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代의 易學은 易學史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유가역과 상수역으로 대표되는 漢易은 진의 焚書 이후에 한무제의 儒術 존숭정책에 의해 주역이 6경의 하나로 주역의 해설이 전문적인 학문으로 성립되었다. 주역의 전문적 연구는 사회발전과 문화 사상의 변천에 따라 漢易시기,晉唐시기,宋易시기, 淸代시기와 같이 크게 네 단계를 거쳤고, 象數學派와 義理學派를 형성시켰다.
陰陽奇偶의 수와 卦爻象 및 8괘가 상징하는 物象으로『주역』의 經과 傳의 文義를 설명하는데 중점을 둔 역학을 상수학이라 하고, 괘명의 의의와 괘의 성질로 『주역』의 경과 전의 글을 해석하며, 괘효상과 괘효사의 의리를 밝혀 드러내는 데에 중점을 둔 역학을 의리학이라 한다. 한역 시기에는 상수역이 주류를 형성하고, 위진 수당 시기에는 위진 시기의 王弼(226~249)과 韓康伯(322~380), 당 초의 孔潁達(574~648)로 대표되는 의리학파가 우위를 점하는 시기였다. 송명시대에는 상수학파와 의리학파가 병행하면서 상수학은 다시 수학파와 상학파로 나뉘고, 의리학파와 기학파, 심학파와 공리학파 등의 여러 유파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청대는 다시 한대 역학이 부흥하였다.
이와 같이 역학의 역사는 다양하게 변천하면서 발전해갔다. 漢代 易學의 발전은 내용의 차이에 따라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즉 유가역 시기와 상수역 시기이다. 대략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전 50년까지가유가역 시기로 田何에서 시작하여 宣帝 연간(재위 BC 74∼BC 49)의 시수․맹희․양구하 세 학자에 의해 발전하다가 쇠퇴한다. 이 시기의 역학은 선진의 儒家 十翼 義理를 밝히는 복고적인 역학으로 韓嬰 계열의 가전역학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전하의 문하에서 역학가들이 배출되었음으로 인하여전하역 시기라고도 한다.
이 발제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역학은 한대의 상수역학이다. 그 동안 한대의 상수역학에 관한 연구들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경방의 역학이론을 거론한 학자는 중국과 대만에서는『易學哲學史』를 지은 朱伯崑, 국내에는『상수역학』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兩漢易學史』를 저술한 대만의 高懷民,『兩漢象數易硏究』를 쓴 劉玉建, 그리고『 象數易學 發展史』를 쓴 林忠軍, 요명춘외 2인이 쓴 『周易哲學史』,『京房評傳』을 쓴 盧央 등이 있다. 국내의 연구논문은 漢代의 卦氣易學을 연구한 文載坤의 「漢代의 易學 硏究」가 있다. 이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일부에서는 卦氣易學의 思想的 背景을 陰陽五行論·氣論·天人相感論 측면에서 살펴보았고, 이부에서는 卦氣易學의 天文曆法 要素를 天干地支·二十四氣·十二律呂·八風·五官과 二十八宿 등의 측면에서 논구했으며, 삼부에서는 卦氣易學의 형성과 전개를 孟喜의 卦氣易學·京房의 卦氣易學·鄭玄의 爻辰說 등의 세부적 내용 차원에서 다루었다. 易學史的으로, 卦氣易學은 「易傳」易學의 발전으로서 陰陽五行論을 儒家學術에 깊히 접맥시켰고,『周易』의 原初的인 天道人事의 合一思想을 天人相感體系로 환원하면서 현실적 응용성을 확보해 놓았으며, 別傳의 易學과 卦燮說을 낳아 또다른 易學의 발전가능성을 열어 놓은 공이 있다. 그러나 卦氣易學은 東漢 이후 玄學的 義理易學의 掃象論에 밀려 퇴색된다. 象數의 支離함과 人爲의 牽强함을 玄學思辨的인 義理易學이 등장하여 극복한 것이다.
尹太鉉의 「京房 易의 硏究」 는 한대의 역학가인 京房(기원전 77~37)의 상수역을 다룬 박사논문이다. 경방은 최초로『周易』에 오행설을 도입하여 여기에서 相合, 相生, 相剋의 이론으로 卦爻를 해석하는 방법을 창안한 인물이다. 이 논문에서 卦變說, 음양오행설, 卦氣說, 8宮說, 世應說, 五行說, 納甲說, 飛伏說, 窮理盡性論 등을 다루었고, 오행설 가운데 納甲과 納地를 붙인 원리와 이것이 六親說과 旺休說과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경방이 상수역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의리역에 대해서도 언급하여 전통 주역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주장하였는데, 그 설이 궁리진성론이다. 그리고 경방을 상수역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의리역학가로 비교하여 왕필이나 정이천에 견줄만 하다가 언급하면서 그의 상수역 이론이 소강절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현대 활용되는 술수와 상수 역학 이론 가운데 많은 부분이 경방에서 시작되었다고 논지를 펼치고 있다.
김진희의 박사논문인 「文王筮法과 京房筮法의 비교연구」에서는 오행의 원리에 의해 점괘를 판단하는 경방서법의 학문적인 근거와 학술적 가치를 밝히기 위해서 문왕서법과 비교분석했는데, 의리철학서로 알려진『易傳』이 점서성과 사상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역을 자연과학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한대 象數學 내지는 卦氣易과 京房筮法의 출현의 단초를 놓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제시했다.
이 논문은 현재 경방서법의 내용을 담고 있는『增刪卜易』과『卜筮正宗』에 관하여 분석했다. 또한 경방역의 음양 2기설과 팔궁괘설, 오행설, 납갑설 등의 역론이 경방서법에서 활용되는 점과 문왕서법과 경방서법과 유사성과 차이점을 논술했다. 결론적으로 문왕서법과 경방서법은 점단방법의 차이로 인한 결과의 대처방법에 문왕서법은 인간의 자유의지적 대응을 중시한 데 반하여 경방서법은 이미 결정된 상황을 중시함으로써 인간의 대응의지를 소홀히 하여 운명론에 치우칠 수 있다는 점이 비판의 소지를 갖고 있다고 결론내리면서 해결책으로 점서의 목적이 지극한 정성과 조화와 중화의 도를 추구하면서 인간이 신에게 선한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외에도 한대 역학 관련 연구로는 임채우의「漢代 象數易學과 王弼 義理易學의 관계 :天象과 人事 : 象水와 義理의 天人關係」,와 임경순의 「상병화의 『焦氏易詁』에 관한 고찰 :실전된 서한역학의 역상을 중심으로」라는 석사논문은 서한시대 초연수의 상수역학인『焦氏易林』을 청대의 인물인 상병화가 『주역』․『좌전』․『國語』등과 함께 연구하고 분석하여 실전된 역상을 밝혀내고, 易說과 象數를 재정립하여 실전되었던 선한의 상수역학을 다시 세상에 밝힌 과정과 결과를 엮은 책인 『초씨역고』에 관한 논문이다.
김영심의「京房의 『京氏易傳 上』飜譯硏究」는 경방의 생애와 저서 및 경방역학의 이론체계 및 경씨역전 원문을 번역한 논문이다. 이외에도 역사학 쪽에서 최진묵의 박사논문인 「한대 수술학 연구 :한대인의 천·지·인 이해와 그 활용」과 오민영의 석사논문인 「前漢代 曆法과 讖緯의 결합 : 위서역의 성립과 역법의 정밀도 문제를 중심으로」등이 한 대의 역학을 다룬 논문들이다. 한편 한대의 역학과 정약용의 역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정해왕의 「漢代의 易學理論과 丁若鏞의 易學理論」등이 있다.
이와 같이 한대의 역학에 관한 연구성과들이 나와 있으나 아직까지는 많은 영역에 있어서 한대 역학의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한대 상수역과 송대 상수역및 청대 상수역의 비교분석 같은 연구는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이 될 수 있다.
아래에서는 한대 역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특히 장을 달리하여 한대 상수 역학자의 특징과 상수역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한대 역학의 전개과정
1.한초 이전의 역학의 침체
한대 역학이 흥성한 이유를 알려면 먼저 한대 이전의 역학이 부진한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역학사도 역사진보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서 역학발전의 내재 논리를 근거로 지금까지의 역학 발전사를 여섯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즉 역학은 선진시대에 발원하여 한대의 상수학, 진당의 현학학, 송대의 리학역, 명청의 박학역, 현대의 역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가운데 제1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선진 역학 시기이다. 선전역학은 다시 두 개의 단계를 거치는데, 먼저 역학의 맹아 단계인 춘추 이전의 서주 초까지와 역학의 기초가 성립된 춘추전국시대이다. 이 시기에 상수․ 의리 두 파가 이미 단초를 들어낸다. 『좌전』,『국어』속의 무사로 대표되는 점서파와 공자로 대표되는 의리파가 『주역』연구에서 확연히 다른 견해를 형성하여 이후의 역학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의리파 역학의 첫 이정표가 공자의『십익』이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공자의 죽음이후 기원전 206년 한 고조 즉위까지 273년 동안 공자가 역을 전했다는 상구와 간비․ 교자 ․ 주수 ․ 광우라는 인물이 역사책에 전혀 언급이 없는 것에서 역학의 침체를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사기』「중니제자열전」의 기록에도 한초 이후 전하까지 여섯 세대 동안 한줄기 계보밖에 없다. 이 기간 동안 역학이 침체한 원인은 주로 어지러운 시대상황과 유학의 부진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였다. 하․ 상․주 삼대 이래로 인간 중심의 문화적․ 사상적 취향을 보여 온 이래로 서주의 문왕과 주공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런 노선을 견지했고 공자의 仁 존중 사상이 더욱더 이러한 사상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제후들이 현실정치에 맞는 지식을 요구함으로 인하여 이론 연구를 중시하는 역학이 밀려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부진을 들 수 있다.
전국시대의 역학은 명목상 유가의 육학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시대는 편파적인 사상과 인심이 통하던 시절이라 中道에 기반한 공자와 맹자의 도는 통하지 않고 도리어 음양가 추연과 같은 인물의 학설이 편파적인 시대에 영합하기 좋았다.
2. 유가역 부흥자, 田何
진의 분서 사건 이후에 유가역을 부흥시키는 데 있어서 책임을 다한 인물이 전하이다. 상수학이 아직 일어나기 전인 무제에서 문제 시대에 활약한 田何는 오랜침체를 거쳐 진의 분서 이후에 최초로 역학의 부흥운동에 종사한 사람으로 한무제 이후 조정의 역경박사는 모두 전하역을 전수받은 인물들이므로 그들이 자연히 유가역을 연구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전하의 생애와 역학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그와 관련된 문헌을 통해 그의 생존연대와 역학의 내용이 유가역이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아무튼 선제 연간에 맹희․ 초연수․ 경방의 상수역학이 일어나기 전의 역학은 한영 계열의 역학 외에는 거의 전하의 후학이었다는 사실이다. 서한(西漢)의 경학자로서 관학을 주도하던 전하(田何)는 금문역학의 창시자로서, 전한(前漢)때에 세워진 박사(博士)의 금문역학은 모두가 전하의 전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그 인맥은 丁寬--> 田王孫--> 孟喜와 焦延壽, 梁丘賀--> 京房--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모두가 관변에서 높은 벼슬을 하였거나 대장군의 직위에 있었던 사람들로서, 금문역학의 대를 이어 오면서 소식(消息), 괘기(卦氣), 세응(世應), 비복(飛伏), 효진(爻辰), 월체납갑(月體納甲), 승강(升降), 방통(旁通), 호괘(互卦) 등과 같은 「상수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상수역」은 전한의 초기에 유교를 국교(國敎)로 진작시킨 바 있는, 동중서(董仲舒 BC179-104)의 저작인 春秋繁路에 쓰여있는 음양과 오행에 대한 해설문으로부터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역경(易經)의 해석하는 방법이 우주의 무한한 변화와 인간의 길흉을 상(象)과 수(數)로서 해명하려하고 있으나, 예컨대 「상수역」의 한 분야로서 점후역(占候易)이 있는데, 하늘에 나타난 해 달 별 구름의 모양과 빛깔 등의 움직임을 보고 국가와 인간의 길흉을 점치는 일을 하여 왔으나 그 근거가 미약하고 황당무계한 해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우주의 구조와 무한한 변화에 입각하여 인간의 도덕적 당위(道德的當爲)를 도출해 내려는 의리역(義理易)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가역의 흥성과 쇠퇴
한대의 역학은 유가역과 상수역이라는 전혀 다른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역학이다. 물론 한대 역학의 주류는 상수역이다. 그러나 유가역이 전하와 그 계승자들에 의해 한때 흥기했고 상수역의 흥기에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전하 이후 유가역의 흥성과 쇠퇴 과정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서한시대 유가역의 저작에 관해서는 『한서』「예문지」역13가 도서목록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 의하면 총 18종 가운데 유가역이 10종, 도가역 1종, 상수역 7종으로 나타나 있다. 이 가운데 한영의 유가역 1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하의 유가역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하 이후에 왕돈, 주왕손, 복생 등 세 계열은 별다른 성취를 이루지 못했고, 정관 계열의 역학이 확대 발전하였다. 정관은 항생에게 역을 배우다가 전하에게 배웠다. 나중에는 동문인 주왕손에게도 역을 배워 전왕손에게 전했고, 전왕손은 시수․ 맹희․ 양구하에게 전했다. 이후 유가역이 크게 빛이 나 조정에서 3가 역학박사를 설치하여 유가역이 융성했다. 시수는 나중에 승상이 된 장우와 회계태수가 된 노백에게 유가역을 전했고, 승상 장우는 대사공이 된 팽선과 구경이 된 대숭에게 전했고, 노백은 모막여와 병단에게 유가역을 전했다. 이들은 청렴으로 이름났고, 모막여는 상산태수가 된 유명한 사람이다.
梁丘賀는 본래 태중대부 京房(초연수의 제자 경방이 아니라 양하의 제자인 경방이다)에게서 역을 배우다 다시 전왕손에게 배웠는데 특히 서술에 뛰어났다. 그는 역을 아들 양구림에게 전했는데 양구림은 왕준과 오록충종에게 전했는데 오록총종은 다시 장중방과 등팽조, 형함,장빈에게 전했다.
시수와 양구하는 유가역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맹희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맹희는 유가를 버리고 상수로 학문적인 전환을 한다. 그는 학술 풍조의 전환을 이끈 인물로 상수역의 천하를 연 선구자이다. 그의 제자들인 백광과 적목은 역경박사가 되었다. 시수․ 양구하․ 맹희의 세 학파의 후계자들인 장우와 팽선의 학, 사손장․ 등팽조․ 형함의 학, 적목과 백광의 학은 동한의 원제․ 성제 시대에 우열을 다투면서 유가역이 극성을 이루었다.
전하 계열의 유가역 외에도 또 다른 계열의 유가 역학가가 한영이다. 한시로 유명한 한영은 『한서』「유림전」을 보면 역학에 관한 내용이 절반이 되는데 효문제 때 박사가 되었고 손자인 韓商도 박사가 되었다. 후손인 한생도 한영의 역을 전수받았다. 개관요는 원래 맹희에게 역을 배웠으나 한생의 제자가 되었다. 전하 계열의 역은 이미 사라졌지만 한영역은 『한시외전』에 완전하게 여섯 구절이 남아있다.
그러나 맹희의 유가역에서 상수역으로의 변화는 역학의 혁명으로 발전하여 원제(재위 기원전 48년~기원전 33년)․ 성제(재위 기원전 32∼기원전 7) 사이에 경방의 역이 박사로 설치되자 유가역은 급속히 쇠퇴하고 맹희와 경방의 역학이 대단한 세력을 형성했다. 당대의 대유학자인 마융․ 정현과 같은 인물들까지도 상수역이라는 거대한 흐름속으로 들어갈 정도로 동한 이후 유가역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이와같이 상수역이 유가역을 대체한 것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데, 한대 유가역의 내용은 선진 유가의 십익 의리로의 복고였지만, 당대의 새로운 사조는 음양․ 오행․ 재이 등의 사상으로 결국 학술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하여 맹희가 최초로 유가역을 포기하고 상수역을 제창하자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유가역이 완전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유가역은 상수역에게 학술의 대세를 양보했으나 공자 이후 오랫동안 침체된 역학을 전하 한 사람의 힘으로 다시 진작시켜 결국은 원제․ 성제 시대에 성세로 발전했고, 상수역의 융성에 기초를 마련한 역할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동한의 시대는 상수역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Ⅲ. 상수역학의 발전과정과 역학관점
1. 한대역학의 경향과 시대적 배경
한대 시대의 역학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경향이 있었다. 첫 번째 경향은 맹희 ․ 초연수․ 경방으로 대표되는 관방역학이다. 이 학파는 역학방법에 있어서 괘상과 『주역』의 몇몇 숫자를 연구하는데 집중하였음으로 인하여 후대에 象數派라 부르게 되었다. 이 경향은 한역의 주류를 대표하여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양한 역학의 두 번째 경향은 費直으로 대표되는데, 비직의 역학서는 전하지 않으나 후대에義理學派로 발전하였다. 이 학파는 한대 초기의 역학전통을 계승하여 魏晉 玄學派 역학의 의리중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 경향은 嚴君平과 揚雄으로 대표되는 역학으로 道家黃老之學과 결합하여 음양변역을 천명하는 학설이다. 한대 역학의 세 경향은 모두 그 시대의 정치․ 문화 ․ 사조 ․ 학술 사상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으며, 관방역학이 한역의 주류였다. 맹희 ․ 초연수 ․ 경방이 창시한 한역 상수학파는 중국 역학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즉 송대의 周敦頤․ 邵雍․ 朱震 등의 상수학가와 청대에 혜동은『易漢學』에서 장혜언은 『虞氏易』에서 한역 상수학을 대단하게 받들었다.
한대의 의리역의 업적과 영향은 상수파에 비해 약하여 위진시대의 왕필대에 와서야 확립이 되고 의리역을 선양한 인물은 程頤이다.
이렇게 한대 시대의 역학이 다양성을 보이는 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의 사회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讖緯 신학이 범람하였다. 유방, 한무제, 광무제 등의 황제들은 참위와 도참으로 국가대사에 활용했다. 成帝때는 緯書로 經義를 추리 연역하자 참위가 경학과 합류하여 더욱 성행했다. 둘째 한무제 이후 경학이 흥성하였다. 경학의 今文과 古文의 구분이 있는데, 먼저 흥성한 금문경학의 주된 특징은 유가와 음양가의 학설을 합쳐 천인감응의 이론을 얽어 낸 점이다. 도참과 재이 등의 미신과 지나치게 투합하여章句之學이라 부를 만큼 통속적이고 자질구레하였다.
금문경학을 대신한 고문경학가는 참위설에 반대하고 경전의 해석도 훈고에 통하고 대의를 밝히되 장구를 일삼지 않았다. 費直은 전한의 경학자인데 古文易學인 費氏易의 창시자로서, 고문역학의 시작은 비씨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학설이 처음에는 민간에 유전하다가, 後漢에 이르러 馬融 (AD 79-166)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며, 鄭玄( 127-200)또한 마융의 제자로서 고문역학인 費氏易을 연구하였으나, 정현은 금문역학과 고문역학의 융화에 노력한 공이 크므로 오늘날까지도 그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다.
그 이후로 삼국시대 魏의 王弼 (226-249)은 『주역』을 주석할 때에, 費氏易에 근원을 두어 象數이론을 모두 없애고 여기에 다시 義理思想을 덧붙여서 『周易注』 6권을 저술하였는데, 唐에 이르러 孔子의 32대 손인 孔穎達( 547-648)이 찬술한 『五經正義』중에 『周易正義』의 근원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十三經注疏本』 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2.상수학파의 흥성과 발전 과정
상수학파의 이론체계는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점차 형성된 것이다. 제1단계는 한선제 시대에 괘기설이 출현하여 이론들을 갖추게 된 단계인데 대표자는 위상, 맹희,초공 등이다. 초공의 이름은 延壽이다. 맹희에게서 역을 배워 경방에게 전수하였다. 그의 역학은 災變에 특장이 있어, 4괘를 나누어 하루씩 당직시켜 일을 맡게 하고 , 비바람과 추위 더위를 후로 삼아 각각 점험이 있도록 했다. 저서에 『焦氏易林』16권이 있다.
제 2단계는 한의 원제․ 성제 때에 경방과 그 제자들에 괘기론을 발전시켜 완성하였다. 제 3단계는 서한말의 애제․ 평제 때에 위서가 유행하여 괘기설을 한층 신비화하고 상수로 역리를 해석하였는데, 말류에 흘러 음양재변과 참위미신을 선양함을 주내용으로 하게 되어 후대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다.
제 4단계는 동한시대이다.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마융 ․ 정현 ․ 순상 ․ 우번 ․ 육적 등 경학가가 맹희 ․ 경방의 괘기설을 발휘하고 緯書를 인용하여 『역』을 해설한 여러 가지 논법이 등장한 점이다. 이 새로운 체계에는 오행상생설 ․ 爻辰說 ․ 升降說 ․ 互體說 ․ 半象 ․ 逸象 ․ 旁通 따위가 있다.
이와같이 상수학 체계는 양한 시대에 네 단계의 발전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상수학의 체계는 본질적으로 주역에 있던 복서 미신의 측면이 발전하면서 많은 새로운 것들이 부회, 천착되었다. 이것들이 과학적인 가치를 결여하고 있어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상수역학은 한역의 주류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이 크기에 역사적으로 직시하고 논평을 해야 한다.
3. 孟喜의 卦氣說
맹희는 괘기설을 주장한 한대 상수역의 개조이다. 괘기역학이란 『周易』의 卦爻象과 曆法의 諸要素를 결합시켜 그로써 天道의 定律을 揆測하고 人事의 吉凶을 占候하여 天仁相感合一의 妙理를 밝히고자 하는 易學이다. 괘기역학은 특히 陰陽消息과 五行轉德論을 思想基調로 하여 天人相感體系를 易學上에 조명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음양설로『 周易』을 해석하고 이 괘상으로 1년 절기의 변화를 해설하였다. 즉 8괘나 64괘를 4계절, 12월, 24절기, 72후에 배당하였는데, 이것이 괘기로 인간사의 길흉을 추단하였다. 맹희의 전력은 한서 유림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맹희는 자가 장경 동해의 난릉 출신이다. 부친은 맹경이다.
맹희는 부친이 전왕손으로부터 역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열전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사람에게서「역가후음양재변서」를 얻었다고 사람들에게 떠들어댔다. 동시에 전왕손이 죽을 때 자기 무릎을 베고 역을 전해 주었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여러 유학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동문인 양구하는 맹희에 대한 그 유학자들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정당한 것으로 증명한 바 있다.
“전왕손은 시수에 의해 장사지내졌고, 그때 맹희는 동해로 돌아가 있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촉의 조빈이 소수서를 좋아하여 그것이 역이라 여기고, 그것으로 역의 글을 수식하였다. 그는 기자라는 어진 신하가 어리석은 군주를 만나 화를 당한다는 기자 명이를 해석하면서, 그것은 음양의 기가 기자를 없애버린 것을 말하는데, 기자는 만물의 뿌리가 자라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조빈의 교묘한 주장을 반박하지 못한 역학가들은 그것은 고법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역학이 맹희에게서 배웠다고 하면서 맹희의 이름을 빌려 역학가로서 행세하였다. 그러나 맹희의 학설은 조빈이 죽고 그나마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맹희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불신 당했다.
그는 효렴으로 천거 받아 낭과 곡대서장이 되었다가 병 때문에 면직되어 승상연이 되었다. 박사에 결원이 생기자 사람들이 그를 천거했지만 그가 스승의 학설을 고쳤다는 말을 들은 황제는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맹희는 같은 고을의 백광과 패의 적목에게 전했는데 그들은 다 박사가 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적목과 백광의 학이 있다고 한다.”
고회민 등의 주장에 의하면 맹희가 현대 상수역을 개창한 최초의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근거는 경방전이다.
“초연수는 일찍 맹희에게서 역을 배웠다고 말했다. 맹희가 죽자 경방은 초연수 역을 맹희역이라고 여겼다.”
이곳의 기록을 보면 맹희가 초연수보다 연장자이고 역림의 저자인 초연수 역이 맹희에게서 비롯됐으므로 상수역의 개창자는 곧 맹희라는 주장이다. 맹희와 초연수는 여러모로 보아 서로 교류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초연수로부터 역을 전수받은 경방전에 보면 ‘초연수가 은사의 설을 배웠고’ ‘맹희에게 일찍 역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초연수에게 역을 가르친 사람이 은사였듯이 맹희도 그가 획득한 「역가후음양재변서」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고회민은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스승으로부터 역을 전수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결국 한나라의 상수역은 초연수로부터 역을 전수받은 경방에 의해 본격적으로 확대 발전되어 나갔지만 맹희가 선배이고 초연수가 후배이므로 한나라 이후 상수역의 출발은 맹희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맹희 역설의 특징은 당대의 고승이었던 일행에 의해 정리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64괘 384효를 1년의 4시 12월 24기 72후 365일에 배합한 괘기설이다. 먼저 그의 「大衍曆議」에 인용하고 있는 맹씨장구의 4正卦說을 살펴보자.
坎․離․震․兌의 24기는 차례대로 한 효씩 주관하며 운행한다. 그 첫 번째가 冬至와 夏至, 春分과 秋分이다. 坎은 음이 양을 감싸고 있으므로 正北쪽(절기상 동지)으로부터 미약한 양이 아래에서 움직여 올라가지만 이르지 못한다. 2월까지 가면 응고한 기가 사라지고 坎의 운행이 끝난다. 춘분은 震에서 나오는데 비로소 만물의 으뜸으로 안에서 들어 주관하니 여러 음이 변화하여 그것을 따른다. 正南(절기상 하지)에 이르면 만물이 풍성하게 커지는 변화가 그치고 진의 작용이 끝난다. 離는 양으로써 음을 감싸므로 하지로부터 미약한 음이 땅 속에서 생겨나 쌓이지만 현저히 드러나지는 못한다.
8월에 이르면 문명의 질이 쇠퇴하고 離의 운행이 끝난다. 中秋는 음이 兌에서 드러나 비로소 만물의 말단을 따라 안에서 주관하니 여러 양이 내려와 그것을 잇는다. 동지에 이르러 하늘의 은택이 끝나고 태의 공이 끝난다. 그러므로 양 7의 고요함은 감에서 시작되고 양 9의 움직임은 진에서 시작되며 음 8의 고요함은 이에서 시작되고 음 6의 움직임은 태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사상의 변화는 모두 6효를 겸하지만 그 안에는 계절에 따라 법칙에 맞는 감응이 갖춰져 있다.
맹희의 4正卦說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역의 기본 8괘 가운데 1년 24절기를 대신해서 나타낼 수 있는 괘상은 문왕 후천 8괘의 4正卦다. 그가 말하는 坎․離․震․兌는 모두 효가 24효가 되고 하나의 효는 하나의 절기를 대신하는 괘상의 움직임이다. 그 가운데 감과 이는 양과 음이 서로를 감싸고 있는 점에서 음과 양의 숨고 드러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양이 갇혀 있고 음이 드러나 왕성한 점에서 보면 冬至 때의 坎(☵)이다. 양이 드러나고 음이 갇혀 있는 점에서 보면 양의 기운이 왕성한 夏至 때의 離(☲)다. 다만 그것은 그 절기의 시작에 해당하며 다음 절기의 추분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맹희 괘기설의 특징이다. 이는 우리가 일년의 운행에서 삼복의 의미와 연결해 볼 때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에서 시작한 양의 왕성한 離卦는 가을의 추분까지 사라지지 않고 작용을 하므로 오행의 庚金은 이미 하지를 지난 뒤에도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離卦의 아래 엎드려 있다고 하여 삼복이다. 고회민의 주장대로 맹희의 사정괘설은 다음과 같은 설괘전의 기록을 참고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帝出乎震, 齊乎巽, 相見乎離, 致役乎坤, 說言乎兌, 戰乎乾, 勞乎坎, 成言乎艮.
(上帝가 震에서 나온다. 巽에서 가지런하고, 離에서 서로 보며, 곤에서 역사를 이루고, 兌에서 기뻐하고, 건에서 싸우며, 감에서 위로하고, 艮에서 이룬다.)
최경의 周易探玄에 근거하면 이곳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절기로 도표화해 나타낼 수가 있다.
立夏 巽(손)
夏至 離(이)☲
立秋 坤(곤)
春分 震(진)☳
秋分 兌(태)
立春 艮(간)
冬至 坎(감)
立冬 乾(건)
배치상의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봄철의 괘상인 제출호진에 대해서만 집해의 내용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최근은 帝出乎震의 帝가 하늘의 왕기라고 말한다. 곧 춘분에 이르면 우뢰인 왕기로 만물이 출생하는 의미라는 이야기다. 이는 맹희에게서 보면 帝出乎震으로 震이 나오는 춘분의 때다. 그 이전까지는 겨울에 해당하는 감의 효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와 추분 및 동지도 마찬가지다. 하지가 되었다는 것은 離괘가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추분과 동지가 되었다는 것은 태와 감이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도표로 이를 구체화 시켜보자.
離九三大暑
離六二小暑
離初九夏至
震上六芒種
震六五小滿
震九四立夏
離☲
震☳六三穀雨
震☳六二淸明
震☳初九春分
坎☵九五雨水
坎☵上六驚蟄 坎☵六四立春
震 ☳
兌☱
離☲구사立秋
離☲六五處暑
離☲上九白露
兌☱初九秋分
兌☱九二寒露
兌☱六三霜降
坎☵
坎☵六三大寒
坎☵九二冬至
坎☵初六冬至
兌☱上六大雪
兌☱九五小雪
兌☱九四立冬
이 도표에 대한 맹희의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지 초부터 中孚가 작용한다. 1개월의 책(음양의 변화를 나타내는 수)은 9, 6, 7, 8이니, 이것이 30이다. 괘는 땅의 6이고 후는 하늘의 5다. 5와 6이 상승하여 소식영허가 한차례 변한다. 12변을 한 뒤에 세월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坎,震,離,兌는 24기가 차례로 1효씩 주관한다. 그 처음은 동지와 하지의 2至 및 춘분과 추분의 2分이다.
習坎은 음이 양을 감싸므로 저절로 북방이다. 미약한 양이 아래에서 운동하여 올라가되 채 도달하지 않고, 2월에 극하여 응고의 기가 소멸하면 坎의 운행이 끝난다. 춘분은 震에서 나와 처음으로 만물의 원을 근거로 안에서 주장하니 뭇 음들이 화하여 따른다. 정남에서 지극하여 풍부 성대한 변이 다하면 震의 공이 마무리된다. 離는 양이 음을 싸므로 저절로 정남방이다. 미약한 음이 지하에서 생겨나 쌓이되 채 드러나지 않으니, 8월에 이르러 문명의 질이 쇠하면 離의 운행은 끝난다.
중추는 음이 兌에서 형태를 이루어 비로소 만물의 끝을 따라 안에서 주장하여 뭇 양들이 내려가 받든다. 정북방에서 지극하여 천택의 베풂이 다하면 태의 공이 다한다. 그러므로 양7(陽七)의 고요함(靜)은 坎에서 비롯하고, 양구(陽九)의 움직임(動)은 震에서 비롯한다. 음8(陰八)의 고요함(靜)은 離에서 비롯하고, 음육(陰六)의 움직임(動)은 兌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4상의 변화가 모두 6효를 겸하며, 中節의 응함이 갖추어진다.(신당서 권 27)”
다음으로 맹희의 12월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맹희와 경방의 12월괘 비교표
11월
12
1
2
3
4
5
6
7
8
9
10
맹희
월건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소식괘
복괘
임
괘
태괘
대장
쾌괘
건괘
후괘
돈괘
비괘
관괘
박괘
곤괘
경방
월건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
대응괘
후괘
돈
괘
비괘
관괘
박괘
곤괘
복괘
임
괘
태괘
대장
쾌괘
건괘
위 도표는 맹희와 경방의 1월괘 비교표인데 위 도표에서 보듯이 4월과 10월은 건괘와 곤괘는 같으나 나머지 괘는 서로 음양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京氏易傳』에서
음은 오를 따르고 양은 자를 따른다. 는 것으로 자오가 서로 음양 관계임을 말하는 것으로 『黃帝內徑』의 5운6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4정괘설 외에 맹희는 12벽괘설을 주장했다.
12벽괘설은 1년의 12달을 역의 64괘 중 12괘로서 구분하여 나타내는 방법이다. 벽이라는 글자는 원래 고대에 圭와 君을 뜻하였다. 또 圭는 해시계를 뜻하는 말로 하늘의 해가 움직이는 모습을 측정하는 수단이었고, 임금에 해당하는 君은 사계절의 만물을 통솔하는 주재자의 개념이다. 하나의 양이 아래로부터 지뢰복으로 자라나면서 중천건이 되고, 다시 하나의 음이 천풍구로부터 자라나면서 중지곤이 되며 일년 12달을 차례로 주관한다면 양이 자라날 때는 양이 주관하고 음이 자라날 때는 음이 주관한다. 그래서 12월괘는‘음이 작용하여 消가 되고 양이 작용하여 息이 된다.’는 의미에서 12소식괘라고도 불린다.
4. 경방 상수역학의 의의와 영향 및 개념
한대의 역학가인 경방(기원전77~37)은 상수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맹희의 괘기설을 발전시켜 이를 당시의 음양오행설과 결합시킴으로써 독특한 역학 체계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전하는『京氏易傳』에 근거하면 경방 역학은 괘기설, 팔궁괘설, 오행설, 음양2기설, 납갑설, 팔괘기원설, 『周易』본질론 등을 주로 포괄하여 내용이 대단히 풍부하다.
경방의 역학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를 계승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정현은 경방의 납갑설과 오행설을 이어 받아 발전시켰고, 虞翻은 互體說, 卦變說, 納甲說 등을 전승했다. 위백양은 경방의 납갑설을 계승하여 月體 納甲說을 주장했다. 조위시기의 관로(208~255)는 오행, 주역, 절후, 풍점, 관상, 천문, 기문 등에 통달하여 자유자재로 괘를 잡아 미래를 보았는데, 음양오행, 주역, 절후, 납갑설, 풍점 등은 경방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鐵板身數』를 저술한 소강절은 주역․ 명리학과 元會運世이론과 경방의 납갑설, 8궁설, 世應說, 飛伏說, 六親說, 五行說, 互體說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京房評傳』을 저술한 盧央은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의 주요이론이 맹희와 경방의 이론이라고 말한다.『적천수』의 유백온이 지은 황금책과 경방의 이론인 오행역의 世應說, 8宮說, 納甲納地說, 陰陽五行說, 飛伏神說, 六親說 등을 그대로 이어받아 王洪緖는 『卜筮正宗』을 지었다.
반면에 왕필, 정이천, 황종희, 왕부지 등은 경방의 상수역에 혹평을 가하였다. 이와같이 경방을 보는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경방의 역학은 맹희나 초연수에 비해서 괘효에 宮과 納甲과 숫자와 오행을 대입하여, 이런 것들로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오행상수역을 창안하여, 괘사의 길흉 해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점에 있어서 의리역의 왕필이나 정이천에 견줄만한 상수역학자로 평가할 만하다.
아래에서는 경방 상수역의 주요 개념들에 대한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2. 경방 상수역의 주요개념들
1)互體說
호체설은 경방이 창안한 것으로, 호체설의 근거가 되는 이론이 『계사전』에 있다. 잡다한 것들 사이에서 덕을 가려내고 시비를 분별하는 것은 중효가 아니면 안 된다.
이는 초효와 상효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개 효로 새로운 괘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天水訟卦에서 2,3,4효는 離卦이고 3,4,5효는 巽卦로, 風火家人이라는 괘를 다시 하나 더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이 호체이다. 경방이 호체설을 창안한 주목적은 괘상을 증가시켜 괘의 해석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다. 경방은 64괘를 호체로 부연 설명한 것이 맣으며, 소강절은 호체설을 계승하여 『皇極經世書』에서 이를 많이 이용했다.
2) 納甲納地說
이것은 괘의 각 효에 오행을 붙이는 방법으로, 천간을 붙이는 것을 納甲이라 하고 지지를 붙이는 것을 納地라고 한다. 이 이론에서 주가 되는 것은 지지이므로 납지법이라 불러야 하나 통상 納甲法이라 부른다. 납갑법은 경방이 최초로 주장한 이론으로 경방역학의 핵심이론이다. 경방은 납갑을 붙이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乾卦 六爻에 天干과 地支를 같이 붙이면 初爻에 甲子, 二爻에 甲寅, 三爻에 甲辰, 四爻에 壬午, 五爻에 壬申, 上爻에 壬戌을 붙이니 下卦는 初爻로부터 甲子 甲寅 甲辰이 되고 上卦는 壬午 壬申 壬戌이 된다.
坤괘 六爻에 地支를 初爻로부터 순행으로 붙이면 初爻에 乙未, 二爻에 乙巳, 三爻에 乙卯, 癸四爻에 癸丑, 五爻에 癸亥, 上爻에 癸酉을 붙이니 下卦는 初爻로부터 乙未 乙巳 乙卯이 되고 上卦는 癸丑 癸亥 癸酉이 된다. 나머지 坎,艮,巽,離,兌괘도 이와 같이 붙이면 된다.
戌
亥
申
酉
4.巽
辛
9.離
己
2.坤
乙.癸
午
未 坤
3.震
庚
5
7.兌
丁
艮 辰
巳 兌
坎 寅
卯 離
7.艮
丙
1.坎
戊
6.乾
甲.壬
乾 震 子
丑 巽
3)팔궁괘설
경방의 역 해석은 64괘를 새롭게 배열하여 乾에서 시작하여 歸妹에서 마친다. 경방은 4개 본괘를 거듭하여 이루어진 8괘 중괘를 八宮 혹은 八純이라 칭한다. 각 궁괘는 괘 7개씩을 통솔하는데, 궁괘는 上世라 칭하고 통솔받는 7개의 괘는 1세․2세․3세․4세․5세․遊魂․歸魂이라고 한다. 『경씨역전』은 이것들을 한데 아울러 풀이하길 『역』에는 4세가 있으니 1세와 2세는 地易이고, 3세와 4세는 人易이며, 5세와 八純은 天易이고, 유혼과 귀혼은 鬼易이다라고 하였다.
청대 인물인 惠棟의『易漢學』은 경방의 의리와 체제에 의거하여 일목조연하게 「八宮卦次圖」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에 의하면 상세의 8중괘는 모두 불변괘이다. 1세괘에 속한 것은 하나의 효가 변한 것으로 양효가 음으로 변하거나 음효가 양으로 변하되 모두 초효가 변하였다. 상세 팔순괘의 배열순서는 건․진․감․간․곤․손․리․태이다. 이 설은「설괘전」이 건곤을 부모괘로 삼고 각각 3남3녀를 통솔케 하며 앞의 4괘를 陽卦, 뒤의 4괘를 陰卦로 한 데서 기원하였다. 帛書『周易』에도 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유혼이나 귀혼의 명칭은 「계사전」의 내용에 뿌리를 두어 경방은 유혼괘와 귀혼괘를 鬼易이라고도 한다.
팔궁괘설의 내용은 세 가지로 귀결된다.
첫째, 건곤 2궁이 음양소장한다는 설이다. 경방이 이와 같이 64괘를 배열한 것은 괘효상의 변화가 음양소장의 과정임을 표시하려는 의도였다. 예컨대 건궁의 각 괘를 살펴보자. 乾卦는 6효가 모두 양으로, 1음이 생겨남으로서부터 5음이 생겨남에 이르게 된다. 유혼괘 내괘☲ 외괘☷는 양이 모두 박탈당할 수 없어 다시 양으로 복귀하되, 내괘의 위치에 까지는 회귀하지 못하고 다만 외괘 4위가 유탕함을 표시한다. 귀혼괘大有상괘☲ 하괘☰ 에 이르러서는 하괘☰가 건으로 변하여 비로소 本位로 복귀한다.
이상은 음이 번식하고 양이 소멸하는 과정을 강론하였다. 또 곤궁의 각 괘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곤괘(☷☷ 坤)는 6효가 모두 음으로 음기가 극성하다. 1세에서 5세는 1양부터 5양까지 생겨나고, 강의 유를 결단하여 음의 도가 소멸한다. 유혼괘는 음의 도가 전부 소멸될 수 없어 유혼으로 되돌아감을 표시한다. 귀혼괘에 이르러서는 귀혼하여 근본으로 회복한다. 이상은 양이 번식하고 음이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였다.
이 건곤 2궁이 음양소장한다는 설은 사실 맹희의 12벽괘설에서 나왔다. 그러나 경방의 배당한 월분은 맹희의 월분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건곤 2괘의 월분 배당만 같을 뿐으로 기타 괘의 월분은 상반된다.
둘째, 世應說이다. 경방은 1괘의 길흉이 주로 그 괘 가운데 1효의 상에서 정해진다고 보았다. 1괘6효에서 초효는 元士, 제2효는 大夫, 제3효는 三公, 제4효는 諸候, 제5효는 天子, 상효는 宗廟로 여섯 효가 각기 계급적 지위를 지닌다. 각 괘는 모두 1효가 주가 된다. 이 세응설은 사실 점술에 이용되어 『경씨역전』이 말하였듯이 길흉을 정하려고 1효의 상을 취함에 주로 기능하였다. 진괘(외괘☲내괘☷晉)를 해석하여 제후가 거세하니 도리어 원사에 응한다고 하였다. 진괘는 건궁의 유혼괘로 그 구4효는 건괘의 양효로 회복되는 것이므로, 제4효가 주가 됨을 두고 제후 거세라고 하였고, 구4효가 초육과 상응하므로 도리어 원사와 응한다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모두 점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셋째는 飛伏說이다. 경방은 괘상과 효상에 모두 비가 있고 복이 있다고 하였다. 비란 볼 수 있고 바깥으로 나타난 것이요, 복이란 볼 수 없고 배후에 숨은 것이다. 비와 복은 서로 대립하는 괘상과 효상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건괘의 상은 볼 수 있는 것은 (☰☰乾)으로 이것이 비이다. 그 대립하는 괘상은 곤괘로 건의 상의 배후에 숨어 볼 수 없으니 伏이다. 경씨역전에 건괘는 곤과 비복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고, 곤괘는 건과 비복의 관계를 이룬다고 하였다. 비복설은 각 괘로 하여금 본괘의 괘상 이외에 괘효상을 하나 더 가지게 하는 것으로 점산술로 보면 인간사의 길흉에 갖다 붙이기가 더욱 편하다. 비복설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