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 옛이야기 -
뽕잎차를 마시며
3년 동안 달라붙어 살던
마스크를 벗어 던지자
3년 동안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오복같이 조르는 병마와
뽕잎차를 마시며 아침을 마중하자
한 모금 또 한 모금
뽕잎 향을 음미하자
* 김영문 : 경호문학회 자문위원, 금서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역임, 사하향토사 발간추진위원장, 금서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역임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이던 미란이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마음이 울적했다. 흔히들 말하는 가을을 타는 거라고는 생각되지않았다. 낮에 펜션 주변에서 일을 하는 동안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밤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도 가슴이 시렸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기타를 치거나 홀로 술을 마셔도 끝내 그 외로움이란 놈은 내 주변을 맴돌았다.
마지막 날 밤, 미란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녀, 유희의 많은 부분을 알게되었다. 그녀의 가정사는 불우했다. 세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어머니로 인해 그녀는 어린시절에 아버지란 존재에 혼란을 겪으면서 마땅히 받아야할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지못했다. 그로인해 그녀는 또래남자에겐 만족이 되지 않아 자신보다 세상을 더 산 여러 남자와 교체하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생활은 자신에게 잠재되어있던 혼란과 불운의 DNA가 돌출되는 바람에 시작부터 일이 꼬이면서 그녀는 현재 불행하다. 이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병석에 누운 어머니의 반대와 아이의 장래문제 그리고 남편과 시댁의 반대 때문에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꼬리표 때문에 그녀가 서울로 간 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미란이 마지막 날 밤에 이제 유희를 받아 달라고 한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라고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예전 그녀에게 한 번 상처 받았던 내 기억의 쓴 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와의 재결합 – 현재 상황에서 나와 그녀의 유일한 선택 –을 꿈꾸면서도,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마음에 스스로 화가 치밀었다. 그런 고민으로 몇 날 며칠을 밤마다 술마시며 괴로워할 때였다. 휴대전화로 익숙한 문자가 하나 왔다.
‘내일 아침에 갈 터이니 마당에 불 피워놓을 것.’
지난여름에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달이나 펜션을 돌봐준 201호였다. 스스로 내 문제에 빠져 지친 내게 그는 보약같은 존재였다. 나는 즉각, 답장을 했다.
‘새벽에 오더라도 불 피워놓고 있겠음.’
다음날 그가 다 떨어진 자신의 트럭을 타고 아침나절에 펜션에 왔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그를 와락, 하고 껴안았다.
“있을 때는 막 부려먹더니 뭐야? 요새 펜션에 손님이 없는 거야?”
그는 의외로 시큰둥했다.
“잘 왔어. 그러지 않아도 너무 외로웠다.”
그는 내게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자신의 트럭 안에서 투망과 낚시장비를 꺼냈다.
“요새 물고기 안 낚아봤지? 지금이 적기야. 얼른 잡아 올 테니 준비하고 있어.”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가 불을 피워두래서 돼지고기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남달랐다. 그는 씩씩한 발걸음으로 개울로 향하고 나는 그를 위해 얼른 불을 피우면서 간단한 밑반찬과 술을 준비했다.
잠시 후 그는 비닐봉지에 한가득 붕어, 밀어, 꺽지, 쉬리 등의 민물고기를 담아왔다. 몇 마리는 손질 후에 구워 먹고 나머지는 잡어 매운탕을 끓였다. 나는 펜션에 오랜만에 사람 냄새가 나서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다.
“크아! 이 맛이다. 어이. 최 시인. 그동안 별일 없었어?”
“자네는 여태껏 뭐하다 지금 온 거야?”
“나야 뭐, 늘 하던 대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지. 그러다 얼마 전에 강원도 목조주택 짓는데서 잡부노릇하면서 돈도 좀 벌었어.”
그는 자신의 가방에 있는 현금을 내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런데 좀 벌었다는 게 고작 만 원 권 몇 장과 천 원짜리 몇 장밖에 없었다.
“좀 벌었다며?”
“그래, 벌긴 했는데 이곳으로 오다가 누군가 힘들다 해서 그냥 다 줘버렸어. 나야 뭐 어떻게든 먹고 살잖아.”
그다운 말이었다. 그는 몹시 배가 고팠는지 내게 밥과 김치를 요구하더니, 쉬지않고 먹고 마셨다.
“그동안 굶었냐? 밥이나 좀 사 먹고 그러지.”
“돈이 없어 그런 건 아냐.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을 그런 사정이 좀 있었어. 그건 그렇고 그때 그 여자, 펜션에 찾아왔던 유 뭐랬더라? 응. 유희 씨. 어때? 그동안 한번 찾아왔어?”
나는 그의 말에 싱긋이 웃었다. 무슨 말이든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는 그였다. 그때 병원에서 들려줬던 나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아직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두어 번 왔었다.”
“그래? 야! 이제 이 쓸쓸한 펜션에서 홀아비 생활 끝나는 것 아냐? 두 번이나 왔다면 그쪽도 뭔가 마음이 있다는 말인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그간의 일에 대해 모조리 말해주었다.
“일단 술 한 병 더하자. 냉장고에 있지? 내가 가져올까?”
그는 일순 신중한 척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경험상, 이건 자신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얼른 안내실로 뛰었다. 그는 매운탕뿐만 아니라, 내가 구운 흑돼지고기 2인분과 술 한 병을 다 먹은 다음, 입을 닦았다.
“그러니까 최 시인이 보기에는 유희 씨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이 핑계를 대며 이혼만은 안 된다고 말하지만, 내심 최 시인과의 재결합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지? 유희 씨 친구인 미란이란 여자도 그렇고?”
그의 진단은 정확했다.
“그렇지.”
“그런데 거기까지는 알고 있는데 정작, 최 시인이 결정을 못 내린다는 것 아냐?”
“그런 셈이지.”
나는 그의 유도심문에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정을 못 내리는 이유가 뭔데? 예전 상처 때문에? 아니면, 그녀의 이혼과정에서 불거질 그쪽 남편과 집안의 분란에 개입해야 하는 골치 아픈 상황 때문에?”
“말하자면 그거야.”
그러자 그는 허허, 하며 크게 웃었다.
“유희 씨를 아직 사랑하기는 해?”
그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랑이라기까진 뭣해도 그녀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그게 사랑이지 뭐야? 자기 옆에 두는 것. 이게 사랑이야. 별 것 있는 줄 알아? 이봐! 최 시인. 아직 인생 헛살았구먼. 이런 문제를 두고 고민할 게 뭐 있어. 유희 씨 전화번호 가지고 있지?”
그때 그녀가 서울로 떠나던 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아 두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에게 어떤 식이든 연락한 적은 없었다.
“있기는 해.”
“그런데 아직 전화한 적 없지?”
그는 내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응.”
“뭐야? 최 시인은 지금 청춘이 아냐. 그리고 유희 씨도 그 옛날의 화려하고 예뻤던 처녀가 아니라고. 이젠 둘 다 인생은 부조리한 것을 알만한 아저씨, 아줌마야. 얼굴은 보지 않더라도 연락을 해야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통할 거잖아. 일단 잘 안되더라고 부딪쳐야지. 그러다보면 서로의 일치되는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어. 예전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거 아니면 지금 당장 그녀에게 전화 해.”
“전화해서?”
“뭐라긴. 그냥 안부 전화부터 시작해. 그런 다음에 네가 보고 싶다. 필요하다. 이곳으로 오면 좋겠다. 그런 거지. 뭐.”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하긴 사랑의 당사자는 아무리 경험과 지식이 많아도 질서 있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럴 땐 오로지 제삼자가 논리적이고 쉬운 결론을 내리기가 더 쉬울 수 있다.
“그럴까? 그렇게 하는 게 맞을까?”
“그래. 그렇게 해. 어쩌면 유희 씨는 최 시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자신은 예전에 최 시인을 한번 배신했으니까, 양심의 가책이 아마 있을 거야.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올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대가 더 잘 알잖아.”
나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이제라도 그녀에게 문자나 전화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아아,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사랑 상담을 해주었다는 핑계로 안내실 냉장고에 있던 소주와 맥주를 몽땅 마시고선, 펜션으로 들어가 곯아떨어졌다. 나는 그와 먹던 자리를 깨끗이 정돈하고 예전 그녀와 함께 갔던 개울로 갔다. 아침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서쪽에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에야 끝나버렸다.
가을바람은 시원했다. 나는 그녀와 그때 앉았던 바위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그동안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감정의 찌꺼기가 조금씩 물에 떠내려갈 즈음,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주위는 컴컴했고 물 흐르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신호음이 몇 번이나 갔음에도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는 행여, 내가 지금 잘못 하는 게 아닌 거 싶어 마음이 불안했다. 그날, 그녀도 내 전화번호를 받았으면 분명히 목록에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내 이름이 뜬 것을 확인하고도 일부러 받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이 들자 정신이 아득했다.
나는 컴컴해진 개울의 바위에 앉아 그녀처럼 돌을 주워 던지기를 반복했다. 술이 깨려는지 머리가 아팠고 덩달아 가슴이 시렸다. 나는 한 번 더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는다면 나는 사실이지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그녀인가 싶어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최 시인님. 저, 미란이에요.”
나는 놀라면서도 실망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여보세요? 최 시인님 전화 아니에요?”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 안녕하세요. 최 림입니다.”
“네. 이제 잘 들리네요. 갑자기 전화 드려 죄송한데, 펜션 예약을 할까 해서요.”
“예약 말입니까? 언제요?”
“네. 이번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 1박 2일이에요.”
“몇 분이나 오시는데요?”
“남편과 저 둘뿐이에요. 저번에 유희랑 놀러 갔다 온 후로 남편에게 좋다고 말했더니 꼭 가보고 싶다네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제가 잡아둘게요.”
“그럼 부탁드려요. 그날 뵐게요. 그날도 마당에 불 피워주실 거죠?”
“당연하죠.”
그렇게 전화를 끊자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나는 유희에게 전화하고 그녀의 친구, 미란은 내게 전화를 한 셈이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아 실망한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개울을 건넜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