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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17:1-24) 이방 왕은 독수리, 선민 왕은 나무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에스겔 17장으로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함께 합니다. 우리는 1-6절을 읽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여 이르시되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되
4.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어 가지고 장사하는 땅에 이르러 상인의 성읍에 두고
5.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
6. 그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 곧 굵은 가지와 가는 가지가 난 포도나무가 되어 그 가지는 독수리를 향하였고 그 뿌리는 독수리 아래에 있었더라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이방 왕은 독수리, 선민 왕은 나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에스겔이 참 특이한 소재들을 사용하여 예언말씀을 비유적으로 계속 해주고 있습니다.
읽어서 아시겠지만 "두 독수리와 두 나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익히 반복해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알게 되었던 바, 여호야긴 왕이 2차 침입 때 포로로 잡혀가면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공석에 시드기야 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왕을 반역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애굽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느부갓네살이 화가 나서 3차 침입을 감행하게 되고, 3차 침입에 의해서 남 왕국 유다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역사적 이야기를 오늘 두 독수리와 두 나무를 소재로 삼아서 우리에게 다시 예언을 하고 있는데, 에스겔서에서도 시드기야 왕이 포로로 잡혀가고 눈이 빠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비유가 뜻하는 내용보다도, 내용은 본문에서 이미 설명을 다 해주고 있습니다. 비유의 독특한 의미가 역사적인 내용보다는 소재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 두 독수리를 언급하고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 나무의 높은 곳에 있는 연한 가지, 새로 막 피어난 가지와 포도나무를 소재로 사용했느냐는 것이에요.
여러분 짐작하셨겠습니다만, 첫 번째 나오는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오는 독수리는 시드기야 왕이 도와달라고 손을 뻗었던 애굽의 바로 왕을 말합니다. 그리고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은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레바논이 선민 전체를 상징하든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백향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향목'은 나무 중에서 그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는 가장 훌륭한 목재로 사용하는 나무였던 것 같아요.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고. 그래서 레바논으로 상징이 되기도 하는데, 그 레바논에 있는 높은 백향목 나무 중에 가장 연한 가지를 꺾어서 장사하는 나라로 가져갔다는 것은, 여호야긴 왕을 바벨론 포로로 잡아갔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5절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 가에 심더니”라는 것은 시드기야 왕을 유다 왕국의 왕으로 옹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의 내용은,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바벨론의 그늘 아래에서 살 것을 거부하고, 애굽에 손을 뻗어 자기가 자발적으로 나라를 세워보겠다고 한 태도가 불신앙적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망했는가라는 역사적 사실은 반복해서 우리가 봤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안점은, 도대체 왜 남 왕국 유다가 아무리 작은 나라이더라도 그 나라는 나라요, 국가는 국가고, 그 국가의 왕인데 여호야긴 왕과 시드기야 왕은 레바논에 있는 백향목 나뭇가지의 한 가지로 비유를 하고, 또 시드기야 왕은 포도나무로 비유를 하는 반면에, 바벨론 왕은 너무너무 아름답고 크고 깃털까지 화려한 독수리로 비유하고, 애굽 왕은 화려한 채색의 털이 아닙니다. 색깔로만 보자면 그냥 밋밋한 것 같아요. 그러나 왜 큰 독수리로 비유를 하는 겁니까?
적어도 왕들이 독수리로 비유가 될 것이었다면, 바벨론은 그 당시 근동의 패권을 쥔 자 아닙니까? 가장 크고 멋진 독수리로 비유가 되고, 그 다음에 애굽이 바벨론만은 못해도 중동의 큰 나라라서 독수리로 비유 됐다면, 중동의 작은 나라 유다의 왕들은 솔개나 매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참새정도는 돼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같은 왕이니까. 같은 종(種)인 하늘을 나는 새로 표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왜 굳이 나무로 표현을 했을까요? 이 새와 나무는 너무나 차이가 많지 않습니까? 창공을 나는 독수리의 그 날갯짓과 하늘에 높이 떠서 기류의 흐름을 타고 나는 독수리, 날갯짓도 많이 하지 않잖아요. 한번 척- 하고 한 참을 날아가지 않습니까? 창공을 비상하고 유유자적하며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모습과 아무리 물가에 심겼다지만, 그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를 생각하면 백향목이 멋지다 하지만, 한 곳에 머물러 붙박이로 뿌리를 내려야 하는 그 나무로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잖아요.
독수리가 뜻하는 바가 뭡니까? 우리가 동쪽에서 뜨는 태양을 향하여 절하는 태양숭배를 말할 때에 신앙이라는 단어를 생각해서 해석을 했습니다. 밝은 미래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이 태양숭배로 나타난다고 함께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늘을 나는 이 날갯짓, 이것도 또 하나의 소망과 희망의 표현 아닙니까? 주어진 현실이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 현실을 벗어납니다. 어디로 갑니까? 밝은 미래, 현재의 이 답답한 묶음을 끊어버리고 하늘을 나는 비상의 꿈으로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피터팬이라는 아이들 동화를 보면, 만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만, 네버랜드가 나와요. 그 네버랜드는 소년과 소녀의 나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늙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피터팬의 나라에서 후크 선장이 피터팬과 함께 있으면서, 피터팬과 라이벌 관계를 이루어 전개되는 이야기가 이 피터팬 동화의 내용인데, 만화 내용을 보면 현실세계에 있는 웬디라는 소녀를 찾아올 때 피터팬이 배를 타고 오는데, 그 배 조차도 네버랜드의 배는 날아다닙니다. 아이들의 꿈속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피터팬의 꿈이 있어요. 그런데 그 피터팬의 꿈이 어른이 되면 ‘돈 좀 더 많이 벌어야지. 좀 더 좋은 차와 좋은 아파트를 사야지. 좀 더 높아져야지. 내가 만약 서울 대학을 들어간다면, 내가 만약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다면’ 이러한 꿈으로 표현이 됩니다. 현실을 벗어나는 날갯짓이 꿈으로 표현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바벨론 왕이 색깔이 아름다운 독수리로 표현된 것은, 지금 현실과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꿈을 이룬 것이에요. 중동의 패자(覇者)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왕이라는 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면서 가질 수 있는 꿈의 최고봉이 현실이 된 것이 왕의 자리 아닙니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원을 모두 다 실행시킬 수 있는 자리, 그러한 권세의 자리, 그러한 부의 자리, 그러한 영광의 자리가 바로 왕의 자리고, 그 왕까지 도달하기 위해 걸어가는 수 없이 많은 계단 중의 어느 하나에 사람의 꿈은 머물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독수리가 되고 그 꿈이 그보다 작은 솔개가 되든지 매가 되든지 하다못해 참새가 되든지, 인간은 모두 다 소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지금의 현실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꿈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꿈꾸는데 돈이 드는 것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꿈을 꿉니다. 현실로부터 더 나은 현실로 비상하는 소망의 날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민의 왕들은 나무로 표현을 하는 겁니까? 이 본문의 역사적인 의미와 연관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본문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시드기야가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라는 것은, 그저 바벨론의 그늘에 살았더라면 좀 더 평안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애굽에게 손을 뻗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그런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는 독수리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바벨론의 그늘 아래에 있다는 것이지요. 자, 이런 역사적 내용을 예언하기 위해서 왜 나무로 표현 했을까요? 독수리와 다분히 상반되는 개념인 나무, 붙박이로 있어야 하는 나무로 표현된 이유가 뭡니까? 선민의 꿈은 시간의 흐름상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 꿈을 가질 때 선민의 꿈은 날개를 다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선민이 꿈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 더 깊이,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에요. 나무는 미래에 심겨질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지금 놓여 있는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그리고 나무의 꿈이 있다면 어떻게 더 깊이 땅 속으로 뿌리를 내릴 것인가에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뿌리를 깊이, 깊이 내림으로 양분을 받아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독수리와 나무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왜 선민은 소망을 가질 때 날개로 갖지 못하고 뿌리의 형태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까?
언제나 하나님은 지금 내 옆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선민이 가져야 할 꿈은 앞으로 10년 뒤에 20년 뒤에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어야지 하는, 지금을 벗어나는 날개를 다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의 꿈은 지금 내 옆에 와 계신 하나님께, 어떻게 뿌리를 내려서 도달해 가느냐는 것이에요.
그럼 왜 뿌리를 내려야 합니까? 왜 지금은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내 속의,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들어와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장애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장애물들의 지층을 뚫고 하나님께로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께 내 마음이 닿아야하는 것이 선민의 소망이라는 것이에요.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문제가 가득 차 있고 세상 사람들의 말씀들이 들어와요. ‘돈을 벌어야 한다. 일류대학을 들어가야 한다. 건강하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야한다.’ 이러한 모든 세상적인 율법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한 율법들이 들어와서 걱정을 일으키고 근심을 일으키고 슬펐다. 기뻤다. 하고 있는 이 상태에서 그런 모든 이 세상의 일들과 세상의 말씀들의 지층을 뚫고 내려가서 하나님께 닿으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율법을 묵상했어야 하는 것이에요. 구약시대 때에.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율법의 완성, 말씀의 완성, 말씀의 총화 되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소망은 지금 기도함을 통하여,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함을 통하여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들을 쫓아내고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이 죽어야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니까. 더 나아지는 미래를 향하는 게 아니라, 지금 기도하는 동안에 지금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소망인 것이에요.
사랑의 단계가 뭡니까?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사랑의 단계라는 것은 그 하나님을 만나는 단계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실감하는 단계지요. 그러니까 항상 믿는 사람들의 소망은 뿌리의 형태를 가지고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이 세상 사람들의 소망은 언제나 날개를 달고 지금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금을 떠나요. ‘지금은 내가 안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물론 믿는 사람들도 선민들도 지금의 환경에 마음을 안주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이 환경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환경 배후에 계시지만 바로 지금 계시는 그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환경으로 인해서 어지러워진 내 마음의 지층을 뚫고 나가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고요. 바로 이런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과 애굽의 이방 왕들은 왕의 자리에 올라선 자들이요. 이 땅에서 이방 사람들이 꿈꾸는 꿈을 단지 꾸었을 뿐만 아니라 실현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선민은 나무입니다. 이 소재를 택하심에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에요. 시드기야의 실수가 뭐였습니까? 바벨론과 애굽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버렸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바벨론의 그늘에 머물라고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그렇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기어코 애굽 왕에게 손을 뻗습니다.
여기서 시드기야가 착각한 것은 자기가 독수리가 되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를 다스린다고 해서 국가를 자기가 책임지고 국가의 존망에 대한 어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국가를 유지보존하기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하고 애굽에 손을 뻗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식으로 표현 되느냐면, 오늘 8절에 보면 "나무가 옥토에 심겨서 분명히 바벨론의 그늘 아래에서 잘 살 수 있었는데, 뿌리를 독수리에게 뻗으면서 물을 달라"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좀 더 확대 해석하자면 독수리가 희망의 상징이요, 소망의 상징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더 나은 현실로 바꾸겠다고, 국가의 현실을 더 나은 현실로 바꾸겠다고 왕의 입장에서 나라를 운영한 것이에요. 이게 잘못 된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시드기야는 유다 국가에 속한 왕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선민들은 유다라고 하는 국가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국가의 레벨과 국가의 차원, 바벨론 국가든 애굽 국가든 유다 국가든 국가의 레벨을 넘어서시는 슈퍼 파워 되시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지, 유다라고 이름 지어진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로 이해하자면 대한민국 땅에 있는 교회는 그리고 교인들은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투표도 하고 주민등록증도 갖고 다닙니다만, 영적으로 대한민국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보내어진 자들입니다. 천국에 소속한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속해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바벨론 왕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지만 없어졌어요.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은 영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국가가 되기 위해서 첫 번째 필요한 요소가 영토 아닙니까? 그 다음에 국민이고 그 다음에 주권이에요. 그러데 영토가 없이도 이스라엘 민족이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아남은 것은 안식일을 지켜가면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국가라는 형태에 속해있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드기야가 그걸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 땅에 있는 교인들은, 미국 땅에 있는 교인들은, 미국에 속한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 속한 자들로서 대한민국에 보내진 것이에요. 그러므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라, 천국을 위해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어떻게 만나집니까?
지금 여기서 지금의 환경이 싫다고 소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마음이 먼저 창공을 날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 앞의 미래를 향해 나가서는 안 돼요. 우리 마음은 붙들려 있습니다. 언제나 위를 향해 있습니다. 이 위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하늘은 앞에 있지 않고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앞에 계시지 않고 위에 지금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는, 뿌리 형태의 소망을 가질 때에 이 세상, 이 땅,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내 삶의 미래와 앞날은 하나님 안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알아서 우리에게 필요한 복지를 계획하시고 계획하신대로 실천하시며 이루어 가시는 것이에요.
여러분! 돈 벌기 위해 미래를 꿈꾸고, 일류대학을 위해 미래를 꿈꾸고, 승진을 위해 미래를 꿈꾸고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것 안 돼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습니다.” 이문열씨의 소설 제목 아닙니까? 그리고 인게부르크 바하만이라는 오스트리아 여류 시인의 “유희는 끝났다.”라는 시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만,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독수리처럼 날았던 바벨론 왕은 없어져버렸어요. 그러나 땅에 뿌리를 내리는 뿌리의 형태를 가지는 선민들은 영토 없이도 2000년을 버텨왔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에서의 메시아를 예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잘못된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이들의 신앙이 영토 없이도 2000년을 민족으로서 보존케 해주셨던 것, 이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됩니다.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8장에 이야기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식민지로 있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상의 조국을 위해서 하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천국에서 보내져 오신 분으로서 천국에 속한 백성들을 챙기신 것뿐이지요. 우리의 소망은 날개가 아니라, 뿌리의 형태로 지금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지금 계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우리의 앞날에 대한 소망은 내 마음 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방 사람들 불신앙인들 십자가의 복음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날개를 달며 소망의 날개로 하늘을 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뿌리의 형태로 갖게 하셔서 지금에 심겨지게 하시고 지금에 머물게 하시고 지금 계시는 하나님께 도달하게 해 주시고, 이 땅에서 삶의 미래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 의해서 펼쳐지는 복지의 삶을 우리의 눈 앞에 보며 간증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나무로 살라고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십자가 올라타고 믿음의 견고한 뿌리를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