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정인선
깜박 졸음까지도 잊고 사시는 와불님은
수국 초리에 물오르는 소리 들어셨는가
격자문을 닫으려는 하루를 보고도 빙긋 웃으신다
여우비로 목을 축인 어둠이
오닉스 단주短珠를 쥐고 앉은 여인의 입술을
살짝 들춰보다가
그도 빙긋이다
보리굴비를 훔쳐 먹은 암고양이가
담장을 훌쩍 뛰어넘는 모습을 보시고도
와불님은 그냥 웃는다
쇠망치로 정을 내리치던
석공의 팔에 새겨진 근육질을 펼쳐놓고
가쁜 숨소리를 끌러 보신 걸까
또, 잔잔한 미소만 던지고 계신다
햇살 끝자락에 남아있던 선홍빛 한 자락이
와불님을 살짝 훔쳐보고 갔는지
두 뺨까지 불그레하다
어제는 빗소리에 묻어온
고생대의 기별 한쪽을 받으셨다고
말끔히 씻으시고 새벽으로 오시더니
목련꽃 한 송이 펼쳐놓고
오늘은 마냥 웃고만 계신다
코비드covid의 축선
정인선
탱탱하게 부푼 양극을 잡아당기자
음극의 틈새에서
노오란 복수초 꽃망울이 달려 나오던 날,
어둠을 부리로 콕콕 찍어내던 비둘기 떼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전해진 골목길은
어시시한 음계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고비사막에서 특급으로 보내왔다는 택배가
매캐한 화약 냄새를 토해놓은 대문 앞에는
도시를 무릎 꿇린 탄도미사일의 폭음이
하루의 맥박을 가늠하는 사이
레퀴엠의 보폭에 맞춰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눈물이 슬픔을 대변할 사이도 없이
순번 없이 우리는
문장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발색의 검은 입술을 열고나온
괴괴한 바람과 흉흉한 소문들로
만삭이 된 저녁뉴스는
아버지와 딸들이 죽었고
의사도
바다도 산도
모두가 사라져갔다는 말 자막이
오월의 밀밭처럼 넘실거린다.
텅 빈 거리는 어떻게 할까
실종 신고가 접수된 아침의 자리에
성큼 들어선 낮선 그림자
하데스의 시대가 온 것이다
검은 복면의 세기가 온 것이다.
약력
성명 : 정인선
1948년 삼척 출생.
2008년 『문파문학』 등단.
시집 : 『잠깐 다녀올게』, 『거기』 『오른쪽이 무너졌어』
카페 게시글
이 계절의 시인
그냥 , 코비드covid의 축선/ 정인선
이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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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6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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