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월 상순(10수)
하루시조 182
07 01
이리 헤고 저리 헤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이리 헤고 저리 헤니 속절없는 헴만 많아
험(險)궂은 인생(人生)이 살고자 살앗는가
전전(前前)에 언약(言約)이 중(重)함에 못 잊을까 하노라
헤다 -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다.
속절없다 -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험궂다 - 험하고 거칠다.
살앗는가 – 살았는가.
전전(前前) - 아주 오래전.
이 작품 속의 화자(話者)는 조금 답답하군요. 약속(約束)도 문서로 한 게 아니고 말로 한 언약(言約)이요, 그 시간도 지날 대로 지난 아주 오래된 약속인데도 그 걸 못 어겨서 죽을동살동 살아왔다네요. 험궂은 인생이라, 어디 한 발짝 잘못 디밀면 낭 아래로 떨어질 줄 모르는데, 이리 헤엄쳐 보고 저리 헤쳐 나가보고, 정말로 속절이 없을 수밖에요.
헤다, 헤엄이 여기서 나온 명사로군요. 온도 맞춰진 수영장에서 운동으로 즐기는 헤엄도 쉬운 일이 아닐진대 난바다에서의 목숨을 건 헤엄질이라니, 저 같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인생은 상상불가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3
07 02
이 몸이 싀여져서
무명씨(無名氏) 지음
이 몸이 싀여져서 님의 잔(盞)에 술이 되어
흘러 속에 들어 님의 안을 알고라자
매웁고 박절(薄絶)한 뜻이 어느 굼게 들었는고
싀여지다 – 쓰러지다. 사라지다.
알고라자 – 알아나 보자꾸나.
박절(薄絶) - 박절(迫切)의 잘못인 듯. 인정이 없고 쌀쌀하다.
굼 – 구멍. 구석.
발상이 참 그럴싸합니다. 중요한 것은 님의 뜻일진대, 자기를 대하는 낯이 ‘맵고 박절한’ 것이 못내 서럽고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 되어 님의 잔에 담겼다가 속으로 들어가 굽이굽이 돌아들어 서운함이 숨은 곳을 알려 한다.
박절(薄絶)이라는 어휘가 사전에는 없고, 대신 박절(迫切)이 올려져 있군요. 작품의 쓰임대로 ‘엷고 끊음’이라 풀어도 좋겠는데요, 박절(迫切)의 강도를 누그러뜨리는 연모(戀慕)의 정이 들어 있음직도 합니다. 사랑은 항상 우리(작자나 청자나)를 비논리(非論理)로 옭아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4
07 03
인간이 꿈이런가
무명씨(無名氏) 지음
인간(人間)이 꿈이런가 꿈 아니 인간(人間)이런가
좋은 일 궂은 일 어수선 된저이고
인간(人間)에 깬 이 없으니 꿈이런가 하노라
꿈 아니 – 꿈 안이.
된저이고 – 되었구나.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을 모르더라도, 이 작품의 작자는 이 세상을 ‘꿈 안’이라고 보았군요. 그 이유가 ‘깬 이 없어’입니다. 인간이, 인간사가 어지럽고 뒤죽박죽 되었어도 누구 하나 깨지를 않았으니, 앞으로도 누구 깰 이가 나오려나요. 눈을 뜨고 잠에서 깨는 상황이나, 혼돈(混沌)을 바로잡고 대오각성(大悟覺醒) 깨는 상황이나, 묘하게 이 작품 속에서는 어느 것이나 딱 맞춰드니 수작(秀作)이라고 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5
07 04
인생 실은 수레 가거늘
무명씨(無名氏) 지음
인생(人生) 실은 수레 가거늘 보고 온다
칠십(七十)고개 넘어 팔십(八十)들으로 건너 가거늘 보고 왔노라
가기는 가더라마는 소년행락(少年行樂)을 못내 일러 하더라
소년행락(少年行樂) - 젊은날의 즐거움 찾기.
수레가 갑니다. 인생이라는 짐을 싣고 갑니다. 시 속의 작자는 이 수레가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왔습니다. 초장의 상황은 묘사와 서술이 순차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중장은 이 초장의 내용을 구체화 시켰습니다. 이 수레가 고개를 넘어 들판으로 갔답니다. 이것을 보고 왔답니다. 그런데 인생 70은 고개요, 이 고개를 넘은 인생 80은 들판이라는군요. 이걸 보고 또 왔다는 것입니다. 종장에서 하고 싶은 말, 주제(主題)가 드러납니다. 소년행락 따라갈 만한 장수(長壽)는 없다는 것입니다.
글자 수에 괘념치 않고 나이 든 노인네가 인생 수레의 고비와 들녘과 소년행락의 되돌릴 수 없음을 느긋하게 읊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6
07 05
인생이 가련하다
무명씨(無名氏) 지음
인생(人生)이 가련(可憐)하다 물 위에 평초(萍草) 같이
우연(偶然)이 만나서 덧없이 여의거다
이 후(後)에 다시 만나면 연분(緣分)인가 하노라
가련(可憐) - 가엾고 불쌍함.
평초(萍草) - 개구리밥과의 여러해살이 수초(水草). 물 위에 떠서 산다고 부평초(浮萍草)라 하고 떠돌이 삶을 비유하기도 한다.
우연(偶然) - 아무런 인과(因果) 관계(關係)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덧없이 -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시간이 매우 빠르게.
여의다 -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이별하다.
연분(緣分) -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인연. 하늘이 베푼 인연. 부부가 되는 인연.
옛시조를 읽는 잔잔한 기쁨 중에 알듯한 단어인데도 적확하게는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는 일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덧’에 대하여, ‘연분’에 대하여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비단 부부간 만이 아니라도 우연히 만나 덧없이 이별하는 게 인간사라는 건 아주 쉬운 상식일진대, 수초(水草)를 비유로 들어보니 더욱 명확해집니다. 종장의 연분에 대한 사전적 풀이가 세 가지나 되는데, 인생사 전반을 망라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7
07 06
일각이 삼추라더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일각(一刻)이 삼추(三秋)라더니 열흘이면 몇 삼추(三秋)인고
상사(相思)로 병될 님을 잊어 무방(無妨)하건마는
정녕(丁寧)한 굳은 언약(言約) 생각할수록
일각(一刻) - 한 시간의 4분의 1. 곧 15분을 이른다. 아주 짧은 시간.
삼추(三秋) - 가을의 석 달. 세 해의 가을. 긴 세월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정녕(丁寧) - 대하는 태도가 친절함. 충고하거나 알리는 태도가 매우 간곡함.
일각이 여삼추라. 그냥 두고 쓰는 관용구 같았는데 이 작품을 대하며, 작중 화자의 질문에 답하며 살펴보니 상당한 과장(誇張)이 들어 있군요. 15분. 오늘날의 시간 개념으로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옛 사람들은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였다고 합니다, 암튼 열흘이면 240시간이니 상당한 일각이 들어 있습니다.
상사로 더디 가는 시간을 삼추라 늘여 생각하면 정말로 긴 시간입니다. 누군가에게 정녕하게 굳게 말로 약속한 일이 없도록 살아야겠습니다.
종장 끝구는 시조 창법에 의한 생략으로 ‘못 잊어’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8
07 07
일월은 하늘로 돌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일월(日月)은 하늘로 돌고 수레는 바퀴로 돈다
산진이 수진이는 산협(山峽)으로 다니는다
우리는 청루주사(靑樓酒肆)로 돌며 늙으리라
산진이 – 산(山)지니. 산에서 자라 여러 해를 묵은 매나 새매.
수진이 – 수(手)지니. 사람의 손으로 길들인 매나 새매.
산협(山峽) - 산속의 골짜기.
청루주사(靑樓酒肆) - 창기(娼妓)나 창녀가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술집.
일월과 수레와 사냥매들을 불러와 그들의 규칙성과 자유로움을 실컷 빗대어 놓고, 늙은 우리는 술판이나 돌며 늙어가노라. 희망사항이기도 하고 실제 유한한 노년인 듯도 합니다. 청루와 주사가 결합해서 진탕 거나하게 즐겨보자는 뜻을 드러냈는데, 나이 든 노인들의 호기로움일 뿐 실제 이행 불가인 걸 대다수가 압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9
07 08
일포식도 수 있거늘
무명씨(無名氏) 지음
일포식(一飽食)도 수(數) 있거늘 분외사(分外事)를 바랄소냐
못될 일 하려 하면 반드시 패(敗)하려니
해(害) 있고 무익(無益)한 일을 하올 줄이 있으랴
일포식(一飽食) - 한 번의 포식. 배불리 먹음.
수(數) - 정해진 숫자. 운수(運數).
분외사(分外事) - 분수(分數) 밖의 일. 넘치는 호사(好事).
못될 – 잘못될. 도리에 어긋날.
패(敗) - 실패(失敗).
하올 – 구태여 행할.
어휘 풀이가 아니더라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입니다. 억지로 어떤 일을 행하거나, 제 분수에 넘치는 운을 바란다면 안 될 것이다. 다짐을 겸한 생활준칙을 읊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90
07 09
일월성신도
무명씨(無名氏) 지음
일월성신(日月星辰)도 천황씨(天皇氏)적 일월성신(日月星辰) 산하토지(山河土地)도 지황씨(地皇氏)적 산하토지(山河土地)
일월성신(日月星辰) 산하토지(山河土地) 다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적과 한가지로되
사람은 무슨 연고(緣故)로 인황씨(人皇氏)적 사람이 없는고
일월성신(日月星辰) - 해와 달과 별을 통틀어 이르는 말.
삼황(三皇) -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세 명의 임금.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로 보는 설과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로 보는 설이 있으며, 복희씨 신농씨 헌원씨로 보는 설 따위의 여러 학설이 있다.
옛사람들은 참으로 오랫동안 중국의 역사적 생각 범주에 갇혀서 살았구나 싶습니다. ‘삼황(三皇) 오제(五帝) 하(夏) 은(殷) 주(周)’로 시작하는 역대 중국의 왕조사, 그 맨 앞에 삼황이 나옵니다. 이 작품에서 사용되는 여러 한자 어휘도 개인의 존재론을 대별하는 말이기도 한데, 말인즉슨 천황의 지휘 하에 있는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지황의 지휘를 받는 산하토지(山河土地)는 변함이 없이 그 옛날 그대로인 것 같은데, 어찌 사람만은 인황씨 적 사람이 없느냐 입니다.
천하태평하고 조물주의 정성(精誠)이 고스란하던 그 때의 사람이 그립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91
07 10
굼벵이 매암이 되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굼벵이 매암이 되어 나래 돋혀 날아올라
높으나 높은 남게 소리는 좋거니와
그 위에 거미줄 있으니 그를 조심하여라
굼벵이 - 매미의 애벌레나 꽃무지, 풍뎅이와 같은 딱정벌레목의 애벌레. 주로 땅속에 살며, 몸통이 굵고 다리가 짧아 동작이 느리다.
매암이 – 매미.
나래 – 날개.
남게 – 나무에.
높이 오른 벼슬아치에게 주는 경고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지난여름 억세게 울어쌓더니만 9월 중순이 되니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매미의 계절이 끝이 난 것입니다. 7월10일부터 9월10일까지, 딱 석달 동안이 매미의 시간이었던 셈입니다. 실제로 한 매미의 지상에서의 생애는 열흘이 채 못된다고 하더군요.
매미는 상당히 큰 곤충인데도 꼼짝 못하게 잡는 거미줄은 제 나름대로의 기능이 있는 셈인데요, 바람을 타듯 능청거리는 기능도 곤충을 잡는 하나의 무기일 것입니다.
아무튼 환로(宦路)에 든 고관대작(高官大爵)일수록 몸조심을 해야 한다는 뜻을 매미와 거미줄로 잘 표현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무명씨 시조는 유명씨 시조의 삼 장 중 한 장을 바꿔 쓴, 요즘말로는 '패러디'한 작품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