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음식을 통해 느끼게 되는 맛을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으로 구분합니다. 음식물의 화학성분이 혀에 있는 미각 세포에 감지된 후 이 정보가 뇌에 전달되어, 최종적으로 우리가 ‘맛’이라고 인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살펴볼 매운맛은 앞의 다섯 가지 맛처럼 미각(味覺)이 아니라 통각(痛覺)으로 정의되는 ‘맛이 아닌 맛’입니다. 즉, 매운맛은 음식물을 섭취했을 때 혀와 입안의 점막이 고통을 느끼는 자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맛이 없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일부러 찾게 되는 중독성 있는 이 고통! 맛과 영양의 마지막 주인공, 매운맛을 탐험해 보겠습니다.
매운맛
매운맛을 내는 음식으로는 고추, 후추, 겨자, 고추냉이, 마늘, 양파, 생강 등 다양한 향신료들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매운맛의 최강자를 뽑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추를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고추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소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쓰는 향신료인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된 건 불과 400년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고추가 매운 것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고추씨에 많이 함유되어 있고 기름에 잘 녹는 지용성이며 열에 강한 특성이 있습니다.
매운맛, 얼마만큼이면 될까요?
고추류의 매운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로 스코빌 지수(Scoville scale)를 주로 사용합니다. 고추에서 추출한 캡사이신을 얼마만큼 묽게 희석해야 매운맛을 느낄 수 없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이지요. 즉, 매울수록 스코빌 지수는 높아지고 파프리카, 피망 같이 캡사이신이 없는 고추는 스코빌 지수가 0이 됩니다. 시판 중인 매운맛 라면이 1,320-2,700 SHU, 청양고추는 4,000-12,000 SHU, 한동안 매운 고추로 이름을 날렸던 하바네로는 10만-35만 SHU, 호신용 페퍼스프레이는 200만-500만 SHU, 순수 캡사이신은 1,500만-1,600만 SHU 정도의 매운맛을 갖고 있습니다.
매운맛의 기능
이러한 매운맛은 일반적으로 식욕을 높여주고, 음식의 맛에 긴장감을 더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기분 전환이 필요하거나 스트레스가 있을 때 얼큰한 음식을 찾기도 합니다. 매운맛이 ‘통증’으로 뇌에 전달되면, 뇌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연 진통제인 엔도르핀을 분비합니다.엔도르핀이 분비되면 실제로 어느 정도는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있는 식단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건강과 관련된 매운맛의 기능 몇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1) 위장관 운동
캡사이신은 혈관을 확장하고 위점막을 자극해 소화액 분비와 장운동을 촉진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매운맛은 소화 기능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매운맛이 과도할 경우에는 설사, 항문질환, 역류성 식도염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매운 음식이 위점막을 손상시키고 위궤양의 원인이 된다는 오랜 속설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섭취하는 고추장 정도의 매운맛은 오히려 위점막을 보호하고 위궤양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2) 체중조절 캡사이신이 체지방을 연소하고, 에너지 대사를 촉진한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강렬한 매운 음식 위주로 섭취하는 '캡사이신 다이어트'가 한 때 유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운맛이 식욕을 높이고 소화 기능을 촉진시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매운맛 위주의 식단이 과식을 유발하여 비만을 더욱 초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매운 음식으로 체중 감소하려다, 체지방이 연소되는 속도보다 음식 섭취량이 더 많아지면 안 되겠지요? 우리 몸은 정직하니까요.
3) 진통효과
캡사이신의 매운맛이 초기에는 강한 자극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통효과를 낸다는 사실이 1940년대에 밝혀지면서 캡사이신을 활용한 진통제 개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현재는 대상포진에 의한 신경통, 당뇨병성 신경증, 류마티스성 관절염 등의 치료약제에 캡사이신 성분이 직접 사용되기도 합니다.
캡사이신 계열 화합물들은 일반적으로 진통효과가 일주일 이상 지속되고 독성이 강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의사 처방 없이 민간 진통요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4) 암 질환 캡사이신이 전립선암이나 대장암, 유방암 등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매우 고용량의 농축된 캡사이신을 암세포에 직접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실제 적용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고용량의 캡사이신이 투여되면 암세포도 죽이지만 더불어 정상세포를 손상시키고 자연살해세포(암세포를 파괴하는 면역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려 피부암, 위암 등 암 발생을 촉진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과량의 캡사이신을 임의로 섭취하거나 투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캡사이신의 섭취 권고 기준은 확립되어 있지 않지만, 최근의 국내 연구에서는 건장한 성인 남성 기준으로 하루 청양고추 20개 미만을 섭취하도록 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