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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方 廣 佛 華 嚴 經
第四會
修因契果生解分
差別因果周
夜摩天宮 如來放兩足趺光 功德林菩薩 入菩薩善思惟三昧 十行法門
二十一, 十行品
제21 十行品 39
1. 공덕림(功德林)보살이 삼매(三昧)에 들다 39
2. 부처님이 가피를 내리다 39
(1) 가피(加被)의 인연을 말하다 39
(2)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하는 일을 말하다 40
(3) 가피의 상(相)을 보이다 41
① 말의 가피 41
② 뜻의 가피 41
③ 몸의 가피 41
3. 공덕림보살의 열 가지 보살행 42
(1) 보살행의 근본을 말하다 42
(2) 열 가지 행의 이름을 열거하다 42
(3) 제 1 환희행(歡喜行) 43
① 보살은 모든 것을 다 베푼다. 43
②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베푼다. 43
③ 보시의 행을 밝히다 44
④ 깨달음으로 회향(廻向)하는 보시(布施) 46
⑤ 보시의 인(人)과 법(法)이 다 공(空)함 46
⑥ 인(人)과 법(法)이 공(空)한 이익을 밝히다 47
⑦ 법의 보시를 행하기를 원하다 47 (4) 제 2 요익행(饒益行) 48
① 계(戒)를 가지는 행(行)을 밝히다 48
② 섭율의계(攝律儀戒) 49
③ 섭중생계(攝衆生戒) 50
④ 섭선법계(攝善法戒) 51
⑤ 더욱 수승한 행을 닦을 것을 생각하다 53
(5) 제 3 무위역행(無違逆行) 53
① 인욕행을 밝히다 53
② 원한과 침해를 참는 인욕 수행 54
③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인욕 수행 56
④ 법의 이치를 관찰하는 인욕 수행 56
⑤ 인욕을 수행하는 의미 57
(6) 제 4 무굴요행(無屈撓行) 57
① 정진행을 밝히다 57
㉮ 열 가지의 정진 58
㉯ 과오를 떠나다 58
② 정진을 수행하는 이유 58
㉮ 일체중생을 위한 정진 수행 58
㉯ 일제 불법을 알기 위한 정진 수행 59
③ 다시 문답으로 정진행을 밝히다 60
④ 정진행으로 일체중생에게 열반을 얻게 한다. 62
(7) 제 오 무치란행(無癡亂行) 62
①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 62
② 경계에 나아가도 어리석음과 산란함이 없다 62
③ 선정으로 바른 생각을 성취하고 온갖 법을 듣는다. 63
④ 선정 수행의 인과를 밝히다 64
⑤ 선정을 성취하면 온갖 음성도 산란케 하지 못한다. 65
⑥ 온갖 음성에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65
⑦ 모든 장애를 떠나다 66
⑧ 선정을 닦은 보살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66
⑨ 청정을 얻다 67
⑩ 선정(禪定)의 공덕 67
⑪ 중생들을 더욱 이익케 할 것을 생각하다 68
(8) 제6 선현행(善現行) 68
① 반야바라밀의 행 68
② 삼업(三業)을 보이다 69
③ 이치로써 사상(事相)을 알다 70
④ 이치와 사상이 걸림이 없다 70
⑤ 이치를 따라서 자비를 일으키다 71
⑥ 내가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면 누가 교화하겠는가. 71
⑦ 나만 이 법을 알면 다른 중생은 어찌 되겠는가 72
⑧ 중생들을 먼저 교화하라 72
⑨ 이와 같은 보살을 섬기면 깨달음을 이루리라 73
(9) 제7 무착행(無着行) 74
①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나 마음에 집착이 없다 74
② 삼보를 공양하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다 74
③ 장구한 시간을 수행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76
④ 온갖 만행(萬行)을 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76
⑤ 집착이 없으므로 자신은 이롭다 77
⑥ 집착이 없으므로 남을 이롭게 하다 78
⑦ 큰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다 79
⑧ 집착이 없음을 널리 나타내다 80
⑨ 집착이 없는 까닭 80
⑩ 집착이 없는 행의 광대함 81
⑪ 집착이 없는 행의 만족함 81
(10) 제 8 난득행(難得行) 82
① 열 가지 선근(善根)의 성취 82
② 선근을 닦아 얻기 어려움을 다 얻다 83
③ 얻기 어려운 행을 이룬 이익 84
④ 중생을 제도함을 비유로 나타내다 84
⑤ 비유와 법을 합하여 나타내다 84
⑥ 비유와 법을 합하여 나타내다 85
방학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제 9번째 단락 그러니까
⑨ 二行을 雙遮라
두 가지 행을 모두 버리다
그 대목 할 차례지요?
앞으로 한 번 잠시 넘겨보시겠습니까?
제 ⑥번 비유와 법을 합하여 나타내다
어떠한 무슨 까닭이냐, 何以故, 어떠한 까닭이냐
보살이 深入衆生界如法界하야, 보살이 중생계와 법계와 같은데
깊이 深入, 들어가서 중생계와 법계가
無有二라,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없다.
비유와 법을 합하여 나타내는 대목 있죠?
그 대목이 되겠습니다.
둘이 없는 법에는 더함이 없고 덜함이 없고 나는[生] 것도 없고 멸함도 없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취함도 없고 의지함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둘도 없나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일체법과 법계가 둘이 없음을 아는 연고이다.
여기서 취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분별할 수 없다, 이런 말입니다.
분별할 수 없는 것을 쉬운 말로는 同一眞如法界라,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러니까 이 얘기를 이제 무위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셔야
화엄경에서 우리 흔히 얘기하는
法性圓融 無二相이라고 하는 대목 있지 않습니까?
화엄경 법성게 첫 구절
우리가 궁색하게 억지로 말해가지고
色受想行識을 나눠놓기도 하고
또 진여다 열반이다 생멸이다 이렇게 나눠놓지만
이 진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생멸에 너무 사람이 과도하게 집착해 있고
무명 번뇌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걸 건지려고 피치 못해서 시설 세워놓은 것이 진여이지
그런 것을 이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해를 하셔야 되고
그것이 고정적인 실체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든지
열반의 법이 있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스님들이
상당히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처님 뜻 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흔히 도인이라 하시는 분들도
화두를 챙겨서 깨달을 법이 실제로 있다고 자꾸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 화엄경 이 구절을 빌려서 볼 것 같으면
우리 소승 불교의 아함부 대목 하고
전혀 그 부분 중에서 실제로 연기법을 꿰뚫어서
연기가 환망과 같다고 하는 그 대목 하고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을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다시 한 번 이 대목을 오랫만에 한 번 짚어보고
오늘 본문에 들어가야 조금 이해가 쉬울 것 같아서
앞에 잠시 짚어봤습니다.
그러니까 방편을 빌려서 피치 못해서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고
방편에 의지해서 진실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법이 시설됐는데
실제적으로는 생멸의 법도 없고 진여의 법도 없다고 하는 것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는 그 대목을
우리는 그냥 으레적으로 있는 경전 구절이거니~ 하면서 외우지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큰 종소리나 북소리 같이 울리는 거죠.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했을 때
진공 본래 없는 것이요 色受想行識 亦復如是니라.
본래 없다.
諸行이 無常하고 諸法에 無我라.
무위법에도 我는 없는 것이고 無我인 것이고
유위법에도 무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둘도 없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고
영가 현각스님 증도가를 첫 구절을 빌려서 이해하자면 그...뭡니까?
絶學無爲閑道人은
不除妄想不求眞이라.
망상을 없애려고도 하지를 아니하고
진짜를 구하려고 하지도 아니한다.
망상을 왜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까?
망상 본래 없기 때문에
진짜를 구하려고 하지도 아니한다.
이 뜻은 어떻게 되죠?
진짜 본래 없기때문에
그래서 육조스님 말씀을 빌리자면 本來無一物이다.
그래서 無相으로 爲宗하고 無住로 爲體하며 妙有로 爲用이라.
이래서 금강경 육조 서문에 첫구절이 그렇게 돼 있죠.
이 대목을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법성을 이해하는 데서
상당히 이해가 편하게 올 것 같습니다.
자~ 다시 한 번 이쪽으로 주목해주십시오.
우리 불교를 이해하는데는
화엄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화엄경 제 일게를 들어라 하면 뭐죠?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4회차 설법에 야마천궁 게찬품 몇 번째?
9번째 게송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대목에 제가 강의하면서 설명드린 바가 있는데
다시 한 번 짚습니다.
왜 옛어른들께서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를 집어놨느냐?
그 4만 5천 게송 중에서~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까지는 평상적인 말입니다. 그죠?
그대 과거 현재 모든 부처님을 알고 싶으냐?
어떻다는 말이죠?
應觀法界性 하라.
應觀 법계의 성품
오늘 지금하는 대목이 뭡니까?
법계와 법계, 이런 얘기가 쭉 나오지 않습니까? 그죠?
법계의 성품이 어떻다는 말이죠?
본래 없는 진공이라는 말씀입니다.
三世一切佛을 알고 싶으냐?
일단 먼저 應觀 法界性 하라!
생멸법이고 불생불멸법이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면 다 뭐냐?
일체가 유심조니라.
모든 현상 분별 세계는 심식으로써 마음으로 조작한 것이다.
그래서 應觀法界性이라는 대목에서는
우리 불교에서 얘기하는 모든 것을 있는 걸 다~ 민절해서 없애는
중관 사상 진공 사상이 거기 나옵니다.
법계의 성품은 본래 없다는 대목
그런데 이 세상 전체가 觸目皆法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법이고
만나는 것마다 전부 다 佛佛이라.
모든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얘기했을 때는
일체유심조라고 얘기를 합니다.
능가경 구절을 빌리자면 그런 대목은
心生卽 從從法生 하고 心滅卽 從從法滅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죠?
생각이 생겨나니까 갖가지 법이 따라서 생겨지고
생각이 사라지니까 모든 법도 사라진다.
이게 이제 大乘始敎 쪽에 와서 그렇게 정리가 된 거고
一乘圓敎에 와서는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합니다.
이런 것을 아함이라든지 근본 불교 쪽으로
입장으로 당겨놓고 보면 어떻습니까?
마승비구가
諸法은 從緣生하고,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고
緣盡法還滅이라, 인연이 다 하면 법 또한 다 사라진다.
그러면 인연은 어떠한 것이냐?
본래 공이다.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하니까 皆空이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 가시죠?
그런 것을 마승비구가 이제 그 구절을 읊죠.
諸法은 從緣生하고 緣盡法還滅이라.
我師大沙門은,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常作如是說이라,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열반도 없고 생멸도 없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이제 이해가 되어야 여기 하는 대목들이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일체법과 법계가 둘이 없음을 아는 연고라.
일체법계가 동일한데 어찌 우리가 좀 모자란다고
우리 중생만 그 법계에서 빠질 수 있겠습니까? 그죠?
우리도 당당히 법계의 일원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냐 하면
더 이상 보탤 수 없으니까 이대로가 진짜요.
더 이상 뺄 수 없으니까 이대로 여여한 것이라.
그래서 眞如當體라.
깨닫는다 하더라도 이것보다 더 보태질 것도 없고, 그죠?
이 在纏法身으로, 번뇌에 얽혀사는 중생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모자랄 것이 없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⑦ 動靜無礙
菩薩이 如是以善方便으로入深法界일새 住於無相호대 以淸淨相으로 莊嚴其身하며 了法無性호대 而能分別一切法相하며 不取衆生호대 而能了知衆生之數하며 不着世界호대 而現身佛刹하며 不分別法호대 而善入佛法하며 深達義理호대 而廣演言敎하며 了一切法離欲眞際호대 而不斷菩薩道하고 不退菩薩行하며 常勤修習無盡之行호대 自在入於淸淨法界하나니라
⑦ 고요하고 움직임이 걸림이 없다
보살이 이와 같이 좋은 방편으로 깊은 법계에 들어가고는 모양이 없는 데 머물러서 청정한 모양으로 그 몸을 장엄하며, 법의 성품이 없음을 알지마는 일체법의 모양을 분별하며, 중생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중생의 수를 알며, 세계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부처님 세계에 몸을 나타내며, 법을 분별하지 않으면서도 부처님 법에 잘 들어가며, 이치를 깊이 통달하고도 말로 가르침을 널리 연설하며, 일체 법이 탐욕을 여윈 진정한 경계를 알면서도 보살의 도를 끊지 아니하고 보살의 행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다함이 없는 행을 닦아서 자재하게 청정한 법계에 들어가느니라."
⑦ 고요하고 움직임이 걸림이 없다
⑦ 動靜無礙라
앞에는 법계무애를 얘기해놨잖아요. 그죠?
여기서는
動靜無礙라
화엄경 왕복서 첫 대목 어떻게 나옵니까?
往復은 無際나, 오고 가는 것
往復, 往은 가는 것이고 復은 돌아오는 것이잖아요. 그죠?
거래, 다른 말로는 생멸
생멸 거래가 無際라, 끝도 없다 하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잖아요?
조금 머리 좀 좋고 돈 좀 많고 인물 좀 좋고 이래 봤자
그 아만 피워봤자 그런 걸 흔히 아만이라 하거든요.
족벌 좀 좋고 이래봤자...
저 바다에 멸치 몇 마리 더 있는 것 비슷한 거요.
머리 조금 좋아봤자 이 불성에 비유하면
저 넓은 들판에 낱알 곡식 몇 개 더 있는 것 비슷하다고...
그것도 굉장한 차이기는 하죠.
돈 몇 푼 더 있는 것 하고
우리가 진여 자성을 이대로 간직하고 있는 칠보탑, 칠보 밥그릇
우리 금 밥그릇을 황금 밥그릇을 다 가지고 있잖아요. 사람마다
그런데 우리는 번뇌 집착 때문에 늘~ 거지 깡통을 부러워 하잖아요?
제가 강의하다가 한 번씩 걷어보라고 하잖아요.
여기 줄 있는 분들은 전생에 거지 깡통 이래 차가지고 구걸하던 데거든. ㅎㅎ
스님들은 이~렇게 다니니까 밥그릇 이렇게 탁발 이렇게 다니지만...
거지 깡통 있죠?
여기 차고 다니는 것 ㅎㅎ
여기 한 번 걷어보세요.
여러분들 줄이 하나 쪽~ 나 있을 거에요.
마음이 옹색한 사람들은 나 있어요.
그런 것이 부처님께서 32상 80종호가 유위법이기는 하지만
괜히 생겨진 게 아니다.
집착 없는 마음을 씀으로 해가지고
사람의 이 색신도 원만해지고 相好도 원만해지고
相 속에는 또 好가 있고,
호도 참 아름답게 돼 있죠.
그런 몸에 색신과 형상과 상호가
그렇게 好가 펼쳐진 걸 動이라 그러고
그러니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한다는 것을
여기서는 靜이라고 합니다.
動은 생멸이고
靜은 往復은 無際나 動靜은 一源이라, 해뇠죠.
움직이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 근원은 하나다.
기신론 얘기를 굳이 빌리자면
覺心初起에, 처음 우리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을 때
心, 마음은 無初相이라, 업상이 없다.
기동하고 작동하는 게 아니다.
無動이다.
舊來不動名爲佛 諸法不動本來寂
본래부터 不動에서 움직임이 없는 것이 고요하다고 하잖아요. 그죠?
여기에서 우리는 뭘 믿어야 될지 뭘 의심해야 되는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분명히 부여해야 되고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여기서 이제 動이라고 했을 때도
그냥 움직이는 것~ 고요한 것~
이 정도 해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고
動靜無礙라고 했을 때도 어떻습니까?
있기는 있지만 아까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방편을 시설한 것은 뭘 알기 위해서?
진짜를 알기 위해서
저울대를 든 까닭은 뭡니까?
실제 곡식을 달려고...그죠?
우리 흔히 공부할 때
'과학적으로' 이렇게 하잖아요. 그죠?
절에서는 뭐라 하죠?
과학적이라 안하고 과학보다 더 분석해가지고
科判과판이라 하잖아요. 그죠?
科判
벼 禾화자 옆에다가 말 斗두자
벼를 이~만큼 쌓아놓고 몇 말인지 어떻게 해봐야 돼요?
말로 달아가지고 분석해봐야 되잖아요. 그죠?
그걸 이제 科과라고 하잖아요. 과
그래서 우리가 제목 같은 것 떼어놓은 것 科라고 하잖아요.
科는 과만 알려고 하는 게 아니고 뭘 알려고 하죠?
그걸 통해서 분석해가지고 정확하게 내용을 알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저울대를 이렇게 든 까닭은
실제적으로 진실, 진짜 열매를 달 무게가 얼마인지 크기가 얼마인지
부피와 무게를 달려고 하잖아요?
저울대 자체가 우리 흔히 뭐라 합니까?
고기 잡는 통발이고
이 화엄경 같은 게 전부 방편 시설로 돼 있는 것이죠.
달을 가리키는 뭐죠?
손가락이고 강을 건너는 떼벌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 아니겠어요?
방편과 진실을 잘 이렇게 깊이 생각해서 알아야 되는데
흔히 우리 같은 강사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글 많이 아는 걸로 자기가 진짜 아는 줄 압니다.
이건 아는 게 아니죠.
글만 아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動靜無礙라고 하는 것도
그러니까 글만 아는 게 아니고 글도 제대로 모르는 거죠. 사실은 ㅎㅎ
글만 아는 게 아니라 글도 모르는 거죠.
動靜無礙라고 하는 거는
靜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이고, 집착이 없는 무착이고,
動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것이든지 방편을 시설해서
생멸로 움직이는 입장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될 지 무엇을 의심해야 될 지는
대충 이제 화엄경 하면서 판단은 났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이제 일단 믿는 건 뭡니까?
자기가 了因佛性을, 正因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는 거죠.
그것이 이제 흔적이 없다는 것까지 믿으면 굉~장한 거죠.
그리고 연기법이라고 하는 거는
이 세상에 유위법으로 벌어진 연기는
반야심경 구절을 빌리면 어떻습니까?
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처음 시작에,
자~ 과거법이라고 하는 거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과거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니까 뭡니까?
無始입니다.
미래법이라고 하는 거는 종극입니다.
끝입니다. 그죠?
종말입니다.
그런데 미래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뭡니까?
無終입니다.
이 마음은 無始無終입니다.
그런데 번뇌는 유시유종입니다.
지금 현재는 지금 현재 쓰는 거는
이 무시무종의 중간 속에서 無住而住라.
무집착으로 무애하게 이렇게 쓰는 것이
應無所住 而生其心으로써
현전에 일념으로 살아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힘들죠.
힘든 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까지 믿어야 되죠.
아~ 금방 돌아보면 압니다.
내가 깨살스럽고 아만 떨고 이런 것 이래 보니까
아~ 계속 속고 살아온 거죠?
그래 자기를 믿지 못하는 거죠.
불안스럽고
여기서 動靜無礙라고 하는 것은
산란하고 고요한 것이 둘이 아니다.
여기서 다른 걸로 이제 붙이자면 이런 것까지 붙일 수 있습니다.
이게 시계입니다. 시계
시계 들면 이게 쉬게... 쉬시게... ㅎㅎ
이 안에서 째깍~째깍
시간이 저 시계도 있고 이 시계도 있고 막 돌아가지만
시간이 돌아가는 시간은 뭡니까?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이판이라고 했죠. 이판
시계가 이런 모양으로 형성돼가지고 이렇게 보이는 거는 뭡니까?
사판입니다. 그죠?
그러면 저 시계하고 이 시계 하고는
큰시계 하고 작은 시계는 시간이 달라요.
여기서 시계는 같은 시간은 거의 없죠. 시계에도
아~ 그런 것 이래 보면
사람이 이판은 달라질래야 달라질 수도 없고
시간은 그 시간이잖아요. 그렇죠?
시간은 그 시간인데 시계는 그 시계가 아니요. ㅎㅎ
얼추 비슷하지만 같은 시간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더 맞겠죠?
이해 가십니까?
아~ 그러면 우리의 一理平等하게 흐르는 진리,
진짜 이판이라고 하는 우리 진심,
진여는 본래 없기 때문에 누구나 다 똑같을 수 있지만
얼굴이라든지 키라든지 몸무게라든지
사판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그 사람의 사상과 주의 생각 지식 정도
이런 것 또 어떻습니까?
성격
衆生之根欲性이 殊라, 다 다르다.
그러면 같다고 하는 거는 뭘 같다고 하는 지
다르다고 하는 거는 뭘 다르다고 하는 지
이건 파악이 가야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면 動靜無礙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이판으로 있는 진짜 진여의 본심은
어떠한 형태로 그 사람이 지옥 아귀 축생을 돌든지 간에
전혀 상관 없이 무애자재하게 그거는 썩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썩고 사그라들고 단절이 있고 끊어지고
영원하지 못한 거는 뭡니까?
무명으로부터 파생되어진 우리의 업장, 업보, 이해가시죠?
그런 것들을 진심이 본래 없는데
망상이 어디에 붙을 자리가 있겠느냐?
이런 걸 이제 위로 삼아서 가다가 보면 이런 구절들이 이해가 됩니다.
⑦ 고요하고 움직임이 걸림이 없다
보살이 이와 같이 좋은 방편으로 깊은 법계에 들어가고는
법계에 깊~이 들어간다는 말은
자리의 행이 스스로 이익되는 행이 믿는 마음이 강렬해야 됩니다.
발심 공덕이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범행품 마지막 구절이 뭐였습니까?
초발심시변성정각
초발심시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리고나서 초발심공덕품 들어가죠. 그죠?
처음 발심만 하기만 하면~
이런 뜻으로 나옵니다.
좋은 방편으로
그러니까 방편은 나쁜 방편도 좋은 방편도 있고
좋은 방편은 뭘 나타내기 위해서 방편을 쓴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까?
진짜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죠?
더 정확하게 진짜를 점검하기 위해서
저울대가 필요하고 자가 필요한 거죠.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이렇게 잴 수는 있지만
김해 가면 무척산이 있듯이
부처님의 이마를 바라볼 수 없듯 고원정상이듯이
우리의 본심의 바다는 너무나 깊고 넓어서
사실은 볼 수는 없는 것이겠죠?
형체가 있으면 우주 끝이 있으면 어떻게든지 볼만 하겠는데
본래 자체가 없는 것이니까 어떻게 볼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봤다고 하면 착각이죠.
봤다고 하면 착각이라 이러면 어른스님들한테 두드려 맞으니까
봤다고 하면 시계죠.
착각 착각 ㅎㅎ
모양이 없는 데 머물러서 청정한 모양으로 그 몸을 장엄하며,
그러니까 그 대목을
모양이 없는 데 머물러서 청정한 모양으로 그 몸을 장엄하며 법의 성품이 없음을 알지마는 일체법의 모양을 분별하며,
그러니까 계율이 없는 줄 알지만
사람들이 같이 단체 생활해야 되니까 계율을 지켜주고, 그죠?
남에게 보시를 행하는 것도
不住色布施인 줄 뻔히 알지만, 어떻습니까?
내가 보시했다는 이름을 크게 내고, 왜냐?
상을 내는 게 아니고 남들로 하여금 분발해서
그 사람도 보시할 수 있는 인연을 지어주기 위해서
일부러 신문에도 내고 테레비에도 내고 광고 많이 해야 되죠.
그러나 그게 상을 내는 건 아니죠.
상이 아닌 줄 알고 그냥 요령 흔들고 구세군 하고
악수해주고 보시해주고 돈 도와주고
내가 5백만 원 냈다, 내가 3억을 냈다, 이렇게 세월호 난 1억 냈다,
이렇게 하는 거는 어떻습니까?
간탐 중생들이 거기 동참해가지고 얼마라도?
백 원이라도 할 수 있게끔 위로한다면 그건 상이 아니죠?
여기 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이제 저~기 지금 십행품이니까 더 구체적으로 잘 나오고 있죠.
저~ 뒤에 가면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만
離世間品 보면 이런 대목들이
정~말 離 世間, 세간을 떠난 상태에서 세간에 같이 살거든요.
너무 자세하게 나오죠.
이세간품이 몇 번째 법문이죠?
8번째 법회 아닙니까? 그죠?
그것도 보현보살 보현행원이 주체가 그런 것들이요.
그 다음에
중생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중생의 수를 알며, 세계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부처님 세계에 몸을 나타내며, 법을 분별하지 않으면서도 부처님 법에 잘 들어가며,
우리 흔히 대표적으로 뭐라 합니까?
부처님의 팔상성도가 고정불변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전설같은 꾸며진 얘기들이 아니라
누구를 격려하기 위해서?
중생을 격려하고 이끌기 위해서 방편으로 시설했다.
이런 얘기들이 화엄경 곳곳에서 등장하고
기신론 같은 데 또 다른 데도 많이 등장하죠.
법화경은 더욱 더 말할 것도 없죠.
법화경에 보면 大通智勝如來부처님의 16번째 아들이 누구죠?
석가모니부처님이 16번째 아들입니다.
왜 하필이면 석가모니부처님이
그러니까 강의를 하다가 보면
"스님~! 석가모니부처님이 대통지승여래불의 16번째 아들이에요?
마야부인 아들 아니에요? 정반왕의 아들?"
그거는 朝打三千 暮打八百
아침에 삼천 대 저녁에 팔백 대 두드려 패버려야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통지승여래불의 16번째 아들이구나!'
이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아~ 잘 살면 팔정도, 못살면 팔사도'
그래서 막내 제 16번째 아들입니다.
대승경전은 그와 같은 얘기들이 좍~ 많이 나오죠.
화엄경도 의미를 꿰뚫고 이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이치를 깊이 통달하고도
이치를 깊이 통달하면
모든 반연하는 것을 떠나고 이름을 떠나고
언설을 다 떠나게 돼 있습니다. 그죠?
이 진여라고 하는 것은
혓바닥으로 말하고 싶어도
이 혓바닥으로는 용광로에 갖다대는 것 같아서 말할 수가 없고
이 진여라고 하는 것은 말 한 마디 붙이려고 해도
紅爐一點雪이라.
그냥 포항제철 용광로에다가
눈 한 줌 집어넣어봤자 금방 녹고 없어지는 것처럼
도저~히 어떻게 부처를 강의를 하고, 마음을 강의를 하고, 이게 되겠느냐?
안된다.
이 육안으로 부처를 보려고 하면 눈이 녹아버릴거요.
아마 내가 볼 때는
혓바닥을 갖다대면 혓바닥이 타버릴 것이고...
그렇지만 피치 못해서 갈 길이 무슨 길 뿐이에요?
말 뿐이니까 因言遣言인언견언이라.
말을 세우기 위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말로 한다.
因言遣言
흔히 以毒制毒, 독에다 독을 더 하는 게 아니라
독을 제거하려면 할 수 없이 독을 써야 되고
以夷制夷이이제이라,
오랑캐를 없애려고 하면 오랑캐를 하듯이, 그렇죠.
이치를 깊이 통달하고도
말로 가르침을 널리 연설하며,
그러니까 말로 안하니까
옛날에는 하~ 도 말 안들으니까
마이동풍이니 뭐 우이독경이니 그렇게 얘기했는 것 같아요.
하여튼 경전 안보는 사람들은
화엄경 안보면 좀 축생 비슷~하다고 이렇게 봐도 될 것 같아요.
축생이요. 정확하게~
신심 있다고 폼을 잡고 옛날에 휘황~찬란하게
행자 시절에 우리 신심 있게 살았던 그런 얘기하잖아요?
아쉬운 낙오자는 다 과거를 자랑하게 돼 있어요.
"하~! 우리 그때 선방에 살 때 진짜 용맹정진 할 때 좋았는데..."
이러면 그거는
'아~ 지금 아무 것도 없구나...'
이래 생각하면 돼요.
지금 좋아야 돼요. 지금
그러니까 삼매의 근본은 뭡니까?
진여입니다.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는 삼매, 어른이고 아이고 무조건 못들어가요.
선방에서 삼매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은
오직 거짓말도 없고 그냥 탐진치가 다 끊어져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그건 경전 속에 자명하게 돼 있어요.
우리가 노리는 게 지금 삼매 아니겠습니까? 삼매
삼매 속에서 여기서 이제 동정무애가 되는 거죠.
시장 바닥에 가더라도 흔들림이 없고
혼자 가만~히 있더라도 속이는 게 없고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간에
如對大賓이라.
자기 내면에 있는 부처님 하고 마주보니까
바깥에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이야 속일 수도 있지.
신도 속이고 부처님도 속이고 도반도 속이고 다 속이지만
자기 속에 있는 부처를 속이면 그때부터는 삼매는 없는 것이요.
일체 법이 탐욕을 여윈 진정한 경계를 알면서도
제대로 삼매에 들어가는 거죠.
보살의 도를 끊지 아니하고
좀 오졸 없이 산다 이런 말입니다. 솔직하게는~
미주알 고주알~ 남 다 돌보면서
남한테 좀 모자란다는 소리 많이 듣죠. 이래 되면
보살의 행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다함이 없는 행을 닦아서 자재하게 청정한 법계에 들어가느니라."
어떤 악조건이 있어도
於諸難處無諸難이라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 어려움이 자기를 힘들게 하지 못한다.
청정한 법계
청정한 거는 잘 아시겠지만 應無所住 而生其心
無住而住라, 머무름 없이 머무르고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낸다.
그러니까 자재하고 청정하고
얼마나 청정하느냐 하면
미제 오공 본드 미제 강력 본드로 붙여도
이 허공은 붙일 수가 없다.
그 어디에도 집착이 달라붙지 않는 것
지금 거기 앞에 8 꼭지로 쭉~ 설명을 해놨는데
그 앞 부분은 아~주 본체, 고요한 데 있는 그런 작용을 나타내고
뒤에는 움직이고 보살행을 하고 흔들리는 중에서도 뭡니까?
또 고요~함을, 그죠?
처음에는 고요함 속에서도 움직이고
뒤에는 뭡니까?
움직임 속에서도 고요~하고
서장 같은 데는 대혜 종고스님께서
鬧處요처에 공부가 시끄러운 데서 신경질 나고 공부 안되고
막~ 돌 깨고 앵~ 하고 공사하고
절에서 불사할 때 시끄럽잖아요?
공부 안되는 분들은 어디에서 공부가 안됐습니까?
靜處에서, 고요한 곳에서 공부를 안했는 사람은
시끄러운 곳에서도 공부를 못하는 거라.
훈련소에서 뺑뺑이 돌고 사격을 열심히 해야
자대 배치 받아가지고도 사격을 잘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평소에 훈련 중에서
열심히 고요한 곳에서 자기 힘을 길렀던 사람은
고요한 곳에서 누워 자던 놈은
시끄러운 곳에 오면 막 비틀거려. 자빠져버려.
왁! 이러면 자빠져버려.
그러니까 고요한 곳이 시끄럽고 이러니까
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곳이라고 하는 거는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잠이 많고 말초 신경을 자극시키는
그런 오욕락이 드글드글 끓는 자리가 시끄러운 곳 아니겠어요?
여기서 끝에 것은
그런 오욕락이 시끄러운 속에서도 어떠하다고요?
고요~하다.
거기 마지막 구절 있잖아요?
부지런히 다함이 없는 행을 닦아서
어떻게?
자재하게 청정한 법에 들어가는 게
고요한 거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움직이니까 어떻습니까?
부지런히 다함이 없는 행을 닦는다
이런 말씀 아니에요?
앞에 것까지는 어때요?
고요함 속에서 움직이고
뒤에는?
움직임 속에서 고요하니까 動靜無礙라.
그렇게 되면 어떠냐?
⑧ 譬喩
譬如鑽木하야 以出於火에 火事無量이나 而火不滅인달하야 菩薩도 如是하야 化衆生事가 無有窮盡이나 而在世間하야 常住不滅이니라
⑧ 비유로써 밝히다
"비유컨대 나무를 비비어 불을 내거든 불타는 일이 한량없으나 불은 꺼지지 아니하나니, 보살도 그와 같아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다함이 없으나 세간에 있어서 항상 머물고 멸하지도 않느니라.
⑧ 譬喩
譬如鑽木하야 以出於火에 火事無量이나 而火不滅인달하야 菩薩도 如是하야 化衆生事가 無有窮盡이나 而在世間하야 常住不滅이니라
( 鑽 찬 : 1. 금강석(金剛石), 2. 깊이 연구하다(硏究--), 3. 끌다, 4. 날(=鋒刃), 5. 다이아몬드, 6. 뚫다, 7. 모으다, 8. 비위를 맞추다,)
지난 시간에 여기까지 읽고 마쳤습니다.
⑧ 비유로써 밝히다
"비유하자면 나무를 비비어 불을 내거든 불타는 일이 한량이 없지만
불은 꺼지지 아니하나니, 보살도 그와 같아서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다함이 없지만 세간에 있어서 항상 머물고 멸하지도 않는다.
이 나무는 법계에 비유합니다.
불꽃은 우리 천수경 할 때 뭐라 합니까?
우리 몸을
受持身是光明幢 受持心是神通藏 하듯이
이 몸과 이 마음이 이대로가 잘 이루어진 몸이 돼 있는 身智죠. 신지
몸이 지혜가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쿡! 찌르면
모기가 물면 얼마나 아픕니까?
몸도 기똥차게 안다니까 이게
그리고 지가 또 살려고 막 부어오르고
이 몸에도 지혜가 가득~해요.
피부 끝부터 해가지고 머리카락 끝까지 신기해요.
손톱도 저절로 자라고...
이 불은 우리가 개발만 하면 언제든지 몸의 육체적인 능력이라든지
정신적인 능력이 활활 타올라서
특히 우리 불성은 말할 것도 없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죠.
여기서 불타는 일이 한량이 없다
인연을 잘 만나서 불이 꺼지지만 않으면
계~속 이제 활화산처럼 타오른다는 것은
우리가 불꽃이 저렇게 타듯이 그냥 '불 났는가 보다' 이러면 안되고
정확하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불 가지고는 여러가지를 음식도 만들고 방도 덥히고 물도 끓이고
뭐 많이 하잖아요? 그죠?
중생을 교화하는 우리 자비심이 불입니다.
자~ 불이 활활활 타올라 오는 거는 어디에 비유한다 했습니까?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어떻다?
끝없으니까 무변하다.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광대무변한 거죠.
여기 이렇게 화엄경을 2년차 지금 1년 반 끝내시고
또 계속하시는 분들이 만만한 분들입니까?
중도에 다 폐기하죠.
그 다음에 본래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히 있다고 하는 것은
몸과 우리 지혜가 항상 있다고 하는 거죠.
그걸 육조스님의 얘기를 잠시 빌리면 이렇습니다.
돈황본 단경에는 어떻게 돼 있죠?
佛性常淸淨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그죠?
불성이 항상 이렇게 오염되지 않고
잃어버리거나 파괴되거나 되지도 않고
항상 청정한 존재로 우리 하고 같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불성이 항상 기대어 있는데
그 불성 자리에다가 꺼고 싶어도 꺼지지 않는 거죠. 사실
우리 심지, 항상 담담~하게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깨끗하게
우리 몸과 마음에 그것이 갖춰져 있다고 하니까
피치 못해서 말을 빌리자니까 갖춰졌다고 하는 것이죠. 그죠?
그런데 업장이 두꺼운 놈은 못쓰잖아요? 잠시도
수갑 차고 족쇄 찬 것처럼 해가지고 그걸 못쓰잖아요?
눈 꽉~ 닫고 귀 꽉~ 막고 눈 감고 이래가지고
막 보고 듣는 것 하고 똑같잖아요?
그런데 바깥에 무명의 번뇌에만 사로잡히지 않으면
우리 심지풍광이 본지풍광이 몸과 마음의 지혜가 항상 담담~하죠.
우리 49재 지낼 때 뭐라 합니까?
妙體湛然
그 다음 뭐요?
無處所 그죠?
묘체는, 우리의 심체는 담연해서 깨끗해서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지. 사실은
허공 청정한 것처럼
거기까지 해가지고 우리의 심지, 본지풍광에 대해서
쭉~ 앞에도 이어진 얘기지만
앞에 너무 돌아가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거기까지 해서 한 번 돌아봤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저는 금년 1월에사 이곳 카페 소개를 받고 녹취록을 따라 오느라 날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네요
이제 40강까지 따라 왔지만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한편 행복하답니다
읽을 강의가 더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지!!!
아직 윗 녹취록(47-1)은 읽지 못했지만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이곳에 댓글을 올렸습니다
낱낱이 친절하게 베푸시는 법설과 녹취록 너무 고맙습니다
어쩌든지 강사스님과 지선화님 두 분께서는 저를 위해서라도 건강하십시요
늘 꼬리글 보면서
'중도에 그만두지 않으시고 차근 차근 너무 잘 하시는구나...'
하고 있지요 ^^
저도 이렇게 수도 없이 들으며 녹취하는데도 신기하게 여전히 감동이랍니다.^^
'아 스님도 그래서 평생 보시는구나...' 싶어요
보살님도 건강하셔서 서로 탁마하면서 화엄경 끝까지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_()()()_
動靜無礙..
佛性常淸淨...
지선화 님!! 수고하셨습니다..^^
상을 내는 게 아니고 남들로 하여금 분발해서
그 사람도 보시할 수 있는 인연을 지어주기 위해서
신문에도 내고 테레비에도 내고 광고 많이 해야 되죠
일부러 글 많이 아는 걸로 자기가 진짜 아는 줄 압니다.
이건 아는 게 아니죠.
글만 아는 거죠.
ㅡ고맙습니다 스님~ 지선화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