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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4
한여름 복날 더위에도 일을 계속하시자 제자스님께서 노스님을 강제로 눕혀서 쉬시게 하는 모습.
제6장. 해현노화상 해묵법사 해원법사 체광법사: 천년토록 이러한 승단 만나기 어려웠네 (千載難遇此僧團)
현공노화상, 그리고 해묵법사, 해원법사, 체광법사 등 이 네 분이 함께 동백산 탑원사에서 초막집을 짓고 함께 수행하셨던 그 옛 일이 흔적도 없이 전부 사라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일이 초래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말학은 이 기회를 빌려서 특별히 수록하였습니다.
현공은 생전에 말학에게 해묵법사에 관한 많은 사적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독 체광법사를 말씀하실 때에는 현공이 습관적으로 “인현印玄”이라 부르셨기 때문에, 말학은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왠지 송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체광법사의 법명이 “인현”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으며, 작년 1월에 현공께서 생전에 남기신 동영상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려가 깊으신 대덕들이 이러한 귀중한 동영상자료를 찍지 않았다면, 전기傳奇라 칭할만한 이 공안 또한 단지 현공의 극락왕생을 따라 즉시 파묻혀져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해묵법사는 현공보다 네 살이 많으셨으므로, 현공은 습관적으로 해묵법사를 “대흑大黑노화상”이라 부르셨습니다. 해묵법사의 속가의 성은 방方씨이며, 선조는 남양지역의 대부호셨습니다. 법사는 어렸을 때 양친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조모의 손에 자라셨습니다. 법사는 일찍이 일본사관학교에서 유학하셨으며, 국민당삼십군國民黨三十軍의 참모장을 지낸 적이 있으십니다. 처음에는 불법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원을 허물고서 학교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법사가 친구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무심결에 《능엄경》에 손길이 가서 집어 펼치고 읽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으며, 그래서 이전의 잘못을 참회한 후 사원을 원래의 모습으로 중수重修하여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동백산에 들어가 전걸공傳傑公(현공의 사숙이십니다. 당시에 선문에는 “남쪽 지역의 허운화상, 북쪽 지역의 전걸화상”이란 칭송이 있었습니다.)에게 절을 하고 출가하셨습니다. 민국 26년(1937년)에 조모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며, 대흑노화상은 조모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초막집을 짓고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매일 경전을 독송하고 염불하여 조모에게 회향하셨습니다.
2008년 가을, 현공은 말학에게 대흑노화상이 조모를 위해 시묘살이를 한 일을 들려주시는 중에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눈에 글썽글썽하셨으며, 또한 찬탄하며 말씀하시길, “대흑노화상의 효심, 그것은 진실로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동시켰지! 나는 그분이 틀림없이 조모의 시묘살이를 하며 염불하였던 그 3년 동안에 이미 깨달으셨을 것이라 생각하지.”
1964년, 대흑노화상은 의양현宜陽縣 영산사靈山寺에 주석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인연을 물리치고서 절 뒤에 토굴을 하나 파고는 스스로 자신을 “대흑굴大黑窟”이라 불렀으며, 토굴 속에서 살면서 염불정진을 하셨습니다. 일찍이 두 차례나 아미타불께서 광명을 놓아 화상이 왕생하실 때를 미리 보여주심을 감득感得하셨습니다. 1968년 9월 23일, 대흑노화상은 여러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서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셨습니다.
현공은 왕생하시기 4개월 전에 남양의 거사들에게 그 당시에 초막집을 짓고서 함께 수행하셨던 일을 들려주실 때, 여전히 대흑노화상을 찬탄하며 말씀하시길, “대흑노화상은 변재가 아주 뛰어나 어느 경전이든지 전부 다 강설할 줄을 아셨지.”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대흑노화상이 전병煎餠을 드시는 것을 좋아하셨던 것까지 또렷하게 기억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거사가 현공께 여쭙기를, “노화상께서도 경전을 강설하신 적이 있으십니까?”라고 하자, 현공은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길, “난 단지 땅에 씨를 뿌리고 농사짓고 일할 줄만 알아. 어느 경전도 배운 적이 없으며, ‘아미타불’만을 부를 줄 알뿐이네.”(我只會種地幹活, 啥經都沒學過, 就會念阿彌陀) ……
해원법사(1904~2000년)는 현공보다 네 살이 어리시며, 속가의 성은 장章씨이며, 하남성河南省 당하현唐河縣 대하둔향大河屯鄉 장루촌章樓村 사람이십니다. 어릴 때부터 고모의 영향을 받아 그때 이미 불법을 널리 전할 뜻을 세우셨습니다. 13살 때에 태백정(太白頂: 동백산의 주봉) 운대사雲臺寺에 전재傳再법사에게 절을 올리고 출가하셨으며, 16살 때에 무한武漢 귀원사歸元寺에 가서 구족계를 받으셨습니다.
민국 33년(1944년) 봄, 해원법사는 마흔 살이셨을 때, 동백산을 내려가 북경에 가서 참학하였으며, 그때 한 번 떠나신 후로 50 여 년 동안 다시는 동백산으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해원법사께서 미륵원과 광제원에 상주하면서 겪으신 고생은 여기에서는 차마 상세하게 서술하지 못하겠습니다.
1979년, 중국불교협회에서 해원법사에게 영광사에 가서 부처님치아사리탑을 수호하는 일을 위임하였습니다. 당시에 서산西山은 전체가 온통 심하게 무너지고 훼손되었으며, 적막하고 인적이 없었습니다. 75세의 해원법사는 그곳에서 외로운 몸으로 혼자서 사리탑을 지키셨으며, 스스로 몸을 움직여 일하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으면서 아침에는 참선하고 저녁에는 염불을 하며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1999년 음력 12월에 해원법사는 편안하게 원적하셨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앙모하여 그의 성상聖像을 주조하여 사원 안에 공봉供奉하였습니다. 혜원법사의 명성을 흠모하여 사원에 와서 앙모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해원법사를 이야기할 때, 현공은 극구 찬탄하시길, “해원의 수행, 그것은 흔히 말하는 그런 평범한 정진이 아니야! 우리들이 함께 지낼 때 그는 걸핏하면 자주 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조차 잊어버리곤 하였지. ……”
왕춘생노거사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 의하면, 해원법사께서는 현공께 몇 십 년 동안 서신을 보내셨으며, 현공은 서신을 받으신 후에는 늘 왕거사를 찾아 읽어달라고 하셨습니다. 문화대혁명 이후에 해원법사께서 보내오신 서신에서 종교정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래불사가 바로 그 시기에 맞추어 중건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체광법사의 속가의 성은 원袁씨이며, 하남성 항성 사람이시고, 민국 13년(1924년) 4월에 태어나셨습니다. 14살 때에 혼자의 몸으로 당하현 흑룡진의 발산髮山에 들어가 보화사普化寺 해산海山법사에게 절을 올리고서 출가하셨습니다.
현공께서는 당시에 네 분이 초막집을 지었던 정확한 시간에 대해 전혀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말학이 몇 분의 연보年譜로부터 추산해본 즉, 대략 민국 29년(1940년)에서 민국 32년(1943년) 사이일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민국 29년(1940년) 전에는 체광법사는 아직 출가하시지 않으셨고, 대흑노화상은 한창 조모를 위해 시묘살이를 하고 계셨으며, 그리고 민국 33년(1944년) 봄에는 해원법사는 북경으로 가셨으며, 그 후로는 다시는 동백산으로 돌아와 상주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체광법사의 연보 기록에 의거하면, 법사는 19살 때 호북성 무한 보통사寶通寺에 가셔서 구족계를 받으신 후에 영암산에 가서 인광법사의 사리에 참배하셨으며, 또한 그 도량에서 몇 년 동안 상주하셨습니다. 그 후 법사는 운문사로 가서 허운노화상을 따라 선정을 익히고 참선하셨으며, 몸소 직접 “운문사변雲門事變”을 겪으셨습니다. 당시 법사가 허운노화상께서 부상당하신 상태를 문안하러 갔을 때, 노화상은 그에게 게송 한 수를 주시면서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이 화상 매우 달라, 재투성이 머리 흙투성이 얼굴로 무량한 국토에 두루 하네. (這個阿師迥不同, 灰頭土臉遍剎塵.)
확탕지옥 노탄지옥에서 항상 유희하며, 털을 덮어쓰고 뿔을 이고서 법륜을 굴리네. (鑊湯爐炭常遊戲, 披毛戴角隨轉輪)
악취가 하늘에 자욱하여 사람이 가까이 하기 어렵고, 삼계의 안팎으로 찾아도 종적이 없네. (臭氣薰天人難近, 三界內外覓無蹤.)
지금 나이 몇이나 되었느냐 묻는다면,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고금도 아니라네. (若問行年經幾許, 非色非空非古今.)
당시에 체광법사의 나이는 겨우 27살이셨습니다.
당하현 보화사의 주지이신 여진如眞법사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 의하면, 체광법사께서는 운문사를 떠나신 후에 동백산 탑원사에서 거의 2년 동안 주지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다시 당연히 운거산雲居山 진여사眞如寺에서 계속해서 상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공께서 문화대혁명시기(1966년 5월~1976년 10월)의 일을 들려주신 말씀에 따르면, 이 10년 동안에는 체광법사는 분명히 동백산으로 돌아가셨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현공께서 말씀하시길, “홍위병은 인현에게 긴 걸상 위에 서 있게 하고는 그의 목에 작은 맷돌을 걸게 하였네. 그런데 인현이 무술을 할 줄 안다는 것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긴 걸상 위에서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선 채 조금도 꿈쩍 하지 않았네. 그때 한 홍위병이 발로 그 걸상을 걷어찼는데, 그러나 아무리 발로 여러 번 걷어차도 끝내 조금도 인현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지. 그러자 그 홍위병은 사람들을 불러서 여럿이 함께 인현을 발로 차다가 그 걸상이 넘어지는 바람에 그 홍위병 역시 따라서 꽈당 하고 넘어졌어. 그런데 인현을 쳐다보니, 인현은 여전히 두 다리를 쫙 벌린 채 땅 위에서 똑같은 자세로 그대로 서 있었네. 이를 본 홍위병들은 몹시 놀라 다시는 감히 인현과 싸우지 않게 되었지.”
또 여진법사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따르면, 체광법사는 80년대에 여러 차례 동백산으로 돌아가 당시의 도우道友들을 보러 간 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1990년부터 체광법사는 청원산青原山에 주지하시면서 원적하실 때까지 조사祖師들의 도량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그의 법체를 항아리에 봉안하여 홍제弘濟선사의 탑 곁에 안장하였습니다.
본환本煥노법사(1907~2012년)는 체광법사를 찬탄하며 말씀하시길, “체광법사는 어렸을 때 출가하여 어린 나이에 도를 증득하셨습니다. 금계禁戒를 굳게 지켰으며, 실학實學을 착실하게 참구하셨습니다. 청원靑原선사의 조정祖庭을 중흥시켰으며, 백장百丈선사의 가풍을 이어서 펼치셨습니다. 선당禪堂에 상주하면서 대중을 접인接引하셨으며, 그분의 도풍道風은 멀리까지 전해졌습니다. 법사께서 제도하신 중생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많습니다. 진실로 승려의 모범이십니다!”고 하셨습니다.
체광법사께서 원적하신 후, 그의 제자문인들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동백산에 탑을 지어 법사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봉안하여 공봉供奉하고자 발심하였습니다. 현공은 이 일을 듣고서 기뻐하고 찬탄하셨으며, 또한 친히 탑원사에 가서 법사를 위해 직접 탑 자리를 고르셨습니다. 2011년 11월 12일, 법사의 사리탑이 탑원사에서 낙성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말학이 운이 좋게도 체광법사의 상좌이신 연사演嗣법사가 해주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사법사께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여러 곳을 골랐지만, 그곳들은 전부 본래 우리가 바라는 뜻에는 약간씩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해현노화상의 가피를 얻어야 할 것 같았으며, 결국에는 노화상께서 당시에 함께 초막집을 짓고 사신 적이 있었던 이곳을 골라주셨습니다. 덕분에 모두가 매우 만족해 하였습니다.”
해묵법사는 선종과 법상유식法相唯識을 수학하셨고, 해현법사는 선종과 정종을 함께 닦으셨고, 체광법사는 오로지 선종만을 닦으셨고, 해현노화상은 오로지 정토만을 닦으셨습니다. 네 분 어르신들은 비록 각자가 서로 다른 법문을 수학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지내면서 함께 닦을 수 있으셨으며, 또한 바로 명실상부한 화합 승단이셨습니다. 그래서 구경에는 한 분 한 분의 성취가 비범하셨으니, 실로 고금에 희유한 일입니다! 말학은 마음속으로 현공을 비롯한 이 네 분 어르신께서 초막집을 짓고서 함께 닦으신 이 공안은 장래에 중국불교사 속에 반드시 수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감복感服을 금할 수 없는 마음을 이 기회를 빌려 이 네 분 성인을 위해 게송 한 수를 지어 찬탄해 봅니다.
마음속 깊이 밀물처럼 세차게 밀려와 눈물이 흐르고, 마음은 현공을 따라 그때를 생각하네. (五內潮湧淚潸然, 心逐賢公思當年.)
대장부가 생사의 길을 끊기 위해, 양친 부모 이별하고 출가하여 깊은 산속 들어가셨네. (丈夫爲斷生死路,辭親出家入深山)
탑원에서 초막집 짓고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는 여섯 가지 원칙을 준수하셨으니, 공덕과 명성 진실로 만고에 전할 만하리. (塔院結廬遵六和, 德名眞堪萬古傳.)
종문과 교하에 본래 걸림 없으니, 정토와 법상이 어찌 선이 아니랴? (宗門教下原無礙, 淨土法相寧非禪?)
어찌하여 백 번 말해도 도무지 싫증이 나지 않는가? 천년 동안 이러한 승단 만나기 어려웠네. (因何百說咸不厭? 千載難遇此僧團.)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여래께서는 가르침을 펴실 적에 때를 따르고 중생의 근기를 따르셨습니다. 법문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화엄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만약 제불의 근본 법륜만을 믿고 나머지 모든 경전을 가벼이 여긴다면, 이 또한 경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만약 일승一乘만을 믿고 나머지 경전에서 성불을 강설하고 있는 것은 모두 원만하지 않다고 멋대로 말한다면, 이 또한 망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능엄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만약 오직 이 경만이 지혜를 열 수 있으며 나머지 경전은 모두 열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강경》을 수지하는 사람이 만약 오직 이 경만이 일체 허환虛幻한 형상을 간파하여 일체 종문宗門과 교파敎派를 뛰어넘어 속히 불지佛地에 오를 수 있으며, 나머지 경은 모두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우매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량수경》만을 수지하는 사람이 만약 이 경만이 여래의 정설正說인 제일第一의 경이며, 나머지 모든 경은 생사를 끝마쳐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한 현자가 화합이성(和合二聖: 한산과 습득)을 위해 시를 지어 찬탄하였습니다.
태도가 온화해야 대중이 화합하고, 마음이 맞으면 일이 화평하리. (和氣乃眾合, 合心則事和.)
세상 사람들이 화합할 수 있다면, 기쁨과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世人能和合, 快活樂如何?)
현공을 비롯한 이 네 분이 초막집을 짓고서 함께 수행하신 이 공안을 회고해보면, 이 네 분이 비록 각자 서로 다른 법문을 수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성취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필연적인 일이며, 또한 이치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었음을 간파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음력 4월 14일에 이 글은 이미 완성되어 끝마쳤습니다. 말학과 인지법사는 다시 동백산에 올라 석반石盤 연화사蓮花寺에 가서 연세가 이미 여든의 고령이신 인증印證 비구니스님을 찾아뵙고서 그 스님의 말씀을 통해 현공의 생전에 관한 사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자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스님은 비록 현공과 친분이 있으신 지 여러 해가 되셨지만, 오히려 구체적인 일들을 들려주지 못하셨으며, 다만 끊임없이 여러 번 현공의 미덕들을 찬탄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저희는 그곳을 떠나려 하기 전에 대전에 들어가 다시 참배를 하였습니다. 그때 뜻밖에도 무심결에 대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현공의 머리를 깎아주어 승려가 되게 해주신 은사이신 전계공傳戒公과 현공의 은사(전계공)의 은사이신 진공노상인眞空老上人의 덕상德像을 발견하였습니다.
두 분 고승의 덕상德像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미 희미해진 저의 기억 하나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2008년 겨울, 현공께서 천불사에서 말학에게 진공상인께서 수행하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또한 현공 자신이 일찍이 대흑화상과 함께 걸어서 북경에 가서 은사의 은사이신 진공상인의 영골(사리)을 청해 동백산 탑원사로 모시고 와서 탑을 세워 봉안하여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였던 지나간 옛일을 들려주셨습니다. 단지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를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말학이 나중에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본 결과, 진공상인은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 선문禪門의 석덕碩德이라 할 수 있으며, 만년에는 북방의 제자들의 간청에 응하여 북경의 미륵원에 상주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남방에 있던 고민사高旻寺와 금산사金山寺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호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선객들은 “남방에는 고민사와 금산사가 있고, 북방에는 미륵선원이 있다.”(南有高旻、金山, 北有彌勒禪院.)는 것을 알았습니다. 1952년에 진공상인은 선정에 든 지 14일 후에 단정하게 앉아서 원적하셨습니다.
말학은 탑원사에 가서 진공상인의 사리탑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그 후 말학이 또 대흑노화상의 연보를 펼쳐 보니, 1954년에 대흑노화상이 북경에 가서 진공상인의 영골을 청한 일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그러나 다만 현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말학과 인지법사는 또 해원노화상의 전법傳法문인인 연도演道법사를 찾아뵙기 위해 북경에 갔습니다. 연도법사 또한 그 해에 해원법사 역시 진공상인의 영골을 동백산으로 호송하여 갈 때 함께 참여했었다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말학은 이 인연을 빌려서 이 일을 여기에 보충하여 수록하였습니다.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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