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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자료에는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조선에서 순교한 선교사를 위해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에 그 곡은 가톨릭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임이 밝혀졌다.
2017년 3월 25일에 성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원로 한국화가인 이종상 요셉 화백이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13점과 신리 성지 출신 순교성인 5위의
영정을 우리나라의 전통 채색 기법과 초상화 기법으로 제작해 봉헌하였다
실제로 보게되면 어마하게 큰 그림으로 사진으로는 전체의 설명표현이 어렵다.
성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
성 피에르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Angouleme) 교구 뤼페크(Ruffec) 본당의 에제크(Aizecq)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는데, 모두 5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오메트르가 성실은 하였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하여 그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을 때 본당신부는 그의 성품에는 감동했지만 성적을 보고는 반대했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공부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1862년 6월 14일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자신의 전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조선 입국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는 중국 어선으로 연평 바다를 거쳐 비교적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이때가 1863년 6월 말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우선 1개월 동안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함께 서울에서 지낸 후,
용인의 손골(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로 내려가 조선말을 익혔다.
그 후 1864년 9월에는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입국한 지 2년 남짓 지났을 때 박해의 소문이 나돌았고,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인 1866년 당시에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 있었다.
여기서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나기 위해 일단 교우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미사 예절용 물건들을 모두 감추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 마을로 갔다.
이것은 오메트르 신부가 교우들에게 더 큰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자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다블뤼 주교의 집에 있던 포졸들은 다블뤼 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들도 체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포졸들은 주교를 위시하여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홍주 옥으로 일단 끌고 갔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투옥시켰다.
문초를 받는 동안 주리 틀림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결국 오메트르 신부를 포함한 세 선교사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2백 50리나 떨어진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의 갈매못 사형장으로 끌려가 1866년 3월 30일 참수 치명하였다.
바로 그 날이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일로 그들이 처형된 시간이 예수께서 운명하신 시간이었다고 전해온다.
그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1836-1866년)
"성 마르티노 루카 위앵"(Martin Luc Huin)신부의 세례명은 "마르티누스 루카"(Martinus Lucas)이며, 한국 성은 민(閔)이다.
그는 1836년 프랑스 "랑그르"(Langres)교구의 "기용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의 부친도 9남매가 모두 훌륭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막내로 태어난 "위앵"은 1851년에 "랑그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56년 10월에 "랑그르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6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어 "랑그르 교구"의 사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면서도 선교사제의 꿈을 키우다가
마침내 1863년 8월 20일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864년 6월 13일에 자신이 전교해야 될 지방이 조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부모님에게는 물론 옛날 본당 신부님에게도 편지를 썼다고 한다.
1864년 7월 15일 "위앵" 신부는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신부, "볼리외"(Beaulieu, 徐沒禮)신부,
"도리"(Dorie, 金)신부와 함께 전교지인 조선을 향해 파리(Paris)를 떠나
홍콩, 상해를 거쳐 1864년 11월 만주의 "차쿠"(岔溝)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조선과의 연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한문과 조선어 공부를 하며 그 해 겨울을 지냈다.
그 이듬해인 1865년 5월 27일에 비로소 위앵 신부는 일행과 함께 충청도 내포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도착 후 "위앵" 신부는 6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그 후에는 내포 지방에서 20리쯤 떨어진 당진 합덕 지방의 "세거리 공소"로 떠났다.
"위앵" 신부는 1866년 2월에 벌써 교우들의 고해성사를 듣고 신자들을 가르칠 수가 있었다.
"위앵" 신부는 박해 직전까지 5백여 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15명 내지 20명에게 병자성사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교우들에게 혼인성사도 집전해 주었다.
1866년 3월 12일 그는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고 순순히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3월 19일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866년 3월 30일 보령 수영 갈매못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 마음에 아픈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토록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것도 아니요,
이곳과 같은 처절한 장소에서 죽게 된 때문만도 아니라,
이 나라 불쌍한 백성들의 구령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게 되니 그것만이 마음 아플 뿐이오.”
그의 유해는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황석두 루카.
황석두는 1813년에 충청도 연풍에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그가 과거시험에 합격토록 그를 공부시켰다.
황석두는 20세에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 한양의 주막에 묵던중 한 박식한 천주교인을 만났다.
황석두는 그에게서 천주교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 천주교인에게서 몇 권의 천주교 서적을 받았다.
그는 그 천주교인이 떠난 후 사흘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놀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말은 하늘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황석두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를 맞았지만, 천주교 신앙을 공부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나아가 황석두는 그의 아내를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한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황석두는 3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온가족은 그의 무언증을 고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온가족은 애달퍼했지만 결국 황석두의 권면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었다.
비천주교인들까지도 황석두의 헌신과 충실함 그리고 훌륭한 성품에 감복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 했을 때, 황석두는 여생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절제와 금욕을 위해 페레올 주교에게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으로 살았다.
주교는 황석두를 사제로 만들기로 결심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황석두의 아내가 입회할 수녀회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황석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친척들이 그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페레올 신부는 황석두를 한문학 교사이자 교리 교사 및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그는 사제들의 복사직도 수행했다. 황석두는 그 의무들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디블뤼 주교의 복사가 되었다.
그는 주교들과 함께 여러 권의 서적을 번역 및 저술하였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황석두의 지식과 능변을 아까워하여 포졸들에게 황석두만은 체포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황석두는 한양으로 압송되는 주교를 수 십리 동안 뒤따라가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압송되었다.
1866년 3월 30일 황석두는 사형을 선고받고 보령의 갈매못(충청도에 있던 수군 기지)에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장주기등과 함께 참수되고 군문효수되었다.
그렇게 그가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4세였다.
성 손자선 토마스.
"손자선" 토마스는 충남 덕산군 홍주면 신리마을 거더리에서 3대째 천주교를 믿는 부유한 농가애서 태어났다.
본래 부지런하고 성실했던 그는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묵주기도를 드렸고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카가 체포되고
며칠 뒤 덕산의 포졸들이 거더리마을의 몇몇 신자들의 집을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얼마 후 덕산 관아에서 약탈당한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고 연락을 했지만 박해시기에 마을 사람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때 "손자선" 토마스는 자진해서 덕산 관아로 물건을 찾으러 갔다.
덕산 관아에서 천주교 신자인지를 묻는 관리의 질문에 그는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두려워 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더 무서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이시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이요."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배교를 거부하였다.
"손자선" 토마스는 즉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가 극심한 고문으로 숨이 넘어갈 정도로 큰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몹시 측은히 여겨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 가며 구해주고 치료하자 그는
"이러지들 마십시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오셔서 내 상처를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상처들은 기적같이 치유되었다.
덕산 관아에서 해미로 이송된 뒤 "손자선" 토마스에게는 더욱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사이에 몸둥이를 끼워 양쪽으로 틀자 살이 터지고 두 다리가 모두 부러졌지만 이 참혹한 형벌에도 그는 의연하게 견디었다.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에게서 관장은 천주교를 버리겠다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고문을 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손자선" 토마스는 1866년 부활 전 날인 3월 31일 교수형을 받았다.
처형된 지 사흘 후 가족들이 그의 유해를 거두려 갔는데
그 때까지 그의 유해는 조금도 썩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취도 전혀 없었다고 전해진다.
신리에 믿음의 터전을 일구었던 믿음의 조상 "손자선" 토마스는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지하 1층에 있는 순교 그림들.
천주교 탄압 당시 생생한 모습을 큰 그림으로 그려 미술관을 장식했다.
실물을 영접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으로 사진으로는 전체적인 표현이 어렵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서품식.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金家巷)성당에서
"페레올"주교의 주례하에 조선인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때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도와 사제서품식 보좌를 하고,
11명의 조선인 신자, 네 명의 유럽인 신부, 한 명의 중국인 신부가 참여하였다.
강경 포구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들.
1845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가 탄 라파엘호는 상해를 출발해
제주 용수리에 표착한 뒤, 10월 12일 강경포구를 통해 조선에 첫발을 내 딛게 된다.
낮선 땅에서 다른 사람들이 외국인 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상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의 교우들과 만나게 된다.
사목방문.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상복을 입고 갓과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서,
농한기에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사목 방문을 다녔다.
특별히 "다블뤼"주교는 사목방문을 다니며 고해성사, 찰고, 신자들 교육과
어려움의 해결, 조선 교회의 역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 등을 하였다.
조선 최초의 예비 신학교 교장.
"페레올" 主敎는 지병으로 인해 사목방문을 다니지 못했던 "다블뤼" 神父로 하여금
예비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칠 것을 명하여, "다블뤼" 神父는 요양하며 이 일을 수행하였다.
신리에서의 미사.
"다불뤼" 주교는 사목방문의 대부분의 시간을 400여명의 신자가 있는 신리(新里)의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서 보냈다.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와 많은 신앙교육을 했고 자주 미사를 거행하였다.
한양에서의 수감.
거더리에서 잡힌 "다블뤼"주교, "위앵"신부, "오메트르"신부, "황석두" 루카는
홍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은 맨땅으로 되어 있었고, 살인자들과 도둑들이 뒤엉켜 함께 갇혀 있었다.
이들이 수감되었던 때는 사순시기였기에, 자신들의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에게 음식을 양보하며 주님을 기억하며 희생과 극기에 동참하였다.
오성바위에서의 기도.
한양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은뒤 처형지인 오천 갈매못의 충청 수영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지로 내려가는 중 포졸들이 충남 아산 음봉 동천의 주막에 들러 잠시 쉬려할 때,
다섯 성인은 옆에 있는 큰 바위에 둘러 앉아 기도와 성가를 통해 주님을 찬미 찬양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갈매못에서의 순교.
군문효수형의 집행을 위해 갈매못으로 온 다섯 성인은 충청도 수군 절도사에 의해 형이 집행되었다.
만일을 대비해 관장 주위로 9명의 조총수(鳥銃手)를 배치하였고,
200여명의 병사들이 구경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삼엄하게 애워 싸고 있었다.
1866년 3월 30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성 금요일에 다섯 성인은 희광이의 칼에 주님을 위한 순교를 했다.
신리 신자들의 체포.
1868년 이후 수많은신리 신자들이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신자들이 반항하거나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몽둥이로 마구 때려 힘을 빼고, 팔을 부러뜨렸다.
손 요한의 신리 신자들에 대한 염습.
박해시절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피난 길을 떠났던 손 요한은
그 때에 순교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염습하기 시작했다.
전염병에 걸리고, 부패가 된 시신을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 정성스럽게 묵묵히 염습을 하여 묻어 주었다.
이런 손 요한의 모습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그림 셋이 더 있는데 전시공간이 부족해서인지 못보았고,
자료집에서 찾아 보았다.
다블뤼 주교 서품식.
1841년 12월 18일 파리 "성 쉴피스" 신학교 성당에서 "아프르" 주교의 주례로 위대한 순교자의 사제 서품식이 이루어졌다.
1845년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신부는 제4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의 선택을 받아,
1857년 3월 25일 밤에 한양에서 선교사들과 몇몇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콘느"(Arcones)명의의 주교로 서품을 받게 된다.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에서 저술.
"다블뤼" 주교는 사목방문을 한 후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조선 교회사와 순교자들의 사료를 수집하였고, 새 교우들을 위해 최초로 한글 교리서를 편찬하였다.
천상에서의 성인과 순교자들.
자신들의 목숨보다 하느님을 더 소중히 여겼던 신리의 다섯 성인과 많은 신자들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모습이다.
聖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聖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이고, 한국名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s)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답게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덕행의 꽃을 피웠던 집안이다.
부모는 그의 억세고도 침착하지 못한 성격을 고치려고 다소 완고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사제직에 뜻을 두고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잇시"(Issy)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 "생 쉴피스"(Saint Sulpice)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르와예"(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외방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제3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 상해로 가서
8월 17일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후,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남 강경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1866년 3월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그는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인 1846년부터 전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갖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백여 명의 교우들을 돌보았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자 일단 활동을 중단하고
습기가 심한 불결한 방에 숨어 살았으며, 그러면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
1848년 박해가 뜸해지자 건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전교활동을 시작하여 1850년에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로 하여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전교활동을 금하였고,
그동안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틈틈이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을
편찬하는 등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서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Paris)로 보냄으로써 후대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그는 1861년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시작했었는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더욱 가혹해져 마침내 같은 해 2월 23일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잡혀 3월 7일 참수 치명하였다.
그래서 보좌주교였던 그가 주교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체포되어 당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던
"위앵"(Huin, 閔) 신부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다블뤼" 주교는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고 했다.
그러나 3월 23일 그가 사형에 처해질 것이 결정되어
충청도 보령(保寧) 수영(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이송되는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 성 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성 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의 소원대로 3월 30일에 성 금요일에 다블뤼 주교는 사형을 받게 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다블뤼"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다블뤼"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다블뤼 주교의 목을 두 번째 내리쳤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얼마동안 군문효수 되었다가 교우들의 손에 의하여 홍산 땅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제 전망대로 올라가 본다.
전망대는 5층인데 올라가는 계단이 무척 높다.
다행히 4층까지는 승강기가 있다.
마지막 층은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계단 올라가는 코너에 설치된 조형물.
마치 고래를 형상화 한 것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전망대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
신앙선조 사백명을 상징하는 사백개의 철심을 엉켜서 만들어진 십자가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성지.
내포 평야와 "버그내 순례길".
내려와서 전망대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본다.
이길로 가면 전망대 주변만 볼 수있고, 정망대로 올라가지는 못한다.
이제 근처에 있는 공소를 찾아 간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세거리 공소"만 둘러보려고 한다.
"세거리 공소"는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 종형차를 가져가면 돌아 나오기가 불편하다.
(양촌에) 도착하기 조금 전, 왼쪽으로 신리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다블뤼"주교가 거처하던 곳이고 또 1866(병인)년에 체포된 곳이다.
그리고 좌우의 세거리와 거더리 두 마을은1866년 이전까지는 완전히 교우들 마을이였다(1896년 10월 26일 자 뮈텔 주교 일지)
뮈텔주교의 증언대로 신리와 함께 세거리와 거더리는 박해가 극심했던 때에도 완전한 교우촌이였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인해 신리와 마찬가지로 세거리 교우촌도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이후 다시 모여든 신자들이 새롭게 교우촌을 이루면서 합덕 본당의 주요 공소가 되었다.
현재의 공소건물은1935년에 지어진 것으로 중앙문으로 이어진 전실이 있고, 좌우에 사제와 복사방이 있다.판공 때가 되면 본당 신부가 머물면서 성사를 베풀고, 신자와 비신자 할 것 없이 보례떡과 푸짐한 음식을 나누며 흥겨운 잔치를 벌렸다고 한다.
순례길 도장 함.
지금은 폐허가 되어 들어가기도 위험했다.
그래도 옛날에 치던 종은 그대로 남아 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하루빨리 보수를 해서 옛 모습을 찾아 순례자들을 기쁘게 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