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奧地라는 이름을 벗겨낸 객주 문학관
시조시인 김은하 (울산문학 제79호 게재)
▲ 객주문학관은 폐교된 고등학교 건물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여 2014년 6월에 개관하였다. 폐교된 진보 제일고교 건물을 증개축한 4천640㎡, 아담한 3층 건물로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해 늦가을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울산 문예대학 아카데미 학생들과 문학기행을 출발한 지 3시간여 만에 청송
<객주 문학관>에 도착했다. 마지막 단풍으로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 모양을 한 문학관 주변의 가을을 보고청송의 가을을 가슴에 담기 시작했다. 문학관 입구의 소나무는 햇살을 받아 더 위엄 있게 보였다. 청송은 예부터 산간벽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고장으로 산이 전체 면적의 80%에 이른다. 지금은 상주 영덕 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산간벽지라는 오명은 벗어던졌다. 그곳에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생존하는 작가의 문학관을 짓기로 결심한 청송군수의 집요한 설득과 김주영 작가가 함께 만들어 가는 문학관은 입구에서 보기만 해도 따뜻한 온기가 넘쳐 보였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 문학관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설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역사 박물관, 미술관, 문학관을 해설사가 없이 보는 것과 해설사의 도움을 받으며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소설 『마당 깊은 집』의 소설가 김원일 선생은 작가 김주영에 관해 “한 사람의 작가는 과연 어떻게 탄생 되는가. 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려면 그 작가의 성장배경 중 6세부터 20세까지를 면밀히 관찰해 보면 알 수 있다.”고말했다. 김주영 작가는 시골의 엽연초 조합에서 16년간을 재직하다 작가가 되었다. 그가 작가가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집안의 어른 한 분은 “문학이란 것이 부잣집 둘째 아들이 하는 것”이라고 만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김주영 자신 또한 울산문협에서 주최한 북 콘서트에서 자신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지독히도 가난한 벽촌에서 시래기 국이나 먹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 나이까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는 고백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과거로의시간여행』에서 ‘자기변호나 위장술에 탁월한 수완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숨길 수 없는 세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 재채기, 가난’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느낀 가난이란 우리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가난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면서 작가에 대한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청송에서의 객주 문학관은 지역소통의 창구로 다양한 기획전시를 하고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상주해 있는 해설사의 도움으로 방대한 자료와 소설의 배경에 대해 설명 들을 수도 있다. 작가의 문학관에 와서 비로소 대하소설 『객주』를 부초 같은 서민의 삶과 애환, 처절하게 살아남는 법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맛깔난 문장 탄생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그날 운이 좋았다. 문학관 1층 로비에 전시된 소설 속 문장에 등장하는 낯선 순우리말, 흔하게 사용하지 않아
무슨 뜻인지 사전적 검색으로도 알 수 없는 단어들에 대한 설명을 작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다. 그것도 작가의 구수한 입담으로 직접 듣는 영광을 누렸다. 최고의 경력은 경험이라고 했던가. 방언 같기도 한 토착어는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고개가 저절로 끄떡여졌다. 과연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
게 된 순간이었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 투철한 의식의 김주영 작가는 장돌뱅이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스스로 장돌뱅이가 되었다. 『객주』 연재를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답사하였다고 하니 그에 존경심이 생긴다. 연재 기간에는 한 달에 이십 일 이상 장터를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옛 보부상과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장 상인들과 막걸리를 나누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소설 『객주』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전국을 유랑한 결과물이다. 면 소재지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원고를 써서 신문 지국에 보낸뒤 또 다음 지역을 향해 출발하는 생활을 연재하는 5년 내내 계속했다고 한다. 한 작품을 위해 십 년의 시간을 보낸 보답이 오늘날 밀리언셀러로 돌아온 것이다. 작가의 긴 호흡과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었다면 장돌뱅이들의 애환은 시나브로 잊히고 말았을 것이다. ‘길 위의 작가’라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결코 화려한 명성 덕분이 아니었음도 알 수 있다.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마디 뿐,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위한 허세에 불과하다.” -작가의 고백-
전시관에서 엿볼수 있는 집필실의 모습은 단출하다. 작가가 지방의 여인숙에서 집필했던 공간이나 장돌뱅이 들을 만나 취재했
던 공간은 다소 거칠면서도 정겹다. 작품 속에 드러난 장터 주막집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고되고 소
외된 삶, 여린 마음에 층층이 담았던 거부하고 싶은 현실을 풀어낼 만한 공간이라 여겨진다. 작가가 겪은 아픈 속내는 술과 담배보다 소설 속 현장에서 오히려 위로 받았을 듯하다. 전시실 벽면에 걸린 전국의 장터가 열리는 지도와 두꺼운 백과사전이 눈길을 끈다.
소설 『객주』는 집필 방식부터 투철했다. 먼저 노트에 자료들을 기록한 다음, 다시 원고지에 정리하여 옮겨 적었다. 그 기록물인 육필원고도 전시되어 있다. 웬만한 시력으로는 육안으로 읽어내기 어렵다. 그야말로 깨알 같은 글씨들은 마치 개미들의 행진을 보는 듯하다. 그 개미들이 어디로 가는지 『객주』는 그 길을 따라 펼쳐졌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렇듯 깔끔하게 유지 보관한 것도 놀라웠다. 육필원고는 김주영 작가에게는 끊임없는 에너지의 원동력이 되고, 작가지망생들에게는 필수교본이 될 만하다. 작가는 어려서부터 장터 구경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장날만 되면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에 가지 않았을 정도다. 그랬던 것이 어느 날부터는 장이 서는 날이면 실제로 배가 아파 구경을 나가지 못했단다. 그 일화가 소설가로서의 운명 같은 불씨가 되었음을 문학관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전국 각지의 장터를 돌아다니는 일은 『객주』라는 대하소설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의 명성을 얻기까지 고단했겠지만 멈출 수가 없었으리라. 문학관에는 이러한 작가의 역마살도 진하게 배어 있다.
작가가 「객주」를 쓰기 시작한 것은 서른한 살 되던 1970년이다. 그때부터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그해 월간문학에 「여름사냥」이 가작으로 입선된다.이듬해 다시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도전하여 단편소설 「휴면기」 당선으로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한 후 지금까지 왕성한 필력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로서 김주영의 철학은 특이하다.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동하며 격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목인들은 모든 소유물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가재도구와 가축, 비단과 향수,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물, 물통과 식칼, 빈대와 벼룩, 바람과 빛의 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예민한 촉각. 절대적인 환경과 싸워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 하물며 번뇌와 증오, 분노와 저주까지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작가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 김주영 작가의 철학이다.
“악어의 결정적 무기는 치명적인 치악력을 가진 이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속에서 몸을 낮추고 먹이가 사정거리에 올 때까지 숨을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 그리고 공략해서 한번 물고 절대 놓지 않는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로 밤을 새워 5~6개월, 또는 1년 어떤 작품은 5년이 걸려서 완성된 작품도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실망하지 않고 또 다른 작품을 구성해내는 것, ‘일희일비’하지않고 또다시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정신임을 작가는 강조한다. 좋은 작품을 쓴다고 해서 약사나 의사처럼 사회적 명칭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당부는 과연 문학관 입구에서부터 전해진다.
객주문학관은 현존 작가의 문학관임에도 작가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 작가의 이름보다 자신의 작품이 오래 남길 바란 김주영 작가의 뜻을 청송군이 수렴한것이다. 쓰는 사람이 만족해야 독자도 만족한다며 팔순의 나이에도 아직 펜을 놓
지 않는 작가의 열정이 세운 객주문학관. 한적한 산골을 조용히 알리고 있는 문학의 산실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잘 읽었어요^^ 아동문학 최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