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변이’ 효창운동장
창(昌)은 일(日)과 왈(曰)이 합하여 이루어진 회의(會意)문자다. 회의문자는 둘 이상의 한자를 합쳐 그 글자들의 뜻을 모아 새로운 뜻을 창조해낸 문자다. 두 글자를 합하되 한 글자에서는 뜻을, 한 글자에서는 음을 차용하는 형성(形聲)문자와는 그 점에서 다르다. 그 의미대로 창(昌)은 원래 ‘밝게 말하다’는 뜻인데 ‘해처럼 영원히 전하여질 아름다운 말’의 의미로 확대되어 ‘곱다, 아름답다, 기쁨, 경사, 훌륭한 말’이라는 내포하여 ‘창성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창경궁, 창덕궁과 같이 왕궁은 물론 순창원(명종의 장자 순회사자의 묘), 효창원과 같은 왕실의 묘지명으로도 사용하였다. 이름 하나 지을 때도 작명법과 풍수이론을 접목하던 조선시대에 창(昌)은 그만큼 길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정조의 한이 서린 효창원
효창원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가 묻힌 묘다. 지금은 경기도 원당의 서삼릉에 있지만 원래는 서울 용산의 효창동에 있었다. 1782년 9월에 태어나 1786년 5월에 죽은 왕세자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의 정조실록(1782년 9월 7일)에는 정조의 기쁜 마음이 나타나 있다.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그러나 3세에 세자로 책봉할 만큼 기대를 모았던 세자가 1786년 5월 11일에 창덕궁 별당에서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고복(皐復)을 하고 윤 7월 19일에 장사지냈다. 비록 어린 세자지만 5월에 죽은 세자를 석달이 지난 윤7월에 장사지낸 것은 왕실의 모든 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사랑을 베풀기도 전에 죽어버린 아쉬움의 정성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장사지내고 무덤에서 하루를 지내며 친히 신주(神主)를 쓰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내기도 했다.
효창원은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길지로 천장하기 위해 점지한 명당이었다.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정조는 궁궐에서 가까운 명당에 아버지를 모시고 효심을 다하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먼저 가버렸다. 묘호의 첫자에 효(孝)자를 사용하여 효창원이라 한 것은 바로 효성을 다하지 못한 회한의 표현이기도 하다.
효(孝)는 아들[子]이 노인[老]을 밑에서 떠받드는 모형을 본떠 만든 글자다. 노(老)자 아래에 있는 비(匕)를 생략하여 효도를 가리키는 회의문자다. 아버지를 모시려했던 곳에 아들을 묻고 아쉬움을 달래던 대왕 정조. ‘효창’이라는 이름에는 그렇게 정조의 애절한 사랑이 담겨있다. 효를 가장 아름다운 덕목으로 보았고 효를 통해 기쁨과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그 효가 해처럼 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이기를 원했던 윤리와 통치이념이 살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들도 文孝라 했다.
그러나 정조의 아픔은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문효세자를 묻고 채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의빈 성씨가 죽었다. 2년 전에 돌도 안 된 옹주를 잃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그들의 어머니마저 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어졌도다.”
정조실록 정조10년 9월 14일의 기록에는 이렇게 제왕의 외로움이 나타나 있다. 아버지 복 없으면 자식복도 없는 것일까. 중전과의 사이에서는 아예 자식이 없고 네 명의 후궁에게서는 두 아들과 세 옹주를 얻었다. 그러나 의빈 성씨가 죽은 후 1787년에 맞이한 수빈 박씨와의 사이에서 1790년에 태어난 순조와 숙선옹주만 살아 장성했다. 스스로 군사(軍師)라 할 만큼 학식과 덕망이 있고 문무를 겸비한 건장한 임금이 정비와 네 명의 후궁 사이에서 겨우 1남 1녀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후손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후 효창원에는 1854년에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그녀의 소생 영은옹주가 묻혀 왕실묘역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용산구 효창동 일대의 효창원이다.
효창공원
2007년 9월 17일에 방영을 시작하여 2008년 6월 16일에 종영된 MBC의 드라마 『이산』은 정조를 주제로 한 드라마다. 드라마에서는 송연이가 먼저 후궁이 되지만 두 번째 후궁 화빈 윤씨 소속의 궁녀였기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었고, 더구나 송연이가 어린 시절 이산의 친구였다는 것은 시청자를 TV앞에 앉혀 놓으려는 계획적인 구성이다. 더구나 화빈 윤씨와 의빈 성씨가 같은 날에 아이를 낳게 하여 누가 아들을 낳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것은 드라마가 지니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 요즈음 퓨전 역사물이 등장하는 마당에 ‘이산’과 같은 역사 소재 드라마는 교실에서 등한히 하기 쉬운 역사를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공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기는 하다.
역사가 드라마에 의해 그렇게 왜곡되듯 역사의 현장은 정치적 논리와 힘에 의해 왜곡되기도 한다. 효창원이 대표적인 곳이다. 왕실묘역으로 시작된 효창원은 1894년 일본군이 효창원 남단에 주둔하면서부터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 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듯 1924년에 효창원을 일반인의 놀이터인 효창공원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 일제에 의해 효창공원으로 바뀐 효창원은 1944년 10월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천장하여 왕실묘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 영향은 아직까지 남아 효창원에 얽힌 정조의 한과 왕실의 역사를 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민족성을 말살하고 조선 역사의 뿌리를 흔들어버린 일제의 계획은 아직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효창운동장
효창공원은 광복을 맞은 후 또 한 번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46년에 김구 선생이 일본에 있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이곳 효창원의 문효세자가 묻혔던 곳에 국민장으로 안장하고 그 왼쪽에는 안창호 선생의 유택을 가묘로 설치해 놓았다. 이어 1948년에는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중국에서 모셔와 조성환 선생과 함께 의빈성씨가 묻혔던 자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49년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선생마저 이곳에 묻혔으니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찾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을 중점으로 한 독립운동상을 그려볼 수 있는 곳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재외 한인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이승만 박사는 김구 선생과 정치노선이 달랐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남북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김주석의 이상론과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운 후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이박사의 현실론이 대립한 것이다. 결국 1948년 총선을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이듬해 김구 선생은 암살당하여 국가를 위해 서로의 힘을 결집하지 못한 채 영원히 화합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 후 자유당 정권에게 효창공원은 콧잔등의 사마귀 같았는지 1959년 제 2회 아시아 축구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효창운동장을 건립하였다. 일곱 분의 유해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골프장을 건설하려 하였지만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관계 여러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효창원이 효창공원으로 바뀐 것은 일제의 의한 민족정신의 말살이라 한다면 효창운동장으로의 변신은 불안한 정권이 정적의 자취를 소멸하려는 내부적 갈등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효창공원은 효창원으로의 복구와 백범 묘소의 성역화를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서울시 소유인 효창운동장과 반공 충혼 위령탑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효창원 주변을 독립공원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예산도 책정했다. 1989년 효창운동장을 제외한 이 지역을 사적지로 지정하여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 효창원은 이제 옛 모습을 되찾을 전망이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 역에서 1번이나 2번 출구로 나오면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음, 영내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돌면 임정요원 묘, 원효대사 동상, 아기우물, 반공기념탑, 김구선생 묘, 백범기념관, 윤봉길 의사 동상, 충렬사 등의 순서로 답사가 가능하다. 백범기념관 바로 뒤에 있는 대한노인회 중앙회 건물 옆에는 고 육영수여사 송덕비가 있다. 입장료 없고 담장을 사이로 숙명여자대학교가 있다.
첫댓글 효창공원에 그런 사연들이 있군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 서울에 갔을 때 효창공원에 가서 김구선생 및 애국지사님들의 묘역을 참배한 적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효창공원에 얽힌 슬픔 역사속의 의미 알게되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