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옛집
울 아버지 세 번째 기일
우물 곁 감나무가 있던 옛집 평상에는
집 떠난 주인 대신
웃자란 바람과 해쓱한 햇살만이 서성거리고
머뭇 머뭇 들어선 마당 한켠
마지막 당신이 쏟아내던 회한처럼
주인 잃은 경운기가 붉은 녹물을 흘리고 있다
고물상은 눈을 감고 사나 몰라
경운기는 손 안대고
빨갛게 휘어진 앵두가지만 죄 꺾었는지
가득하던 울타리가 엉성하다
작은 개다리소반에
4홉들이 소주병 하나 김치 몇 조각 앵두 한 종지면
울 아부지 하루가 흥겹고
오며가며 들른 객까지 한 잔 술의 호사가 늘어졌는데
학교 마치고 돌아오던 귀갓길에
노을처럼 불콰해진 울 아부지 얼굴을 보면
까닭 없이 속상하고 친구한테 창피해서
저 평상을 없애버렸으면 좋겠다
어디 구석진 곳으로 이사 갔으면 좋겠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괜시리 감나무만 땅땅 차던 유년
세상에 온전히 발을 딛지 못하고
당신이 반쯤만 엉덩이를 걸치던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앉은 엄마가
-아요, 소주 한 고뿌 안하시껴
미움도 정이더라고
꺼먼 숱 삭힌 세월 속 일기장을 펴신다
하릴없이 앵두가지만 붙들고
기억을 만지작거리던 가슴 안으로
후. 두. 둑 비가 내린다
잠든 내 볼에 꺼칠하게 비비던
울 아버지 술 냄새가
비처럼 내린다.
마흔 다섯의 저녁
불혹 넘어 시작한 일은 느슨한 저녁 해를 닮았다 노을 한 귀퉁이를 붙잡고 퇴근하는 길, 쇼윈도의 마네킹들은 일제히 표정을 손질하며 나긋나긋 손짓을 한다 수초처럼 거리를 배회하는 푸른 입김들 속에 내 피곤한 저녁이 몸을 섞는다 고개를 들어 거리를 휘 둘러본다 마네킹과 젊은 수초들이 하나같이 잘생긴 팔등신으로 있다 초라한 내 몸피가 낯설다 우두커니 서서 어둠을 휘젓는 불빛들을 마주 본다 후우- 크게 숨을 고르며 물속처럼 깊어지는 골목 안 온기를 더듬어본다 내 손등에 오래 눈길을 얹은 노을 한 점이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만진다 아, 현란한 골목의 끝 마지막 쇼윈도를 장식한 마네킹이 가을처럼 웃는다 그녀를 마주 향해 화안하게 웃어준다 거리에서 만난 내 마흔다섯의 나이가 저녁을 지난다.
바람이 전하는 말
긴 여행에서 돌아온
지친 신발이
댓돌 위에서 휴식에 들었다
앞산 청솔 숲을 지고 갔던 바람
머언 바다를 들고 와
신발 발치께에서
소금기 묻은 편지를 펼쳐 든다
겹겹의 휘장으로
일제히 나는 물 새떼들
마당 가득 흩어지는 빗살들이
소중한 인연으로 온다
언제 온 걸까―
툇마루 위 자리를 옮겨 앉던 햇살이
고분고분한
산 그림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다의 풍경 속을 함께 거닐고 있다
세상의 때 묻은 얘기들이
바람의 눈썹을 닮는 바위 하나로
내 안에 들어와 섬이 되는 날
바람은 내게 자꾸만 비워내라고
비워내라고 한다.
여름 낯꽃
개암나무 그늘 밑
뽀작 다가앉는 햇살
갈래머리 동심, 손가락을 펴들다
두 조막손에
졸조르르 빛살을 늘어놓고
찡긋거리며 바라본 하늘
이쁜 고 가시내―
눈이 부시다
어느 결에 물 한 모금 청해 놓고
머뭇거리던 동자 바람, 남세스럽게도!
햇살이 사방으로 튀었겠다,
박하 잎 화아한 웃음이 허리를 꺾다
가을을 걷다
오늘은 길이 참 가벼워
햇살이 걸음을 통째로 끌어당기고 있거든
이런 아침엔
연이은 재채기를 날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하루를 걸친 가방에
금싸라기 느낌표들을 꾸욱 꾹 눌러 담는 건 어때
무게 따윈 걱정하지마
채울수록 가벼워지는 게 가을이니까
어머님은 늘 그러셨지
쉴 새 없이 가을을 뜨개질 하시면서
하루해가 짧구나, 너무 짧아
무늬 닳은 몸빼 바지 속에는
내가 모를 다리 몇 개 쯤 더 숨기고 계셨는지도 몰라
빠진 머리칼을 수건으로 가린 당신의 정수리 위에는
늘 삶보다 부피가 큰 희망 몇 개가 얹혀 있었고
우리는 그 뜨거운 희망을 저울질하며
끝없이 당신의 곳간을 토막내어 세상에 던졌지
채워질듯 채워질 듯 그러나
한 번도 채워지지 못했던 어머님의 곳간은
이젠 오히려 덜어낼 일이 없어 버겁다고 하셔
오늘 같은 날은 우리,
쏟아지는 가을의 가슴 속을 걸어보는 건 어때
간혹
눈물이 귓가를 흐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