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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빌립보서 4장 4-9절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를 일반적으로 기쁨의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쁨과 관련된 내용이 자주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2장 17절과 18절에서도 복음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매를 맺는 것이 성도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3장 1절에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모든 기쁨은 어디 안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주님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평안함 가운데 있었던 시기가 아니라, 위험함이 있는 시기였습니다. 외적으로는 박해가 있었고, 내적으로는 거짓 복음을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기록한 바울 자신만 봐도 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한다고 말하고, 또한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주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런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4절 말씀을 보시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3장 1절에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만 말했다면 여기서는 ‘항상’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풀자면 기쁨을 빼앗길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만큼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그런 상황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지 못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외적으로는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복음이 교회를 어지럽힐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보면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골치가 아플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볼 때 크고 작은 어려움, 그리고 그런 어려움으로 인해 고난의 시기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무엇이냐? 주님 안에 있는 것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기쁨은 빼앗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이라는 것이 그 정도가 다양하여 때로는 약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강해지기도 하는 면이 있습니다. 강했다가도 어떨 때는 약해지기도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4장 3항).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신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견디게 하시는 견인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침내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쁨을 빼앗기는 일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를 마칠 때 쯤 뭐라고 다시금 권면하는가? 주 안에서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우리가 가진 이 기쁨은 주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기쁨과는 분명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기뻐한다고 할 때 주로 어떤 것에 대해 기뻐한다고 말합니까? 세상의 것이 주된 내용을 이룹니다. 좋은 대학에 가면 기뻐하고, 좋은 직장에 가면 기뻐하고, 또 사업이 잘 되면 기뻐합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내 자녀가 그렇게 되면 기뻐합니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잘되면 기뻐합니다. 반대로 그것이 사라지면 기쁨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빌립보서 3장을 통해서도 확인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했습니다(빌3:8). 그것 때문에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를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7-8). 달리 말하면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럽다고 생각할만한 것들이 아니란 소리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어떤 말까지 했느냐? 의식주를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배를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말했습니다(빌3:19). 이 땅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그 결과는 멸망이더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산 생애는 몇 년, 혹은 몇 십 년이지만 멸망의 세월은 영원이더란 것입니다. 당연히 이 땅에서 얻는 기쁨은 유한할 뿐이지만 주님 안에서 얻는 기쁨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기쁨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되, 누구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느냐?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5) 소위 예수 없이 배부른 자들, 예수 없이 웃는 자들, 달리 말하면 세상적으로 볼 때 의식주가 풍부한 자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자들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밖에서 기뻐하는 모든 것은 이 땅에서는 웃는 것으로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화가 미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으로 기쁨을 삼는 자들은 이 땅에서는 기뻐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때로는 빼앗기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 모든 것은 사라질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결코 그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주시는 것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도 무엇이냐? 바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대한 것들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기쁨을 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기쁨을 누리셔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는 것(빌3:8-9), 아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cf.눅12:21), 그것으로 기쁨의 내용을 삼으셔야 합니다.
이런 기쁨이 성도의 기쁨이요, 너희 역시 성도로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한 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5절을 보시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 안에서의 기쁨이 우리의 내적 상태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외적 상태는 무엇인가? 관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관용이라는 말은 온화함,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즉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로서 어떤 사람을 만날지라도 그 온화함, 부드러움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너희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의 관용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용이라는 말 속에는 절제, 인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비록 너희 삶 가운데 박해도 있고, 또한 거짓 복음으로 말미암은 어려움도 있지만, 혹은 실제 우리 삶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있지만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면서 인내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근심, 걱정으로서 우리의 얼굴과 마음이 지배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끝가지 인내하고, 참고,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한 뒤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까웠다, 심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라는 것이고, 인내하면서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 그리고 복음을 반대하기 때문에 박해하는 자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도 돌아보게 되는데, 앞서 우리의 기쁨은 주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할 때 우리는 세상적인 즐거움에 대해서도 무분별하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절제를 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도라고 해서 항상 좋은 사람만 만나는 게 아닙니다. 성도라고 해서 좋은 상황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바울의 상황처럼 박해를 받는 상황도 있고, 혹은 알게 모르게 어려운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한 바울처럼 시기하는 사람들이나 대적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박해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반대자들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막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주변의 상황이나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복된 내용들은 결코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관용을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라도 온화함, 부드러움을 잃지 말아야 하고, 또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주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고, 심판 때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은 “어떤 대학을 나왔는가? 어떤 직장을 가졌는가? 얼마만큼 돈을 모았는가?” 여기에 있지 않고, “얼마나 합당한 열매를 맺었는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열매를 원인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는 어떤 자인가?” 했을 때 원수라 할지라도 원수로 대하지 않는 자로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성경에 보면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보면 실제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게 됩니다. 우선 14절 말씀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7절에도 보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그러면서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19절부터 21절도 보시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관용이란 이런 것입니다. 특히 원수 갚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때문에 원수일지라도 우리는 그런 원수 앞에서 인내해야 하고, 인내로서 온화함을, 인내로서 부드러움을 나타내 보이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열매를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로 오시면 그런 의미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는 완전한 존재로 있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시험꺼리들이 찾아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내 앞에 원수가 있다면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혹 어려움이 있다면 그런 가운데서도 인내해야 하지만 원망, 불평이 더 쉬운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의식주만 하더라도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신으로 여긴다고 말할 정도로 민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입니다. 마땅히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지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어떤 유혹이 있느냐?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무 것도 염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이 부분과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왜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에서 3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 보시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식주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믿음이 작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아버지로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그리고 창조하지는 않으셨지만 죄에 대하여 조차 섭리로서 다스리십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떠난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우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가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믿습니다. 당연히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도 우연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든, 좋지 못한 사람이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 가운데 우연이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좋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다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옥에 갇혀서 매를 맞는 경우도 생기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잘 안 될 때도 있고, 혹은 사업이 망하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 좋은 일이 있을 때만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가?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좋든, 좋지 못하든 하나님은 모든 만물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하여 섭리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어떤 말씀도 있느냐?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해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여러분, 좋은 일만 우리에게 좋은 결과는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지 못한 일도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좋은 일 같지만 좋지 못한 결과를 줄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의 경우 죽을 병에 걸렸다가 기도함으로 15년 생명 연장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는 기도했기 때문에 15년 생명 연장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살펴봐야 하지만, 여기서 그 부분까지는 살피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다고 할 때 오늘날도 보면 오랫동안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 가운데 있지만, 오래 사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했을 때 히스기야의 경우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걸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15년 생명 연장 받은 것으로 인해 교만해졌다, 그래서 바벨론 사신이 그에게 왔을 때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함으로 결국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15년 동안 더 살면서 누구를 낳았느냐 하면 그의 아들 므낫세를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 므낫세는 어떤 인물인가 하면 남유다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히스기야 하면 기도의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개혁의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혁의 내용을 누가 다 엎었느냐 하면 므낫세가 다 엎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도를 통해 응답 받은 15년이 과연 잘된 일인가? 결과적으로 볼 때 잘되었다고만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지금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좋은 일도 그 결과가 좋지 못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좋지 못한 일이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진감래,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흥진비래, 즐거운 일이 지나가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까지 말씀하시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이 비록 그 결과로서는 나쁘지만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분으로 계시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므낫세의 경우 남유다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그런 악한 왕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회개케 만드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은혜를 드러내셨던 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의 사고는 조심해야 합니다. 죄는 죄일 뿐입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께는 피해를 가게 하지 않지만 성도에게 죄는 이미 죄 자체가 피해를 주고 있는 것과 같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죄를 멀리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염려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가?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염려를 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돌보심에 대해 무지하거나 불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일이 있을 때, 우리 마음에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기도한다는 것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염려 대신 무엇을 하도록 권면하는가 하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지만 모든 일에 대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면 기도의 응답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히스기야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15년 생명 연장시켜줬다고 할 때 15년 생명 연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 자체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사용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걸 드러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에 대해 인간은 악으로 갚을 뿐이라는 걸 보여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악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면 그런 선을 배제하고 응답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 대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데,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기도하면 기도하는 내용대로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물질이 없어 물질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렇게 응답하시는 게 가장 좋은 줄 압니다. 병이 들었는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그렇게 응답해 주시는 게 가장 좋은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그렇지 않다는 걸 여기서 보여줍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엇이 지켜지길 원하시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길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염려하게 한 원인을 제거하시는 게 가장 좋은 것으로 있는 게 아니라, 염려한 원인은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원수가 있다면 원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겁니다. 물질의 어려움이 있다면 그 물질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물질의 어려움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병이 들어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지만 기도했을 때 그 병이 낫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병의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런 염려의 원인을 제거하기도 하십니다. 이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경 자체도 그 기도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실 거라는 것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적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만큼은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특히 어떤 염려로 인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만큼은 지키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언 말씀으로 하자면 생명의 근원이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의 구원은 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고, 해결되지 않고에 따라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비록 세상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지만, 그래서 어려운 속에 있고, 고난 속에 있고, 또 그것 때문에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죄악에서 떠나 선한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증거이기 때문에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생각을 오늘 본문에서는 뭘 하겠다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지키시겠다. 특히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문제 해결은 안 될 수 있지만 무엇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가?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당연히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의 것으로 흔들 수 없는 평강인 것입니다. 너희 마음을 지키시겠다, 너희 생각을 지키시겠다.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을 주심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고, 사업이 어렵고, 힘들고, 지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문제는 여전히 내 앞에 있지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함으로 인해 그 문제까지도 문제로 봐지지 않는, 오히려 그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인해 그 마음에 평강을 맛볼 수 있는 일들로 우리에게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가? 그것도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 세상의 것이 없다고 해도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은 이 땅에서라도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길 원하십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14장 9절에서 13절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것은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더 좋은 것, 그걸 주고자 하십니다. 그럼 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더러 고통만 받으라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있지만, 그 영광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이루어가도록 하시느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형상을 가진 자로 만들기 원하십니다. 때문에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그 성령의 열매가 뭐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걸 주면 세상의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가? 아닙니다. 더 좋은 것입니다. 성령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은 분이 없는 겁니다. 그분만 계시면, 그분만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래서 우리 마음을 지키신다면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주고자 하시는가? 염려와 근심이 되는 문제 해결은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성령을 주고자 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그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시겠습니까? 8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어떤 자로 만들고자 하시는가 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무엇에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 모든 일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참되라는 것입니다. 경건하라는 것입니다. 옳은 자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정결한 자로 있으라는 것이고, 사랑 받을 만한 자로 있어라는 것이고, 칭찬 받을 만한 자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로서 덕을 나타내든지 아니면 기림, 즉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걸 말하는데, 그런 일이 있을 때도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덕을 쌓고 칭찬해주기 때문에 거기에만 이목을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럴 때에도 참된지, 경건한지, 옳은지, 정결한지, 사랑 받을 만한지, 칭찬을 받을 만한지, 물론 사랑을 받는 것, 칭찬을 받는 것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로 있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칭찬은 때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자로 자라가고 있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기쁨만을 구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세상의 기쁨을 구하다보니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세상의 잣대로만 평가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혹 어려운 상황이 오게 되면 인내함보다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 불평하는 건 아닙니까? 혹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그저 문제 해결에만 초점이 있는 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구하는 것도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 해결만, 마태복음으로 하자면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의식주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하고, 그 영광을 위해 성령의 열매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참된가? 모든 일에 경건한가? 모든 일에 옳은가? 모든 일에 정결한가?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가?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가? 혹 세상 사람들이 칭찬을 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휩쓸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도 역시 주 안에서만 자랑하는 자로 있는가?
오늘 본문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어떤 자에게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자에게 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주시지만,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결코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런 자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거짓 평안에 속지 마셔야 합니다. 세상은 세상의 것을 많이 갖추면 평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갖추기 위해 정당한 노력 이상의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제가 정당한 노력 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를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정당한 노력이 아니라 거짓과 부정, 부패 가리지 않고 이 세상의 것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력, 세상의 모든 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가져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가? 없습니다. 혹 세상적으로 볼 때 평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거짓 평안이요, 한시적인 평안일 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은 어떤 자였습니까? 부귀영화를 모두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부귀영화와 관련해 성경은 솔로몬보다 더한 자가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어떤 고백을 하게 됩니까? 전도서 1장 1절과 2절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 봐도 그것은 다 헛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하나님 없는 것보다 더 나은 인생인 겁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내용이 그것 아닙니까! 우리가 읽었지만 마태복음에서도 뭐라고 말했습니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부귀영화 다 가져봤는데 이 꽃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게 솔로몬의 부귀영화인 겁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결국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깨닫게 되어 기록한 성경이 전도서인 겁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러분, 무엇이 더 복된지, 무엇이 참된 평강인지, 무엇이 참된 기쁨인지를 성경을 따라 배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복으로, 그리고 평강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가지셔야 합니다. 어떤 자에게 복을 주시는가?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주시는가?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는가? 배우고 받고 듣고 본 자, 그리고 행하는 자에게 입니다. 8절 말씀으로 하자면 모든 일에 참되며, 모든 일에 경건하며, 모든 일에 옳으며, 모든 일에 정결하며, 모든 일에 사랑 받을 만하며, 모든 일에 칭찬을 받을 만 한 사람,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과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도 보면 같은 말을 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부디 주의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모든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열매로서 가득하시고,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강으로 인하여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시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