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틀
<6> 행장
[본문] 지난날 원오노사에게 간청하였더니 노사께서 법어를 여섯 단락을 보여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일을 바로 보이시고 뒤에는 운문스님의 수미산(須彌山)과 조주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두 가지 인연을 들어서 저의 우둔한 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항상 스스로 거각(擧覺)하여 오래 오래하면 반드시 들어갈 곳이 있으리라.”고 하신 노파심의 그 간절함이 이와 같았습니다만 우둔하고 꽉 막힌 것이 너무 심하니 어찌 하여야 좋겠습니까?
[강설] 원오노사에게 법문을 들은 내용을 밝혔다. 법어의 여섯 단락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이 일(此事)이란 선불교에서 흔히 하는 표현이다. 선지식들의 법문 서두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若論此事)”이라고 시작하는 예가 많다.
즉 참선공부(一大事), 또는 참선공부의 기본을 말한다. 원오선사가 먼저 참선공부에 대해서 설명하고 뒤에 운문스님의 수미산(須彌山)이라는 화두와 조주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라는 화두를 설명하였다고 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묻기를,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운문스님이 “수미산”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방하착(放下着)이란 엄양(嚴陽) 존자가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주스님이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하였다.
엄양존자가 또 물었다.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조주스님이 “내려놓기 싫으면 짊어지고 가거라.”라고 한데서 엄양존자는 크게 깨달았다. 이 두 가지 인연을 원오스님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거각(擧覺)이라는 말은 간화선에서 화두에 대한 의심을 계속해서 지어나가는 것을 “화두를 든다(擧)”라고 표현한다. 또한 화두를 듦으로서 종내에는 깨달음(覺)을 이루게 됨으로 그것을 합하여 거각(擧覺)이라고 한다. 간화선 공부를 대혜스님이 체계화하고 대중화하였으나 스승인 원오선사가 이미 이와 같이 재가 신도들에게까지 가르치고 있었음을 이 편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화두에 대한 의심 계속하면
마침내 깨달음 이루게 된다
[본문] 지금은 다행히 사가(私家)의 세속 인연을 모두 끝내고 한가하게 살면서 아무런 다른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통렬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처음의 뜻을 갚고자 합니다. 다만 선사님에게 친히 가르침을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할 뿐입니다.
일생의 허물을 이미 낱낱이 들어 받쳤습니다. 반드시 이 마음을 환하게 비춰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노니 자세히 이끌어 주시고 경책하여 주십시오. 일용에 마땅히 어떻게 공부를 지어야 절대로 다른 길에 들어서지 않고 바로 본지(本地)에 계합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이야기도 허물이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저의 정성을 다 던지는 일입니다. 스스로 피할 수 없으니 진실로 불쌍한 일입니다. 지극정성 다해 묻습니다.
[강설] 불교공부를 위하여 어떤 선지식을 정하여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으로 여긴다면 이와 같이 자신이 걸어 온 삶을 다 토로하여 고백하고 마음을 다 털어 보이는 정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높은 벼슬살이를 하며 살아 온 사람으로서 이처럼 속내를 보이며 간절히 물어 온 것은 증시랑의 인격과 사람 됨됨이를 짐작케 한다.
대혜선사는 이와 같은 편지를 받음으로서 마음의 짐을 짊어진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이 편지 이후 여러 통의 편지를 수차에 걸쳐 보내면서 있는 정성을 대해서 간곡하게 가르치게 된다. 본지(本地)란 부처의 경지, 진리인 법신 자리를 뜻한다. 본지에 계합한다는 말은 참선공부를 성취하여 부처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출처 : 불교신문 201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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