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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10강
말씀/ 마태복음 7:1-12
요절/ 마태복음 7:12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경민 목자 가정은 토요일마다 찬양님 자매들에게 커피타임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경민 목자 말에 의하면, 오래전 장막생활 했을 때부터 선배들에게 많은 대접을 받았는데, 지금 갚아나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대접받는 청년들도 그와 같이 누군가를 대접하는 손길을 펼치겠지요. 그로 인해 우리 모임이 은혜가 마르지 않는 교회로 계속 남게 된다면, 지금까지 모두의 대접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면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어떤 비판은 발전적 자극으로 역사할 때도 있습니다. 기숙사 의료봉사에서 만났던 어떤 형제는 고1때 희망지원대학에 ‘연세대’를 썼습니다. 그러자 담임으로부터 ‘너 같은 놈이 연대에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자극을 받아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연대에 합격하고 경희대 의대까지 왔습니다. 그렇게 선기능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하지 말라’, 비판 자체를 금하십니다.
비판은 관계성을 파괴하고 정죄와 미움의 악순환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으로 비판을 받고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정죄하는 마음으로 비판한 것은 정죄하는 마음으로 되돌려 받습니다. 마치 탁구공을 세계 치면 더 강하게 되돌아오듯이, 강한 비판은 강한 반발, 강한 공격을 만들어냅니다. 비판은 비판하는 사람과 비판받는 사람, 두 사람의 관계성만 파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은 바이러스처럼 주변을 오염시킵니다. 어떤 목자가 아내에게 양들의 허물과 잘못을 털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녀들이 삼촌과 이모들에게 분노하며 공동체에 대해 냉소적으로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비판이 자녀의 신앙성장에 끼친 악영향을 발견하고 ‘비판’를 토하지 않고자 결심했습니다.
비판 대신 긍정의 말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김인중 목사의 ‘안산 동산고 이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내성적인 학생은 생각을 진지하게 해서 좋습니다. 사교성이 적은 학생은 정직하고 과장되지 않아서 좋습니다. 소심한 학생은 실수가 적고 정확해서 좋습니다.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의욕이 넘쳐서 좋습니다. 말이 많은 학생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은 겸손해서 좋습니다...” 비판하기로 하면 전혀 다른 해석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내성적인 사람은 꿍꿍이가 많습니다. 사교성이 적은 학생은 자기 세계에 빠진 4차원입니다. 소심한 학생은 연약하여 일을 못합니다. 질투심이 많은 학생은 욕심꾸러기입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가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랴 하겠느냐” 들보는 집의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큰 나무입니다. 티는 들보를 만들 때의 톱밥 정도의 먼지입니다. 각 사람 인성이 다른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천사표 인성의 소유자가 있고 싸이코패스같은 인성을 소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대방의 허물을 티로, 나의 허물을 들보로 보라니, 이는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첫째는 상대방을 아는 지식이 빙산의 일각처럼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비판하는 사람들 대부분 ‘상대방을 알고 있다’는 교만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깊은 속사정까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은 좋은 의도로 말한 것을 내가 꼬아서 들은 경험, 사람마다 몇번씩은 있을 것입니다. 전체 모습에서 내가 보는 부분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 스스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훤히 알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았으면서도 백데나리온 빚진 자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인색함의 들보가 있음을 압니다. 영적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내면세계는 그런 타이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중성의 들보가 있음을 압니다.
티와 들보 비유의 두 번째 핵심 메시지는 관용입니다. 눈에 들어있는 티는 눈물 한번 쏟아내면 대부분 빠져 나갑니다. 그와 같이 상대방의 허물과 죄를 치명적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치유불가의 들보 같은 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일만 달란트 죄값을 탕감해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로인해 누구든지 회복가능한 죄인으로 바라보고 출발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남을 비판하는데 너무나 익숙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문하러 왔다가 욥을 고문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욥처럼 억울한 고난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 관대하고 상대방에 대해 엄격한 자기중심성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사회 최고의 엘리트 그룹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오류이기도 했습니다. 친구의 심정이나 최고의 율법 지식을 갖춘 것이 살리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상처와 절망에 밀어넣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책망하십니다.(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물론 자기에게 엄격하고 상대방에게 관용할지라도 항상 좋은 결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나누어 주었는데도 모욕과 상처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서의 개는 사랑스런 ‘애완견’이 아닌 야생을 배회하는 ‘들개’로서, 동물의 사체나 썩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돼지 또한 더럽고 부정한 것을 먹는 짐승의 대표입니다. 개와 돼지는 고상함 자체를 모르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누가 개와 돼지인지를 분별하여 그들을 피해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 개 돼지 같은 자들이 복음을 통해 변화되어 양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창세기 1장 말씀공부한 후 한심하다는 듯이 목자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이런 것 믿어요? 차라리 나에게 노자의 도덕경을 배우세요’ 개와 돼지처럼 복음을 비웃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가 개 돼지 출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나운 들개처럼 교회를 물어뜯다가 복음의 일군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본질은 비판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지라도 힘든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에 밟히는 모욕을 당하고 갈갈이 찢겨 상처를 입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일군이 함부로 전했기 때문에 혹은 섬세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와 돼지 같은 욕망에 충돌하면 고통과 상처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해야 합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고대에는 거지들, 현대에는 영업사원들의 대표적 요절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린다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며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8) 9-11절을 보십시오.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면, ‘그래! 옛다 돌이나 씹고 망가져봐라’, 모래로 만든 떡을 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9)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옛다 생선 대신 뱀이나 먹어라’ 던져줄 아버지도 없습니다.(10)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떡을 달라 하면 두쫀쿠를 주고 싶고 생선 먹고 싶다면 비싼 뱀장어를 사주고 싶어합니다.(11) 그와 같이 하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취업? 결혼? 진급? 양? 건강? 부자?, 1-6절 말씀과 연결시켜 본다면, 올바른 관계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 천국을 맛보기도 하고 지옥을 맛보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긋나 버리면 으리으리한 부잣집에 살아도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좋은 머리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머리 좋은 사람들가운데 나르시즘에 빠져 주위 사람들을 마구 찌르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관심 모드를 택하는 이유입니다. ‘괜히 오지랖 떨지 말자’ 무관심모드로 들어가면 충돌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관계의 발전이 없고 성숙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는 은혜가 없습니다. 타인의 허물을 티로, 내 안의 자기중심성을 들보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개 돼지 같은 욕망에 붙잡혀 있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비판의 소리가 떠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대접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세상도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공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보통 사람들은 말합니다. ‘대접 받은 만큼 대접하라’, 나에게 선물을 보내면, 나도 선물 보내는 것입니다. 나에게 칭찬한 사람을 나도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 실은 갈등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저마다의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부자인데, 저 사람은 나보다 시간이 많은데, 저 사람은 나보다 여유가 있는데, 이렇게 이 정도 밖에 돌려주지 않는가! 합당하게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슬픔과 분노를 유발합니다. 우리 시대 많은 청년들이 그런 슬픔과 분노를 안고 있습니다. 어느 세대보다 많은 능력을 갖추었는데, 성공 가능성은 이전 세대보다 적은 모순을 만났습니다. 청년세대에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삼성전자 노조가 예고한 파업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근무환경이 열악한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는 배부른 자들의 탐욕처럼 비춰지겠지만, ‘삼성의 어마어마한 실적을 생각하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삼성노조의 주장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세상에서만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니, 당연히 예수님 좌우편의 자리는 내가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도 ‘누가 크냐’의 경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내가 대접받는 것’에 포커스가 주어지면, 다툼과 갈등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포인트는 ‘남을 먼저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접 받고 싶은 마음으로 먼저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접을 받고 싶습니까! 실수하고 사고 쳤을 때, ‘너, 이럴 줄 알았어! 말 많이 할 때부터 알아봤어’, 콕 집어주기를 원합니까! ‘누구나 실수해, 다음에 잘하면 되지’, 그런 말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주일 메시지를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아무리 엉터리로 전하는 날이었을지라도 ‘목자님, 수고하셨어요 정말 은혜로운 메시지였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으로 먼저 동역자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사모님, 수고하셨어요. 최고로 맛있고 은혜로운 서빙이었어요”, 조금 섬기고 많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섬긴 사람을 많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먼저 그의 좋은 동역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성경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대접하셨습니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아름다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타락했을 때, 독생자를 구원자로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범죄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갔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노예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 서게 된 것,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우리 조상이 잘해서, 우리 혈통이 순수해서, 우리 전통을 잘 지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택함 받은 것부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율법을 주심으로 그들 또한 세상 만민을 향해 은혜를 베푸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유다이즘의 시각으로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유대인의 민족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구약성경을 보면, 만민을 대접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경배하는 이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대접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접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며 복음의 비밀입니다.
지식의 풍성함이나 고강도의 훈련만으로 영적 공동체를 세울 수 없습니다. 지식은 얼마든지 다운로드할 수 있고 고강도 훈련은 해병대가 훨씬 잘합니다. 우리를 먼저 대접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먼저 대접하는 법을 실제로 체험해가야 합니다. 오래전 경희대 앞에 방3개짜리 바이블하우스가 있었고, 본4 형제목자들이 방 한 개를 장막으로 쓰며 바이블하우스를 관리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1년 후배목자가 장막 방에 들어와서 엉겨 붙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함께 하고 싶어하는구나’였는데, 비판하는 관점으로 보고 ‘자격이 없는 자는 나가라’며 내보냈습니다. 그는 오래토록 그 날의 서운함을 말했습니다. 몇 년 후 저의 아버지가 간암 말기로 원광대 병원에 입원하여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 후배가 서울에서 앰브란스를 타고 익산의 원광대 병원까지 내려와서 병원 서류까지 일사천리로 해결하더니 아버지를 태우고 경희대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경희의료원에 올라와서 세례를 받고 기적같이 회복되더니 5년을 더 살다 가셨습니다. 벌써 30여년 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몇 개월 전, 우연히 결혼식 피로연에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를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익산까지 내려왔던 것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때 방에서 쫓겨난 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고마웠습니다. 상처를 기억하고 있음에도 저의 아버지를 도와주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러 왔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댓가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판은 부끄러움을 가져오고 대접하기에 힘쓰는 것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배우기에 힘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생들은 예수님을 향해 조롱과 멸시와 불신의 마음으로 살았는데,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자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끝까지 참으심으로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비판하고 찌르고 싶을 때,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그를 인해 관용하고 대접하는 손을 내미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천국의 백성된 모습으로 살아갈 때, 메마른 세상을 이기고 풍성한 공동체를 이루어갈 것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