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속도로 신 나게 달리세요!
김리라 작가의 책가방
<빛보다 빠른 꼬부기> (이병승 지음, 살림어린이펴냄, 2010)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들 관우 때문에 아침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일어나는데 이십 분, 이 닦고 세수하고 나오는데 십오 분, 혼자만 세수해도 되는데 꼭 옷까지 씻겨준다. 긴 팔 옷을 입으면 어김없이 팔이 다 젖는다. 밥 먹는 시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냥 내버려두면 한 시간은 거뜬히 채우리라. 옷 입는 시간 십오 분, 점퍼 입고 책가방 메고 운동화 신고 신주머니까지 챙기면 십오 분, 이젠 정말 전쟁 끝! 이라고 생각하면 망한다.
“엄마, 나 똥 마려워요.”
관우는 다시 운동화 벗고, 신주머니랑 가방 내려놓고, 점퍼랑 바지 벗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어느 땐 양말도 벗는다.
“빨리 싸. 그러다 지각해.”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몇 번은 참는다. 생리현상이니까. 그 느낌 아니까.
시간을 잴 수 없을 만큼 아주 중요한 현상 때문에 아침마다 나는 바짝 긴장한다.
주인공 천둥이의 별명은 꼬부기다. 천둥이는 관우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리 만만한 아이가 아니다. 천둥이 아빠도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아빠 말로는 내가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나가면, 느긋하게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고, 아침 신문을 맨 뒷장까지 보고, 천천히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면, 그제야 경비실 앞을 꼬물꼬물 지나가고 있는 내가 보였다고 한다.
(본문 10쪽)
다시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들 관우 이야기다. 아침마다 꾸물거리는 관우에게 순서를 정해줬다.
아침에 일어나면 첫 번째는 양치하고, 세수하고, 똥 싸기다. 학교 갈 때 입는 옷도 안 버리고, 똥 누는 시간을 빼면 남은 시간을 쪼개어 활용한다.
밥은 한 끼 굶어도 똥은 참기 힘들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똥을 못 누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학교에서 많은 아이들이 줄서 기다리는데 그것도 짧은 쉬는 시간동안에 볼일을 봐야한다는 압박감은 스트레스였다.
세 번째는 옷 갈아입고, 밥 먹기다. 여기까지 하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예상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점퍼 입고, 가방 메고, 신주머니 챙기고, 문을 열고 나가면 끝? 아니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신주머니를 자주 놓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보초 서듯 재촉한다.
순서를 정해놓으니 편하다. 이래서 엄마도 경력이 필요한가 보다.
천둥이 아빠는 나보다 더 정교하고 좀 독한 것 같다. 이런 표까지 만들었으니 말이다.
시간을 정복해야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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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소요시간(분) 항목 소요시간(분)
알람 후 일어나기 10분 머리 감기 10분
양치질 10분 질문에 답하기 즉시
등교 준비 20분 슈퍼마켓 심부름 15분
학교까지 걷기 20분 약수터 갔다 오기 1시간
방 청소 15분 옷 갈아입기 5분
설거지 10분 전화 받기 다섯 번 울리기 전
외출 준비 30분 텔레비전 끄기 방송 끝난 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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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분 늦으면 용돈 백 원 깎음.
* 이 외에 모든 지각(학교, 학원, 약속 등)도 해당함.
* 아빠가 무언가를 시킬 때 몇 분이라고 제한 시간을 말할 것! (26쪽)
어느 날 관우가 “엄마는 친엄마가 아닌 것 같아요.” 이러면서 천둥이처럼 몰래 집을 나간다면 그러니까 가출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살금살금 방을 나와 현관으로 갔다. 아빠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아빠 방을 향해 큰절을 했다. 홍길동처럼.
‘아빠 저는 집을 떠납니다. 느려터진 꼬부기 때문에 이젠 속상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데 집을 나서자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불 꺼진 예성 피아노 학원 안녕, 지금은 조용한 백호 태권도장도 안녕, 용마 공업사 지붕 위의 고양이들도 안녕, 폭포 공원 나무 계단도 안녕, 나무 계단 틈에 핀 잡초들도 안녕, 놀이터도 안녕, 놀이터 의자도 안녕, 놀이터에 새로 심은 나무도 안녕, 그리고 청해 수산 오징어 나라도 안녕, 수족관의 납작한 광어도 안녕, 오징어도 안녕, 마술 방구 할아버지도 안녕.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날은 어둡고 달은 구름 속에 숨었고, 나는 갈 곳이 없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82쪽)
천둥이는 아빠랑 단둘이 사는 5학년 남자아이다. 천둥이 아빠의 직업은 퀵 서비스 맨이다. 느림보 천둥이와 빨라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아빠와의 충돌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친아빠가 아닐 거라는 천둥이의 상상은 점점 현실화된다.
이 이야기는 자신만의 속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해체된 가정이야기로 확장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결말은 천둥이에게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숙제를 내준다. 그동안 친아빠인 줄 알고 살았던 아빠를 선택할 것인지, 아빠보다는 부유한 진짜 엄마를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어른 독자인 나도 잔인하고 냉혹한 숙제 앞에서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5학년 천둥이는 잔인하고 냉혹한 숙제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슬픔 반, 걱정 반으로 239쪽이나 되는 이 책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똥개는 늑대가 되기로 했다. 늑대가 아니라 똥개로 태어난 것도, 똥개지만 늑대의 손에 길러지는 것도, 똥개는 선택할 수 없었다. 늑대도 늑대가 아닌 똥개를 자식으로 키우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늑대에게 길러진 똥개는 늑대를 아빠로 선택했다. 이제 늑대가 똥개를 아들로 인정하고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가족이란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진짜 가족은 선택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엄마는 이제부터 나를 보러 오면 된다. 아빠가 10년도 넘게 날 키워 준 것처럼, 엄마도 10년 넘게 나를 보러 오면 된다. 그러면 엄마도 가족이다. (237)
마지막이 정말 좋았다. 특히 그동안 미우나 고우나 키워준 아빠에 대한 천둥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천둥이가 숙제를 아주 잘 풀어줘서 고맙고 대견하다.
책을 덮고 나서도 빛보다 빠른 꼬부기, 천둥이가 생각난다.
몸은 아직 느리지만 생각만큼은 느리지 않는 천둥이가 바로 아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김리라
아들 관우는 학교에서 시험 점수를 받고 나는 관우에게 글 점수를 받는다.
2010년 웅진주니어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동안 쓴 책으로는 <무에타이 할아버지와 태권 손자>, <안 돼, 낯선 사람이야!>, <우리는 걱정 친구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