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죠의 바티칸 산책22, "고작 '하루치 식량'이라고?"
엉클죠 ・ 2020. 5. 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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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날마다 하느님께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냐? 기도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비는데…, 그게 말이 되나? 요새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루 먹을 양식이 아니라 몇 년 먹을 양식을 쌓아놓고 있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니….”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주님의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항상 이 대목이 걸립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암송할 때 ‘일용할 양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일용할 양식(daily bread), 쉽게 말해 ‘하루치 식량’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하루치 식량을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 아니면 늙어 죽을 때까지 먹을 평생 식량이나 자자손손이 먹을 식량을 달라고 하는가, 후자라면 매일 기도할 때마다 위선을 떨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하느님께 이렇게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때 저 자신을 약삭빠르게 합리화합니다. 하루치 식량의 의미가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와 현재 21세기와는 다르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입니다. 저만 이럴까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2000년 전 갈릴래아로 되돌아가,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예수님은 탈출기 속의 주님을 생각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당시 갈릴래아 백성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던 것처럼 갈릴래아 백성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아마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광야는 풀이 듬성듬성 나 있고 모래바람이 쌩쌩 부는 황량한 벌판입니다. 40년 광야살이! 지금 생각해 봐도 끔찍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식솔들은 오죽 많았습니까.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성경에는 장정만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전체 인원은? 줄잡아 200만 명 이상이었겠지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200명이면 어떻고, 2000명이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주님과 어떻게 소통했는지가 중요하지요.
시나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꼼짝없이 주님에게 매달려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준 다음 저마다 먹을 만큼만 가져가라 했습니다(탈출 16,16). 먹을 만큼만! 매일 하루치 식량만 준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나 욕심꾸러기와 청개구리가 있습니다. 하루치 이상의 식량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당일 먹고 남은 음식은 썩어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얼마나 공평한 조치입니까.
광야에서 먹는 일용할 양식은 생물학적 생존에 필요한 영양 공급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일치의 기적을 일으켰고, 강한 공동체 정신과 끈끈한 형제애를 낳았습니다. 동물원의 사육사가 우리 안에 갇힌 동물들에게 던져주는 먹이와는 차원이 다른 음식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 대대로 수백년 간 노예로 살았습니다. 영혼이 없는 동물적인 삶이었지요. 주님을 섬길 생각도 없었고, 동족 간의 형제애도 없었고, 독립심이나 자유의지도 없었습니다. 하루치 식량은 신묘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한솥밥 효과입니다. 맛있는 밥을 40년 동안이나 받아먹었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감사와 사랑이 저절로 생겨날 수 밖에! 주님과의 거룩한 일치를 확인한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특정 개인에게 주지 않고 모두에게 골고루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항용 먹는 것(경제문제)을 놓고 싸우는데,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 이집트에서 모래알처럼 살았던 백성들이 공동체 정신과 형제애를 함양할 수 있게 된 것이었지요. 이웃 간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살이는 노예 근성을 털어버리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하느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고난의 행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빵은 일용할 양식을 상징합니다. “빵의 기적은 다른 모든 기적의 초석이 된다. 언어로, 또는 눈에 보이는 기적들로 표현된 비유들은 모두 여러 방법으로 만들어진 빵일 뿐이다.”(‘예수 이야기’, 조반니 파티니, 메디치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