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창
장의순
바람이 부는 오후 FM 채널에서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잠에서 깨어난 나른한 기운이 무엇에 이끌리듯 전화번호를 눌려본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숫자들-4726. 그의 음성, 그 모습,
그 이름, 벨만 울리고 유령의 집처럼 아무도 없는 곳.
이승희라는 이름의 40대 후반의 여인이 살다간 맞은편 아파트
6층 601호의 집은 예상되로 비어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수녀인 그녀의 언니가 동생을 못 잊어 죽은 동생의 사진으로 온 벽면을 장식했다. 그녀의 남편은 산야를 헤매며 매일 술로 날을 보낸다고 한다
죽은 자는 불쌍하다. 살아서 죽은 자를 못잊어 하는 자도 불쌍하다
혈육인 언니는 동생의 영혼이라도 붙잡겠다는 심정이었을까 어쩌자고 죽은 자의 사진으로 온 집안을 치장했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었을 테지만 수녀인 당신은 神에 귀의한 몸.
동생의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더구나 그녀의 남편은 아내를 살리려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느니
“그렇게 좋은 남편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할 정도로 애처가였다고 한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늦은 봄날이다. 따가워진 햇살 속에 얼굴을 가리고
내가 경작하는 텃밭 근처에서 쑥과 민들레를 채집하고 있었다.
나는 억세어진 배추 몇 포기를 인심 썼고,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에서 바라보이는 앞동에 살고 있었다.
그녀 는 모차르트와 파바로티를 좋아하고 피아노 렛슨도 했노라고 했다. 우린 길지 않은 시간에 마음이 통했고
낮선 이곳에 와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고 좋아했다. 정식으로 초대받아 방문했을 때
화사한 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들에서 본 모습보다 훨씬 젊고 우아했다. 거실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고, 벽엔 아름다운 그림들이 걸려있어 화실을 연상시켰다. 사진 속의 부부는 세명의 건장한 아들과 환 하게 웃고 있었다. 사랑이 있는 행복한 가정임을 직감했다.
운명일까. 그녀는 얼마 전까지 간염을 앓았으며 그때는 야생풀을 갈아 즙을 마시며 나름대로 병의 재발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당에 이사온 것을 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공기가 맑은 이곳에서 자생하는 들풀을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녀는 신앙이 없는 나를 천주님께 인도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여름 휴가를 건강한 사람처럼 차를 몰고 다니다 결국 병이 도진 것이다. 입원과 퇴원… 나는 처음 수확한 늙은 호박을 들고 문병갔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고
금 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김현승의「눈물」이란 시의 의미를 확인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후, 그녀를 위해 남의 텃밭에 피어난 도라지 꽃을 꺾어 훔쳐 나오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꽃도 엉망이 되어 겨우 두세 송이를 들고 방문했을 때 환자의 안정을 필요로 만나지 못했다.
그 해 겨울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그의 아파트 경비실을 찾았을 때 “조금 전에 장례가 나갔다” 고 했다.
가슴이 휑해졌다. 흩날리는 눈 속을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준 성경책 뒷장에 새긴 이승희라는
싸인이 문신처럼 각인되어 왔다. <1997년 분당수필 창간호에>
첫댓글 아ᆢ이 봄날 아침
장선생님의 아름다운 슬픔에 눈물이 납니다
한 편의 시를 그려주셨네요ᆢ
명화의 한장면들이 스쳐가기도 합니다
아픈 그녀를 위해 도라지꽃을 훔쳐 꺾어오다 넘어진 일ᆢ늙은 호박ᆢ
그녀가 지금은 천국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지상에서 사랑했던 한 시인님을 그리워 하실겁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시인과의 우정을 추억하실겁니다
비아 시인님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댓글에 취해 기분좋은 밤입니다. ㅎㅎㅎ 언제나 처럼 우리 둘이 북치고 장고치고, 인생은 歌舞가 최고라지요.
감동입니다. 장선생님 못뵈어 아쉬웠습니다. 이 봄 아름답게 치장하시길요...
오영록 선생님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병원에 들랑 거립니다. 감기도 안 걸렸는데 목이 쉬어, 이비인후과에 다녀 왔습니다. 5일치 약 먹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꼭 탄문 모임 날짜에 맞추 탈이 나는지 알수없는 일입니다.
글을 읽다가 며칠 전에 지구를 영원히 떠난 친구가 생각나서 울컥 했습니다.
누구와 영영 이별한다는 것은 겨울 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추운 시간입니다.
<누구와 영영 이별한다는 것은 겨울 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추운 시간>중후한 표현력, 대단하세요. 문학카페의 진수가 댓글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