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동네 유지 한 분에게 전화가 왔다. “김의원, 지금 어디 있나?” “아 지금 인동(지역구)에 있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자연스레 이런 질문으로 이어졌다. “동에 있나?” ‘동’이란 주민센터(동사무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분은 내가 거기 있는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오셨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과거에는 동사무소를 주요 거점으로 쓰던 지방의원들이 있었다. 썩 바람직한 습성은 아니라고 난 판단했다. 물론 한편으로 나 자신이 ‘동’에 뜸하게 가는 편이고 마음만큼 발길이 자주 닿지 못해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주민센터에 발이 머물러 있는 지방의원은 놓치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 지방의원이 이 동네 저 골목으로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는 동시에 주민센터에 자주 드나들지라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관’이나 이에 가까운 주민의 입장에 서기 쉬우며, 괜시리 주민센터 공무원들에게 방해만 될 수도 있다.
그분에게 지역구 사무실 위치를 알려 드렸다. 가까이 계셨던 모양인지 금방 오셨다. 그런데 마주 앉자마자 하시는 말씀. “왜 지역구 사무실이 (인동동 관내) 인의동에 있어? 김의원은 진평동(진미동 관내) 사는데…”(사실 내 거주지와 사무실은 법정동만 다를 뿐 자전거 타고 5분 거리에 불과하다.)
그리곤 내가 경악할 만한 말씀을 호감을 담은 웃음과 함께 건네셨다. “김의원은 인동동 아니고 진미동 시의원이잖아.” 이분은 진미동 토착민이다.
내 지역구인 진미동과 인동동은 모두 칠곡군 인동면이었다가 공단 조성과 함께 구미시로 편입된 지역으로서 사실상 하나의 생활권이다. 진미동 주민 사이에서 인동동이란 이름을 이제 같이 쓰자는 주장도 근래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두 지역의 경계가 되는 하천은 복개된지 오래지만, 아직도 보일 듯 말 듯 소지역주의가 온존한다. 여느 지역에 있는 일화처럼 옛날옛적 하천변에서 청년들이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데, 인동동에는 ‘인동 장씨’로 대변되는 양반이 축인 반면 진미동은 농민들이 많아서 생긴 갈등이 유래라고도 한다.
진미동쪽 토착민들은 자신의 정치적 대표자가 없다는 의식을 가진 지가 몇 년되었다. 지역구 시의원이 다른 행정동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진미동은 가구수의 절반이 원룸에 속해 있고 간신히 확보한 공원 부지 외에 이렇다 할 시설을 지을 땅도 남아 있지 않으며 이곳저곳에서 불합리한 도시계획이 드러난다. 그러니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이 피해의식을 이해할 만하다. 더구나 소외감은 중노년 토착민 남성에서 끝나지 않고 외지 출신 30대 여성까지 번져나갈 기미도 보인다.
외형적인 ‘시설’만 보이고 ‘사람’은 사라져
하지만 시의원을 지역구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만 여기거나, 더 나아가 지역구 중에서도 특정 동네를 대변해야 한다고 보는 태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나는 그분에게 “에이, 왜 시의원을 굳이 동의원으로 만들려고 하십니까?”라고 말씀드리려다 말았다. 시의원을 동의원으로 묶어두는 태도는 동네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산과 사업을 편성하고 심의하고 집행하는 것은 대부분 시단위에서 이뤄진다. 동단위 행정에서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은 일명 재량사업비라고 불려지며 포괄사업비라고도 하는 예산, 그만큼이다.
‘동의원’이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이 될까? 해당 동네에만 적용되는 사업이고, 이것은 거의 시설을 만드는 사업이다. 결국 동의원이 사활을 걸게 되는 건 이것이다. “‘잘해놨네’ 소리 듣고, ‘ooo 의원이 해놓은 거’라는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시각적인 분야와 시설비 예산 따오기에 함몰되어 민생을 위한 제도 개선이나 여타의 복합적 접근이 밀려나면, 예컨대 우리 동네에 원룸과 노동자와 청년층과 영유아가 많다는 현실이,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람’이 상당히 묻혀버리게 된다.
복지 분야에서도 그렇다. 경로당에 어르신 복지의 중점을 둬버리면 경로당에 나오지 않는 어르신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시의원은 시 재정이나 지역구 바깥에 폐를 끼치면서까지 예산을 따와서도 안 되지만, 예산을 따오기 위해서라도 ‘시의원’답게 행동해야 한다. 가령 청소년문화의집 건립을 요구한다면, “우리 지역이 지금 사정이 이러이러하며 시 전체 차원에서도 이곳이 가장 급하다”는 이치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다른 지역 시의원에게 ‘자기 지역구 예산 따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흉 잡히지 않고, ‘일단 저 지역구에서 하는 일이지만 우리 지역에도 도움이 되고 시 전체에 바람직하다’고 그가 납득할 만해야 한다.
늘어놓고 나니 참 쉬운 말을 했다 싶다. 말만 쉬울 뿐이다. 오늘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숱한 지방의원들이 지역구 개발에 관한 민원을 접수하며, 때로는 목소리가 큰 민원인들의 닥달에 애간장이 녹았다가 때로는 그 사업의 실현을 놓고 이름값을 올리거나 생색을 내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구에서 벌어질 어떤 개발사업을 반대하고 싶어도, 해당 지역구 출신 의원이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관계로 강건너 불구경을 하는 사례도 허다할 것이다.
지자체 재정 낭비를 막아야 할 지방의원이 외려 그 주범이 된다. 지방의원이나 주민이 각성해서 해결되기까지 기다려야 할 일일까? 어쩔 수 없이 제도에 손을 대야 할 것 같다. 손을 대자는 이야기라도 해야겠다.
국회의원 어려우면, 지방의원부터 ‘대선거구제’ 검토
지난 총선이 끝나고 “지역구 국회의원 제도를 폐지하자”는 구호를 트위터에서 접한 바 있다. 지역구 중심으로 사고하는 정치인은 개발 이슈에 몰두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적 관점을 지닌 입법기관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수백 수십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을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잠시 뒤로 하고, 수십 수명 혹은 한자리수의 의원이 있는 지방의회부터 건드려보면 어떨까?
얼마 전 구미시의회의 한 의원(새누리당 소속)이 국회의원 300명에게 전달한 건의문이 지역신문에서 화제가 됐다. 그에 담긴 방안 가운데 한가지가 ‘기초의원 대선거구제’다. 나는 그분과 사석에서 대선거구제에 관한 대화를 여러차례 나누었다.
서로의 취지는 비슷하다. 그러잖아도 ‘80대20’이라고 하는 단체장 및 집행부와 지방의회의 역관계에서, 현재의 ‘동네 대표’ 개념으로는 지방의원의 집행부 감시 기능이 떨어지고, 위에서 거론한 ‘동의원’의 역기능만 강조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 단위에서 시의원들을 선출해 시장의 명실상부한 ‘카운터 파트너’를 만들자는 것이다. (간혹 어떤 이들에게서 대선거구제도를 지방의원 내각제와 결부시키자는 주장도 듣는데, 이 논의는 우선 뒤로 미룬다.)
아직 전국의 지방의원의 대다수는 소선거구를 선호하는 편이다. ‘같은 지역구 다른 의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점 탓일 게다. 정치학계도 소선거구를 다른 이유로 선호하는 듯하다. 가령 인동동과 진미동을 합쳐 3명의 시의원을 뽑느니 진미동에서 1명의 시의원을 뽑으면, 지역 소외가 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역구 분할이 개발지상주의로 흐르는 단점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왕 소선거구의 특성을 살리려면 지역구를 더 잘게 쪼개고 의원 정수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할 텐데 시민들이 이것을 받아들일까?
물론 대선거구제로의 전환에도 여러 가지 숙제가 남아 있다. 후보자별 득표를 가지고 단순하게 1등부터 n등까지 끊어서 당선자를 확정지을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당별(후보군별) 득표의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표를 방지하고 소수파를 원내 진출시킨다는 장점이 있지만 넓어진 선거구만큼 선거비용이 늘어나는 난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그렇지만 지방의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하나의 큰 원인으로 ‘동네대표(만으)로 전락한 지방의원’을 꼽을 수 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선거구제’가 놓칠 수 없는 화두임은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