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宗親府)
종친부(宗親府)는 조선 시대 국왕을 지낸 이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종실·제군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 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고려 때 제군부를 세종 15년에 고친 이름으로, 한국어 1905년 종부사로 이름을 고쳤으나 2년 후에 폐지되어 그 업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옥첩당은 경근당보다 격을 낮추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평면으로 규모를 줄였으며 공포도 초익공을 갖도록 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친부 옥첩당(宗親府玉牒堂)]
지난 4월 10일 종친부(宗親府)에 다녀왔습니다.
오래전에 지인께서 종친부(宗親府)에 가보았는지 물어 보시었습니다. 그 당시는 종친부가 어느 곳에 있는가하고 물어보았어요. ‘종친부’ 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고 뜻 자체를 몰랐습니다.
지인께서 종친부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듣다 보니 제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갔을 때 뒤편에 궁궐의 한 부분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사진 몇 매 촬영하였던 곳을 알려주셨습니다. 위치를 인지하고는 4월 10일 집을 나서 안국역에서 바로 종친부를 향해 가는중에 비가 오기시작 하여 우산을사고 종친부에 도착 했을때는 가랑비처럼 조금씩 내려 경근당과 옥첩당 주변 모습을 촬영하였고 안네판도 꼼꼼히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는 옛 종친부의 관아건물 중 일부에 해당하는 경근당 63.45평과 왼쪽 익사(翼舍)인 옥첩당 32.84평만 남아있다. 원래 경근당의 왼쪽에도 익사인 이승당(貳丞堂)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敬近堂─玉牒堂))]
조선시대에 종친부가 있던 터에 위치한 이 우물은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상부에 네 귀가 조출(彫出)되어 있다. 내부는 자연석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는 이 우물의 원래의 형태가 아니고 1984년에 기무사에서 뜰 공사 도중 지하 3m에서 우물돌을 발견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 새로 조성한 것이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을 구조물 1점은 현재 이 우물 내부에 놓여져 있다.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우물과 같이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인 특징을 갖는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 후원에도 있다.
이 우물은 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 서울유형문화재 제5호 1987년 8월 정독도서관으로 이전)에서 사용했던 것이며, 두개의 타원형 깃돌로 만들어졌다. 우물 깃돌의 네모형 괴임대는 동서남북을 표시하며, 물동이를 놓기도 하고 정수를 떠 놓고 소원을 기원했던 자리이다. 우물옆 소나무는 약 300 년전 정자수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옛 종친부의 관아건물 중 일부에 해당하는 경근당 63.45평과 왼쪽 익사(翼舍)인 옥첩당 32.84평만 남아있다. 원래 경근당의 왼쪽에도 익사인 이승당(貳丞堂)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宗親府敬近堂─玉牒堂))]
종친부뒷쪽모습을 촬영하였습니다.
첫댓글 종친부의 이력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었습니다. 좋은 자료와 정보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