하는 별도의 법이 있어 이것을 초월하였기 때문에 [계경에서] ‘이생의 경지를 초월하였다’고 말한 것이니, 요컨대 이같이 해석할 때 비로소 세존께서 설하신 계경에 담긴 크나큰 취지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방론(傍論)에 대해서는 이미 마쳤으니, 이제 다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비득은 어느 때 응당 버리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법의 비득은 이러한 법을 획득할 때, 혹은 지(地)를 바꾸게 될 때, 이러한 비득을 버리게 된다.60) 즉 성법(聖法)의 비득을 설하여 이생성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성법을 획득할 때 3계 [성법]의 비득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무루심(즉 고법지인)에 머무는 자는 고법지(苦法智)에서, 나아가 내지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에 머무는 자는 아라한[과]에 대해 존재하는 비득을,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이러한 법을 획득함에 따라 이러한 법의 비득을 버리게 된다.61)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내지 아라한과로서 시해탈자(時解脫者)는 아라한으로서 불시해탈자에 대해 존재하는 비득을, 이러한 법(불시해탈)을 획득할 때 이러한 법의 비득을 버리게 된다.62) 그 밖의 법의 비득에 대해서도 이에 유추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이러한 비득을 버린다고 함인가?
만약 비득의 ‘득’이 끊어지면 비득의 비득이 생겨나니,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비득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득과 비득에는 각기 여타의 또 다른 득과 비득이 있을지라도 무한소급[無窮]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즉 득의 세력에 의해 본법(本法)과 득의 득[得得]이 성취되며, 득의 득의 세력에 의해 본법과 함께 생기는 득이 성취되는 것이니, 어찌 무한소급에 빠질 것인가?63) 비득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득의 비득은 비득과 필시 함께 생기하지 않는다. 또한 하지로부터 상지에 태어날 때 하지의 비득 일체를 모두 버리게 되며, 상지로부터 하지에 태어날 때에도 이에 유추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소의(所依)의 힘에 의해 비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6.3. 동분(同分)
이와 같이 득과 비득의 상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동분(同分)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동분이란 유정의 동등함이다.64)
논하여 말하겠다.
또 다른 개별적 실체[別實物]가 존재하니, 이름하여 동분(同分)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온갖 유정이 존재로서의 동등함[類等]을 갖고 전전(展轉)하는 것을 말하는데, 본론(本論)에서는 이를 중동분(衆同分)이라고 이름하였다.65) 즉 동일한 취(趣)에서 동등하게 태어난 온갖 유정은 동일한 신체적 형태와 제근(諸根)의 작용을 소유하며, 나아가 먹고 마시는 것 등이 서로 유사한데, 이러한 유사성의 근거와, 아울러 그들이 전전하면서 서로 욕락(欲樂)하는 근거를 중동분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선명한 정색(淨色)이나 업ㆍ마음ㆍ대종과 같은 것도 모두 바로 그러한 [유사성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신체적 형태 따위는 오로지 업만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신체의 형태를 지금 바로 보건대, 이것은 서로 유사한 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이니, 제근의 작용이나 먹고 마시는 것 등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66) 그러나 만약 ‘만업(滿業)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도 차별이 있다’고 한다면,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을 것이니, 어떤 [유정의] 신체적 형태는 오로지 서로 유사한 인업(引業)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중동분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업용(業用) 등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67) 그런데 만약 신체적 형태 따위가 오로지 업의 과보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욕락하는 바에 따라 업용 등의 일을 혹은 버리기도 하고, 혹은 행하기도 하므로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을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68)
여기서 신체적 형태나 업용, 욕락은 서로 유사하게 전전하기 때문에 ‘동(同)’이라고 일컬은 것이며, ‘분’이란 바로 근거[因]의 뜻이다. 즉 어떤 개별적인 실체가 존재하여 바로 이러한 동등함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동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은 동분을 오로지 온갖 유정에 근거하여 설하였을 뿐 초목 등에 근거하여 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이것은 천(天)의 동분이며, 이것은 인간의 동분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온갖 유정의 형색이 서로간에 유사하다고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界, 3계)ㆍ취(趣, 5취)ㆍ생(生, 4생)ㆍ처(處, 4종성)ㆍ신(身, 남여 등의 신체) 등의 차별에 근거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유정동분이 존재한다.69) 또한 법의 동분도 존재하니, 이를테면 온(蘊)ㆍ처(處)ㆍ계(界)에 수반되는 것을 말한다.70)
나아가 이생의 동분은 정성이생(正性離生, 견도위를 말함)에 들 때 버려지고, 유정의 동분은 열반에 들 때 버려진다.
(1) 경주(經主)의 동분 비판에 대한 해명
그렇다면 어찌 이생성을 바로 이생의 동분이라고 하지 않겠는가?71)
이는 응당 그렇지가 않으니, 작용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생의 신체의 형태라든지 업용, 욕락이 상호간에 서로 유사한 근거를 일컬어 ‘동분’이라 하였으며, 성도(聖道)의 성취와 상위(相違)하는 것으로서 이생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이생성’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중동분의 경우 정성이생에 들 때 역시 버려지고 역시 획득되지만(이생의 동분은 버려지고 성자의 동분은 획득됨), 이생성의 경우 버려지기만 할 뿐 더 이상 획득되지 않는 것이다.
동분은 색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용이 있어 능히 무차별의 현상[事類, 즉 유정의 동류상사성]를 낳는다고 하니,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72)
그 같은 [동류상사성이라는] 결과가 관찰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함을 아는 것으로, 이를테면 현재 업에 의해 획득된 결과를 보고서 전생에 일찍이 지었던 업이 존재함을 아는 것과 같다. 또한 관행자(觀行者)는 지금 바로 깨달아[現證]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비유정[無情]의 동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73)
마땅히 이와 같이 힐책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럴 경우 커다란 과실을 범하기 때문이다. 그대 역시 인간이나 천(天) 등의 취(趣)나 태생(胎生)이나 난생(卵生) 등의 생은 존재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어찌하여 암라수(菴羅樹) 등의 취나 녹두 등의 생은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불세존께서는 일찍이 [비유정의 동분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세존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유정에 대해서만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풀 따위에 대해서는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았는지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어떻게 이와 같은 동분이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함을 아는 것인가? 하면, 우리는 바야흐로 이에 대해 이와 같이 해석한다. 즉 그러한 풀 따위는 어떠한 경우라도 전전(展轉)하는 업용이나 욕락이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별도의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풀 따위는 필시 유정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에 오로지 유정에 대해서만 동분이 존재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선행된 업과 현재의 근용(勤勇)에 의해 이러한 법은 능히 생겨날 수 있지만, 그 같은 풀 따위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으니, 그래서 동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실유[實物]의 동분이 존재함을 깨달아 아는 것이다.
또한 목소칠주화(木素漆雕畵) 등의 상(像)과 그것의 진짜 형상 사이에는 비록 각각에 전전하는 색채나 형태의 상호 유사함이 있을지라도 한가지만을 실물(實物)이라고 말하지 오로지 그것들 사이의 상호 유사함만을 보고서 이것이 바로 실물이라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상호 유사하게 차별되는 존재에 대해 비로소 ‘실물’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실로 이 같은 차별의 법(즉 유차별동분)이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곧 이러한 ‘실물’이라고 하는 말은 이 같은 법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초목 등에 동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어떻게 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신체의 형태를 지금 바로 보건대, 이것은 서로 유사한 업에 의해 낳아진 결과이니, 제근의 작용이나 먹고 마시는 것 등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온갖 동분은 전전(展轉)하며 차별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동분)에 대한 또 다른 동분 없이 [다른 동분과] 차별이 없다는 인식[覺]과 시설(施設)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인가?74)
온갖 동분은 바로 동류(同類) 현상의 근거가 되는 존재[因性]이기 때문이다. 즉 동분은 동류로 전전하여 서로 유사한 인식과 시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眼)과 이(耳) 등은 대종과 소조색에 의해 비로소 색의 성질을 성취한다. 그러나 대종은 비록 그 밖의 다른 대종에 의해 조작되는 일이 없을지라도 색의 성질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땅히 승론(勝論)이 주장하는 총동구의(總同句義)와 동이구의(同異句義)를 드러내어 성취하게 될 것이다.75)
만약 승론이 주장한 이러한 두 가지 구의가, 그 본질이 단일하지 않으며, 찰나 멸하는 무상한 것이며, 소의지(所依止)가 없으며, 전전하며 차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설혹 그것과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역시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76) 그러나 승론에서는 안 등의 근이 능히 색 등을 행해(行解)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뿐더러 불교도[釋子]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견해를 버리고 달리 해석하라고 한다.
따라서 그(경주 세친)가 논란하였던 바는 바로 그들 패거리의 말일 뿐으로, 정리(正理)를 구하는 이라면 마땅히 채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6.4. 무상과(無想果)
이미 동분에 대해 분별하였다.
무상(無想)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상(無想)이란 무상천(天) 중에서
심ㆍ심소법이 소멸한 것으로
이숙과이며, 광과천(廣果天)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색계 제4선의 제3천인 광과천) 중에 태어나면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니, 이것을 일컬어 무상(無想)이라고 한다. 이것은 실유의 존재[實有物] 즉 실체로서 능히 미래의 심ㆍ심소법을 차단하여 잠시 생기하지 않게 하니, 마치 강물을 막는 방죽과도 같다.
이러한 법은 한결같이 바로 무상정(無想定)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異熟果)이다. 즉 그러한 무상유정천 중의 무상이나 색은 오로지 바로 이러한 무상정에 의해 초래된 이숙과이지만 이러한 선정은 중동분이나 명근(命根)을 능히 인기(引起)할 수 없다. 중동분이나 명근은 오로지 유심(有心)의 제4정려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이며, 그 곳에서의 그 밖의 나머지 온도 바로 같은 이숙과이다.
그리고 무상유정천 중에 태어나더라도 무상에 들기 전과 무상에서 나온 후는 다시(多時)에 걸쳐 유심(有心)이지만, [그 중간의] 무심의 상태가 지극히 길기 때문에 무상천이라고 총칭하게 된 것이다.77)
그렇다면 무상의 유정은 어떠한 처소에 거주하는 것인가?
광과천(廣果天)에 거주한다. 이를테면 광과천 중에는 중간정려의 그것처럼 높고 뛰어난 곳[高勝處]이 있으니, 이것을 무상천이라고 이름한 것이다.78) 그들(무상천의 유정)은 숙업(宿業)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임지식(任持食, 무상과를 지녀 지속하게 하는 힘)으로 삼는다. 즉 숙업에 의해 중동분이나 명근 등을 인기하는 것으로, 속생(續生)의 마음과, 무간에 무상과로 들어가는 마음이 견인(牽引)하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에도 역시 과거의 촉 등은 존재하여 임지식이 된다. 다시 말해 무심의 상태 중에서는 오로지 과거의 촉 등이 존재하여 식(食)이 되지만, 현재의 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심의 상태 중에서는 두 종류가 함께 존재한다.
나아가 그곳의 온갖 유정은 상(想)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곳에서 몰(歿)하게 되며, 이미 몰하였으면 결정코 욕계에 태어나지 그 밖의 다른 처소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찍이 [욕계에서] 닦은 정행(定行, 즉 무상정)에 의해 초래된 수명의 양이 그 세력을 다하였기 때문이며, 그곳(무상천)에서는 능히 다시 선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허공으로 발사된 화살은 그 힘이 다하면 바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만약 온갖 유정으로서 마땅히 그 곳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욕계의 순후수업(順後受業)을 지녀야 하니, 이는 마치 그러한 북구로주(北俱盧洲)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하늘(즉 6欲天)에 태어나는 업을 지녀야 하는 것과 같다.79)
6.5. 무상정(無想定)
무상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두 가지 정(定)이란 무엇인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무상정의 경우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마찬가지인 무상정은
최후의 정려로서,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며
선이며, 오로지 순생수업(順生受業)이며
성자의 것이 아니며, 일세(一世)의 그것만을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하였듯이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무상(無想)이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별도의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일컬어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한다. 즉 [본송에서]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오로지 심과 심소를 소멸하는 이러한 선정이 무상[과]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성취하여 갖춘 것[成辦]이기 때문에,80) 혹은 지극히 잘 성취하여 갖춘 것이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유여사는 설하기를, “참답고 평등하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마음이 대종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상자(無想者)의 선정이기 때문에 ‘무상정’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선정이 무상(無想)이기에 ‘무상정’이라 이름하였으니,81) 상(想)을 염괴(厭壞)함에 따라 이러한 선정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생은 수(受)에 대해서는 능히 염괴하지 않으니, ‘수’에 탐착함으로써 이러한 선정에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상정은 어떠한 지(地)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최후의 정려 즉 제4정려에 존재하는 것으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82)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본송에서]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선정은 능히 무상의 이숙과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무상정의 이숙과인] 무상의 유정이 광과천에 거주한다고 설하였으니, 응당 광과천이 최후의 정려에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면 어찌 다른 지에서 그 원인(즉 무상정)을 닦는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일찍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어떤 곳에서도 무상정이 무상과의 원인이 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앞의 본송에서 ‘무상이란 이숙과이다’고 어찌 설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것을 해석하면서도 무상정의 결과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일찍이 어떤 본송에서도 이와 같은 설(무상정이 무상과의 이숙인이라는 설)을 지은 적이 없으므로 지금 설하여 바로 성취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선정을 이생의 선정[異生定]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해탈을 추구하여 이러한 선정을 닦고자 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무상(無想)이 바로 참된 해탈이라고 주장하고, 무상정을 출리도(出離道)라고 주장하여 무상을 증득하기 위해 이러한 선정을 닦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성자는 이 같은 유루에 집착하여 그것을 참된 해탈이나 참된 출리도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선정을 ‘이생의 선정[異生定]’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무상[과]는 바로 이숙과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기성에 포섭된다는 사실은 논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무상정은 한결같이 선이다.
이것은 바로 이숙인이기 때문에, 선성(善性)에 포섭된다는 사실을 설하지 않더라도 어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무상유정천(광과천의 무상과)에 대해 원인이 되어 능히 오온의 이숙을 초래하는 것이다.83)
그렇지가 않으니, 본송 중에서는 [이것이 바로 무상유정천의 이숙인이라는 사실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염오무기를 누가 다시 능히 부정할 것인가?8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본송)서 마땅히 ‘순전히 선[純善]’이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으니, 말을 떠나 뜻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으로, 이것은 마땅히 앞에서 설한 이생성에 준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85) 혹은 오로지 선이라고만 말하면, 이미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정이 이미 이숙인이라고 하였으니, [그 과보는] 어떠한 수(受)에 따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언제 그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오로지 순생수(順生受)일 뿐으로, 순현수(順現受)나 순후수(順後受), 순부정수(順不定受)가 아니다.86) 그런데 어떤 부류의 여러 논사들은 이러한 선정에 대해 주장하기를, “이치상으로 볼 때 순생수와 부정수이다”고 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선정을 성취하는 자도 역시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서는 반드시 이러한 선정을 현기(現起)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곧 현행에 근거하여 무상정을 이생의 선정이라고 말한 것이지 [이숙과를] 성취하는 것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87)
또한 이러한 선정은 바로 이러한 법(이생법)과 외도의 법에 통하는 것으로, 이생에 의해 획득되는 것일 뿐 성자가 획득하려는 바가 아니니, 모든 성자들은 무상정을 마치 깊은 구덩이[深坑]와 같다고 보아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송 중에서 이미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선정이 오로지 이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다시 ‘성자의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성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처음으로 획득할 때에는 [3세 중] 몇 세(世)의 그것을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88)
이것은 별해탈계와 마찬가지로 온갖 상태 중에서 찰나 찰나에 걸쳐 개별적으로 획득된다. 즉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제1 찰나[念]에는 과거의 그것을 획득하지 않으며, 무심(無心)이기 때문에 미래의 그것도 닦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으로 무상정을 획득할 때에는 오로지 일세(一世)의 그것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현재의 그것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2 찰나로부터 이후 아직 출정(出定)하기 전까지는 과거의 그것도 역시 성취하며, 이미 출정한 때로부터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은 동안은 오로지 과거의 그것을 성취할 뿐 천안(天眼)이나 천이(天耳)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그것을 닦는 일이 없으니, 오로지 가행득(加行得)일 뿐 이염득(離染得)이 아니기 때문이다.89)
6.6. 멸진정(滅盡定)
다음으로 멸진정(滅盡定)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진정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정주(靜住)를 위한 것이고, 유정(有頂)이고
선이고, 두 가지의 수(受)와 부정수(不定受)이며
성자가 추구하는 바로서, 가행(加行)에 의해 획득된다.
[부처는] 가행이 아니라 성불할 때 획득하니
삼십사 찰나[念]가 걸리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무상정과 마찬가지로 ‘멸진정도 역시 그러하다.’ 즉 제3정려의 탐을 떠난 자에게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법으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무상정’이라고 이름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탐을 떠난 자에게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법으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멸진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의 차별상은 이러하다. 앞의 무상정의 경우 해탈을 구하기 위해 상(想)을 염괴(厭壞)하여 먼저 출리상(出離想)의 작의(作意)를 닦아 증입(證入)을 획득하려는 것이라면, 지금의 멸진정은 정주(靜住, śānta vihāra:마음이 산란을 떠나 고요히 머무는 것)를 구하기 위해 마음의 산란 동요를 염괴하여 먼저 지식상(止息想)의 작의를 닦아 증입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또한 앞의 무상정이 색계 변지(邊地, 즉 제4정려)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멸진정은 무색계의 변지(즉 非想非非想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같이 비상비비상처에 존재하며 생을 받은 소의신은 최상의 업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유정(有頂)이라고도 이름한다. 혹은 가장 끝[邊際]에 존재하기 때문에 유정이라고도 이름하니, 이를테면 나무의 가장 끝을 설하여 나무의 꼭대기, 즉 수정(樹頂)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이러한 경지(즉 비상비비상처)에만 멸진정이 존재한다고 하니, 어떠한 이유에서 하지(下地)에는 이러한 선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일체의 마음을 싫어하여 등지고[厭背], 아울러 가장 끝자리의 마음[邊際心, 여기서는 무소유처의 마음]을 끊어야 비로소 능히 이러한 뛰어난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해탈을 설정한 것이니, 첫째는 일체의 마음을 싫어하여 등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가장 끝자리의 마음을 잠시 끊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하지에 이러한 선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종류의 마음을 싫어하여 등지는 것이 아니니, 아직은 능히 상지의 마음을 싫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가장 끝자리의 마음을 끊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상지의 마음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하지에서의 선정은] 일부의 마음만을 싫어하여 등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며, 역시 또한 마땅히 중간자리[中際]의 마음만을 끊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멸진정은 앞의 선정(무상정)과 마찬가지로 삼성(三性) 중 오로지 선성일 뿐 염오무기가 아니다.90) 즉 모든 성자들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므로 염오무기를 취하여 고요히 머무는 것[寂靜住]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앞의 무상정은 능히 순생수(順生受)이고 아울러 부정수(不定受)였지만, 지금의 멸진정은 순생수ㆍ순후수(順後受), 그리고 부정수 모두와 통한다. 즉 이숙에 근거하여 볼 때 순생수이기도 하고, 혹은 순후수, 혹은 부정수이기도 하며, 혹은 그 과보를 완전히 받지 않는 경우[不受]도 있으니,91) 이를테면 만약 하지(下地)에서 이러한 선정을 일으키고서 상지에 태어나지 않고 바로 반열반하는 경우가 그러하다.92)
또한 이러한 멸진정은 능히 유정지(有頂地)의 네 가지 온의 이숙과만을 초래한다.93)
또한 앞의 무상정은 오로지 이생이 획득하는 바였지만, 이러한 멸진정은 오로지 성자만이 획득하는 것이다. 즉 온갖 이생은 능히 멸진정을 일으킬 수 없으니, 그들에게는 멸진정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는 자신의 경지(地)가 있어 아직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은 아직 유정지의 견소단의 번뇌[惑]를 초월하지 못하였기에 필경 멸진정을 일으킬 만한 공능이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이생은 유정지의 견소단의 혹을 능히 초월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성자만이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모든 이생은 단멸(斷滅)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자는 현법열반(現法涅槃)의 승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오로지 성자만이 획득하는 것일 뿐 모든 이생은 획득하지 못한다”고 하였다.94) 그러나 그의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상정에서도 이와 동일하기 때문이며, 이러 저러한 마음이 끊어지는 것과 열반의 승해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제4정려의 심ㆍ심소는 거칠 뿐더러 여전히 소의신을 갖기 때문에 [마음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상정을 닦는 것은 마음을 멸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즉 해탈을 구하기 위해 출리상(出離想)을 일으켜 무상정을 닦는 것으로, 마음이 소멸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올바른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미 출리상으로 무상정을 닦았다면 역시 마땅히 열반의 승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유여사)의 말은 [이생은 멸진정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의] 올바른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성자는 유정지를 획득할 때 모두 그와 같은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인가, 획득하지 않은 것인가?
마땅히 획득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선정은 이염득(離染得)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멸진정은 무엇에 의해 획득되는 것인가?
가행에 의해 획득된다. 요컨대 가행에 의해 비로소 증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정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증득할 때에는 오로지 현재의 그것만을 획득하고, 과거의 그것은 획득하지 않으며, 미래의 그것도 수득(修得)하지 않으니, 요컨대 심력(心力)에 의하여 비로소 능히 수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 찰나 따위 이후 내지 아직 그것이 버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과거의 그것도 역시 성취한다.95)
그렇다면 세존께서도 역시 가행으로써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획득하게 된 것인가?
성불(成佛)할 때 획득한다. 그런데 그(경주 세친)는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진지(盡智)를 성취할 때 (다시 말해 일체의 번뇌가 이미 다하였음을 알 때) 획득한다”고 하였다.96) 그러나 어찌 성불할 때 진지 역시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하물며 멸진정이 획득된다고 하겠는가? 즉 모든 보살은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에 머물 때 [비로소] 진지를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97) 득(得) 자체가 생겨날 때를 일컬어 ‘획득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불할 때, 진지는 가행에 의해 현재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니, 잠시 욕락이 현재전할 때 일체의 원만한 덕성[圓德]도 그러한 욕락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으로, 불신(佛身) 중에 존재하는 공덕은 성불할 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부처가 진지를 성취할 때 멸진정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보살의 시절에 일체 번뇌의 염오함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불신 중의 공덕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니, 그래서 여래가 갖는 공덕은 모두 이염득(離染得)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에는 역시 과실이 있다. 그를 위해 편의에 따라 두루 해석해 보면, 그것은 이를테면 근사(近事)에 대해 원성(遠聲)을 설한 것이거나 혹은 금강유삼마지에 있을 때 반드시 깨달음[佛]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성불’이라 말한 것으로, 무간의 찰나에 결정코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이 같은 사실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세존께서는 일찍이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진지를 획득할 때 최상의 원만한 구분해탈(俱分解脫)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98)
그것은 선정의 장애[定障, 즉 불염오무지]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며, [멸진정의] 불성취를 버렸기 때문이며, 멸진정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니, 그래서 이미 [멸진정을] 일으킨 자와 마찬가지로 구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99)
그런데 서방사(西方師)는 “보살은 유학위(有學位)에서 먼저 이러한 선정(멸진정)을 일으키고, 그 후에 보리(菩提)를 증득한다”고 말하고 있다.100) 그렇지만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먼저 멸진정을 일으키고, 그 후에 비로소 진지를 낳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 나라의 비바사사는 어떠한 근거에서 [진지를 낳기] 전에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며, 어째서 서방사가 제기한 논거에 대해 책망하지 않는 것인가?
바야흐로 우리 가습미라국에서도 34념(念, 찰나)에 보리를 증득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결정코 먼저 무소유처에서 이탐(離貪)을 획득하고 나서 비로소 견제(見諦, 즉 견도)에 들어가므로 다시 하지의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이 34념에 대(大) 보리를 증득하게 된다. 즉 4제를 현관(現觀)하는데 16념이 걸리며, 유정(有頂)의 탐(즉 수혹)을 떠나는데 18념이 걸리니, 이를테면 유정의 9품(品)의 번뇌를 끊음에 있어 9무간도(無間道)와 9해탈도(解脫道)가 바로 그것이다. 곧 이와 같은 18념에 앞의 16념을 더하여 34념이 되는 것이다.101) 그리고 이 중간에 동류가 아닌 마음[不同類心]을 일으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102) 따라서 앞의 단계(즉 18념을 낳기 전의 단계)에서는 결정코 멸진정을 일으킬 리 없으니, 만약 앞의 단계에서 멸진정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바로 기심(期心)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보살은 결정코 기심을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103)
이치상 실로 보살은 기심을 어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루의 성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10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심(期心)을 어떻게 어기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이를테면 ‘나는 온갖 번뇌의 영원히 다함[永盡]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끝내 이러한 결가부좌를 풀지 않을 것이다’고 하는 이와 같은 기심을 결코 어기지 않고 오로지 한자리에서 모든 일을 다 마쳤기 때문이다.105)
어찌 이러한 사실에 따라 무루의 성도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심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보살은 모든 번뇌를 다하기 위해 일찍이 획득한 적이 없었던 견(見)ㆍ수(修) 2도(道)를 닦아 유정지(有頂地)의 견소단 번뇌의 뿌리를 뽑고, 아울러 유정지의 수혹의 원적(怨敵)을 제거하고자 서원하여 기한을 정해 결가부좌하였음에도 아직 그 일을 다 마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그 중간에 기약하였던 무루의 대치도를 버리고서 무시(無始)이래로 능히 세간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선정을 귀중히 여겨 누구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멸진정을 획득하기 위해 머뭇거렸을 것인가? 이와 같이 말할 때 34념에 보리를 증득한다고 하는 논의는 잘 성취되기 때문에, 앞서 [서방사가 제시한] 논거는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도 “멸진정에서 나올 때 응당 세 가지 촉과 접촉할 것이니, 이를테면 부동촉(不動觸)ㆍ무소유촉(無所有觸)ㆍ무상촉(無相觸)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세 가지 촉과 접촉한다고 함은 무엇이 어떠하다는 말인가?
어떤 이는 설하기를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난 마음과 상응하는 법에는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의 세 가지 촉이 존재하니, 멸진정에서 나올 때 그 순서대로 세 가지 촉과 접촉한다”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식무변처ㆍ공무변처의 마음과 상응하는 촉을 부동촉이라 이름하니, 이 두 가지는 순전히 [무변(無邊)의] 의식과 허공만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처의 마음과 상응하는 촉을 무소유촉이라 이름하니, 앞의 것(의식과 허공)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06) 비상비비상처의 마음과 상응하는 촉을 무상촉이라 이름하니, 유상(有想)과 무상(無想)의 상(相)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으로,107)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4무색정(無色定)을 유상정(有想定)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나는 마음은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하며,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날 때 혹 어떤 경우 차례로 혹은 반대 순서로 온갖 등지(等至)에 들어가기도 하며, 혹 어떤 경우 반대 순서로 초월하여 온갖 등지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와 같이 멸진정에서 일어난 마음은 현재전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서방사의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다].”108)
다시 유여사는 이 같이 설하고 있다. “오로지 무루인 무소유처의 열반을 소연으로 하는 마음에 근거하여 멸진정으로부터 일어날 때를 ‘세 가지 촉과 접촉한다’고 말한 것이니, 무루이기 때문에 부동촉이라 이름하였고, 무소유처의 경지에 포섭되기 때문에 무소유촉이라 이름하였으며, 열반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무상촉이라 이름하였다.”
1) 무상정과 멸진정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비록 두 가지 선정(무상정과 멸진정) 사이에 다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고 이미 논설하였을지라도 여기에는 또 다른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가지 선정은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는 것으로
멸진정은 인취(人趣)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두 가지 선정’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상정과 멸진정을 가리키니, 이 두 가지는 다같이 욕계와 색계 두 곳에 의지하여야 현기(現起)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오로지 아래 세 정려에 있을 때만 무상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제4정려에 있을 때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그래야 원인과 결과가 지극히 인접하여 서로를 핍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제4정려에서도 무상정에 들어갈 수 있지만 무상천은 제외하니, 그 하늘에 태어날 때 그러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말하기를 “오로지 욕계에 있을 때에만 무상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색계에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논(論)의 글귀에 위배되니, 이를테면 본론(本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109) “혹 어떤 이는 바로 색유(色有, 색계의 유정)이면서 이러한 유(有)의 5행(行, 5온을 말함)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전(色纏, 곧 색계)의 유정으로서 혹 어떤 경우 유상천(有想天)에 태어나 동류가 아닌 마음[不同類心]으로 머무르거나, 혹은 무상정에 들었거나, 혹은 멸진정에 들었거나, 혹은 무상천에 태어나서 이미 무상에 든 자가 그러하다.110) 이러한 이들을 바로 색유이면서 이러한 유의 5행이 아닌 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은 다같이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여야 현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을 일러 두 가지 선정의 같은 점[同相]이라고 한다.
두 가지 선정의 다른 점[異相]이란, 이를테면 무상정은 욕계나 색계 모두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멸진정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인취(人趣) 중에서이다. 즉 멸진정은 오로지 인취 중에서만 최초로 닦아 일어날 수 있으니, 오로지 인취 중에만 [그것을] 설하는 자가 있고, 해석하는 자가 있으며, 아울러 강성한 가행력이 있기 때문이다.111) 그리고 인취 중에서 처음으로 닦아 획득하고서 먼저 [그러한 선정에서] 물러남에 따라 바야흐로 색계에 태어나게 되면, 색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그 후 다시 [이러한 선정을] 닦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112) 그러나 무색계에서는 능히 멸진정에 들 수 없으니, 소의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명근(命根)은 반드시 색심(色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데, 만약 무색계에 있으면서 멸진정에 들 경우 색심이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명근은 마땅히 끊어져야 하며, 제온(諸蘊)은 서로 의존하며 전전하고 머물기 때문에 유정으로서 오로지 1온을 갖춘 이도 없어야 한다. 또한 심ㆍ심소법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또한 유정으로서 오로지 3온을 갖춘 이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멸진정에 물러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인가?
『오타이계경(鄔陀夷契經)』 뜻에 준거하였기 때문이니,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수(具壽)여, 여러 필추(불환과를 획득한 비구)들이 있어 이들이 먼저 이러한 처소(욕계를 말함)에서 청정한 시라(尸羅, 戒)를 갖추고, 삼마지(三摩地, 定)를 갖추고, 반라야(般羅若, 慧)를 갖추면 능히 자주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고 날 수 있을 것이니, 이 처소에서는 그럴 수 있음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현법(現法)에 있어서나 혹은 임종의 상태에서 부지런히 닦았더라도 능히 [무학의] 승해(勝解)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이러한 몸이 허물어짐에 따라 단식천(段食天)을 초월하며, 그에 따른 1처(處)인 의성천(意成天)의 몸을 받는데,113) 그 곳에 태어나서도 다시 자주 멸수상정에 들고 나니, 이 처소에서도 역시 그럴 수 있음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의성천의 몸을 부처님께서는 바로 색계라고 설하였으나, 멸수상정은 오로지 유정(有頂)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선정을 획득하여 반드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색계로 가 생을 받을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114)
이와 같이 두 가지 선정의 다른 점에 대해 널리 해석하였다. 여기에는 모두 여섯 가지의 갈래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지(地)ㆍ가행ㆍ상속ㆍ이숙ㆍ순수(順受)ㆍ초기(初起)의 차별이 바로 그것이다.115)
아비달마순정리론 제13권
변차별품 ⑤
(1) 비유논자(譬喩論者)의 멸정유심설(滅定有心說) 비판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멸진정 중에서는 일체의 심ㆍ심소법이 모두 소멸하는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만 말하는 것인가?
그러한 두 가지(즉 수와 상)를 싫어하고 거역[厭逆]하여 이 선정을 낳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수’와 ‘상’은 능히 견애(見愛)와 잡염(雜染)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것에 편중하여 싫어하고 거역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두 가지의 법은 온갖 허물이 많으니, 5온에 대해 논설하는 중에 널리 분별한 바와 같다.1) 따라서 그것에 편중하여 싫어하고 거역할 때 멸진정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온갖 상응법(즉 심소법)으로서 혹은 생기[生], 혹은 소멸[滅], 혹은 획득[得], 혹은 끊어짐[斷] 등과 같은 사태[事]와 동시가 아닌 것이 없다. 그렇지만 설법자(說法者)는 방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門]으로 차별하여 설하였고, 아비달마에서는 오로지 정리(正理)에 근거하여 제법(諸法) 성상(性相)의 의미에 대해 분별하고 온갖 경에서 설한 취지의 권실(權實, 방편과 진실)에 대해 판결하였다. 즉 [경에서] 설한대로이지 결정코 다른 것이 아니라고는 주장하게 하지 않으니, 이에 따라 여러 경의 취지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예컨대 [경에서] ‘이러한 선정에서 식(識)은 소의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였다면, 심소도 역시 마땅히 [소의신을] 떠나지 않는 것임을 응당 알아야 하며, ‘이러한 선정에서는 모든 의행(意行)이 소멸하였다’고 설하였다면, 여기에서는 마음도 역시 마땅히 소멸한 것임을 응당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자 식의 논의[影論]는 다른 경에도 역시 존재하니, ‘모든 부처님의 정등보리(正等菩提)는 모두 불방일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하였지만, 다른 경에서는 다시 아난타에게 고하기를 ‘무상보리(無上菩提)는 정진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 또한 ‘지혜는 능히 번뇌를 해손(害損)시킨다’고 설하고 있지만, 다른 경에서 다시 ‘무상의 관념[無常想]을 닦아 능히 욕탐을 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2)
그런데 비유논자(譬喩論者)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멸진정 중에서는 오로지 ‘수’와 ‘상’만이 소멸하는 것으로, 결정코 무심(無心)의 유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멸진정과 목숨을 마치는 것[命終]은 다르기 때문으로, 경에서 ‘멸진정에 들어가더라도 식은 소의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목숨[壽]과 체온[煖]과 의식[識]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
그러나 이러한 설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일체의 마음은 모두 ‘수’ ‘상’과 함께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교(至敎)가 있어 이 같은 뜻이 성취될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 설하기를 “안(眼)과 색(色)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을 낳으며, 세 가지의 화합인 촉은 수ㆍ상ㆍ사와 함께 일어난다. 나아가 의(意)와 법(法)을 연으로 하여 의식을 낳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으니, 일찍이 제7식(識)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거니와 그러한 식은 수ㆍ상을 떠나 생겨난다고 주장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소의(所依, 즉 마음)가 멸하였기 때문에 능의(能依, 즉 심소) 역시 멸하였으니, 온갖 심소법은 소의 없이 능히 홀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온갖 심ㆍ심소법이 모두 다 멸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여기(앞서 인용한 경설)서 ‘함께[俱]’라고 하는 말은 ‘무간(無間)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만타다왕(曼馱多王)은 악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와 함께[俱時, 동시에] 타락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부정관(不淨觀)은 염각지(念覺支)와 함께[俱] 닦는다’고 한 경우 역시 마땅히 그러한 뜻이다”고 한다면, 이치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만타다왕 등에 대해 계경에서 ‘함께’라고 말한 것은 이치상 실로 무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좋지 못한 업과 좋지 못한 결과는 결정코 마땅히 동시에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 경에서는 제5전(轉)으로 설하였기 때문이니,4) 예컨대 “만타다왕은 악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와 함께 타락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설은 [악심을 일으킨] 후에 비로소 타락하였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관과 각지 경우의 경우도 유루와 무루로서 차별되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안과 색을--)에서의 ‘함께’라고 하는 말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성교(聖敎)와 정리(正理)는 모두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함께’라고 하는 말은 ‘무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함께’라는 말이 ‘무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주장할 경우, 진위부정의 오류[不定過]를 범하게 될 것이니, 계경에서 “낙(樂)과 함께 하고, 희(喜)와 함께 하는 4제 현관(現觀)”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나아가 이를 다시 만타다왕에 대해 설한 경과 동일한 경우라고 주장하여 낙ㆍ희와 무간에 비로소 4제 현관을 낳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또한 “유탐심(有貪心) 등은 탐과 함께[俱]하기 때문에 유탐심이라 이름한다”고 한 경설에 대해서도 마땅히 ‘탐과 무간에 일어난 마음을 유탐심이라 이름하였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크나큰 허물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함께’라는 말은 동시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수’ ‘상’ 등은 마음[心]에 의지(依止)하기 때문에 ‘심소’라고 이름한 것으로, 의지가 되는 것[所依止, 즉 마음]을 배제하고서 이러한 ‘수’ ‘상’ 등은 마땅히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마음에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 것을 소의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마음 역시 [전 찰나의] 마음에 의지하여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에 마땅히 심소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심소로부터 무간에 마음이 낳아진다고 한다면, 심소도 역시 마땅히 소의가 되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뜻에 대해서는 6인(因)을 논설하면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5)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멸진정에 들어갈 때 모든 의행(意行)이 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알아야 할 것이니, 멸진정은 다만 이 같은 ‘수’와 ‘상’의 두 가지 법만을 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선정 중에서 식(識)의 상속이 잠시 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정코 마땅히 소의와 소연이 존재하여 식과 화합해야 할 것이니, 소의와 소연을 떠나 식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세 가지의 화합이 존재한다면 필시 마땅히 ‘촉’도 존재할 것이며, 촉과 함께 일어난 수ㆍ상ㆍ사도 존재해야 할 것이니, 그런 즉 멸진정 중에서는 ‘수’ ‘상’의 두 가지 법 역시 마땅히 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6)
만약 “경에서는 ‘수(受)를 연(緣)으로 하여 애(愛)가 있다’고 설하고 있지만, 아라한에게는 비록 온갖 ‘수’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이 ‘애’의 연은 되지 않듯이 촉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즉 일체의 촉이 모두 ‘수’ 등을 낳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러한 예증은 옳지 않으니, [여기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는 “만약 무명촉(無明觸, 무명과 상응하는 촉)에 의해 낳아진 온갖 ‘수’라면, 그것이 연이 되어 ‘애’를 낳는다”고 스스로 분별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아라한은 무명촉을 갖지 않기 때문에 비록 ‘수’가 존재할지라도 ‘애’를 낳지 않는 것이다. 즉 [경에서는] 일찍이 어떠한 곳에서도 ‘촉이 수를 낳는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한 일이 없기 때문에 단지 촉만 존재하면 필시 ‘수’등을 [함께] 낳게 되는 것이다.
유여사가 “멸진정 중에서는 비록 식 자체가 존재할지라도 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그가 아직 무엇을 ‘촉’이라 하는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체의 식(識)은 반드시 소의와 소연에 의탁하여 일어나며, 소의와 소연과 식이라는 세 가지 법의 화합을 불타는 ‘촉’이라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촉을 근거로 하여 수ㆍ상 등을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멸진정 중에 세 가지의 화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7) 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허언(虛言)일 따름이다.
또한 멸진정 중에는 오로지 마음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려(思慮)가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멸진정 중에서는 온갖 의행(意行)이 모두 다 소멸한다”고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마음에 만약 사(思)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려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며, 사려가 없는 마음[無思慮心]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으로 업을 짓게 되는 것은 모두 ‘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음 역시 결정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무심(無心)의 유정도 이치상 필시 존재해야 할 것이니, 목숨[命] 등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이러한 멸진정의 상태는] 결정코 색심(色心)이 존재하지 않는, 목숨이 끊어진 유정과는 다르다. 마음이 만약 결정코 존재한다면 색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며, 어느 때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음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색심과는 관계없이] 목숨을 갖은 자를 바로 ‘유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8)
그렇지만 목숨은 반드시 색과 심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식은 몸을 떠나지 않는다”는 계경의 설을 인용하더라도 [멸진]정이 무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손(害損)도 끼칠 수 없으니, 식은 반드시 이러한 소의신 중에 다시 생겨나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9) 즉 어떤 상속(즉 유정)의 중동분 중에 식이 상속 유전하다 완전히[畢竟] 끊어지는 것은 아니니,10) 비유하자면 귀병(鬼病)이 잠시 발생하지 않을 때라도 영원히 제거된 것이 아니므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목숨[壽]과 체온[煖]과 식(識)은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는 [경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멸진]정이 무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손도 끼칠 수 없으니, 오로지 일부의 사실에 대해서만 이 말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무색계 중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체온(색법)이 존재하지 않지만 목숨이나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으로, 이러한 선정 중에 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목숨이나 체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색계 중에 일체의 색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11)
그렇기 때문에 멸진정에는 필시 어떠한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출정 후 마음[定後心]이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입정전의 마음[定前心]이 등무간연이 되어 인섭(引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행 중에 기약한 세력에 의해 낳아졌기 때문이다.12)
(2) 경주(經主)의 멸정무체설(滅定無體說)과 색심호훈설(色心互熏說) 비판
멸진정은 그 자체 가유(仮有, 가설적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인가, 실유(實有, 실체적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선정은 그 자체 마땅히 실유로서 가유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니, 능히 마음을 차단 장애[遮礙]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13)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와는 다른 해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ㆍ심소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전정심(前定心, 멸진정에 들기 전의 마음)에 의해 차단 장애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정심과 여타의 다른 마음(출정시의 마음, 곧 後起心)은 서로 다르게 일어나는데, 이러한 전정심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다만 뒤에 일어날 여타의 마음을 잠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전정심은 능히 마음과는 다른 소의신을 인발(引發)하여 상속시키기 때문에, 다만 [그 때 마음이] 전생(轉生)하지 않는 상태를 일시 [멸진]정(定)이라고 설정한 것일 뿐 [그렇게 전생하지 않게 하는] 별도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마음이] 전생하지 않는 상태를 가정(仮定)한 것으로, 입정 전이나 출정 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바로 유위법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가설한 것이다.14) 혹은 소의신이 전정심에 의해 인기되어 이와 같은 [여타의 다른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일시 [멸진]정(定)이라 설정한 것이다.”15)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출정] 후의 마음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인가?
이에 대해 그는 “이는 유근신(有根身)에 의해 일어나니, 유근신과 마음은 전전 상속하며 [서로의] 종자가 되기 때문이다”고 설하고 있지만,16) 어찌 이 같은 이치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그럴 경우 마땅히 모든 때, 모든 경계대상에 대한 식이 구기(俱起)해야 하기 때문이다.17) 그러나 [입정] 전의 마음에 근거하여 [출정] 후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설한다면, 두 번째의 등무간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소의의 경계가 동시에 존재할지라도 모든 경계대상에 대한 식이 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과 동류[自類]의 인연[전 찰나의 마음]에 근거하지 않고 유근신에 근거하여 식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모든 상태, 모든 대상에 대한 식은 어떠한 법이 장애하여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유여사는 이와 같은 견해--“다수의 식이 하나의 소의신에서 구기한다”--를 일으켜 주장하였다는 말을 들었다.(세친)
지금 관찰하건대 그대(경주)는 자기가 전승한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 같은 말을 설하고서는 이를 그(유여사)의 주장으로 돌리려고 한다. 만약 “앞서 ‘[입정] 전의 마음에 근거하지 않고 유근신에 근거하여 [출정] 후의 식이 일어난다’고 설한 것은 무심의 상태(즉 멸진정)에 근거하여 이같이 말한 것으로, [그 때] 유근신 중에는 마음의 종자[心種]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만 [출정 후의 마음은]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지 [입정] 전의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일 뿐으로, 유심의 상태(즉 일상) 중에서는 그것(유근신)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무심의 상태든 유심의 상태든] 인과를 달리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유심의 상태에서도 온갖 식이 일어날 때 마땅히 유근신의 종자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심의 상태에 있을 때 유신근 중에 그 밖의 다른 마음(즉 전정심과는 다른 출정심)과 반대되는 선정심의 종자가 있을 것이며, 이것에 의해 유근신 중의 그 밖의 다른 마음의 종자가 손복(損伏)되어 마땅히 [그것의] 수승한 힘이 그 밖의 다른 마음을 인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무심의] 상태의 유신근 중에는 [그 밖의 다른] 마음(즉 출정심)과 반대되지 않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종자가 존재하니, 이것의 수승한 힘에 의해 그 밖의 다른 마음을 낳게 되는 것이다”고 한다면, 유심위 중에 있을 때에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후 찰나의 마음이] 유근신에 근거하여 생겨난다고 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어떤 이가 “예컨대 곡물이나 보리 등의 싹은 자신과 동류[自類]의 종자를 원인으로 삼지 않고 다만 땅 등에 근거하여 생겨날 뿐이다”고 주장한다면, 어찌 지혜 있는 자가 이를 듣고 비웃지 않을 것인가?
또한 멸진정 자체를 오로지 가유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떠한 법이 이러한 가유의 소의(근거)가 되는지 알지 못하니, 가유의 근거를 떠난 가법(仮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는 다만 [마음이] 전생(轉生)하지 않는 상태로서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면, 어떻게 이것이 유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것의 존재성[有性]은 항시 획득될 수 없기 때문에 [입정] 전이나 [출정] 후 그리고 현재에도 모두 존재하지 않지만, 이러한 [무심의] 상태는 존재하며 유위에 포섭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다만 허언(虛言)일 뿐 어떠한 뜻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가유로서의 선정 역시 소의를 가지니, 소의신이 바로 그것으로, [전]정심에 의해 인기되어 이와 같이 [여타의 다른 마음(출정심)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일시 설정하여 [멸진]정(定)이라 하였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선정은 마땅히 무기에 포섭되어야 할 것으로, 무기법을 선이라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8)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마음(즉 입정전의 마음)에 근거하여 마음(출정심)이 일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전정심이 능히 여타의 다른 마음(출정심)을 차단 장애하는 것이 아니다.19)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입정 전의 마음을 떠나 그 밖의 별도의 법이 결정코 존재하여 능히 마음을 차단 장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법으로 말미암아 무심의 상태에서는 비록 마음의 원인이 존재할지라도 마음은 일어나지 않게 되니, 이러한 개별적인 법을 멸진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멸진정 자체는 바로 유위로서 실유이지 가유가 아니니, 관행(觀行)을 닦은 자의 선정에 들기 전의 마음이 기약한 원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멸진정의 세력이 점차 미약해지거나 완전히 다한 상태에 이르러 차단 장애의 작용이 없어지게 되면, 의(意)와 법(法)을 연으로 하여 다시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앞의 무상정과 아울러 무상과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6.7. 명근(命根)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두 가지 선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명근(命根)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목숨[壽]으로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목숨[壽]이다. 그래서 본론(本論)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명근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3계의 목숨이다”고 하였던 것이다.20)
[명근의] 이명(異名)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하게 밝히지 않았으니, 이제 마땅히 다시 진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법을 일컬어 목숨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이 존재하여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니, 이를 일컬어 목숨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목숨과 체온과, 그리고 의식
이 세 가지의 법이 몸을 버리게 될 때
그것이 버려진 몸은 나자빠지니
어떠한 생각도 없는 나무둥치와도 같다.
그래서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여 [유정으로 하여금] 상속하게 하고 머물게 하는 근거를 일컬어 목숨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목숨은 어떠한 법에 의해 능히 유지되는 것인가?
이러한 목숨을 능히 유지하는 것은 바로 업이라고 나는 설한다.21) 이것은 한결같이 업의 이숙과이기 때문이며, 일정한 기간[一期]의 생 중에 항상 수전(隨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온은 한결같이 업의 이숙과가 아니며, 의식은 두 가지가 모두 아니다.22) 비록 일정한 기간 동안 항상 수전하는 처소(즉 소의신)를 가질지라도 한결같이 업의 이숙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이 업에 의해 유지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즉 업에 의해 낳아지지 않는 의식의 유전(流轉) 중에서 업은 능히 [의식을] 유지하는 어떠한 공용(功用)도 갖지 않으며, 하나의 동분 중에서 이숙생의 의식이 끊어졌다가 다시 상속하는 것은 목숨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목숨이 능히 체온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요컨대 목숨이 있는 자는 바야흐로 체온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온을 갖지 않은 자도 역시 목숨을 갖는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에(무색계에서는 색법인 체온이 존재하지 않음) 목숨 자체는 체온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 목숨이 없는 것에도 역시 체온이 존재함을 보지 않았던가?
비록 [목숨이 없는 것에도] 역시 체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로 관찰할 수 있을지라도, 이는 여기서 논의할 바가 아니다.23) 이에 따라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이 있어 그것의 힘이 능히 유정의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니, 이를 설하여 ‘목숨’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1) 경주의 명근 무별체설(無別體說)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시 이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 [우리] 역시 목숨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목숨 자체는 개별적인 실체[別實物]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설할 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법을 설하여 목숨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3계의 업에 의해 인기(引起)된 6처(處)와 그 소의가 응당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住時勢分, sthitikālābheda, 즉 지속력]을 [설하여 목숨이라고 한다]. 즉 업에 의해 인기된 6처와 그 소의가 머무를 때의 세력은 응당 머물러야 할 시간에 따라 그 상속이 결정되며, 그 만큼의 시간만을 머물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을 설하여 목숨이라고 한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곡식의 종자 등에 의해 인기(引起, 즉 발아)되어 성숙할 때까지의 세력과 같으며, 또한 쏘아진 화살에 의해 인기되어 [공중에]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즉 시위를 떠난 화살이 그 힘이 다하여 땅에 떨어질 때까지의 세력)과 같은 것이다.”24)
그러나 목숨 자체는 실유로서,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근(根)을 설하는 곳에서 성립시켰으니,25) 여기서는 다만 경주의 견해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어떤 처소에서는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의 내(內) 5색처(色處, 5근)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그곳에서는 혹 어느 때 업에 의해 인기된 제6 의처(意處)도 존재하지 않는다.26) 또한 이를테면 오랜 시간 염오식 혹은 선한 유루나 무루의 식을 일으켜 상속하는 상태 중에서는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이 존재하지 않는데,27) 무엇을 설하여 목숨이라 할 것인가? 만약 이러한 처소에도 업의 이숙이 존재하여 태어나는 순간부터 명종(命終)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항상 무간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처소에도 업에 의해 인기되어 머무를 때까지 그 상속이 결정된 세력이 존재하며, 그것을 설하여 목숨이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처소에는 이미 업에 의해 인기된 이숙과로서 항상 무간에 일어나는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여기에 명근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치가 이미 그러하니, 어떠한 법을 설하여 ‘업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서,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이라 말할 것인가? 또한 이미 ‘[업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서,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속으로서 결정된 것’은 무엇에 속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또한 이미 이와 같은 ‘상속으로서 결정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응당 머물러야 할 시간에 따라 그 만큼의 시간만을 머물게 되니, 이를 설하여 목숨이라 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경주는 이러한 뜻(명근)에 대해 다만 말만 많이 꾸며내었을 뿐 도무지 드러낸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인용한 비유도 어떠한 논증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즉 종자에 의해 인기된 상속은 끊어지는 일이 없으니, 성숙할 때까지 항상 수전(隨轉) 때문이며, 쏘아진 화살에 의해 인기된 상속도 끊어지는 일이 없으니, [공중에] 머무를 때까지 항상 수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의 경우에는 [발아하여] 성숙할 때까지의 세력이나 [발사되어]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이 있을 수 있지만, 업의 이숙은 항상[一切時] 상속하여 끊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28) 업이 [과거로] 낙사(落謝)하더라도 그것에 의해 인기된 ‘머무를 때까지의 세력’은 응당 머물러야 할 시간에 따라 그 상속이 결정되며, 그 만큼의 시간만을 머문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인용한 비유는 어떠한 논증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 자체는 실유의 개별적인 실체로서,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게 하니, 이를 설하여 명근이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은 명근은 오로지 신체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무색계에도 명근은 존재하기 때문이며, 오로지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무심의 상태에서도 역시 명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명근은 무엇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이는 전세(前世)에 낳아진 업에 근거하여 일어나며,29) 아울러 현세의 중동분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그러한 중동분의 경우 역시 명근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30)
1) 목숨과 죽음의 관계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모든 죽은 이는 목숨이 다하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 밖의 다른 원인이 있어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시설론(施設論)』에서는 “어떤 이는 목숨이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으로, 복이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널리 4구(句)로 분별하고 있다.31) 제1구는 목숨을 초래하는 이숙의 업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다.32) 제2구는 부락(富樂)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다.33) 제3구는 능히 이러한 두 종류를 초래하는 업이 모두 다하였기 때문이다. 제4구는 능히 광횡(抂橫, 횡액)의 연(緣)을 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땅히 수행(壽行)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러한 뜻은 이미 제1구에 포섭되기 때문이다.34)
그리고 목숨이 다한 상태에서 복이 다하였을 경우, 그것(복)은 더 이상 죽음에 대한 공능이 없다. 그렇지만 [목숨과 복이] 함께 다하였을 때 죽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모두 다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35)
2) 목숨은 상속신에 따라 머무는 것인가, 일단 생기하면 머무는 것인가?
그런데 『발지론(發智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36) “이러한 목숨은 마땅히 상속신에 따라 일어나는 것[隨相續轉]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생기하면 머무는 것[一起便住]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욕전(欲纏, 욕계)의 유정으로서 무상정에 들지 않고, 멸진정에 들지 않은 자라면 마땅히 이러한 목숨은 상속신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무상정에 들거나 멸진정에 든 자라면, 그리고 색ㆍ무색전(纏)의 일체 유정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목숨은 일단 생기하면 머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논의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소의신이 해손(害損)될 수 있기 때문에 목숨도 그에 따라 해손되는 경우라면, 이것을 첫 번째의 ‘상속신에 따라 일어나는 목숨’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소의신이 해손될 수 없어 [목숨이] 생겨난 대로 머무는 경우라면, 이것을 두 번째 ‘일단 생기하면 머무는 목숨’이라고 한다. 여기서 앞의 것은 장애가 있음을 나타내고, 뒤의 것은 장애가 없음을 나타내니,37) 이에 따라 결정코 비시(非時), 즉 때 아닌 때 죽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 “[유정은] 네 가지 형태로 자신의 존재[自體, ātma- bhāva]를 획득하니, 이를테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해코지할 수 있고 다른 이는 해코지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등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하고 있는 것으로, 이에 대해 널리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38)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해코지할 수 있고 다른 이는 해코지할 수 없는 존재(제1구)란, 이를테면 욕계의 희망념천(戱忘念天)이나 의분에천(意憤恚天)에 태어나는 것이니, 그곳에서는 너무나도 즐거운 놀이에 몰두함으로써 신체가 피로하여 생각[意念]을 망실하며, 또한 증상(增上)의 분노와 미움[怒恚]을 일으킴에 따라 원한의 마음으로 서로를 질시한다.39)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의 죽음은 [스스로가 해코지하여 죽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또한 사수행자(捨壽行者)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들은 다른 이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40)
오로지 다른 이만이 해코지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은 해코지할 수 없는 존재(제2구)란, 이를테면 알[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거나 탯집[胎] 속에 머물러 있는 갈라람(羯邏藍)ㆍ알부담(頞部曇)ㆍ폐시(閉尸)ㆍ건남(鍵南)ㆍ발라사거(鉢羅奢佉)의 상태가 그러하니,41) 그들은 능히 스스로를 해코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 모두가 해코지할 수 있는 존재(제3구)란, 이를테면 그 밖의 대부분의 욕계의 유정이 그러하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 모두가 해코지할 수 없는 존재(제4구)란, 이를테면 중유(中有)와, 색ㆍ무색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유정과,42) 그리고 욕계에 존재하는 일부의 유정 예컨대 나락가(那落迦)와 북구로주(北俱盧洲)의 유정과,43) 바로 견도(見道)와 자정(慈定)ㆍ멸진정 그리고 무상정에 머무는 자와,44) 왕선(王仙)과 부처의 사자[佛使]와,45) 부처의 기별(記別)을 받은 달미라(達弭羅)와 올달라(嗢達羅)와 긍기라(殑耆羅)와 장자의 아들 야사(耶舍)와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와, 최후신의 보살과, 이러한 보살의 어머니로서 보살을 회임하였을 때와, 일체의 전륜왕과, 이러한 전륜왕의 어머니로서 전륜왕을 잉태하였을 때가 그러한 경우이다.4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였겠는가?
“[존자 사리자가 묻기를] 대덕이시여, 획득한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이 해코지할 수도 없고 다른 이가 해코지할 수도 없는 유정은 어떠한 유정인가?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자여, 이를테면 비상비비상처에 있으면서 생을 받은 유정이 그러하다.”47)
이 경에서는 뒤의 것을 언급함으로써 앞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이니,48) 다른 계경에서 앞의 것을 언급하여 뒤의 것을 포섭하는 경우와 같다. 이를테면 경에서는 “초정려 중에는 이생(離生)의 낙(樂)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최초의 정려를 언급함으로써 그 뒤의 온갖 경지에도 역시 이러한 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포섭한 것이니, 이 경도 역시 그러하여 뒤의 것을 언급함으로써 앞의 것을 포섭시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유정천을 제외한 그 밖의 무색정과 온갖 정려 중에서 생을 받은 유정도 역시 욕계의 희망념천(戱忘念天)이나 의분에천(意憤恚天)의 경우처럼 오로지 스스로 해코지할 수 있을 뿐으로, 그들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번뇌력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곳에서 몰하게 된 것이다. 혹은 그 밖의 무색정과 온갖 정려 중에서 획득한 자신의 몸은 자지(自地)의 성도(聖道)에 의해 해손(害損)되거나 또한 역시 상계 다른 지의 근분(近分)에 의해 해손되지만, 유정천의 경우에는 자지와 상지의 두 가지 해손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계경에서] 양자 모두에 의해 해손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49)
유정천 역시 타지(他地, 즉 무소유처)의 성도에 의해 해손되므로 마땅히 타해(他害) 즉 다른 것에 의해 해손되는 것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러한 설에 의거하는 경우, 이치 역시 마땅히 통하는 것이라 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다른 지’라고 말한 것은 [하지(下地)가 아니라] 상지(上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다] 수승한 것에 대해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것이 저것에 대해 자재력이 없으면 ‘다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니, 상지가 하지에 대해 자재력을 모두 획득할 때 비로소 ‘다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50)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 같이 힐책해야 할 것이니, 만약 부처의 뜻이 자지(自地)와 타지(他地)의 성도에 의해 온갖 번뇌를 끊은 것을 자지와 타지의 해손(즉 해코지)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자지와 타지의 해손에 의해 바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번뇌를 끊고 번뇌를 끊지 않음에 의해 죽거나 죽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해석과도 이치상 상응하지 않으니, 앞서 나락가 등은 자신과 다른 이 모두에 의해 해코지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존자(사리자)는 앞서 설한 자신과 다른 이 모두가 해코지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이미 마음으로 이해하고서 다른 뜻(경우)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이 같이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그곳의 모든 유정은 그곳에서 몰(沒)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까?”
“사리자여, 만약 그곳의 유정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다면 바로 몰하는 일이 있을 것이지만, 이미 번뇌를 끊었다면 바로 그곳에서 반열반에 들게 될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존자는 다만 최후에 획득한 자신의 존재(비상비비상처에서의 존재)에 근거하여 다시 세존께 물었던 것인가?
그는 자신과 다른 이 모두에 의해 해코지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는 일이 있어 그것을 버리기 위해 ‘그곳의 모든 유정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하고 다시 물었던 것이다.
명행(命行)과 수행(壽行)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생겨난 법[生法]의 목숨을 일컬어 명행이라 하고, 생겨나지 않은 법의 목숨을 일컬어 수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버려지지 않은 목숨을 일컬어 명행이라 하고, 버려진 목숨을 일컬어 수행이라고 한다”고 말하였으며, 다시 어떤 이는 “만약 그것이 신족(神足)의 과보라면 명행이라 이름하고, 만약 그것이 선행된 업의 과보라면 수행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다. 다시 어떤 설자(說者)는 “만약 명(明)의 증상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면 명행이라 이름하고, 만약 무명의 증상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면 수행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어떤 설자는 “탐욕을 떠난 자의 상속에 획득된 것을 명행이라 하고, 탐욕을 갖은 자의 상속에 획득된 것을 수행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명행과 수행의 차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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